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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넷] 경광서원(鏡光書院)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 12. 13:41

경광서원(鏡光書院)




건물 이야기

명 칭 : 경광서원(鏡光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92
건 축 주 : 사림
건축시기 : 1568년(선조 1)
이건시기 : 1972년 복원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관리회(관리자 : 관리회)

건축 이야기
1649년(인조 27)에 춘파이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이종준(李宗準)과 장흥효(張興孝)를 모셨다.
1662년(현종 3)에 경광정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배상지(裵尙志), 이종준(李宗準)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687년(숙종 12)에 서원으로 승격, 장흥효(張興孝)의 위패를 옮겨 배상지(裵尙志), 이종준(李宗準)과 함께 제향 하였다.

건축 특징
존현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숭교당은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건축 구성
존현사, 숭교당

현판

박약재(博約齋)
박약은 『논어(論語)』「옹야(雍也)」편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요약한다면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博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온 말이다. 지식은 넓을수록 좋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그치고 행위와는 무관하게 되지 않기를 경계한 말이다.

시습재(時習齋)
논어(論語)』「학이(學而)」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말이다.

경의재(敬義齋)
경의는 『주역(周易)』「문언전(文言傳)」의 ‘경건함으로 내 마음을 곧게 하고, 올바름으로 내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온 말이다.

숭교당(崇敎堂)
여택재(麗宅齋)
존현사(尊賢祠)


내력과 기능


향사일
매년 음력 9월 중정일

관련문집
-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이종준(李宗準, ?~1499)과 그의 아우 이홍준(李弘準, 생몰년 미상)의 1책 2권으로 된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후손 이창욱(李昌郁) 및 권사협(權思浹), 이야순(李野淳) 등이 편집하여 1911년에 간행하였다.

- 경당선생별집(敬堂先生別集)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던 경당선생별집(敬堂先生別集)이다.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시문들을 총2책으로 엮어 신축년에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관련인물-유물


주향자

- 배상지(裵尙志, 1351~1413)
자는 부전, 호는 백죽당(栢竹堂), 본관이 흥해(興海)이다. 정평공 손홍량 선생의 외손자이다. 흥해군 배전(裵詮)의 아들이다.

배전은 고려 후기 충혜왕·충숙왕 때의 공신이다. 배상지는 그의 형제들인 배상도·배상경·배상공과 함께 이색의 문하에서 배웠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그는 음사로 고려 말에 사복시판사(司僕寺判事)를 지냈다. 조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동지 70여 명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칩거하다가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금계촌에 자리 잡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배상지는 집 주위에 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당호를 백죽당(栢竹堂)이라 붙였다. 측백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이고, 대나무는 곧게 뻗는 성질을 지닌 나무이다. 이를 통해 불사이군의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배상지에게는 제목이 없는 해학시 한편이 구전되어 오다가 권기가 1608년에 편찬한 『영가지』에 수록되어 전한다. 백죽당의 아들인 환과 남과 강이 소년시절에 죽림사에서 과거시험 공부 중 하루는 기생을 불러 놀았다. 이때 부친 배상지가 느닷없이 절에 나타났다. 환 등은 어쩔 줄 몰라 이불로 기생들을 싸서 앉은자리 모퉁이에 숨겼다. 이에 상지공이 모른 척 하고 시를 지어서 벽에 붙였다.

배씨 한 사람, 배씨 한 사람, 다시 배씨 한 사람
배씨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봄바람이 돌고 있네.
이름은 죽림사지만 단지 대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도 피어 있네.

그리고는 즉시 절을 나왔다. 이 일화는 배상지의 넓은 도량과 유연한 심지를 알려주는 유명한 고사로서 배상지의 생전에 이미 그 자제들은 새 왕조에 출사할 뜻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너그러움과 여유가 더 큰 분발의 계기가 되었는지,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배씨 가문의 이름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조카인 둔과 소도 문과에 급제하여 한 집안에서 다섯 형제가 급제하였으니, 이는 조선조 500년 역사 속에서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당시 영양 남씨 문중에서 동항의 형제들이 잇달아 무과에 급제하니 당시 조정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문풍을 주도했던 서거정이 배상지를 두고 지은 시에서 “시가 천 수나 되지만 세상에는 몇 편이나 전하고 있는가.”라고 읊은 것으로 보아 천여 수의 시를 수록한 시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은 세 편만이 전한다. 자손들이 훗날 간행한 『백죽당배선생실기』도 대부분 후인들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1690년(숙종 15)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 이종준(李宗準, ?~1499)
본관이 경주이고,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 용헌(慵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육거사(藏六居士)이다.

경주이씨가 안동 금계마을에 들어온 것은 계유정난에 금고를 당한 이시민(李時敏)이 처음이다. 그 이시민의 네 아들 중 둘째가 이종준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던 그는 부친 이시민의 가르침을 받아 큰 포부를 안고 과업에 열중하였다. 이종준이 10세 때 그의 부친은 대청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고서 “이것은 부자(孔子를 높여 부른 말)가 그 그늘에서 강학(講學)하던 나무이다. 뒷날 성덕군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에서 강학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이때 어린 이종준이 “동방에도 성인이 있나요?”라고 묻자, 이시민은 “성인의 도리를 행하면 모두 성인의 문도가 된다.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기자의 유풍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어찌 현인군자가 없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집을 행정(杏亭)이라고 불렀다.

1458년(성종 16)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488년에는 대제학 서거정의 추천을 받아 홍문관 교리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입었다. 이때 임금이 낸 과제의 답안으로 지은 시가 수석으로 뽑혀 이름을 날렸다. 시와 문장 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의약이나 복서(卜筮)에도 정통하였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일본 호송관 또는 북평사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4년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8년(연산군 4)에 그는 조정의 불온한 기미를 미리 감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훈구파에 의해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갔다. 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이 바른말하다 귀양가는 단천을 지나던 중 잠시 머물게 된 고사역의 벽에 “나홀로 외로운 충성, 타인들은 함께 하지 않는구나.”라는 시구를 적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다시 붙잡혀 와 국문을 당하고 죽었다.

이종준이 화를 입자 동생 이홍준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종반정 여러 해 뒤에 조광조의 계청에 의하여 무오사화에 피해를 입은 인사들이 신원될 때 그도 복관되었다.

후손들에 의하여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가 편찬되었으나 이종준의 시는 20여 편, 이홍준의 시는 단 한 편만 수습되었고, 나머지는 후손들이 찾아낸 상소문이나 잡저가 수록되어 있다. 시, 서, 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 죽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 장흥효(張興孝, 1564~163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이다.

처음에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그는 이황에서 김성일,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파의 적통을 전수받은 큰 학자로 퇴계 학맥의 핵심적 자리를 지닌다.

그는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외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퇴계 학맥에서 우뚝하였다. 갈암 이현일의 학문은 갈암의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로, 밀암의 외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고, 남한조(南漢朝)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을 거쳐 학봉 김성일의 11대손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진다.
이 학맥을 퇴계 학파의 가장 큰 줄기로 보는 데는 별달리 이견이 없다.

벼슬길을 마다한 장흥효는 세상사를 멀리하고 좌우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이로써 자호하였다. 장흥효는 평소에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루고서 가묘를 배알하였다. 이어 주자화상(朱子畵像)에 절한 후 서실에 들어가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서가에 꽂힌 여러 책을 벗 삼아 생각에 잠기었다. 깨달음이 있으면 한 밤중이라도 일어나 글로 써두거나 책자로 엮어 두었다.
거처의 남쪽에 소나무, 잣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벌어 있는 대(臺)가 있었는데, 그는 이 대를 제월대(霽月臺)라 이름 하였다. 학습을 마치면 날마다 어린아이들과 이 대 위에서 노닐며 예를 가르치고 노래를 읊조리는 등 소연하게 즐긴 연후에 돌아오곤 하였다.
이와 같이 50여 년을 지내는 동안 발자취를 안동부내로 들인 적이 없으므로 이웃 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완성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앞의 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드러내어 밝혔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독실한 학행으로 조야의 명망을 받던 중 1633년에 특별히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58년이 지난 1671년(숙종 17)에 그의 덕을 기리는 유림의 포상 요청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다. 저서에 『경당문집(敬堂文集)』이 있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ansb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