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개벽 제71호 > 士禍와 黨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3:35

개벽 제71호 > 士禍와 黨爭


잡지명: 개벽 제71호
발행일: 1926년 07월 01일
기사제목: 士禍와 黨爭
필자: 靑吾
기사형태: 논설



士禍와 黨爭

靑吾

緖言-士禍-戊午士禍-甲子士禍-己卯士禍-己巳士禍-黨爭-黨爭의 原因-各黨爭의 盛衰 及上關係-黨爭의 社會化에 及한 影響-黨派의 特色과 地方的 分布狀況-附 黨派一覽表 (靑吾)

緖言

近來 漢學者로 유명한 寧齋 李建昌先生은 일즉이 「黨議通略」을 著하야 朝鮮 由來의 黨爭을 痛論하되 「東漢唐宋이 擧皆朋黨이 잇섯스나 一國을 擧하야 此에 몰두하고 수백년을 亙하야 其 邪正順逆이 명백치 못한 것은 유독 我朝뿐으로 此는 古今 朋黨의 至大, 至難, 至久한 者라」 云하얏다. 그의 말과 가티 朝鮮의 黨爭이야말로 참 古今에 至大至難하고 또 至久하야 其比가 無한 者이다. 享國 519年間에 약 300여 년은 전혀 이 黨爭(士禍*)으로 歷史의 全頁를 充하얏다. 李朝의 歷史는 一方으로 보면 이 黨爭의 歷史라 云하야도 과언이 안이다. 政權도 이 黨爭으로 좌우되고 王權도 이 黨爭으로 消長되고 乃至 制度, 風俗, 文物 그 모든 것이 黨爭의 지배를 밧지 안은 것이 업다. 賢人君子로 一世의 推仰을 밧던 者도 이 黨爭의 관계로 一朝에 亂臣賊子의 陋名을 입어 孤島絶海의 流客이 되거나 혹은 凶釰毒藥의 寃鬼가 되고 大逆不道로 行尸顯戮을 당한 者도 일시에 또 忠臣烈士가 되야 敍勳封爵을 하며 또 如何한 위대의 인물이라도 黨派가 안이면 朝路에 進치 못하고 如何한 열등의 인물이라도 派黨의 배경이 잇스면 榮爵을 拾芥와 如히 취하엿다.<55> 그리하야 君臣이 서로 疑懼하고 士民이 서로 排斥, 殺戮하야 三千里 權域의 내에는 哀號의 聲과 冤抑의 血이 그칠 날이 업섯다. 黨爭의 전에는 國家도 君主도 民族도 親戚도 師弟도 다 업섯다. 다만 自黨의 主義 主張만 貫徹하면 만족할 뿐이엇다. 이것이 엇지 敗族亡國의 本이 안이고 무엇이랴. 宣朝大王은 義州에 播越하얏슬 時에 一詩를 作하야 君臣에게 示하되 「痛哭關山月, 傷心鴨水秋, 朝臣今日後, 寧復各西東이(上二句略-원문)」이라 하얏다. 그 詩가 비록 간단한 數句에 불ꊳ�하나 그 얼마나 비통하며 또 君臣의 黨爭을 戒함이 얼마나 激切하냐. 그러나 당시의 朝臣은 小毫도 改省이 無하야 壬亂 후 불과 幾日에 南北人의 分爭이 生하고 또 繼하야 大小北의 黨爭과 西南人의 黨爭이 激甚하다가 仁祖 丙子에 淸寇가 一至하매 防禦의 策이 無하고 君臣이 城下의 굴욕을 당하얏스며 그리고도 尙 又 부족하야 世世黨爭을 是事하다가 최후에는 국가가 衰亡하는 悲運에까지 至하얏스니 此가 엇지 통탄할 事가 안이랴. 이제 와서 此를 論하는 것은 마치 成服後藥方文을 論함과 如한 感이 업지 안이하나 또한 엇지 他山의 石이 되지 안을는지 알 수 잇스랴.


一. 士禍

士禍는 일종 朋黨의 爭으로 연출한 士林의 慘劇이니(士禍도 黨爭의 일종이나 但히 성질이 永續的이 안이다.) 此를 일반적 廣意로 보면 필경 朝臣間 內訌에 不外하야 엇더한 시대에던지 흔히 잇는 鬪爭이라 할지나 限定的 狹意로 보면 李朝초로부터 新히 勃興한 儒學의 一派와 그 주위의 非儒學派와의 충돌이라 云치 안이치 못하겠다.

원래 朝鮮의 儒敎는 麗朝末葉에 安文成公裕가 비로소 輸入한 이래로 李齊賢, 李穡, 鄭夢周, 吉再 등 諸賢이 其學을 전한 바 其中 吉再(冶隱)는 程朱學의 泰頭라 可謂할 學者로 高麗가 망한 후에 慶北 善山의 金烏山 下에 隱節不仕하고 後生을 敎養함에 전력하야 金叔滋와 如한 高弟를 得하고 叔滋의 子 佔畢齋 金宗直은 또한 저명한 학자로 其 系統을 鄭汝昌, 金宏弼 등에게 傳授하야 一時 名士가 배출하매 其 學風이 점차 지방으로부터 도회에까지 침입하야 燕山 당시에는 벌서 政府 部內의 一勢力을 점함에 至하엿섯다. 然而 此 學派는 전혀 程朱의 學을 계승함은 물론이오. 小學의 실천, 詩文의 연마로 究竟의<56> 목적을 삼는 동시에 自家의 主義 思想을 가장 高尙優越한 者로 자처하고 其 派에 合치 안이하는 者는 異類와 가티 排斥하야 相伍하기를 厭忌함으로 遂히 그 周圍의 惡感을 買하야 소위 士禍를 양성하얏다. 此 士禍는 廢主燕山君 4년 戊午에 始하야 明宗 末年까지 약 70여년 간을 亙하야 屢度의 참극을 演한 바 그 중에는 無論政權의 쟁탈전이 포함되고 終에는 外戚의 抗爭으로 化하얏스며 繼하야 후일 宣朝時에 至하야는 李朝의 一大 痼疾인 朋黨分爭의 端을 啓하얏다. 今에는 其 士禍의 중요한 者를 擧하면 左와 如하다.(端宗遜位以後 歷代黨爭을 다 士禍로 認하야 通稱 12士禍라고도 한다)


甲. 戊午士禍(燕山君 四年)

이 士禍는 朝鮮에서 최초로 니러난 士禍엿다. 처음에 府尹 柳規의 孽子 柳子光은 勇力이 絶人함으로 世祖의 眷顧를 受하고 또 당시 저명한 學者 金宗直의 門下에 출입하얏섯는데 睿宗 초에 南怡將軍의 謀反을 誣告한 공으로 武靈君의 封爵을 受하게 되매(南怡는 宜山尉 南輝의 子요 太宗의 外孫이다) 宗直이 항상 奸凶으로 지목하고 甚히 卑賤하게 녀기더니 宗直이 마츰 咸陽郡守가 되매 그 郡衙에 柳子光의 懸板이 잇는 것을 보고 子光과 가튼 자가 엇지 懸板이 잇스리오 하고 즉시 철거케 하엿더니(先是에 子光이 咸陽에 유람하엿다가 郡守에게 囑하야 자기의 詩板을 揭하얏다) 子光이 그 소문을 듯고 크게 憤恨하야 한번 보복을 하랴고 暗히 당시 權臣 廣陽君 李克墩과 결탁하고 기회를 覗하엿섯다. 그러자 마츰 그때에 宗直의 文人 金馹孫이 史官이 되야 전일에 李克墩이 全羅監司時에 先王의 喪을 당하야 京城으로 進香할 際에 妓女를 載行한 事를 直筆하고 또 헌납이 되어 克墩과 成俊(燕山時 爲相)이 互相反目하야 朋黨이 將起할 事를 䟽論하엿더니 克墩이 크게 분노하야 遂히 子光과 相結하고 其히 宗直의 一派의 撲滅策을 企圖하엿섯다. 然而 燕山 4년에 成宗實錄을 纂輯하게 되야 史局을 開하매 克墩이 馹孫의 史草 중에서 其師 金宗直의 「吊義帝文」이 잇는 것을 발견하고 此는 평생의 怨恨을 報하는 難遇의 好機會라 思하고 柳子光을 見하고 構誣敎囑하야 言하되 「金宗直의 文은 世祖를 譏刺한 것이라」하니 子光이 또한 심중에 暗喜하고 이에 宣城府院君 廬思愼 坡平府院君 尹弼商등과 相謀하고 上啓하야 曰 「宗直이 世祖大王을 詆毁함은 大逆不道로 論함이 可하고 且 其文은 盡히 燒毁하야 世에 流傳치 안케 하지 안으면 붊�가하다」 하며 원래 학문을 不好하고 특히 宗直派의 儒學者를 忌惡하던<57> 燕山君은 柳子光 등의 上言을 一見하매 사실 여하와 是非曲直도 불문하고 즉시 盲從하야 子光으로 하야금 馹孫 등을 推鞫케 하니 子光은 평소의 원한을 일시에 報코자 하야 宗直의 門人은 물론이고 其關係者까지 일망타진하야 혹은 刑殺 혹은 流竄하고 당시에 己死한 宗直은 관을 剖하고 尸를 斬하야 前古末曾有의 一大慘劇을 演하엿다.(당시 被禍者는 金馹孫, 權景裕, 權五福, 李穆, 許磐, 姜謙, 表沿洙, 洪翰, 鄭汝昌, 姜景叙, 李守恭, 鄭希良, 鄭承祖, 李宗準, 崔溥, 李*, 金宏弼, 曹偉, 朴漢柱, 任熙載, 康伯珍, 柳廷秀, 李繼孟, 姜渾 等) 此 事件이 起하기는 李朝 제10대의 王廢主 燕山君 4년 戊午 7월인 고로 후세에 此를 稱하야 戊午史禍라 하고 또 그 단서가 史草에서 發하엿슴으로 但히 史禍라고 稱한다.


乙. 甲子士禍(燕山十年)

戊午의 慘禍를 經한 후 6년 즉 燕山 10년 甲子에 士林에 일대 慘禍가 또 니러낫스니 이것은 즉 유명한 甲子士禍다. 이 士禍의 전말로 말하면 처음에 燕山君의 生母 尹妣가 廢位되고 次하야 賜死되엿스되 당시 燕山은 아즉 幻沖하야 그 사실을 전연 不知하더니 점차 장성함을 따라서 그 사실을 知하게 되매 其母의 非命을 크게 悲慟하고 평생의 大遺恨으로 思하던 중 燕山 10년 4월에 尹氏를 追崇하야 王后를 삼고 成宗의 廟에 **코자 하니 廷臣 등은 대개 其議를 찬성하고 異論이 別無하얏스나 但히 應敎 權達手, 李荇 兩人이 반대를 主唱함으로 燕山이 大怒하야 權達手를 殺하고 李荇을 流配하얏섯다. 그러나 그 憤怒가 尙히 未盡하야 遂히 尹妣의 廢死 당시, 其議를 찬성하던 者 一流까지 追罰할 意가 生하엿섯다. 然而 其時 朝臣 중에는 당시 士林의 명성이 著高함을 忌惡하는 輩가 多한 중 此機를 乘하야 「士林이 國事를 비방한다」 誣告하니 원래 士林을 大嫌하는 燕山은 또한 此를 聽從하고 悲慘한 일대 疑獄을 起하야 朝臣 中 廢妣에 關係가 有한 者와 金宗直學派를 일시에 流配 혹은 誅戮하고 旣死한 者는 泉壤에까지 禍를 及케 하야 其骨을 碎하고 其首를 斬하야 或風에도 飄灑하고 혹 水中에 投入하니 此 士禍는 戊午史禍보다도 일층 慘酷한 者로 士林의 最恐怖時代라 可謂하겟다.(尹弼商, 李克均, 成俊, 李世佐, 權柱, 金宏弼, 李胃 등 數十人은 被死하고 韓致亨, 韓明澮, 鄭昌孫, 魚世謙, 沈澮, 李坡, 鄭汝昌, 南孝溫은 己死 고로 部棺斬尸하고 其子弟親戚도 亦被流竄)


丙. 己卯士禍(中宗 十四年)

이 士禍는 中宗 14년에 니러난 士禍엿다. 이 士禍의 起因은 直接 間接 두 가지로 볼 수가 잇스니 즉 直接은<58> 趙光祖(靜菴) 一派의 急進改革이오. 間接은 中宗大王廢后 愼氏의 復位問題다. 처음에 中宗이 즉위한 후 夫人 愼氏을 封하야 后를 삼으니 愼氏는 곳 愼守勤의 女이엿다. 前者에 守勤이 權勢를 恣하고 驕縱함으로 反正시에 朴元宗이 守勤을 殺한 바 愼氏가 만일 이 王后가 되면 자신에 禍가 及할가 염려하야 領相 柳洵과 右相 金壽童과 상의하고 王께 奏하되 「其父를 罪殺하고 其女로 王妃를 삼는 것은 천하인심에 疑懼를 與하야 社稷에 虞가 有할 듯하니 愼氏를 폐함이 可하다」하고 允許를 得하야 后位에 在한지 8일만에 廢하고 坡原府院君 尹汝弼의 女를 冊立하니 此는 즉 章敬王后요 尹汝弼은 朴元宗의 妻兄이엿다. 然而 中宗 10년 3월에 尹妃가 元子 仁宗을 탄생한 후 僅히 7일에 昇遐하니 諸臣 중에 愼氏復位論이 起하야 朝臣分爭의 端이 復開하얏다. 즉 당시 淳昌郡守 金淨과 潭陽府使 朴祥 兩人은 愼氏復位를 請하는 동시에 向者 朴元宗이 君父를 억제하야 國母를 放逐하얏슨즉 속히 其罪를 治하야 천하후세에 大義名分를 示하자고 上啓하고 大司憲 權敏手 大司諫 李荇은 金淨 등의 上啓를 邪論이라 稱하고 二人을 拿鞠하야 死罪에 처형코자 하다가 左議政 鄭光弼이 不可를 極主하야 僅히 死를 면하고 外驛에 流配하게 되니 正言 趙光祖는 이에 李荇 등을 彈劾하되 소위 言官으로서 時事를 論한 士人을 罪함은 人主를 拒諫에 導함이라 云하고 仍하야 荇등의 職을 罷함을 極論하니 上이 遂히 李荇 權敏手 兩人의 職을 罷하고 李長坤으로 大司憲을 삼고 金安國으로 大司諫을 삼으니 이로부터 李長坤, 金安國은 趙光祖를 찬성하곊� 掌令 柳博, 金希壽 등은 權 李 兩人을 右하며 直提學 金安老는 兩是說(光祖는 言路를 爲하고 荇 及 敏手는 宗社를 爲함으로 云)을 發하야 朝臣의 爭論이 啓發하얏다. 此 分爭은 己卯士禍의 직접 원인은 되지 안엇스나 趙光祖一派로 하야금 其勢를 失케 한 外 慘禍를 被하게 하는 간접의 원인이 됨은 無疑하다. 此에 先하야 中宗이 燕山의 秕政을 개혁하고 中興의 道를 講하매 당시 士林의 領袖 趙光祖를 신임하야 賢良科를 說하고 其派의 學士 金湜, 安處恭, 朴薰 , 朴祥, 李耔, 金絿 등을 다 일시 擢用하야 要職에 就케 하고 光祖는 副提學으로 大司憲에 進하니 其勢가 자못 旭日昇天의 觀이 잇섯다. 然而 趙光祖를 領袖로 한 諸士中年少氣銳의 人은 氣滿意揚하야 三代의 治를 立而可致할 急激의 勢로 자기의 의견을 실현코자 함에는 時의 利 不利와 勢의 可 不可를 不願하고 猪突前進할 뿐 外라. 君上에 대하야도 强迫에 近한 言動이 多함으로 필경 四圍의 好感을 得치 못하고 王의 忌厭도 招하는 경우가 多함으로 其反對派는 其虛機를<59> 乘하야 비밀리에서 排斥運動을 起케 하얏다. 즉 其時에 禮判 南袞은 자칭 名節의 士로 항상 士林의 間에 伍할 事를 희망하얏스나 光祖派의 學者들은 南을 指目하야 小人이라 하고 맛나면 반듯이 此를 詆詬하는 風이 有함으로 袞은 心中에 常히 恨을 抱하야 그 報復의 機會를 窺하고 又 趙光祖가 大司憲이 된 후에 엇던 날 途中에서 贊成 高荊山을 만낫섯는데 趙光祖가 禮를 하지 안코 묵과하얏슴으로 此를 聞知한 其一派는 더욱 趙光祖를 怨恨하얏섯다. 이와 가튼 사실이 중첩하매 光祖의 身邊에는 朝臣의 怨恨嫉視가 蝟毛와 如히 集中하야 무슨 機會만 잇스면 反動이 일시 폭발할 위기에 잇섯다. 그런 중슗� 中宗 14년 10월에 趙光祖는 大司諫 李成童과 伏閤하야 靖國功臣의 濫錄者를 追削하기를 또 請하얏다. 此 靖亂功臣은 즉 向者 丙寅에 燕山君을 廢하고 中宗을 擁立할 際에 其謀議에 참여한 者를 中宗卽位初에 靖亂功臣으로 하야 其 勳을 錄하얏던 者인 바 其中에는 물론 不當不適의 인물이 多함으로 光祖 등은 此를 廓淸하기 위하야 其 追削을 請함이엿다. 此 主張은 당시의 大臣 六卿 등도 또한 대개 찬성하얏스나 中宗大王은 一次 廟堂에서 勳을 정하고 功을 錄한 이상에는 추후 다시 削奪하는 것은 위신상이나 情實上이나 容易한 事가 안이라 하고 初에 容許치 안이하다가 兩司(大司諫)가 强硬히 주장하야 甚至 辭職까지 함으로 中宗도 부득이 聽從하고 功臣 중 二三等의 濫錄이라 可稱할 者와 四等 全部 都合 76인을 일시에 抄削하니 此를 聞한 諸勳臣間에는 아연히 大恐惶이 起하고 衆怨이 光祖 등 일파에 簇集하게 되엿다. 그리하야 평소에 趙를 疾視하던 南陽君 洪景舟 工判 金銓, 禮判 南袞, 兵判 李長坤, 戶判 高荊山 都摠管 沈貞, 參知 成雲 등이 相謀하고 11월 15일 初昏에 神武門 外에 會集密議한 후 洪景舟 南袞 등이 書狀을 持하고 中宗에게 讒啓하되 「政權과 人心이 다 趙光祖에게 歸하고 또 光祖 등이 互相朋比하야 附己하는 者를 進하고 違己하는 者를 배척하야 國勢가 顚倒하고 朝政이 日非하니(中略-원문) 彼 등을 有司에 付하야 其罪를 治함이 可하다」 하니 때에 中宗은 역시 光祖一派의 道學的 言行이 너무 熱烈過激하야 威脅의 態가 有함을 嫌忌하던 터인 고로 直히 其言을 納하고 有司를 命하야 參贊 李耔, 刑判 金淨, 大司憲 趙光祖, 大司成 金湜, 副提學 金絿 등을 체포하야 闕門에 拿致하고 즉시 行戮코자 하다가 領相 銄�光弼과 左相 安塘 등이 極諫하야 光祖는 詔獄에 下하고 其外 諸人은 流竄에 止하얏다.(일설에 南袞이 趙靜菴을 해코자 하야 許多의 奸計를 計劃하던 중 洪景舟가 찬성으로 在하다가 光祖에게 彈劾되야 불평을 胞한<60>事를 聞하고 此를 결탁하야 음모를 企하다가 마츰 京外에 地震이 起하야 인심이 疑懼하고 上이 또한 불안 중에 在함을 知하고 其機를 乘하야 景舟의 女 洪熙*양으로 하야금 禁中에 流言하되 「민심이 趙光祖에게 歸하얏다」하고 또 禁苑木葉에 蜜汁으로 「走肖爲王」4字를 書하야 虫類로 食하게 하고 其 字痕을 王에게 示하야 大히 宸心을 動케 하얏다. 云云) 때에 館學儒生 천여명이 光祖의 하옥함을 聞하고 光化門 外에 聚集하야 光祖의 무죄를 辯䟽하고 또 闕庭에 入하야 痛哭號泣까지 하다가 上에게 觸怒되야 어명으로 拿捕下獄하니 諸生이 先을 爭하야 獄에 就함매 獄中이 충만하야 수용할 여지가 업섯다. 그러한 것을 본 權奸 등은 또 中宗에게 讒誣하되 光祖를 速殺치 안이하면 인심이 더욱 불안하야 大禍가 將至하리라 하니 中宗이 此를 信聽하고 11월 21일에 遂히 光祖의 죄를 정하야 中外에 頒示하고 全南 綾州 竄逐하얏다가 仍히 賜死하고(時年 38) 其派 수십인을 다 流竄하니 時는 즉 中宗 14년 己卯인 고로 후인이 己卯士禍라 稱한다.(당시 被禍한 중요인물은 尹自任, 朴世熹, 朴薰, 奇遵, 李長坤, 金安國, 金正國, 韓忠, 具壽福, 金世弼, 柳雲, 柳庸謹, 崔淑生, 申鏛, 金淨, 金湜, 金絿 등)


丁. 乙巳士禍

종래의 諸士禍는 상술함과 如히 士林과 其 周圍의 충돌로 인하야 起한 고로 士林이 중심이 되엿슴은 물론이나 己卯 以後의 士禍는 外戚의 內訌이 중심이 되고 士林은 但히 其 渦中에 捲入함에 불과함으로 此에 述코자 하는 乙巳士禍도 또한 外戚爭權의 결과로 士林이 其盤渦中에 捲入하야 禍를 被한 者라 云함이 타당할 것이다. *초에 中宗의 妃 端敬王后愼氏는 燕山君 廢位의 際에 被誅한 愼守勤의 女인 관계로 廢位되고(己卯士禍 參照) 繼妃 章敬王后尹氏를 迎入하야 元子 仁宗을 탄생한 후 또한 昇遐하매 中宗은 다시 次繼妃 文定王后尹氏를 迎하야 第二子 慶原大君(즉 明宗)을 탄생하엿섯다. 時에 章敬王后의 兄에는 尹任이라는 이가 잇고 文定王后의 弟에는 尹元衡이라 하는 이가 잇서서 互相 權力을 쟁탈함으로 알력이 太甚하다가 元衡과 及 其兄 元老가 金安老에게 被斥하야 일시 세력을 失하잇더니 中宗 32년에 至하야 金安老가 또한 失脚하고 元衡이 다시 擢用되니 趨勢의 輩가 일시 附隨하야 大尹 小尹 兩黨으로 分立하니 大尹은 즉 尹任이오, 小尹은 즉 尹元衡이엿다. 其後 39년에 中宗이 昇遐하고 仁宗이 즉위하니 其外叔인 尹任이 홀연이 勢를 得하야 其派가 일시 大權를 執하고 당시 士林의 名士인 柳灌 李彦迪 등이 擢用되야 다 大官이 되고 吏判 柳仁淑은 특히 其派의 士類를 援引하야 己卯 以後 衰微에 濱하엿던<61> 士林이 稍稍擡頭하는 觀이 有하엿섯다. 그러나 그는 반면에는 당시 志를 得지 못한 일파가 또한 靡然히 尹元衡에게 附隨하야 일당을 형성하엿섯다. 然而 仁宗이 在位한지 8월에 불행히 昇遐하고 明宗이 13세의 幼齡으로 卽位하야 大妃 文定王后가 簾을 垂하고 政을 聽하게 되니 尹任派는 자연 其勢를 失하고 尹兊�衡派가 俄然히 擡頭케 되엿섯다. 그때에 尹元衡의 兄 元老는 軍器寺僉正으로 爲人이 姦險함으로 領相 尹仁鏡, 左相 柳灌 등이 其罪를 彈하여 海南에 竄하고 또 是에 先하야 尹元衡이 禮參으로 在할 時에 尹任一派를 배제코자 하던 차 마츰 知中樞 鄭順明, 兵判 李芭, 戶判 林百齡, 工判 許磁 등이 본래 尹任과 隙이 有함을 知하고 遂히 四人과 결탁하야 其機를 覗하더니 此에 至하야 誣告하되 「仁宗大漸의 日에 尹任은 자기 保全을 위하야 明宗의 推戴를 不肯하고 桂林君 瑠(成宗 第三子 桂城君 恂의 養子)와 鳳城君 岏(中宗 第八子) 兩人 中에 一人을 立하랴고 하고 柳仁淑, 柳灌 등이 다 此를 援助하얏다.」 하니 文定王后는 此 誣告를 信하고 密旨를 元衡에게 下하야 兩司로 하야금 尹任 등의 죄를 論케 하얏스나 兩司에 紛議가 生하여 容易히 歸決되지 안음으로 元衡은 直夜에 鄭順朋, 李芭 林百齡, 許磁 등 4人과 光化門 외에서 회의하고 翌朝에 政院에 詣하야 급히 誣告하되 「尹任一派가 결탁하야 國家大事件을 야기하랴 한다.」 하니 王 及 王妃가 大驚하야 尹任, 柳灌, 柳仁淑 등 수십 인을 遠竄賜死하고 또 京伯 金明胤의 密啓로 인하야 鳳城, 桂林 兩君을 殺하얏다. 然而 此 獄禍는 但히 此에만 止치 안이하고 明宗 2년 9월에 副提學 鄭彦慤이 全羅道 良士驛 壁上에서 「女王이 執政干上, 姦臣李芭等弄權於下, 國亡可以立待豈不寒心」云云의 朱書를 발견하고 順朋과 공히 上啓하되 乙巳獄에 관계가 有한 者의 所爲인즉 其 禍根을 絶滅함이 可하다 하니 王后가 또한 信聽하고 다시 大獄을 起하야 宋麟壽, 李若水 등을 殺하고 權撥, 李彦迪, 白仁傑, 鄭希登, 朴光佑, 宋希奎, 柳希春, 盧守愼 등외 수십 인을 竄謫하니 此禍가 明宊� 乙巳로부터 始하얏슴으로 보통 乙巳士禍라 通稱한다.


二. 黨爭

甲. 黨爭의 原因

黨爭의 원인은 種種의 說이 有하야 혹은 書院의 弊에 잇다 하고(例如朴齊炯朝鮮政鑑) 혹은 道學太重, 名義太嚴, 文詞太繁, 刑獄太密, 臺閣太峻, 宦職太淸, 閥閱太盛,<62> 昇平太久 등 八大原因에 잇다고 하고(例如李建昌黨議通畧) 혹은 新舊交代의 際에 起한 감정의 충돌이라 하고(例如日本文學博士幣原坦韓國政爭志) 又 혹은 단순히 沈義謙과 金孝元의 反目疾視에서 起因하얏다 한다. 그러나 此를 大別하면 遠因 及 近因 兩者가 有하니 즉 遠因은 (一). 士禍 及 戚의 分爭과 (二). 제도상 결함이오 近因은 (一). 당시 士類間의 新舊不知와 (二). 沈義謙 及 金孝元의 反目疾視다. 然而 士禍 及 外戚의 분쟁이 黨爭의 주요 원인이 됨은 上述함과 如함으로 茲에 更論치 안커니와 李朝의 銓郞制度는 또한 此 黨爭을 馴致하얏다 云치 안이치 못하겟다. 由來 朝鮮의 官制에는 三公(領議政 左 右議政) 六卿(六曹 判書)을 置하얏스나 內外官職의 除拜는 三公이 하지 안코 전혀 吏曹에 속하고 又 吏曹의 權이 偏重함을 慮하야 當時에 最重職인 三司(司憲府, 司諫院, 弘文館)의 任選은 吏判의 下에 在한 正郞, 佐郞으로 專行케 하고 判書는 관여치 안케 하얏스니 此가 즉 소위 銓郞으로 其 實權이 자못 위대하고 從하야 此 銓郞은 三司 중에 名德이 有한 者로 特選하야 此를 임명하고 又 銓郞은 其 後任을 自薦함을 許하되 결코 長官에 속지 안이하엿섯다. 그럼으로 品階의 昇進과 如한 것도 먼저 銓郞에 陞하고 후에 他司에 及하며 일차 詮郞을 經하면 별로 大故가 無한 한에는 平步로 公卿에 上함을 可得하엿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首腦는 三公의 合議制로 成한 議政府가 有하얏스나 明宗 15년 이래로 此는 유명무실하케 되고 文武의 重臣으롊� 成한 備邊司(備局 又는 籌局)가 사실상의 최고기관이 되야 국가의 政務를 決하얏다. 如斯히 李朝의 중앙정부의 조직은 頗히 變態의 조직인 동시에 就中銓郞과 如한 者는 變態 중 더욱 變態의 狀을 呈하야 자연 黨派를 양성케 하얏스니 下에 論코자 하는 沈議謙과 金孝元의 反目疾視도 실은 詮郞에 관한 私怨에 기인한 者이다.

次에 近因은 第一 當時士類間의 新舊不和에 在하니 向者 乙巳士禍 이후로 士類간에도 자연 黨派가 有함은 물론이어니와 宣祖初에 至하야는 新舊의 불화가 더욱 심하얏스니 此는 重言을 不要하고 당시 領相으로 在하던 東皐 李浚慶의 遺剳과 또 此를 반대하던 一事를 見하야도 其 情勢를 可窺할 것이다. 이 李浚慶은 尹元衡의 후를 繼한 領相으로 明宗의 顧命을 受하야 宣祖를 迎立하고 同王 4년까지 領相의 職에 在한 柱石의 重臣이엿다. 그는 領中樞府使로 宣祖 5년 7월에 卒逝할 때에 宣祖에게 이러한 遺剳을 上하얏다.

「今世의 人은 或 身에 過擧가 無하고 事에 違則이 無할지라도<63> 一言이 不合하면 곳 배척하야 容치 안이하고 行檢을 事치 안이하며 독서를 務치 안이하고 但히 高談大言과 朋比結束으로써 高致를 삼아 허위의 風을 成한다(下略-원문)」

此는 즉 東西分黨이 起하던 宣祖 8년으로부터 3년 전의 정세를 明言한 바로 당시 士林의 思想이 如何히 악화한 것을 可知하겟다. 然而 其時 年少의 儒者들은 東皐의 此 遺剳을 見하고 「君聽을 현혹하며 後進을 禍코자 함이라 하고 大히 반대하얏다. 其中에도 栗谷 李珥와 가튼 이는 심지어 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라 더니 浚慶之將死에 其言이 惡이라」는 偏頗의 論까지 發하얏다. 此는 역시 東皐는 其時 74세인 國家元老요 沈義謙, 李珥 등은 年少後輩인 까닭이다. 그러나 東皐의 死後 수년을 過하야 沈金 兩人의 反目으로 東西가 분당된 것을 보면 東皐의 遺剳은 당시 士林의 氣勢를 洞察한 明見이라 云치 안이치 못하겟다.

尙 又 第二의 近因은 상시한 바와 如히 즉 沈義謙과 金孝元의 反目疾視니 此 沈金 兩人의 반목은 실로 東西分黨의 발단을 成한 最近因이다. 然而 其 兩人의 반목한 이유를 說하랴면 先히 其 兩人의 關係 及 爲人如何를 知할 필요가 잇다.

원래 沈義謙(良庵)은 靑松府院君 沈銅의 子로 明宗王妃의 親弟가 되고 吏判 李樑은 또 義謙의 父 沈銅의 母弟엿다. 明宗은 其 外叔 尹元衡의 전횡을 억제하기 위하야 李樑을 擢用하엿더니 李樑이 吏判에 在하야 또한 寵을 持하고 橫肆가 심하야 士林을 항상 排斥함으로 士禍가 將起할 虞가 有한 中 沈義謙은 樑의 近戚됨에 불구하고 士林과 交遊하며 樑黨의 발호가 極하야 朝野가 危懼함을 見하고 또한 副提學 奇大恒과 공히 樑을 탄핵하야 퇴출함으로 士林先輩間에 신망을 得하야 大司憲의 요직에 陞하고(時年39세) 又 金孝元(省庵)은(沈보다 7세가 少함) 金宗直學派의 金謹恭 門人으로 당시 少年秀才 중 文名이 자자하엿섯는데 義謙이 一日은 公用으로 舍人을 遣하야 당시 權戚 尹元衡의 家에 往하얏다가 其家에서 기숙하는 金孝元의 침구를 발견하고 金를 介士가 안이라 하야 심중에 卑劣하게 생각하고 常히 侮視하얏섯다.(원래 孝元의 妻父가 尹元衡의 妾父 鄭允謙의 侄인 고로 孝元이 尹家에 기숙하얏다.) 그러나 此는 孝元의 登科 이전의 事인 고로 피차에 직접 別問題는 업섯다.(보통은 此 사실을 직접 反目의 원인으로 知한다) 그러다가 其後 孝元이 魁科에 登하야 才名이 日盛하매 詮郞 吳健이 金을 薦하야<64> 자신을 代코자 하엿더니 義謙이 此를 저지하고 또 其後 6,7년을 經하야 孝元이 詮郞이 되엿슬 때에는 다수의 新進名士를 인용하되 義謙의 弟 忠謙은 詮郞으로 人이 薦하야도 天官이 外戚의 할 바가 안이라 하고 孝元이 불허함으로 兩人의 반목이 점차 露骨로 化하얏다.

然而 當時 士林의 思想은 상술함과 如히 극단으로 악화한 중에서 此 沈金의 반목이 日甚하매 士類 중 소위 先輩는 情實 관계상 자연 沈을 推崇하고 또 후배는 金을 推崇하야 金派는 義謙을 지목하되 正을 害하는 人이라 하고 沈派는 孝元을 지목하되 私怨을 보복하는 人이라 하야 終에 分黨의 단서를 見하게 된 바 당시 金孝元의 家는 京城의 東部 乾川洞(今 駱山下 부근)에 在하고 義謙의 家는 西部 貞陵洞(今 貞洞)에 在한 고로 金에 가담한 者를 東人이라 하고 沈에 가담한 자를 西人이라 하야 東西朋黨의 名稱이 茲에 始하고 時는 宣祖 8년 乙亥인 고로 또한 乙亥分黨이라 稱한다.(당시 大司諫 許曄은 前輩나 孝元을 推許함으로 東人의 領袖가 되고 右議政 朴淳은 淸名重望이 有하고 또 前輩인 고로 西人의 領袖가 되엿다.)


乙. 各黨派의 盛衰와 及 其政治上 關係

宣祖 8년 東西分黨의 시기로부터 李朝 末葉에 至하기까지 凡 330여년 간의 역사는 실로 黨爭의 역사라 云하야도 과언이 안이다. 따라서 직접 간접으로 정치상에 及한 영향이 다대함은 물론이고 其 分爭의 경과도 또한 區區複雜하야 간단한 지면으로는 도저히 상술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나는 편리상 此를 六時期로 分하야 其大槪를 論코자 한다.


一. 東人得勢와 南北人의 分派時期

此時期는 宣祖 8년으로부터 光海君 15년까지 至하는 約 50여년 간의 시기니 宣朝 8년 東西分黨의 際에 栗谷 李珥가 副提學으로 在하야 此를 극력 조정하다가 其效를 見치 못하고 일시 冠을 掛하더니 其後에 다시 入朝하야 大司諫으로 兵判 及 吏判의 重職에 임하니 그는 비록 分黨의 조정자이나 그 門人이 西人인 고로 자연 西人의 세력이 大하얏섯다. 그러나 宣朝 17년에 栗谷이 病卒하고 其後를 承하야 李山海가 吏判이 되고 또 盧守愼은 領相, 柳成龍은 禮判이 되니 此三人은 다 東人의 쟁쟁한 者인 고로 西人의 세력이 점차 일소되고 東人의 勢力은 일층 공고하야 容易難拔의 位에 至하얏다.<65>

其後 宣祖 24년에 東人이 다시 分하야 南北 兩派로 分하얏스니 此分裂의 원인은 其反對派되는 西人에 대한 硬軟의 차별에 不外한 바 즉 硬派는 北人이요 軟派는 南人이다. 硬派의 領袖는 李潑로서 李山海가 此를 조장하고, 軟派의 領袖는 禹性傳으로서 柳成龍이 此를 右袒한 바 李潑의 家는 北岳山下에 在한 고로 其派를 北人이라 하고 禹性傳의 家는 南山麓에 在한 고로 其派를 南人이라 指하얏스니 是가 즉 南人 北人의 分派爭이다. 然而 壬亂을 際하야 南人 領袖 柳成龍이 多年政權을 執할 時에는 마참 國家危急存亡의 秋를 임한 고로 별로 黨爭이 업섯스나 亂이 漸平하매 熄火가 再燃하야 北人 南以恭이 西崖의 主和한 것을 彈劾하야 官爵을 奪하게 되니 南人이 遂히 失脚하고 北人이 其代로 정권을 執하얏다.(宣祖末年期) 그러나 北人은 未久에 또 分爭이 生하야 大北 小北으로 分하고 大北은 또 中北 肉北 骨北으로 分한 바 宣祖 末年에는 小北領袖 柳永慶이 領相이 되야 其勢가 亦大하얏다.

大小北의 爭 大小北人의 爭은 黨人의 소위 祖宗의 名器를 玩弄物로 視한다는 好適例라 云하야도 可하니 此는 즉 宣祖의 世子立承問題다. 初에 宣祖의 元妃 朴氏가 無嗣하고 또한 世子도 아즉 定치 못하얏섯는데 마참 壬亂이 起하야 宣祖가 播遷을 하게 되매 부득이 庶子 光海君으로 世子를 책봉하얏더니 其後 朴妃가 昇遐하고 金悌男의 女 仁穆大妃가 繼后가 되야 永昌大君 의를 生하매 朝臣간에 世子變冊問題가 突起하야(明國과의 관계도 有하나 略함) 柳永慶의 小北一派는 大君을 擁立하랴 하고 李膽의 大北一派는 光海君을 擁護하야 茲에 大爭論이 起하얏다. 然而 宣朝가 昇遐하고 光海君이 卽位하야 李爾瞻을 登用하매(先是爾瞻强請傳位被流配未及配所宣朝*篤召喚) 爾瞻이 疑獄을 起하야 柳永慶國舅金悌男及其三子一婿를 皆殺하고 당시 僅히 8세인 永昌大君은 江華密室에서 熱殺하고 大君의 生母 仁穆大妃는 廢하야 西宮에 幽閉하고 其外 臨海君 珒과 定遠君 琈도 다 被害하니 此 慘變은 李朝黨爭史上 일대 참변이라 云치 안이치 못하겟다. 然而 此時 小北은 비록 廢母를 반대하얏스나 爭論이 不一하야 또한 淸小北 濁小北으로 分하고 大北에게 여지업는 참패를 당하얏스니 此光海君一代의 間은 大北의 천하라 可謂하겟다.


二. 大北의 全滅과 西南人의 抗爭時期

仁祖 元年으로부터 顯宗 15년까지 약 50년 간은 六北의<66> 전멸과 西人 及 南人의 抗爭時期라 可謂하겟다. 즉 光海朝 15년 3월에 西人 李貴, 金自點, 金瑬, 李适 등이 反正의 旗를 擧하야 光海君을 폐하고 仁祖를 옹립하는 동시에 永昌, 任海 兩大君과 金悌男의 爵을 復하고 李爾瞻, 鄭仁弘 등 大北徒黨 수십 인을 살해하고 또 其派 數百人을 竄逐하니 此 時期는 大北의 全滅時期다 然而 大北을 撲滅하고 정권을 掌한 西人 中에 李貴, 金瑬 등은 功勳이 有함으로 功西 又는 勳西의 稱이 잇고 金尙憲 在野黨인 고로 淸西라 稱하야 또한 分裂이 生하얏스니 此는 向者 南北人의 分裂과 如히 反對黨에 대한 硬軟의 차별이 有함에 不過함은 물론이고 又 在朝黨 즉 功西 中에도 老西 少西 二派가 有하야 老西派는 南人과 타협(金瑬 등 軟派)을 保持하랴 하고 少西派는 此를 반대하얏스며 (李貴 등 硬派 其後 仁祖 末年에는 更히 分裂하야 功西는 原黨, 洛黨(金自點 一派)이 有하고 淸西는 山黨 漢黨이 生하얏스니 其 中 山黨은 忠南 連山의 學者 金長生(沙溪)의 子 金集(愼獨齋)을 주로 하야 連山 懷德의 士林을 다 망라한바 沙溪의 門弟 宋浚吉 宋時烈 등이 또한 山黨에 參하얏다. 如斯히 西人은 數多의 분파가 生하얏스나 仁祖 一代의 間에는 勳西 一派가 牛耳를 執하얏다 云치 안이치 못하겟고 또 孝宗朝에 至하야는 洛黨 金自點이 被誅하고 北伐論者 宋時烈이 左議政이 되고 宋浚吉이 吏判됨을 따라 山黨의 세력이 또한 多大하얏다.

南人과 西人의 爭 然而 茲에 一言을 안이치 못할 것은 南人의 지위니 南人은 柳成龍 이후로 정권을 執치 못하다가 仁祖反正후에 梧里 李元翼이 비를소 領相이 되고 또1,2의 南人이 요직에 在함으로 僅히 潛勢力을 보유할 뿐이엿다. 그러나 顯宗朝에 至하야 西南人의 爭論은 大히 注意할 바이엿다. 즉 제1차는 顯宗 初年에 慈懿大妃(仁祖繼妃 趙氏)의 服할 孝宗喪期에 대하야 宋時烈 등은 朞年說을 主唱하고 南人 尹鎬(白湖) 許穆(眉叟) 등은 三年說을 主唱하얏스며 제2차에는 顯宗 末年에 昇遐한 仁宣大妃(孝宗妃 張氏)의 喪에 대하야 宋은 大功說(9개월), 尹은 朞年說을 각자 주장하얏다. 如斯히 兩論의 분쟁이 심하다가 顯宗은 尹說을 채용하니 결국 西人의 勢가 축소되고 南人의 勢가 대두되야 同王 末年에는 南人 許積이 領相이 되고 繼하야 肅宗 初에는 南人 權大運, 許穆이 左右相이 되니 其勢力이 益益旺盛하야 宋時烈을 크게 공격함으로 일시 堂堂의 세력이 有하던 宋時烈도 그만 官爵을 被奪하고 長鬐郡으로 流配되는<67> 悲運에 陷하고 又 당시 南人 中에는 西人에 대한 태도와 硬軟에 의하야 又 淸南(許積) 濁南(權大運)의 兩派가 生하얏다.

이상과 如히 黨派의 盛衰는 一仆一起하야 頗히 복잡하얏스나 摠而言之하면 宣祖 8년의 分黨으로 顯宗 末까지 약 백년간에 최초 50년은 東人이 得勢하고 후 50년은 西人이 牛耳를 執하얏다.


三. 南人失脚과 老少分爭時期

此 黨爭은 肅宗 元年으로부터 同 20년까지 至하는 약 20년 간의 黨爭이니 初에 南人의 領袖許積이 顯宗의 顧命을 受하야 肅宗을 보필하던 바 당시 肅宗은 僅히 14세의 弱齡으로 질병이 多하고 且宗室中反軌者가 多함으로 許積의 子 許堅이 此等과 결탁하여 反正을 謀하다가 (麟坪大君의 子 福昌君 楨, 福善君 梅과 同謀) 兵判 金錫胄의 적발로 인하야 許積의 父子 及 尹鐫 외 수십인이 被誅하고 南人 백여인이 다 被斥하니 此가 즉 肅宗 6년 庚申大獄이다. 如斯히 南人이 일망타진된 후 金錫胄, 金益勳(金長生 孫)은 其功을 錄하게 되야 益勳은 御營大將, 金壽恒은 領相, 閔鼎重은 左相 金錫胄은 右相이 되고 又 宋時烈은 다시 소환되야 朝에 入하니 명망이 一世를 傾하고 따라서 西人의 勢力이 大振하얏다.

그러나 西人 중 少壯者는 金錫胄의 行事를 반대하는 者가 多하야 遂히 老少二派로 또 分裂되얏스니 즉 金錫胄, 金益勳을 右하는 者는 老論이오 此를 반대하는 韓泰東 趙持謙 등 一派는 소위 少論인 바 肅宗 9년에는 다시 禮論問題로 宋時烈과 尹拯(明齋)及 朴世采 간에 爭論이 起하야 宋은 老論과 一派가 되고 尹은 少論과 一派가 되야 有名한 懷尼(즉 懷德과 尼山(魯城)의 戰을 成한 후로 老少의 分爭이 益益熾烈하게 되얏다.(肅宗 9년에 宋時烈이 孝宗의 書室問題와 太祖의 威化島回軍 近二百年紀念 上諡問題를 건의하얏다가 尹拯이 반대하야 遂히 老少爭論이 激起하얏다) 其後 肅宗 15년에는 世子冊封問題로 南人과 西人에 大衝突이 生하야 南人의 睦來善, 金德遠, 閔黯 등이 樞要의 지위를 得하고(金, 睦爲左右相) 西人의 宋時烈은 南人 李玄紀, 南致薰 尹彬 등의 上䟽에 인하야 83세의 노령으로 濟州에 流配되얏다가 井邑에 移하야 賜死하고 吳道一 洪致祥 金益勳 등은 或罷或竄하며 金壽恒도 또 賜死하얏스니 此가 즉 소위 己巳換局이다. (초에 肅宗正妃閔氏가 嗣子가 無하고 熙嬪 張氏가 王子 均을 生하얏는데 肅宗이 正妃 閔氏를 廢하고 王子 均으로 世子를 冊封코자 하얏더니 西人 宋時烈은 반대하고 南人 睦來善 등은 찬성하야<68> 爭論이 又起함) 그러나 肅宗 20년 4월에 至하야 王은 다시 前非를 후회하고 南人을 疏待하니 西人이 此機를 乘하야 南人의 在官者를 黜斥하고 南九萬이 領相이 되야 재차 西人의 內閣을 회복하고 宋時烈도 또한 復爵되얏다.


四. 老少大衝突의 時期

肅宗 20년에 南人이 失勢하고 政權이 南人이 歸한 후 局面은 다시 一變하여 老少 兩黨의 爭戰이 되얏스니 肅宗 20년으로부터 景宗 4년까지 약 30년 간은 老少衝突의 全盛時期라 可謂하겟다. 景宗은 病弱하야 王子를 生誕할 희망이 無하고 또한 聽政하기 不能함으로 元年 8월에 老論派에서 世弟 英宗으로 代理聽政케 할 事를 䟽請하야 領相 金昌集, 領府事 李頣命, 判府事 趙泰釆, 李健命 등(소위 老論四大臣)이 老論巨首가 다 此를 찬동하얏더니 趙泰耈등 少論의 극렬한 반대로 老論이 遂히 패배하고 四大臣外其一派가 다 竄逐을 당하고 趙泰耈등 少論一派가 得勢하야 泰耈은 領相 崔奎瑞, 崔錫은 左右相이 되니 政局은 다시 少論의 천하가 되엿다. 然而 少論中 急激派 金一鏡(承旨)의 徒는 宦者 朴尙儉, 文有道, 宮婢石烈, 必貞등과 음모하고 東宮을 害코자 하다가 발각되야 朴文輩가 다 被誅되고 其翌年에는 一鏡이 또 睦虎龍과 음모하고 老論一派가 東宮을 謀害한다 誣告하야 金昌集 등 4大臣외 수십인이 被誅하고 白望, 鄭麟重, 金龍澤, 李天紀 등도 또한 被罪하니 此가 즉 辛壬誣獄이다.(辛丑, 壬寅 兩年을 亙한 고로 辛壬이라 하고 又 혹은 壬寅獄事라도 한다.)


五. 老論의 登用과 調和主義의 實行時期

英宗元年으로부터 正祖 24년까지의 약 180년 간은 소위 老少調和主義의 實行時期다. 世人이 皆知하는 바와 如히 英宗과 正宗은 李朝末期의 英主이엿다. 英宗은 卽位초에 蕩平의 敎諭를 下하야 內外臣民에 示하고 黨爭의 弊禍를 통절히 論하고 老少調和主義를 取하얏다. 卽位초에는 少論派가 要路에 당하얏스나 壬寅誣獄의 진상이 탄로되매 金一鏡, 睦虎龍 등을 誅하고 柳鳳輝, 李光佐 趙泰億 등 少論一派를 竄逐하며 壬寅寃獄에 관련된 諸人의 官을 復하고 또 金一鏡의 餘黨 李麟佐의 亂을 平하니 일시 宮內에 少論派의 形影이 絶하고 老論이 다시 登用되얏다. 그러나 調和主義를 실행코자하는<69> 英宗은 一黨에게 永久히 정권을 委함이 不可함을 知하는 고로 老論 洪致中으로 領相을 삼는 동시에 少論 趙文命으로 右相을 삼고 300년래 黨爭의 일원인이 되던 詮郞의 규제를 폐지하고 또 老論 宋時烈과 少論 朴世釆을 동시 文廟에 從祀케 하니 이것도 蕩平主義 한 實現이다. 其後를 繼하야 正宗은 또한 宮中寢室에 題하되 「蕩蕩平平室」이라 하고 常히 蕩平主義에 노력하니 前日에 激烈하던 黨爭은 점차 浸息에 至하얏다.


六. 老論의 全盛과 黨派打破時期

英正이후에 黨爭은 대개 緩和되얏스나 老論의 勢力이 依然이 강대한 中純, 憲, 哲諸時代에 至하야는 外戚의 老論이 정권을 좌우하야 비록 전일과 如한 慘劇은 見치 못하얏스나 他派가 政事를 간여치 못하야 李太王初年까지는 恰然히 老論의 천하와 如한 感이 잇섯다가 大院君이 攝政한 후로 일대 勇刀을 下하야 四色을 打破하고 공평이 登用하며 또 黨派 이외의 人도 역시 採用하게 되니 수백년간의 黨爭은 遂히 終幕을 고하게 되엿다. 그러나 合倂時期까지도 依然히 老論이 有勢한 것은 사실이니 佊所謂 76人의 貴族중에 少論이 僅히 7人 北人이 1人이고 其外는 그의 老論인 것을 見하야 또 可知할 것이다.


丙. 黨爭의 社會上에 及한 影響

각 시기의 黨爭이 政治에 如何한 악영향을 與한 것은 상술함과 如하거니와 사회 상에 及한 영향도 또한 다대하니 茲에 略論하면

一. 一般 인심에 及한 영향 黨爭이 一般 人心에 악영향을 與함은 물론인 바 其中 현저한 事는 第一 社會 各階級을 互相離背케 하야 금일 一般 朝鮮人의 團合心의 缺乏을 馴致하고 第二, 自己黨派를 옹호함에만 열중한 고로 人物의 善惡, 忠逆의 標準 如何를 失하고 第三은 倫常을 파멸하얏스며(例如兄弟叔侄이 異色으로 分한 것)

二. 學術 上에 及한 영향 黨爭은 결국 老少의 勝利로 歸한 중 老論은 少論보다 항상 勢力이 多하야 학식의 여하와 인물 여하를 불구하고 顯職을 取함이 拾芥와 如히 용이하얏스나 南人 北人은 일차 실각한 후로 다시 정계에 세력이 無함으로 자연 他方面으로 傾注하얏스니 就中 南人은 詩文, 書法 이외에 政治 經濟의 學術硏究에 전력하는 者가 多하야 柳馨遠의 磻溪隨錄, 李瀷의 星湖僿說, 丁若鏞의 牧民心書, 李重煥의 八域志, 其他 諸 學者의 명저가 有하게 되고 또 自由派의 文人學者가<70> 배출한 결과로 당시 배척하던 佛敎, 道敎 등을 自由硏究하게 되엿스니 其中 天主敎가 南人의 手를 經하야 輸入되고 또 朝鮮에서 新興한 東學이 이 南人의 계통에서 起한 것은 大히 주목할 일이다. 此는 결국 儒學이 전혀 老論의 독점이 되고 仕寰의 진로가 老論이외에는 殆히 閉塞된 결과라 云할 것이다.

三. 婚姻에 及한 영향 동일한 양반이라도 同色이 안이면 결혼치 안은 것은 常例이엿고 또 따라서 부득이 異色과 한다 하면 마치 班常이 相婚한 것이나 嫡庶가 相婚한 것과 如히 思하야 曰 某家는 落婚을 하얏느니 失色을 하얏느니 하고 互相排斥하얏다. 此風은 今에도 아즉까지 잔존하야 古老間에는 異色婚을 배척하는 風이 종종 잇다.


丁. 各黨派의 特色과 及 地方的 分布

南人 南夏正의 著한 桐巢漫錄에 의하면 四色은 각각 특색이 잇스니 즉 老論은 剛厲가 多하고 少論은 眞實이 少하고 小北은 色態를 好하고 東人(南人을 指함)은 柔善하고도 *함과 如하나 東士의 본색을 失치 안이 한다 하얏다. 이것이 과연 적합할지 不知하거니와 四色은 禮節 婚姻, 기타 생활의 환경이 各異한 까닭에 言語, 行動, 性格 등도 相異할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甲午 이전까지는 黨派의 지방적 근거지가 各異하얏스니 즉 京城은 원래 首都인 까닭에 四色이 皆聚하얏고 慶尙道는 士林의 淵藪인 동시에 李退溪를 宗으로 한 柳西厓(成龍)가 南人巨頭로 安東에 잇는 까닭에 安東, 禮安을 중심으로 하야 慶尙一帶가 殆히 南人의 鄕과 如한 感이 잇고 忠淸道는 栗谷의 門人 西人 金長生이 連山에 잇섯고 其學派 宋時烈 宋浚吉이 懷德에 잇섯슴으로 連山, 懷德, 太田一帶는 其子孫 及 門徒의 西人이 만코, 論山(舊魯城)은 尹明齋의 本鄕인 고로 其附近에 少論이 多하고 京畿江原은 老少南人이 互居하고 黃海道 海州一帶는 李栗谷의 子孫과 其派의 西人이 多少잇섯다. 그리고 咸平兩道는 과거에 兩班이 稀少함으로 四色이 또한 別無하고 全羅道는 李朝中葉以後로 大官이 別無하고 士大夫家가 少함으로 鄭松江 金河西, 奇高峰 등 西人幾家외에는 별로 이럿타 할 집이 업섯다.(此는 南人 李重煥의 著한 八城志를 **함)⾀ˆ71>

黨派一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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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ma_013_070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