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史館論叢 第26輯
國史館論叢 第26輯 > 朝鮮前期의 性理學硏究(許南進)
Ⅳ. 性理學의 內面化와 實踐
앞장에서 대략 살펴보았듯이 태조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전기 성리학은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어 건국초 문물과 국가의례를 유교적으로 정비하고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국가질서의 정립에 큰 역할을 했으나 집권훈구파의 거듭된 명분상실로 인해 유교적 이념 자체는 그리 활발히 연구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했다 하겠다. 전반적으로 사장이 중시되고 심지어는 불교 등의 비유교적 요소가 다시 부각되었던 이 시기에 성리학의 이해를 심화하고 성리학적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주력한 학자군은 세조의 癸酉靖難을 계기로 현실권력에서 제외된 일군의 학자들이었다. 성종대에 이르면 이들 기호지역의 기존 성리학연구자 외에 영남지역에서 나름대로 성리학적 명분을 지키며 공부한 학자들이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이들에 의해 조선성리학은 수용과 이해의 단계가 아닌 실천의 단계로 접어든다 하겠다. 물론 이들은 修己에 치중했고 성리학적인 이념의 실현이 향촌단위였기 때문에 그리고 새로운 서적이나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전기 성리학사에서 영남사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후의 조선성리학이 지니는 성격이 여기서 연유하고 성리학의 道德至上主義·至治主義의 실천적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도 영남사림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종대 김종직을 필두로 하여 중앙에 진출한 嶺南士林은 金宏弼·鄭汝昌·曺偉·金馹孫·金孟性·命好仁·金訢·朴漢柱·表沿沫·康伯珍·李宗準·郭承華·孫仲暾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학맥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망국의 한을 품고 절의를 지켜 영남 금오산 밑에서 후진을 지도한 冶隱 吉再(1353∼1419)에 이르게 된다. 여말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길재는 조선왕조에 협력할 것을 요청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현실과 명분 사이의 중용을 택한다.
왕을 섬기지 않음이 어찌 절개를 팔게 되기 때문이겠습니까. 신하노릇을 하지 않음은 인륜을 어지럽힘과 관계될 뿐 아니라 벼슬하는 도리에도 관계되는 것이니(신하가 되지 않음이 오히려) 명교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註 050
고려의 멸망과 조선조의 등장이라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성리학적 명분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은거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길재의 학맥은 江湖 金叔滋·占畢齋 金宗直·寒喧堂 金宏弼·靜庵·趙光祖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여말 노재학의 영향 아래 실천적 성리학풍을 형성한 정몽주·이색 등의 여말 성리학을 계승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들 초기사림들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세종·성종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성리학적 세계관의 이해를 위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小學을 통해 익힌 성리학적 규범의 실천을 통한 유교적-성리학적-가치관의 보편화, 성리학적 명분론의 현실적 실현에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명분에 약간씩의 하자가 있는 기존의 훈구세력을 비판하고자 했다. 初期士林들에 의하여 성리학이 현실의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훈구를 비판하는 무기로 기능했다는 사실은 이후의 조선성리학이 지니게 되는 역사적 기능으로 비추어 보아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 생각된다. 초기사림들의 성리학적 이념의 강조는 勳舊派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침해라고 판단하여 사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戊午士禍(연산군 4년, 1498)와 甲子士禍(연산군 10년, 1504〉이다. 초기사림은 양 사화로 말미암아 그들의 이념실현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다시 향리로 내려가 성리학을 연마하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들 초기사림의 역할은 성리학의 이론적 실천에 있었지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가 아니었고 또 양 사화를 통해 이들의 글들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초기 영남사림들의 성리학 이해수준은 잘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글로 미루어 볼 때 이론적으로는 관학의 성격을 지닌 기호지역 성리학자들의 성리학 연구수준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길재의 직전제자인 江湖 金叔滋(1389~1456)의 경우에는 15세기 초반의 성리학풍을 반영한 〈斥佛疏〉와 〈斥佛議〉가 있으나 정도전의 〈불씨잡변〉만큼 정밀하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영남사림으로서 처음 중앙에 진출한 占畢齋 金宗直(1431~1492)도 “김점필은 학문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종신사업이 다만 詞華에만 있었으니 그의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註 051는 퇴계의 평가가 말해주듯이 문장과 시에는 능숙했다는 평가를 받으나 점필재의 저술을 살펴보면 도학상에는 별로 남긴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유교적 윤리규범인 孝悌忠信을 보편화하고 유교적 명분을 중시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의 저술 곳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학문적 태도가 단순한 지식의 확충에 있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학문을 강함이 진실로 밝다면 孝悌忠信의 가르침을 사람마다 익히고 행하여 학교로부터 일반으로 점차 스며들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五倫은 각기 그 차례를 얻어 士農工商의 四民이 각기 그 생업을 편안히하여 집집마다 착하게 되는 풍속을 점차 이를 수 있을 것이다.註 052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의 보편화를 일차적 사명으로 인식한 김종직을 비롯한 초기사림과 학문의 가치를 현실적 필요성에서 점필재는 훈구세력과의 성리학에 대한 입장 차이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세조 10년 鄭自英·金暎璧으로 하여금 성리설을 강론케 하면서 天文·地理·陰陽·律呂·醫藥·卜筮·詩史의 7문으로 나누고 김종직을 史學門에 넣자 김종직은 “이제문신들로 하여금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시사의 7학으로 나누어 익히게 하나 詩史만 본래 儒者의 할 일이요 나머지는 雜學이니 어찌 유자가 힘써 배울 수 있겠습니까. 또 잡학은 각기 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니……반드시 문신이 해야 할 것입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세조는 “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내가 유의한 바이거늘 종직이 이것을 말하니 옳으냐” 하고 사학문에서 제외시켰다.註 053
위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김종직은 문장과 제술로 이름의 떨치기는 했으나 성리학을 대하는 태도는 기존의 관학자들과는 완연히 달랐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초기사림의 대표격인 그의 문인 정여창과 김굉필에게로 이어진다.
一▼((橐-木)/砳) 鄭汝昌(1450~1504)에 이르러 유교적 명분의 철학적 기초로서 理氣論이 문제되기 시작했고 理氣와 善惡을 관련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정여창은 〈理氣說〉·〈善惡天理論〉·〈立志論〉 등의 성리학관계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이기설에서,
그 理는 氣없는 理가 없고 (氣는) 理없는 氣가 없다. 그러므로 理가 있는 곳에 氣 또한 모여 있고 氣가 움직일 때 理 또한 들어간다. 理氣는 피차의 구별이 없는 것 같으나……피차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이 一而二요 二而一인 것이다……理氣를 통털어서 하나로 통일하면 자기의 사리사욕을 그대로 작용하는 것을 性이라 하는 폐단에 흐르게 되고 理氣를 쪼개어 둘이라 하면 미묘한 道를 구하고자 하다가 드디어 天地日月이 幻妄이라는 거짓에 귀착될 것이니 어느 쪽에도 편벽될 수 없다註 054
하여, 이기론과 修己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흥미있는 점은 정여창 때까지도 氣에 대한 理의 우월을 주장하는 理學的 傾向이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우주론에 있어서는 理氣의 ‘不相離 不相雜’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고 수양론에 있어서는 心(氣)과 性(理)을 동일시하는 心學的 傾向과 性만 중시하는 禪學的 傾向을 동시에 배척하고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程朱的 理學이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일두집의 〈선악천리론〉은 程明道가 生之謂性章에서 ‘理에도 선악이 있다고 하고 惡도 性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으로 정여창은,
理는 善하나 氣에 淸濁이 있다고 하였으니 본래 惡이 理의 本然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정자의 말씀에 ‘천하의 선과 악은 모두 천리다’ 하였으니 이를 살펴볼 때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註 055
하여, 정명도가 제시한 이기와 성악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나름대로 해결을 꾀하고 있어 초기 성리학자들의 관심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초기 사림을 잇는 중종대 사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학자는 寒喧堂 金宏弼(1454∼1504)인데 그는 小學童子로 자칭할 만큼 소학을 중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학은 성종·연산대의 初期士林에 의해 가치가 인식되기 시작하여 그 문인대인 중종대 사림에서 소학의 체득으로 자기를 수양하는 理學風이 조성 되었는데 중종대의 사림인 趙光祖·金安國·李長吉·李長坤·李績·崔忠成·尹信 등은 모두 김굉필의 문인이었으므로 여말 성리학 수용기에 노재학의 영향으로 소학이 강조된 이후 소학의 중시는 김굉필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학에서 시작하여 대학에 이르는 학문방법은 주자가 제시한 것인데 소학의 강조는 성리학적 도덕규범의 개인 차원에서의 실천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사림들은 그들의 이상을 유교적 도덕윤리의 함양을 통해 달성시키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 현실의 권력을 유교적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세력으로 비판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으로서는 이른바 사림파 계열에 의한 15세기 말엽의 鄕射禮·鄕飮酒禮 보급운동과 16세기 초반의 鄕約 보급운동을 들 수 있다.註 056 이러한 비판과 세력확충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야기했고 그로 말미암아 사림의 이상은 현실에서 좌절되었으나 이후 중종대의 己卯士林에 의해 보다 심화된 성리학 이해와 보다 보편화된 성리학적 가치관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현실의 시험대에 올려진다.
연산군의 학정을 빌미로 반정을 통해 집권한 中宗은 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하고 반정의 명분을 두터이하기 위해 연산군 때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를 거치면서 탄압받았던 성리학풍을 진작시켰다. 중종대의 성리학 부흥을 맞이하여 김종직·김굉필의 학맥을 잇는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등장하여 성리학의 이념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을 연산군의 실정이나 현실의 훈구세력을 비판하는 무기로 삼았다. 따라서 성리학적 명분에 충실하지 못했던 연산조 때의 관료나 훈구공신으로 주어진 현실적 이익에 안주하려는 당시 집권층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註 057 이로 말미암은 신진사대부와 훈구파와의 갈등이 기묘사화를 야기하게 된다. 기묘사화에서 다시 희생된 조광조 등 30여 인을 초기의 영남사림과 구분해서 기묘사림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註 058 이들은 ‘三代之治’라는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왕을 비롯한 개인들의 자의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는 안되고 보다 상위의 가치인 仁에 바탕을 둔 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왕을 비롯한 집권사대부들의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적 수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정내의 비성리학적 요소들을 배격하고 성리학 수련을 강화하게 된다. 중종대의 성리학은 이들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는데 이들은 조광조 등의 기묘사림에 속했던 유학자들은 내외의 요직에 포진하여 강론과 상소를 통해 종래의 학문이 詞章을 중시했으며, 종래의 정치가 유교적 이념에 어긋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修己之學으로서의 理學을 장려하여 유교의 이상사회인 三代之治를 이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들 기묘사림들에 의해서 주도된 중종대의 성리학은 이후 조선성리학이 心學化하고 교조적인 주자학으로 변모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묘사림의 대표자로는 조광조를 꼽을 수 있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인이었으므로 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영남사림의 실천적 학풍을 잇고 있지만, 이들의 성리학 이해는 성종대 18년간이나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학업하였으며 중종 2년(1507)부터 5년간 成均館 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을 교육한 眞一齋 柳崇祖(1452~1512)의 성리학에 힘입는 바가 크므로 이 글에서는 우선 유숭조의 성리학을 개관한 다음 이와 조광조의 성리학이 지니는 차이를 살펴보고 중종대 성리학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승조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大學三綱八目箴〉과 〈性理淵源撮要〉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성종대의 학문을 종합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柳洵이 大學箴의 跋文에서 “이제〈大學十箴〉을 보면 우리 동방에 성리에 관한 글이 陽村 이후에 전혀 없다가 겨우 있게 되었다”註 059고 유숭조의 성리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승조는 당시의 성리학 수준을 소학의 실천에서 대학의 연구로 한 단계 높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大學衍義》는 조선 개국 이래 왕의 修身書인 政治理念書로 간주되었던 책이다. 유숭조에 와서 대학이 철학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적 이념의 실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하겠다. 후에 退溪가 〈心經〉을 존중하여 帝王의 心法으로 중요시한 후 〈심경〉이 경연에서 많이 거론되었는데 〈심경〉과 《대학연의》는 모두 眞西山의 저술이므로 진서산의 사상은 조선성리학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겠다.註 060
유숭조는 《大學》 의 明明德條를 해석하면서,
情은 性에서 動하니 純善無雜한 것이요, 義는 心에서 發하니 義는 善과 惡이 나뉘는 기틀인 것이다. 理가 움직이면서 氣를 낀 것(理動氣挾)은 四端의 情이요, 氣가 動하면서 理가 따르게 되는 것(氣動理隨)은 七情의 萌芽이다註 061
라고 하여, 修己의 근거로 心·性·情·義·四端·七情을 理氣槪念과 연관지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단·칠정을 ‘理動氣挾 氣動理隨’로 설명하고 있는 점은 후일 ‘理發氣隨 氣發理乘’으로 설명하고 있는 퇴계의 결론과 유사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수양의 구체적 방법과 대상에 관해서는 설명한 〈格物致知箴〉에서 “心外에 理가 없고 理外에 物이 없다”註 062고 하여 점차 氣의 운동에 의한 세계의 설명보다도 理에 근거한 도덕성의 규명에 당시 성리학의 초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숭조의 성리학을 보면 理氣說의 心性論化는 퇴계 이전 유숭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이는 중종대 실천적 성리학의 결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유숭조의 성리학이 당시 실천적 성리학의 이론적 근거를 밝히는데 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숭조의 이론적 작업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어 당시 수기 그 자체를 중시한 사림들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후일 조광조는 유숭조가 학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됨이 조박하고 유자의 도리를 알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며,註 063 또 奇遵은 유숭조의 학문은 章句之學일 뿐 治身之學은 아니며註 064 아는 것이 많다고는 하나 마음으로 얻은 것이 아니어서 근본도리에는 오히려 어둡다고 평해지기도 했다.註 065 수기를 중시했던 사림들에게는 經史子集에 박통할 뿐 아니라 天文曆象을 비롯한 잡학에까지 정통했던 유숭조의 학문이 별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이는 김종직이 잡학은 유자의 일이 아니라 상소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러나 柳崇祖·金應箕·柳洵 등 성종대의 학풍을 이어받은 성리학에 밝은 성균관 출신의 성리학자들에 대하여 영남지역의 신진사림들은 修己를 위주로 하지 않고 박학하기만 하다고 비난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성리학적 수양과 명분을 체계화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이들의 영향력이 지대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종대의 성리학풍을 부정하고 철저히 修己之學을 강조한 己卯士林 중에는 그 영수격인 趙光祖를 비롯하여 金淨·金安國·權撥·金絿·尹自任·奇遵·金湜 등의 성리학에 밝은 학자들이 있으나 修己의 强調, 至治主義, 仁의 强調 등 여러 점에서 근사하므로 여기서는 조광조의 성리학이 지니는 특징만을 대표로 살펴보고자 한다.
靜庵 趙光祖(1482~1519)의 성리학은 한 마디로 至治主義라고 규정지을 수 있겠다. 그는 조선조가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면서도 三代之治를 이룩하지 못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유교적·성리학적 가치를 체질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성리학적인 가치를 체현하고 실현하는 도덕운동에 의해서 三代之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작문 등의 행정실무능력이 아니라 왕을 비롯한 관료들이 각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고 본다. 조광조는 經筵에서,
子思는 中庸의 끝에서 말하기를 篤實하고 恭敬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천하의 일은 정말 만가지이지만 오직 독실하고 공경함으로써만 천하의 본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여기에 모으면 이로써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지만 한번 흩어지면 만가지 이치가 구비된 전체가 망연히 무너져 일상의 일도 잘 수행할 수 없으니 하물며 천하를 평안하게 하기를 바라겠습니까註 066
라고 하여, 전통적인 유학의 교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학자는 모름지기 修己之學爲己之學, 즉 理學에 힘써야 經世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지 詞章之學이나 科擧之學은 爲人之學으로 경세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조광조의 생각인데, 그 중에서도 왕의 도덕적 의지는 至治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므로 왕의 도덕 수양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광조는,
王道는 하나의 이치에 귀착되니 정치 또한 純一해야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天地의 道를 따름도 또한 이 순일한 이치에 근본하는 것이고 四時가 운행하고 萬化가 亨通함도 一氣의(변화가)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聖王께서는 天道를 본받고 道를 쌓음에 한결같이 하고 政敎를 세움에 순일하게 하고 일을 대하고 베품에 하나의 이치로 일관하시면 皇極을 세울 수 있습니다註 067
고 하여, 人主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왕이 정치를 행함에 천지의 도에 버금가는 변하지 않는 원리에 입각할 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三代之治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가 왕을 비롯한 통치집단의 私的인 이익이나 즉흥적인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보편적인 원리에 의해야 하는데 그 보편적인 원리로 제시되는 것이 仁이다. 조광조는,
仁이란 天地가 物을 生하는 이치인데 끊임이 없어 그치지 않으니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천하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仁을 體認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본성을 얻게 한 연후에야 천지와 더불어 조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仁은 四德을 포함하고 있기에 仁道를 다할 수 있으면 禮·義·智 세 가지는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註 068
고 하여, 仁을 단순히 惻隱之心의 발현으로 보지 않고 天地가 物을 생하는 原理, 義·禮·智를 포괄하는 보편적 가치로 격상시킨다. 그러면 천지의 이치이고 인간의 본성인 仁은 왜 자연스럽게 발현되지 않는가.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본성은 착하지 않음이 없으나 기품이 고르지 못하니 사람의 不善함은 氣가 그렇게 한 것이다”註 069라고 하여 형기의 은폐작용에 그 책임을 돌리고 修己는 결국 氣의 불선함, 즉 인간의 형기에서 연유하는 이기심을 제거하고 仁이라는 본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우주의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인에 대해 종교적 외경심을 가지고 일에 임해야 한다고 하여 敬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조광조의 성리학은 당시의 己卯士林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는데 이전의 조선 성리학과 비교해 보면 성리학을 세계를 설명하는 틀로 보지 않고 修己의 지침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들은 기존의 비성리학적 요소,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난 요소들이 각종 비리의 원천이 되었다고 비판한 후 지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왕을 정점으로 집권사대부들이 보다 보편적인 가치인 仁을 체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성리학은 바로 그 수기의 도구이자 실천의 기준이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자신을 수련하고 民을 통치하는 한편 바로 그 성리학적 기준으로 왕과 훈신들을 제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왕의 마음을 얼마나 성리학적인 것으로 만드느냐에 개혁의 성패를 걸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성리학의 방향은 자연히 도덕의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심성론으로 기울게 되었고 이념을 보다 강조하는 主理의 방향으로 전개되었지 않나 생 한다.
이러한 성리학의 틀을 그들의 이념으로 삼고 있던 기묘사림들은 중종 10년 경부터 조정에 중용되기 시작해서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그들은 우선 조정에 남아 있는 비성리학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일환으로 昭格署革罷를 주장한다. 소격서는 천지 성신을 醮祭하던 곳으로 국초부터 관서를 설치하고 제사를 거행하여 왔는데 중종 11년 韓山郡守 孫世雍이 上疏에서 “불교의 齋는 성종대 이미 없어졌는데 도교의 초제만 아직도 남아 있어 이단의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고 있으니 소격서를 혁파해야 한다”註 070고 주장한 후 조광조 등이 상소하여 없앨 것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왕이 허락하지 않다가 조광조가 계속 그 폐해를 극론하자 마침내 혁파되었다.
昭格署革罷라는 비성리학적 요소의 제거와 더불어 사람들에 의해 비성리학적인 요소로 배격된 것은 국초 이래 만연된 詞章중시라는 풍조였다. 이들 기묘사람들에게는 詞章之學이나 박학하기만 한 章句之學은 몸에 절실한 학문이 아니어서 경세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배격했다. 이들은 사장은 理學에서 발한 末枝에 지나지 않으며 ‘文以載道’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근본이 되는 理學을 체득하면 詞章은 저절로 익혀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념아래 侍講官 柳庸謹은 “詞章은 사실 理學에서 發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장은 그것을 배워도 혹시 할 수 없는 자가 있으나 이학은 그것을 배워서 할 수 없는 자가 없습니다”註 071 하여 사장을 배격하고 이학을 숭상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장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기묘사림들에게는 공통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훈구파에 속한 유학자들은 詞章이 末이라고는 하지만 理學을 장려한다고 해서 眞儒가 쉽게 배출되는 것도 아니고 세종대처럼 학문이 융성했을 때도 사장이 숭상되었고 事大와 交隣의 외교를 함에 사장은 매우 중대하여 권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유자들로 하여금 사장과 이학을 함께 익히게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註 072 이러한 사장과 이학의 대립은 단순한 학문관의 차이가 아니라 과거제도와 관련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중종 13년 司諫 孔瑞麟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文華詞藝로서 학술을 삼았는데 옛사람이 학술이라 한 것과는 다른 듯합니다. 사람을 뽑을 때도 頌表로 취했는데 殿試에서는 반드시 對策으로 해야 합니다. 策에서 그 사람의 학문을 볼 수 있으므로 옛날 大庭之對에서는 반드시 策으로 했던 것입니다. 前年의 別試에서도 역시 詞章으로 사람을 취했기 때문에 이름있는 사람들이 많이 登第하지 못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註 073
하여, 과거에서 사람을 뽑을 때 이학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사림들의 이러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중종 14년 賢良科가 설치되고 金湜 등 28인이 발탁되게 된다. 이러한 이학을 중시하는 정책이 시행된 결과 理學을 貴하게 여기고 詞章을 末枝로 보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져서 작문능력이 크게 저하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였지만註 074 전반적으로 성리학 공부가 유자들의 필수적인 교양으로 되고 성리학이 영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리학풍의 진작을 위해 기묘사림들이 무엇보다 노력한 것은 《小學》·《近思錄》·《性理大全》 등을 간인, 보급하여 성리학적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한편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학의 가치는 각별한 것으로 여겨 졌는데, 조광조·김안국·김정국·기준 등 대부분의 사림들이 進講에 참여하여 소학을 널리 보급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김안국은 소학보급에 더욱 적극적이었는데 그는 慶尙, 全羅監司로 있으면서 程愈의 《集成小學》을 간인하고 소학을 권하는 시 70여 수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종 13년에는 《諺解小學》이 나오게 되었고 소학의 보급확산과 함께 성리학적 가치관이 보편화되자 朱子家禮의 실시, 鄕約의 보급 등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정착도 함께 진행되어 갔다.
소학의 보급과 더불어 성리학 이해의 심화와 이론적 근거를 위해 《近思錄》·《性理大全》의 연구도 아울러 진행되었다. 《성리대전》은 세종대부터 성리학의 이해를 위해 널리 연구된 책이지만 중종대에 와서는 《근사록》이 특히 중시되고 많이 진강되었다는 사실은 성리학에 관한 넓은 지식과 전반적인 이해가 아니라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성리학 이해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근사록》은 奇遵 등의 건의에 의하여 경연에서 강의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 首章인 〈太極圖說〉은 天地萬物의 理致를 구비한 것으로 중시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논의되었다.註 075 당시 朴祥과 李彥迪은 기묘사림보다는 한세대 이후의 젊은 학자들이었으나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중종 11년 박상의 〈辨無極說〉, 12,3년에 이언적의 〈書忘齊忘機堂無極太極說後〉·〈答忘機堂書〉 등 성리학적 세계관의 본격적 이해를 알리는 글들이 나오게 되었다. 晦齋의 〈書忘齊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보면 그는 孫叔暾·曺漢輔 등 선배의 無極太極說에 개입, 忘齊說은 陸象山설이라 하고 忘機堂答書는 周濂溪에 근본하고 있으나 儒家의 寂而感으로 보지 않고 佛敎의 寂而滅로 본 異端의 嫌疑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글들에서 理先氣後의 理氣關係를 분명히하고 있어 조선성리학이 朱子中心의 性理學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고 이해되기 시작하자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사회질서 정립이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되는데 《小學》,《二倫行實圖》,《孝經》,《女訓》 등의 언해와 보급을 통한 성리학적 윤리규범의 보편화가 추진되는 한편 사림이 중심이 되어 향촌의 자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향약의 보급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중종 10년 향약의 전국적인 시행이 건의된 이래 향약운동은 경상도뿐 아니라 기호지방에서도 성과를 거두게 되어 성리학적 이념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이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묘사림이 주축이 된 사림들의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질서 재편성 시도는 훈구파의 반발로 야기된 己卯士禍(중종 14년, 1519)로 좌절되지만 기묘사림에 의해 형성된 실천적 성리학은 이후 조선성리학의 성격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註 050 《冶隱集》 〈辭太常博士箋〉.
註 051 《退溪全書》 4, 〈退溪言行錄〉.
註 052 《占畢齋集》 〈與密陽鄕校諸子書〉.
註 053 《世祖實錄》 10년 8월 甲申조.
註 054 《一蠹集》 〈理氣說〉.
註 055 《一蠹集》 〈善惡天理論〉.
註 056 李泰鎭, 〈조선전기의 향촌질서〉(《동아문화》 13,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76) pp. 164∼165 및 〈15,6세기 신유학정착의 사회경제적 배경〉(《규장각》 5, 1981) p. 13 참조.
註 057 물론 이러한 명분에 입각한 비판의 배후에는 토지문제라는 경제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중종 14년 11월 조광조는 臺諫을 이끌고 궁문밖에 엎드려 靖國功臣중 76인이 功을 지나치게 받았으므로 削除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僞勳削除는 공신으로서 받은 토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놓인 勳舊세력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이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註 058 기묘사림 중종 13년 이들을 비난하는 矢幹係書에 오른 다음의 30여 명을 들 수 있겠다. 金淨·趙光祖·李耔·韓忠·金安國·權撥·柳仁淑·申光漢·孔瑞麟·文瑾·金絿·尹自任·鄭膺·崔山斗·李淸·李若水·柳庸謹·奇遵·張玉·金湜·朴薰·朴世熹·李希閔·梁彭孫 등 30여 인, 《중종실록》 권34, 중종 13년 8월 戊子조(김항수, 앞의 논문 p. 124에서 재인용).
註 059 柳洵, 《眞一齋集》 〈大學箴跋〉.
註 060 劉明鍾, 《韓國思想史》(以文出版社, 1981) p. 223.
註 061 柳崇祖, 《大學三綱八目箴》 〈明明德箴〉.
註 062 위의 책 〈格物致知箴〉.
註 063 《中宗實錄》 권27, 中宗 12년 2월 丙寅조.
註 064 《中宗實錄》 권27, 中宗 12년 2월 庚申조.
註 065 《中宗實錄》 권15, 中宗 7년 8월 戊寅조.
註 066 《中宗實錄》 권34, 中宗 13년 7월 甲子조.
註 067 《中宗實錄》 권34, 中宗 13년 8월 戊辰조.
註 068 《中宗實錄》 권34, 中宗 13년 9월 戊寅조.
註 069 《靜庵集》 권5, 〈筵中記事一〉.
註 070 《中宗實錄》 권27, 中宗 11년 12월 丙子조.
註 071 《中宗實錄》 권30, 中宗 12년 8월 庚申조.
註 072 《中宗實錄》 권27, 中宗 12년 8월 乙未조.
註 073 《中宗實錄》 권32, 中宗 13년 3월 丁未조.
註 074 實錄에는 당시 儒者들이 趙光祖 등을 본받아 《近思錄》·《小學》·《大學》 등만 읽고 詞章에 힘쓰지 않아 문장이 성종대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초학자들도 參禪하는 것 같이 하루종일 端坐만 하고 독서는 하지 않아 師長들이 걱정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中宗實錄》 권29, 中宗 12년 8월 庚戌조 및 권34, 13년 8월 戊子조).
註 075 《中宗實錄》 권26, 中宗 11년 10월 辛酉조.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id/kn_026_0060_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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