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澗松集] 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3:33

[澗松集] 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迂拙子朴先生諱漢柱。字天攴。密陽府人。訓導諱敦仁之子也。天順己卯。生于豐角縣車山村第。生有異質。穎悟莊重。出語驚人。六七歲。能屬文。有大人特立軒天地之句。聞者奇之。初學於生員高克敬。高異其言貌氣象。必冠帶而後敎之。比長。慷慨有大志。以古人自期。與寒暄遊佔畢門受尙書。佔畢公手抽小學書與之。因以詩勖之。先生篤信力行。博聞彊記。文章氣節。稱斗南一人。成化癸卯。中司馬兩試。乙巳。登甲科。七更歲。拜正言。成廟銳意文治。先生自謂知遇。知無不言。嘗入經筵。上曰。辭吐俚正言至矣。蓋先生不避俚語。而言多讜直。故嘉之也。乞養出宰昌寧。臨民御吏。皆有條法。精密嚴恕。務盡道理。一以洗冤澤物爲心。屛徒從暗行閭里。探得民情。而人不知之。尤勤於興學明敎。選邑中子弟之秀者。與之講論修己治人敦本善俗之道。春秋行養老禮。因訪疾苦。昏喪賙濟之。使不失時。凡有令。必前期布告。無慢令致期之撓。閭里晏然。發姦如神。剖決如流。吏慴民懷。道內冤訟之不得其情者。多萃于縣。以治行第一。賜表裏加資。不煩民力構廨館。名曰秋月軒。蓋取朱子感興詩中語也。是時鄭一蠹作光風樓於安陰。李慵軒起聞韶樓於義城。識者謂觀此三構。足以知三賢之心云。燕山三年。爲獻納。極諫遊宴失政等事。燕山怒。至宣賜食物。有朴某勿給之敎。而猶盡言不諱。又箚論盧思愼弄權之漸。任士洪姦邪之狀。卒爲二兇所陷。以及於禍。時主心日荒。國事日非。知不可有爲。遂爲親求外。得平海。旋以邑遠親老換醴泉。始至。郡人迎喜曰。是前日昌寧賢太守也。未幾。搢紳禍起。以佔畢門徒。碧潼郡付處。是戊午七月也。庚申夏。量移樂安。甲子史獄再起。被逮而去。過金駿孫謫所。金要於路微諷云。老母在。須更思量。蓋欲使自明也。先生不應。金憮然而別曰。朴某之舍生守正。人不可及矣。先生臨刑。神色不亂。五月十二日也。是日。晝晦大雨。烈風雷霆。家人聞訃設奠。雷震。長虹一脚揷於庭中水斛。見者異之。分配諸子。鳳巨濟。鸞樂安。唯鵬,鴻以幼免。葬于咸安郡西蓬山東麓。丙寅。中廟靖國。庚午。贈都承旨。錄用子孫。先生自少篤好性理之學。沈潛經傳。孜孜不輟。諸子百家山經地誌。亦皆探討以資窮理。方嚴勁特。英毅果確。語默動靜。一遵繩墨。雖遇倉卒。不變常度。其事親也。篤於愛敬。每日鷄鳴。省問如禮。退而讀書。正坐終晷。雖家人未見懈容。淸介絶俗。家無甔石之貯。而處之裕如。訓導公性嚴有法度。誨以孝弟忠信之方。出入行止。不敢自由。嘗宰昌寧縣。距親庭半日程。奉養之物。常有定品。或於初昏單騎來覲。遲明卽還。而民不之知。方在諫院。訓導公取見章奏。且聞進說太直。戒之曰。吾甚懼焉。後勿如是。對曰。身在言地。不敢隱默以欺君。當危亂之朝。斥姦邪格君非。面折廷爭。略不顧避。人或止之曰。非保身之道。公曰。人臣以直道事君。不合則去。豈可自謀其身。而陷君於不義乎。衆皆愧服。公以興起斯文爲己任。雖在流竄中。訓迪不倦。眉巖柳公希春。以湖南學問淵源皆出於公云。爲文如不經意。而人自不及。平生著述。大禍之後。夫人安氏盡投火中。不傳於世。惜哉。寒岡先生鄭公逑以先生忠孝兩盡。體用兼備。實可師表百世。血食千秋。於是密陽,咸安士林立祠以祀之。咸郡士友謂任道鄕之後生。或嘗聞夫子遺風。合辭徵銘。承乏不獲讓。而爲之敍云。銘曰。

噫嘻先生。河嶽之靈。日星之精。佔畢之門。一蠹寒暄。師友淵源。孝竭供職。忠盡朴直。搢紳柯則。惇倫立紀。講道明理。蓋其能事。牧疲而肥。擊猾以威。霜凜陽暉。憸邪仄目。鬼蜮肆毒。構禍斯酷。震轟掖垣。虹揷庭盆。冥感其冤。天定勝人。盛名不淪。公議鼎新。咸密揭虔。士執豆籩。崇報永年。刀音小谷。寔公舊卜。尙留餘馥。闡幽垂光。刻此銘章。過者聞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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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集/교감표점원문] 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 【幷序】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迂拙子朴先生諱漢柱,字天支,密陽府人,訓導諱敦仁之子也。天順己卯,生于豐角縣車山村第。生有異質,穎悟莊重,出語驚人。六七歲,能屬文,有大人特立軒天地之句,聞者奇之。

初學於生員高克敬,高異其言貌氣象,必冠帶而後敎之。比長,慷慨有大志,以古人自期。與寒暄遊佔畢門,受《尙書》,佔畢公手抽《小學》書與之,因以詩勖之。先生篤信力行,博聞彊記,文章氣節,稱斗南一人。

成化癸卯,中司馬兩試,乙巳,登甲科。七更歲,拜正言。成廟銳意文治,先生自謂知遇,知無不言。嘗入經筵,上曰:“辭吐俚正言,至矣。” 蓋先生不避俚語,而言多讜直,故嘉之也。

乞養出宰昌寧,臨民御吏,皆有條法。精密嚴恕,務盡道理,一以洗冤澤物爲心。屛徒從暗行閭里,探得民情,而人不知之。尤勤於興學明敎,選邑中子弟之秀者,與之講論修己治人敦本善俗之道。春秋行養老禮,因訪疾苦,昏喪賙濟之,使不失時。凡有令,必前期布告,無慢令致期之撓,閭里晏然。發姦如神、剖決如流,吏慴民懷,道內冤訟之不得其情者,多萃于縣。以治行第一,賜表裏加資。

不煩民力構廨館,名曰“秋月軒”,蓋取朱子《感興詩》中語也。是時鄭一蠹作光風樓於安陰,李慵軒起聞韶樓於義城識者謂觀此三構,足以知三賢之心云。

燕山三年,爲獻納,極諫遊宴失政等事。燕山怒,至宣賜食物,有朴某勿給之敎,而猶盡言不諱。又箚論盧思愼弄權之漸、任士洪姦邪之狀,卒爲二兇所陷,以及於禍。時主心日荒,國事日非,知不可有爲。遂爲親求外,得平海,旋以邑遠親老換醴泉。始至,郡人迎喜曰:“是前日昌寧賢太守也。”

未幾,搢紳禍起,以佔畢門徒,碧潼郡付處,是戊午七月也。庚申夏,量移樂安。甲子史獄再起,被逮而去,過金駿孫謫所,金要於路微諷云,老母在,須更思量,蓋欲使自明也。先生不應,金憮然而別曰:“朴某之舍生守正,人不可及矣。”

先生臨刑,神色不亂,五月十二日也。是日,晝晦大雨,烈風雷霆。家人聞訃設奠,雷震長虹一脚揷於庭中水斛,見者異之。分配諸子,鳳巨濟,鸞樂安,唯鵬、鴻以幼免。葬于咸安郡西蓬山東麓。丙寅,中廟靖國,庚午,贈都承旨,錄用子孫。

先生自少篤好性理之學,沈潛經傳,孜孜不輟。諸子百家、《山經》、地誌,亦皆探討以資窮理。方嚴勁特,英毅果確,語默動靜,一遵繩墨,雖遇倉卒,不變常度。其事親也,篤於愛敬,每日鷄鳴,省問如禮,退而讀書,正坐終晷,雖家人未見懈容。淸介絶俗,家無甔石之貯,而處之裕如。

訓導公性嚴有法度,誨以孝弟忠信之方,出入行止,不敢自由。嘗宰昌寧縣,距親庭半日程,奉養之物,常有定品。或於初昏單騎來覲,遲明卽還,而民不之知。

方在諫院,訓導公取見章奏,且聞進說太直,戒之曰:“吾甚懼焉,後勿如是。” 對曰:“身在言地,不敢隱默以欺君。” 當危亂之朝,斥姦邪格君非,面折廷爭,略不顧避。人或止之曰:“非保身之道。” 公曰:“人臣以直道事君,不合則去。豈可自謀其身,而陷君於不義乎?” 衆皆愧服。

公以興起斯文爲己任,雖在流竄中,訓迪不倦。眉巖柳公希春,以湖南學問淵源皆出於公云。爲文如不經意,而人自不及。平生著述,大禍之後,夫人安氏盡投火中,不傳於世,惜哉!

寒岡先生 鄭公逑以先生忠孝兩盡、體用兼備,實可師表百世,血食千秋。於是密陽、咸安士林立祠以祀之。咸郡士友謂:“任道鄕之後生,或嘗聞夫子遺風。” 合辭徵銘。承乏不獲讓,而爲之敍云。銘曰:

噫嘻先生,河嶽之靈,日星之精。

佔畢之門,一蠹 、寒暄,師友淵源。

孝竭供職,忠盡朴直,搢紳柯則。

惇倫立紀,講道明理,蓋其能事。

牧疲而肥,擊猾以威,霜凜陽暉。

憸邪仄目,鬼蜮肆毒,構禍斯酷。

震轟掖垣,虹揷庭盆,冥感其冤。

天定勝人,盛名不淪,公議鼎新。

咸、密揭虔,士執豆籩,崇報永年。

刀音小谷,寔公舊卜,尙留餘馥。

闡幽垂光,刻此銘章,過者聞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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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졸자 박 선생1) 여표비명 병서 〔迂拙子朴先生閭表碑銘 幷序〕


오졸자(迂拙子) 박 선생의 이름은 한주(漢柱)이고, 자는 천지(天支)이며, 밀양부(密陽府) 사람으로 훈도 박돈인(朴敦仁)의 아들이다. 천순(天順)2) 기묘년(1459, 세조5)에 풍각현(豊角縣) 차산촌(車山村)3)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서 총명하고 의젓하였고,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예닐곱 살에는 시문을 지을 줄 알아서 ‘대인의 우뚝한 기개가 천지에 드높도다.〔大人特立軒天地〕’라는 시구를 읊으니, 듣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선생은 처음 생원 고극경(高克敬)에게 배웠는데, 고 생원이 그의 말하는 모습과 기상을 고상하고 기특하게 여겨서 반드시 관디(冠帶)를 한 뒤에 가르쳤다. 자라서는 강개하게 큰 뜻을 품어서 옛 성현과 같이 되기를 다짐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점필재가 손수 《소학(小學)》을 꺼내 주고 시로써 권면하였다.4) 선생은 독실하게 믿고 힘껏 실천하였으며 널리 듣고 잘 기억하여 문장과 기절(氣節)이 ‘천하의 제일인’5) 이라고 일컬어졌다.

성화(成化)6) 계묘년(1483, 성종14)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7) 을사년(1485, 성종16)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7년 뒤(1491, 성종22)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성종이 문치(文治)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는데, 선생이 스스로 지우(知遇)를 입었다고 여겨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경연에 들어갔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투리 쓰는 정언이 왔구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선생이 사투리를 피하지 않고 강직한 말을 많이 했으므로 가상히 여긴 것이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나아가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거느림에 모두 법도가 있었다. 자상하고 꼼꼼하고 엄격하면서도 너그럽게 하여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한결같이 억울함을 씻어주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자기 마음을 삼았다. 따르는 이들을 물리고 몰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실정을 살폈는데,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특히 학교를 세우고 교화를 밝히는 일에 힘써 고을의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와 근본을 도타이 하고 풍속을 착하게 하는 일을 함께 강론하였다. 봄가을로 노인을 봉양하는 예를 시행하여 아픈 데나 괴로운 일은 없는지 물어보았고, 혼사와 상사(喪事)를 두루 진휼하여 제 때를 잃지 않도록 하였다. 무릇 명을 내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일보다 앞서서 공지하여 명령을 느슨하게 해놓고 기한을 각박하게 하여8) 괴롭히지 않으니, 마을이 편안하였다. 귀신처럼 간악한 정상을 적발하고 흐르는 물처럼 명쾌하게 판결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흠모하였으며, 도내에서 실정을 얻지 못한 억울한 송사가 창녕현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다스린 행적이 제일이라 하여, 관복의 안팎감〔表裏〕을 하사하고 품계를 올려주었다.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고 공관을 지어서 그 이름을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했으니, 이는 주자의 〈감흥시(感興詩)〉 중에 있는 말을 취한 것이다.9) 이때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있으면서 광풍루(光風樓)10)를 짓고, 용헌(慵軒) 이종준(李宗準)11)이 의성 현감(義城縣監)으로 있으면서 문소루(聞韶樓)12)를 세웠는데, 식견 있는 자들은 “이 세 건물을 보면 세 현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연산군 3년(1497)에 헌납(獻納)이 되어 연회를 즐기면서 실정한 등의 일에 대해 극력 간언하였다. 연산군이 노하여 음식물을 내려줄 때 ‘박 아무개에게는 주지 말라’라고 교시하였으나 그래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노사신(盧思愼)13)이 권력을 농단하는 조짐과 임사홍(任士洪)14)의 간사한 정상을 논단하였는데, 마침내 두 간흉의 모함에 빠져서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임금의 마음은 날로 황음(荒淫)해지고 국사는 날로 잘못되어 어떻게 해 볼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부모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평해 군수(平海郡守)가 되었다가, 곧 고을이 멀고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갔다. 처음 부임하여 이르자, 군민들이 환영하며 말하기를 “이 분은 예전 창녕의 어진 태수이시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점필재의 문도라는 이유로 벽동군(碧潼郡)15)에 부처(付處)되었으니, 이때가 무오년(1498, 연산군4) 7월이다. 경신년(1500, 연산군6) 여름에 낙안(樂安)16)으로 양이(量移)17)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사옥(史獄)이 다시 일어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김준손(金駿孫)18)의 유배지를 지나게 되었다. 김준손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넌지시 풍간하기를 “노모가 계시니 부디 잘 생각하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에게 스스로 입장을 해명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선생이 응답을 하지 않자, 김준손이 무안해 하면서 작별하여 말하기를 “박 아무개가 삶을 버리고 바름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사형에 임해서도 기색이 어지럽지 않았으니, 5월 12일이었다. 이날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해지더니 큰 비가 쏟아지고 사나운 바람에 뇌성벽력이 쳤다. 집안사람들이 부음을 듣고 제수를 차리는데, 천둥이 치고 긴 무지개 한 줄기가 뜰 가운데 물항아리에 내리꽂히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여러 아들들도 나누어 유배를 갔는데, 박봉(朴鳳)은 거제도로 가고 박란(朴鸞)은 낙안으로 갔으며, 박붕(朴鵬)과 박홍(朴鴻)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면하였다. 함안군 서쪽 봉산(蓬山)의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병인년(1506, 중종1)에 중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경오년(1510, 중종5)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하고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을 독실하게 좋아하였는데, 경전(經傳)에 침잠하여 쉼 없이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산해경(山海經)》, 지지(地誌)들도 모두 탐구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고 굳세고 우뚝하며 영특하고 강직하고 과단성 있고 확고하였으며, 말하고 행동하는 데 한결같이 예법을 준수하여 비록 급작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부모님을 섬길 때는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여 매일 닭이 울면 예에 따라 문안을 드리고, 물러나서는 종일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니 집안사람들이라도 그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청렴한 절개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집에 한 섬의 양식도 저장해 놓은 것이 없는데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부친 훈도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효제충신(孝弟忠信)의 도로써 가르치니 출입하고 행동하는 데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있을 적에 본가와 반나절 거리였는데, 봉양하는 물건은 항상 일정한 품목이 있었다. 때로는 해 질 무렵에 혼자 말을 타고 가서 찾아뵙고 새벽이 되면 곧 돌아왔는데, 백성들은 그런 줄을 알지 못하였다.

사간원에 있을 적에 부친 훈도공이 그의 장주(章奏)를 보고, 또 진언(進言)이 너무 강직하다는 얘기를 듣고서 경계하기를 “나는 대단히 두려우니 이후에는 이와 같이 하지 말거라.”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제가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할 말을 숨겨서 임금을 속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위태롭고 어지러운 조정에 있으면서 간사한 자들을 배척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았는데, 임금 앞에서 직간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피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보신(保身)하는 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하 된 자는 곧은 도로 임금을 섬기다가 부합하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오. 어찌 내 한 몸을 보전하자고 임금을 의롭지 못한 지경에 빠뜨릴 수 있겠소?”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공은 유학을 진작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서 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에도 후진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9)은 “호남(湖南) 학문의 연원은 모두 공에게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문장을 짓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그의 문장에 미치지 못하였다. 평생의 저술은 큰 화를 당한 뒤에 부인 안씨가 모두 불태워서 세상에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한강(寒岡) 정구(鄭逑)20) 선생이 “선생은 충과 효가 모두 극진하고 체(體)와 용(用)이 겸비된 분으로 진실로 백세의 사표(師表)라고 할 수 있으니, 천년토록 제사21)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밀양과 함안의 사림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함안의 사우들이 “내가 선생과 같은 고을의 후생22)이고, 일찍이 선생의 풍성(風聲)을 들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입을 모아 명(銘)을 청하였다. 대신 할 사람이 없는 데다가 사양할 수 없어 그를 위해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선생은 / 噫嘻先生
산하의 영령함과 / 河嶽之靈
해와 별의 정기를 타고 나셨네 / 日星之精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우고 / 佔畢之門
일두ㆍ한훤당과 어울렸으니 / 一蠹寒暄
이것이 사우의 연원이네 / 師友淵源
효도에는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 / 孝竭供職
충성에는 박실함과 정직을 다했으니 / 忠盡朴直
사대부들의 전범23)이 되었네 / 搢紳柯則
인륜을 돈독히 하고 기강을 세우며 / 惇倫立紀
도를 강구하고 이치를 밝혔으니 / 講道明理
이것이 선생의 장점이라네 / 蓋其能事
고단한 백성들 길러 살지게 하고 / 牧疲而肥
간활한 자들 위엄으로 배격하니 / 擊猾以威
추상처럼 늠름하고 햇볕처럼 따뜻했네 / 霜凜陽暉
간사한 자들이 곁눈질하고 / 憸邪仄目
흉악한 자들이 독을 내뿜어 / 鬼蜮肆毒
참혹한 화변을 만들었네 / 構禍斯酷
대궐 문에 벼락이 떨어지고24) / 震轟掖垣
무지개가 뜰 안 물동이에 꽂히니25) / 虹揷庭盆
혼령이 원통함에 감응한 것이네 / 冥感其冤
하늘의 뜻 정해지면 사람을 이기니26) / 天定勝人
거룩한 이름 없어지지 않아서 / 盛名不淪
공론이 새롭게 정해졌네 / 公議鼎新
함안과 밀양에 사당을 세워 / 咸密揭虔
사림이 제사를 받들어 / 士執豆籩
영원토록 받들어 보답하네 / 崇報永年
도움실27)의 작은 골짜기 / 刀音小谷
이곳이 공의 옛 집인데 / 寔公舊卜
아직 그 향기가 감돌고 있네 / 尙留餘馥
숨은 덕 드러내 빛을 드리우고자 / 闡幽垂光
이 명문을 새기노니 / 刻此銘章
지나는 이들 그 향기를 맡으리 / 過者聞香

승훈랑(承訓郞) 왕자사부(王子師傅) 금라(金羅)28) 후인 조임도가 짓다.



1) 박 선생 : 박한주(朴漢柱, 1459~1504)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迂拙齋)이다. 아버지는 박돈인(朴敦仁)이다. 1485년(성종16)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했다는 명목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처형당했다. 《오졸재실기(迂拙齋實記)》가 있다.
2) 천순(天順) :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457~1464년이다.
3) 차산촌(車山村) : 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이다.
4) 시로써 권면하였다 : 《점필재시집》에는 이 시가 김굉필과 곽승화(郭承華)에게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看君詩語玉生煙, 陳榻從今不要懸. 莫把殷盤窮詰屈, 須知方寸淡天淵.” 《佔畢齋詩集 卷9 答金郭二秀才》
5) 천하의 제일인 : 원문의 ‘두남(斗南)’은 북두칠성의 남쪽, 즉 천하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북두 이남에서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다.〔北斗以南 一人而已〕”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6) 성화(成化) :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1465~1487년이다.
7)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 생원시는 강혼(姜渾) 방에 2등 17위로, 진사는 이위(李瑋) 방에 2등 13위로 합격했다.
8) 명령을 …… 하여 : 공자(孔子)가 말한 네 가지 악행 중 ‘적(賊)’에 해당한다. 자장(子張)이 사악(四惡)에 대해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미리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학(虐)이라 하고, 미리 경계하지 않고 공을 이루도록 책망하는 것을 포(暴)라 하고, 명령을 태만히 하고 기일을 각박하게 하는 것을 적(賊)이라 하고, 똑같이 남에게 주면서도 출납할 때에 인색하게 구는 것을 유사(有司)라고 한다.〔子曰:不敎而殺, 謂之虐, 不戒視成, 謂之暴, 慢令致期, 謂之賊,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라고 하였다. 《論語 堯曰》
9) 감흥시(感興詩) …… 것이다 : 〈재거감흥(齋居感興)〉의 열 번째 시에서 뜻을 취하였는데,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천 년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차가운 물에 비친 가을달이지. 공자는 무얼 스승 삼으셨던가? 다 손질하여 성인 규범 전했다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魯叟何常師? 刪述存聖軌.〕” 《晦庵集 卷4 齋居感興》
10) 광풍루(光風樓) : 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누각이다. 1412년(태종12) 이안 현감(利安縣監) 전우(全遇)가 지었는데 당시에는 이름을 ‘선화루(宣化樓)’라고 하였다. 그 뒤 1425년(세종7)에 김홍의(金洪毅)가 지금 위치로 옮겨 세웠고, 1494년(성종25)에 현감이었던 정여창이 중수하여 이름을 ‘광풍루’로 고쳐 불렀다.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년(선조35)에 복원하고, 1605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 이종준(李宗準) : ?~149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변재(弁齋)ㆍ변헌(弁軒)ㆍ부휴자(浮休子)ㆍ상우당(尙友堂)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93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오사화 때 귀양가다가 역사(驛舍)에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를 써 붙인 죄로 사형되었다. 저술로 《용재유고》가 있다.
12) 문소루(聞韶樓) : 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 구봉산에 있는 누각이다.
13) 노사신(盧思愼) : 1427~1498.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맹재(葆盲齋)ㆍ천은당(天隱堂)이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노물재(盧物載)의 아들이다. 145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53년(단종 원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세조ㆍ성종의 총애를 받아 문치를 도왔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윤필상(尹弼商)ㆍ유자광(柳子光) 등이 주동이 되어 김일손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를 할 때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처지 때문에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 등이 옥사를 확대하려는 것을 극력 견제하여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옥(史獄)이 진행되는 도중인 같은 해 9월에 병으로 죽었다.
14) 임사홍(任士洪) : 1445~1506.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이의(而毅)이다. 좌찬성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로, 권력의 배경이 든든한 집안의 출신이다. 아들 임광재(任光載)와 임숭재(任崇載)도 각각 예종과 성종의 사위가 되어 왕실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했다. 1465년(세조11)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도승지,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해 사림파의 공격의 대상이 되는데, 1478년(성종9)에는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ㆍ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되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1498년(연산군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임희재(任熙載)도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ㆍ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때의 중신과 사림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특히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예서(楷書)에 능했다.
15) 벽동군(碧潼郡) : 평안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군이다.
16) 낙안(樂安) : 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지역이다.
17) 양이(量移) : 귀양 간 사람의 정상을 참작하여 조금 나은 지방으로 옮겨 주는 것이다.
18) 김준손(金駿孫) : 1454~1507.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형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백운(伯雲), 호는 동창(東窓)이다. 1472년(성종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86년(성종17) 병오(丙午)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벼슬은 홍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호남에 유배되어 있던 중에 이과(李顆)ㆍ유빈(柳濱) 등과 거병(擧兵)하여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추대하려고 서울에 격서(檄書)를 보냈는데 격서가 이르기 전에 반정(反正)이 되었다. 반정 후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연천군(燕川君)에 봉해졌다.
19) 유희춘(柳希春) : 1513~1577.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麟)이다. 처음 최산두(崔山斗)에게 배우고, 뒤에 김안국(金安國)을 사사하였다. 1538년(중종3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예조 참판,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1546년(명종 원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귀향했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종성으로 이배되었다. 이곳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황(李滉)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주자학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으며, 이 지방 유생들을 교육했다. 저술로 《미암집》, 《속몽구(續蒙求)》, 《속휘변(續諱辨)》, 《역대요록(歷代要錄)》, 《천해록(川海錄)》, 《헌근록(獻芹錄)》, 《주자어류천해(朱子語類箋解)》, 《강목고이(綱目考異)》, 《시서석의(詩書釋義)》, 《완심도(玩心圖)》 등이 있다.
20) 정구(鄭逑) : 1543~1620.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처음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과 이황에게 배웠다. 1608년(선조41)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경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저술로 《한강집》이 있다.
21) 제사 : 원문의 ‘혈식(血食)’은 제사에 올릴 제수(祭需)를 말한다. 고대에 희생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를 지낸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2) 선생과 …… 후생 : 박한주의 처가가 함안이어서 오래 우거하였다.
23) 전범 : 원문의 ‘가칙(柯則)’은 전범 또는 귀감이 됨을 이른다. 도끼로 도끼자루 감을 벨 때는 자기가 잡고 있는 도끼자루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는 말로, 《시경》 〈벌가(伐柯)〉에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리 있지 않도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24) 대궐 …… 떨어지고 : 1500년(연산군6) 여름에 비도 오지 않았건만 대궐 문 밖에서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변고가 있었다. 이 일로 박한주는 낙안(樂安)으로 양이(量移)되었다. 《迂拙齋實記 年譜 燕山君 6年條》
25) 무지개가 …… 꽂히니 : 1504년(연산군10) 박한주의 부음을 듣고 집안사람들이 제수를 차리는데 뇌성벽력이 일어나면서 긴 무지개가 뜰 가운데 물항아리에 내리꽂히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迂拙齋實記 年譜 燕山君 10年條》
26) 하늘의 …… 이기니 : 《사기(史記)》 권66 〈오자서열절(伍子胥列傳)〉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이 이를 인용하여 “人衆者勝天, 天定亦勝人.”이라고 시를 쓰면서 더욱 유명한 격언이 되었다.《蘇東坡詩集 卷45 用前韻再和孫志擧》
27) 도움실 : 함안에 있는 마을로, 광주 안씨(廣州安氏)의 집성촌이다. 박한주는 안효문(安孝文)의 딸과 혼인한 뒤로 쇠실〔牛谷〕과 도움실 마을에 우거하였다. 《咸州志》
28) 금라(金羅) : 현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의 옛이름이다.



◈간송집(澗松集)은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의 文集이다.
○조임도(趙任道) 1585년(宣祖 18) ~ 1664년(顯宗 5).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澗松), 초자는 치원(致遠),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門人. 곽재우(郭再祐), 정온(鄭蘊), 이후경(李厚慶), 문위(文緯), 허목(許穆) 등과 교유. 生六臣 조려(趙旅)의 5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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