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동광 제12호 > 自山詩話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2. 13:29
동광 제12호 > 自山詩話


잡지명: 동광 제12호
발행일: 1927년 04월 01일
기사제목: 自山詩話
필자: 안확(安廓)
기사형태: 문예평론



自山詩話

安廓

外篇

余의 詩話는 本外 2篇으로 傳別한 바 內篇은 古來 朝鮮語로 哦한 것을 말한 것이요 外篇은 漢字詩를 品論한 것으로서 通히 文學史의 閑珊을 지은 것이라.

外篇을 이미 3회나 발표햇섯서. 거긔는 詩의 本品만 보이고 何等의 批論을 키지 아니한 바로서 특별히 無言的의 評隲를 取코저 하엿더니 反히 讀者의 疑訝를 사기 쉬운듯 해. 고로 이번부터는 조곰식 品評을 걸까하노라.

自來 漢詩를 選集 한것은 東文選, 箕雅가튼 것이 잇고 詩話로는 破閑集, 東人詩話, 小華詩評 가튼 종류가 더러 잇서. 그러나 그는 모도 形의 예술에 아랑곳 되는 評이요 참 想에 비처서는 천년간에 하나도 업섯서. 혹시 有道者는 漢詩를 庾詞戱號인 無價値한 것으로 돌려 버렷서.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일천이백 종 文集 중에는 참 흥미잇는 작품도 잇서. 시대의 사상변화도 볼 수 잇고 東洋的 특징도 더러 잇서. 나는 이에 就하야 前人未發을 좀 개척코저 할 딴으로서 이를 지은 것이라.

전에도 詩想을 評한 이가 잇섯서. 僧의 詩格을 豆蕩㾗, 捨水滴, 蔬笋氣 3으로 諷諭한 것이니 이는 補閑集에 보이는 高麗時 尹于一氏의 말이라. 그러나<96> 이는 蘇東坡의 口氣를 숭내내어 諷刺的으로 한 말이요 정당한 詩話는 아니야.

詩는 着想이 위주됨을 모른 고로 李芝峰도 말하되 「文詞者, 止於一技, 雖工無益, 爲之亦可,不爲亦可」라 햇서. 月沙集에도 「文章者, 一技也, 而必專而後工」이라 햇서. 그러치 아니하면 詩를 도덕에 부틴 이도 잇스니 金宗直의 別洞集序, 馬麟淳의 樂齋集序 등의 云云이 그것이라. 其外에 李奎報의 柳子厚文質評 徐居正의 泰齋集序 張旅幹의 文說 가튼대는 사상을 비겨 말한 것도 잇스나 評에 잇서는 다 想을 主觀으로 꼰치 아니하엿더라.

詩形으로 보아도 팔천여책의 文集을 골라대면 漢詩格에 得한 것이라고는 8,9人의 詩集 밧게 업서. 그것은 何故오하면 朝鮮人은 본시 複音語를 사용함으로 單音語인 漢語의 聲律을 마치기 어려운 까달긴 듯 해. 고로 李宗準 慵齋遺稿에 말하되 「吾東方, 旣與中國, 語音殊異, 於其所謂樂府者不知, 引聲唱曲, 只分字之平側句之長短, 而協之而韻, 皆所謂以詩爲詞者, 捧心而顰其里祗見其醜陋耳, 是以, 文章巨公, 皆不敢强作, 非才之不逮也, 亦如使中國人, 若作鄭爪亭小唐雞之辭則, 必且使人撫掌絶縷矣...以此, 知人不可造次爲之, 雖未知樂府, 亦非我國文章之累也」라 햇서.

본래 漢詩의 聲調는 魏晋時代에 陸機, 潘岳 등이 對偶法을 내고 六朝의 沈約, 謝眺, 王融, 周顒 등이 4聲을 정한 후로<97> 언어의 口拍子가 미묘하게 조직된 것이니 其法은 一例를 들면 雙聲 疊韻등으로 母音 子音을 共同히 하고 牙舌 唇齒喉 5音을 딸아 旋律에 맛게 하는 것이라 이 法은 알기가 쉬운데 古人은 모두 領悟치 못햇서 지금이라도 漢詩家는 이 法을 學得함이 可하니 알고보면 어렵지 안은 것이라. 고로 象村集에도 「我朝人, 不得爲詞言者, 以爲, 聲音與中國異, 雖强爲之, 必不似余, 則以爲不然聲音出於自然, 非有中國外國之限, 言詞殊, 而押韻則同, 推一而可及」이라 햇서.

詩를 評함에는 一方으로 민족성을 參照함이 可해. 成三問의 夷齊廟詩에

寸草亦霑周雨露 愧君猶食首陽微

라 한 것은 일반으로 賞讚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立意가 초월한 듯하되 風格은 朝鮮人의 性味로서 넘우 曲盡하야 夷齊의 本志를 害함에 가까웟서. 朝鮮人은 中國人의 「採菊東離下 悠然見南山」가타 深邃한 神韻을 부리지 못하고 骨子的 取헤. 어찌 보면 便狹한 듯헤. 고로 申象村도 말하엿스되 「東方人, 氣稟褊淺, 少有取長, 卽自足故, 德業文章成就者, 少間有之, 皆不大」라 햇서. 그리하되 褊淺한 天性을 가진 것이 아니라 山谷에서 生長한 고로 民性이 山谷的으로 되엇서 朝鮮의 문명을 보아도 山谷에서 나서 山谷에서 자섯서. 外文化를 이용함도 亦然. 佛敎던지 儒敎던지 한번 수입하면 變化發達하지 안코<98> 고대로 膠守하야 썩혓서. 그런 성질이 잇는 고로 그 사상으로 나온 詩는 모도 一便으로 몰아처 나갈 뿐. 不然이면 남의 것을 模倣할 뿐. 그럼으로 나는 前日 白頭山에서 口號로

一上咸山望八道 水潺山疊間間家

萬年此地人無數 活達男兒問幾家

냐 한일도 잇섯노라.

民族性 외에는 作者의 개성 時代相 등으로 꼰을 수 밧게 업서. 고로 제법 史的 가치를 허락할 者는 崔孤雲, 李奎報, 元天錫, 金時習 4,5人을 지목하기 可헤.

보통 挹萃軒時를 絶唱이라 하나 천재는 천재로되 兒態가 흘러. 又 鄭圃隱을 雄健타 하나 그 豪氣가 정치의 맛을 더하야 고만 卑한 기색이 잇스니 入明國京城詩에

內入日午忽傳宣 走上龍堀向御筵.

聖訓近聞天咫尺 寬恩遠及海東邊.

退來不覺流雙涕 感激唯知祝萬年.

從此三韓蒙帝力 耕田鑿井摠安眠.

이란 것은 참 卑屈性이 歷歷해.

益齋稼亭牧隱은 一時의 壯한 시인이라 하나 그저 詩人席에 참여할 뿐. 元天錫은 實相 高麗末年의 대표적이니 그 耘谷集에

三敎宗風本不差 較非爭是亂如蛙.

一般是性俱無礙 何釋何儒何道耶.

아 한것은 思想史의 魂이라. 數千年來 三敎統一은 오직 耘谷의 提唱이요 또 高麗末에 三敎相爭은 이 詩로 可慈할걸.<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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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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