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성종실록] 《유양잡조》 등의 책의 괴탄과 불경함을 아뢰는 부제학 김심 등의 차자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6:33

성종실록 285권, 성종 24년 12월 28일 무자 3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유양잡조》 등의 책의 괴탄과 불경함을 아뢰는 부제학 김심 등의 차자


○弘文館副提學金諶等上箚子曰:

伏聞, 頃者李克墩爲慶尙監司、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唐宋詩話》《遺山樂府》《破閑》《補閑集》《太平通載》等書以獻, 旣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破閑》《補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替)〔潛〕 心經史, 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得失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知《雜俎》《詩話》等書爲怪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進於上者, 知殿下留意詩學, 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者衆, 克墩尙爾, 況媒進者乎? 若此怪誕戲劇之書, 殿下當如淫聲美色而遠之, 不宜爲內府秘藏, 以資乙夜之覽。 請將前項諸書, 出付外藏, 以益聖上養心之功, 以杜人臣獻諛之路。

傳曰: "如爾等之言, 以《酉陽雜俎》等書爲怪誕不經, 則國風、《左傳》所載, 盡皆純正歟? 近來印頒《事文類聚》亦不載如此事乎? 若曰人君不宜觀此等書, 則當只讀經書乎? 克墩識理大臣, 豈知其不可而爲之哉? 前者柳輊爲慶尙監司時, 書十漸疏于屛進之, 議者以爲阿諛, 今所言亦如此也。 予前日命汝等略註此書, 必汝等憚於註解而有是言也, 旣知其不可, 則其初何不云爾?"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심(金諶)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이극돈(李克墩)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고, 이종준(李宗準)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의 책을 간행(刊行)하여 바치니, 이미 내부(內府)1841) 에 간직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송시화(唐宋詩話)》·《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 등의 책을 내려 신 등으로 하여금 역대(歷代)의 연호(年號)와 인물(人物)의 출처(出處)를 대략 주해(註解)하여 바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제왕(帝王)의 학문(學文)은 마땅히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어 수신 제가(修身齊家)하고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요점과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의 자취를 강구(講究)할 뿐이고, 이외에는 모두 치도(治道)하는 데 무익(無益)하고 성학(聖學)에 방해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극돈 등이 어찌 《유양잡조》《당송시화》 등의 책이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말과 부화(浮華)하고 희롱[戲劇]하는 말로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진상(進上)하는 것입니까? 이는 전하께서 시학(詩學)에 유의(留意)하심을 알고 〈그 의중(意中)을〉 맞힌 것입니다. 인주(人主)가 숭상(崇尙)하는 바는 이를 따르는 자들이 많으니, 이극돈(李克墩)이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매개(媒介)를 인연하여 진출(進出)하려는 자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괴탄(怪誕)한 희극(戲劇)의 책은 전하께서 음성(淫聲)·미색(美色)과 같이 멀리해야 마땅할 것이니, 내부(內府)에 비장(秘藏)하게 하여 을야지람(乙夜之覽)1842) 을 돕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위의 여러 책을 외방(外方)에 내어 보내게 하여, 성상(聖上)께서 심성(心性)을 기르는 공력(功力)에 보탬이 되게 하시고, 인신(人臣)들이 아첨하는 길을 막으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그대들이 말한 바와 같이 《유양잡조》 등의 책이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하다면, 국풍(國風)1843) 과 《좌전(左傳)》에 실린 것만 모두 순정(純正)하다는 것인가? 근래에 인쇄하여 반포(頒布)한 《사문유취(事文類聚)》 또한 이와 같은 일들이 실려 있지 아니한가? 만약 인군(人君)이 이러한 책들을 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단지 경서(經書)만 읽어야 마땅하다는 것인가? 이극돈(李克墩)은 이치(理致)를 아는 대신(大臣)인데, 어떻게 그 불가(不可)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였겠는가? 지난번에 유지(柳輊)가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때 십점소(十漸疏)1844) 를 병풍(屛風)에 써서 바치니, 의논하는 자들이 아첨[阿諛]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말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내가 전일(前日)에 그대들에게 이 책들을 대강 주해(註解)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대들은 반드시 주해하는 것을 꺼려하여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이다. 이미 불가함을 알았다면 애초에 어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285권 19장 B면 【국편영인본】 12책 45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출판-서책(書冊)

[註 1841] 내부(內府) : 조선조 때 궁중(宮中)의 재화(財貨)의 간직과 복식(服飾)·포진(舖陳)·등촉(燈燭)의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 또는 그 창고.
[註 1842] 을야지람(乙夜之覽) : 임금이 정무(政務)를 마치고 취침하기 전 열 시 경에 독서함을 이름.
[註 1843] 국풍(國風) : 《시경(詩經)》의 편명.
[註 1844] 십점소(十漸疏) :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올린 열 가지의 경계. 군주(君主)가 소홀히 하면 작은 일이 점점 커져 큰 화(禍)가 된다는 일로서, 검소(儉素)하고 덕음(德音)을 듣는 것 등 열 가지 일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2028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