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충민공◇이명민

[단종실록] 창덕궁 역부(役夫)로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생기다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4:29
단종실록 7권, 단종 1년 9월 5일 무오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창덕궁 역부(役夫)로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생기다


○戊午/昌德宮役夫, 有餓死于道者。 初, 文宗昇遐, 宦寺及大臣, 以魯山幼沖, 不宜仍御舊宮。 皇甫仁金宗瑞倡議, 以重修昌德宮爲名, 大興工作, 實營己私。 昌德宮棟宇尙牢, 猶且張皇不已, 經年未就, 至役近道船軍。 繕工副正李命敏掌其事, 石、木諸工, 皆屬焉。 命敏阿意, 濫役丁夫, 以火繼晷, 盛寒猶不廢, 人不堪其苦, 餓莩相望。 兵曹判書鄭麟趾憤之, 請停營繕, 以紓民力, 不從。 麟趾固執愈請, 怒, 卽以腹心趙克寬麟趾。 一日韓明澮命敏於役所, 値世祖使請梓人。 命敏答曰: "工役方殷, 未敢聞命。" 明澮戲曰: "汝爲安平武溪精舍, 又構淡淡亭龍山江上。 又爲金相營建別室, 輸材運瓦, 結構塗墁, 曾不爲難。 等是王子爾, 獨於首陽, 何惜一匠?" 命敏良久, 乃曰: "汝焉得知? 安平, 一國所仰, 寧可不然? 若首陽, 雖不從所命, 其奈吾何?" 命敏素無異能, 年過四十, 始除繕工直長。 其壻父閔伸爲繕工提調, 悶其老, 令督崇禮門之役, 以苛虐能幹聞。 自是, 凡營繕, 悉令命敏掌之, 其工人、材瓦應用雜物, 不由關轄, 直稟提調, 盡輸所在役處, 該司官吏, 莫敢牴牾, 本監所儲, 爲之一空。 凡移帖諸司, 自署其尾曰都廳, 以自別焉, 役夫目曰李都廳。 時, 權貴之私營家室者, 有求輒應。 由是人皆德之, 稱譽于朝。 歷踐司憲持平、戶曹正郞, 一役甫畢, 輒加一級, 數年之間, 驟至副正。 媒進之徒, 爭慕其所爲焉。


창덕궁(昌德宮) 역부(役夫)로 길에서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 처음에 문종이 승하하자, 환시(宦寺)와 대신들은, 노산군(魯山君)이 어린 까닭으로 구궁(舊宮)에 그대로 있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창의(倡議)하여 창덕궁을 중수한다는 명분(名分)으로 크게 공사를 일으켰으나, 실상은 자기들의 사저(私邸)를 영조(營造)하였다. 창덕궁의 동우(棟宇)744) 가 아직 튼튼한데도 공사를 장황하게 하여 그치지 않아서 해를 지나도 이루지 못하고 근도(近道)의 선군(船軍)까지 부역시켰다. 선공 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이 그 일을 맡았는데 여러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 모두 거기에 속(屬)하였다. 이명민이 아첨하는 뜻으로 정부(丁夫)를 함부로 부려서 성급히 밤에 낮일을 계속하여 심한 추위에도 폐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괴로음을 견디지 못하여 굶어서 죽는 것이 연달았다. 병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분하게 여겨, 영선(營繕)을 정지하고 민력(民力)을 덜기를 청하였으나, 황보인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정인지가 고집하여 더욱 청하니, 황보인이 노하여 곧 그 심복(心腹)인 조극관(趙克寬)으로 정인지를 대신하게 하였다. 하루는 한명회(韓明澮)이명민을 역소(役所)에서 보았는데, 마침 세조(世祖)가 사람을 지켜 재인(梓人)745) 을 청하니, 이명민이 답하기를,

"공역(工役)이 바야흐로 많아서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가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을 위하여 별실(別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는데,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와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명민은 본디 달리 능함이 없고 나이가 40이 넘어서 비로소 선공 직장(繕工直長)에 제수되었는데, 그 사위의 아비 민신(閔伸)이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그 늙은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숭례문(崇禮門)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까다롭고 사납고 능간(能幹)함으로써 소문이 나서 이로부터 모든 영선(營繕)은 다 이명민에게 맡게 하였다. 그 공인(工人) 재와(材瓦)와 쓰이는 잡물(雜物)은 그 관할(關轄)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제조(提調)에게 품(稟)하여 모두 현장의 역처(役處)로 운반하였으나, 해사(該司)의 관리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하여 본감(本監)746) 에 저장한 것이 다 없어졌다. 무릇 제사(諸司)에 이첩(移帖)할 때에 그 끝에 자서(自署)하기를, ‘도청(都廳)’이라고 써서 스스로 구별하니, 역부(役夫)들이 지목하기를, ‘이 도청(李都廳)’이라고 하였다. 이때 권귀(權貴)들이 사사로이 집을 짓는 자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문득 응낙해 주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덕을 보았다고 하여 조정에서 칭찬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차례로 지냈고, 한 역사(役事)를 마치자마자 문득 1급(級)을 더하여 몇 해 사이에 갑자기 부정(副正)에 이르니, 벼슬에 나아가기를 꾀하는 무리들이 그 하는 바를 다투어 부러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8장 A면 【국편영인본】 6책 612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건설-건축(建築)

[註 744] 동우(棟宇) : 집의 마룻대와 추녀 끝.
[註 745] 재인(梓人) : 목수.
[註 746] 본감(本監) : 선공감(繕工監).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05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