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충민공◇이명민

[단종실록] 한명회가 세조를 배알하여 안평 대군이 불궤를 도모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4:26

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21일 무인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한명회가 세조를 배알하여 안평 대군이 불궤를 도모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初韓明澮世祖, 世祖一見如舊, 因曰: "歷代運祚, 或長或短, 雖有不齊, 然皆由末葉之君, 失德亂政, 任用非人, 民墜塗炭, 天怒民怨, 然後乃至滅亡。 惟我國家創業, 規模宏遠, 貽謀裕後之道, 靡所不至。 且列聖深仁厚澤, 洽于民心, 而況主上春秋雖少, 已有大度, 如能夾輔, 足以守成。 第恨大臣憸邪, 無可托孤者, 反懷二心, 以負先王付托之意。 曩見權擥, 知君有志斯世, 請爲我籌之。" 明澮謝曰: "僕本庸愚, 何能有所謀畫, 以副所命? 歷觀往古國有幼主, 則必憸人秉政, 憸人秉政, 則群邪影附, 不虞之禍, 恒由是作。 時有忠義之臣起, 而反正, 然後其屯乃亨, 否泰相承, 天道之自然也。 安平交結大臣, 將謀不軌, 路人所知, 然不能迹彼反情, 暴彼逆謀, 雖卽擧義, 恐亦難成。" 於是, 令邸奴趙得琳等, 交結奴, 及群小跡之, 皇甫仁以微服往來瑢妾家, 又金宗瑞鄭苯許詡閔伸李穰趙克寬鄭孝全鄭孝康夜數宴飮, 白玉帶, 報以黃金沈香帶, 又贈宗瑞犀帶各一腰, 珍玩、書畫, 分遺諸人。 明澮又曰: "趙藩, 之腹心也, 僕素知之甚輕淺, 若與語, 情狀可得矣。" 遂數往來, 以致慇懃, 感之, 傾心輸寫, 因謂曰: "子知安平之爲人乎? 風儀才美, 不須言也。 至如寬仁大度, 愛人下士, 得衆懽心, 以才若德, 豈久在人下者? 幸子一拜, 當爲子先容。" 悉出所遺書畫、器玩示之, 語多誇詡。 明澮色喜之, 因問所與圖事者, 曰: "已(大與)〔與大〕 臣輩謀之, 吾與判事, 司武庫兵仗, 不難致也。 且所管別軍與凡匠人, 不下數百, 皆在掌握, 李命敏多領役夫, 亦可得千人, 以此而往, 何事不濟?" 明澮佯欲依附, 益自驕訰, 盡陳無遺。 明澮問: "大臣爲誰?" 曰: "三公及李二相, 吏、兵曹判書皆善安平, 情同骨肉, 死生以之。" "判事爲誰?" 曰: "尹處恭也。" 又曰: "不出數旬, 當有大慶, 子可傍觀。" 明澮嘗夜往世祖邸, 見騎士十餘人, 自邸前馳來, 意謂巡卒, 伏橋下以竢, 審視之, 乃等群小來也。 翼日明澮言: "昨詣君家, 値君不在, 問家僮, 則曰: ‘往安平第。’ 卽遣人尋之不見, 未知定在何處。" 良久乃曰: "安平率吾輩, 進首陽第, 夜深故還爾。" 明澮曰: "首陽若知安平君在門, 雖三夜, 何不出見?" 微笑曰: "那知許事? 徐觀其變。" 誠寧大君後, 蒸於誠寧成氏, 成氏家, 一日權訔皇甫氏於其家, 遣成氏誠寧故家, 成氏異之, 使人覘之, 則妻昵處, 妻衣裳等物, 如是者屢矣。 又親往家, 夜宴邀妻父, 亦往焉, 自後贈賂交厚, 數乘夜往來, 遂爲黨。 然心猶未安, 與宗瑞往山陵而還, 晝飯川邊, 謂宗瑞曰: "吾等位極人臣, 年已老矣, 更有何求? 安死席上, 不亦可乎?" 宗瑞、瞪目叱之曰: "旣已定矣, 何云云也?" 宗瑞等自稱之麾下, 以爲都體察使, 爲吏曹判書, 克寬爲兵曹判書, 趙順生爲司僕提調, 孝康爲兵曹知事, 處恭爲軍器判事, 爲軍器錄事, 李澄玉咸吉道都節制使, 鄭而漢平安道觀察使, 之羽翼盤據中外樞要者, 不可勝記。 常稱爲上典, 或長跪於庭, 嘗謂曰: "今上幼而多病, 雖長未必賢也, 上典若爲君, 則允協物議, 吾等之意, 常在於是。"


처음에 한명회(韓明澮)세조에게 배알하니, 세조가 한번 보고 옛 친구와 같이 여겼다. 인하여 말하기를,

"역대(歷代)의 왕조(王朝)의 운수는 혹은 길기도 혹은 짧기도 하여 비록 고르지는 아니하지만, 그러나 모두 말엽의 임금이 덕을 잃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며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임용함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도탄(塗炭)에 떨어져 하늘이 노(怒)하고 백성들이 원망한 연후에 곧 멸망(滅亡)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오직 우리 국가는 창업(創業)의 규모가 넓고 먼데다, 후세 사람을 유복(裕福)되게 하는 이모(貽謀)180) 의 도리도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고, 또 열성(列聖)의 깊고 인후(仁厚)181) 한 은택이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하며, 더욱 주상께서 나이는 비록 어리다고 하지만 이미 큰 도량이 있으니, 만약 잘 보좌(輔佐)만 한다면 족히 수성(守成)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신이 간사(奸邪)하여 어린 임금[孤者]을 부탁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이심(二心)을 품어 선왕(先王)의 부탁한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지난번에 권남(權擥)을 보고, 그대가 이 세상에 뜻이 있음을 알았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주책(籌策)182) 을 하라."

하니, 한명회가 사례하기를,

"저는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으니, 어찌 능히 모획(謀畫)하는 바가 있어서 반드시 부응하겠습니까? 두루 오랜 옛날의 일을 보건대,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았고,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여러 사특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붙어서 불우(不虞)의 화(禍)가 항상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그때 충의(忠義)로운 신하가 있어서 일어나 반정(反正)을 한 뒤에야 그 어려움이 곧 형통해지니, 부운(否運)183) 이 서로 이어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자연(自然)이라고 하겠습니다.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장차 불궤(不軌)184) 를 도모하려 하는 것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아는 것이나, 그러나 그의 배반하는 정상을 뒤밟아 그 역모를 드러낼 수 없으니, 비록 즉시 거의(擧義)하려고 하여도 또한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이에 저택의 종[奴] 조득림(趙得琳)으로 하여금 이용(李瑢)의 종 및 여러 소인들과 교제를 맺게 하여 행적을 밟으니, 황보인은 미복(微服)으로 이용의 첩의 집을 왕래하고, 또 이용김종서·정분·허후·민신(閔伸)·이양(李穰)·조극관(趙克寬)·정효전(鄭孝全)·정효강(鄭孝康)과 더불어 밤에 자주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셨다. 황보인이용에게 백옥대(白玉帶)를 보내니, 이용은 황금침향대(黃金沈香帶)로 보답하고, 또 김종서정분에게는 서대(犀帶)를 각각 1요(腰)씩 주고, 진귀한 물건과 서화(書畫)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명회가 또 말하기를,

"조번(趙藩)이용의 심복입니다. 제가 평소부터 그를 아는데, 매우 경박하고 소견이 얕았으니, 만약 조번과 말한다면 가히 정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자주 왕래하면서 매우 은근하니 조번이 감격하여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인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안평 대군의 사람됨을 아는가? 풍의(風儀)와 재주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관인(寬仁)한 큰 도량 같은 것에 이르러서도 사람을 사랑하며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여러 사람의 환심을 얻으니, 재주와 덕(德)을 가지고 어찌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겠는가? 요행히 그대도 한번 뵙는다면, 마땅히 그대는 먼저 용납을 받을 것이다."

하면서, 이용이 준 서화와 기물을 모조리 내어다 보여 주고, 말이 많이 과장되었다. 한명회가 기쁜 빛을 하며 인하여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물으니, 조번이 말하기를,

"이미 크게 신(臣)의 무리들과 이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판사(判事)와 함께 무고(武庫)의 병장(兵仗)185) 을 맡았으니 가져오는 것이 어렵지 않고, 또 관장한 별군(別軍)과 모든 장인(匠人)들도 수백 명 이상이 되는데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이명민(李命敏)도 많은 역부(役夫)를 영솔하였으니, 또한 가히 1천 인은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간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므로, 한명회가 거짓으로 붙어서 따르려고 하자, 조번은 더욱 교만하여져 모조리 말하고 남김이 없었다. 한명회가 묻기를,

"대신은 누구인가?"

하니, 조번이 말하기를,

"삼공(三公)과 이 이상(李二相)186) 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병조 판서가 모두 안평 대군과 친하게 지내어 정(情)이 골육(骨肉)과 같으므로 생사(生死)도 같이 할 것이다."

하였다. 말하기를,

"판사(判事)는 누구인가?"

하니, 말하기를,

"윤처공(尹處恭)이다."

하고, 조번이 또 말하기를,

"몇십 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마땅히 큰 경사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방관(傍觀)하라."

하였다. 한명회가 일찍이 밤에 세조의 집으로 가다가 기사(騎士) 10여 인이 집으로부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순찰하는 군졸(軍卒)이라고 생각하고 다리 밑에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이용(李瑢)조번 등의 여러 소인이 왔다. 이튿날 한명회조번을 보고 말하기를,

"어제 그대의 집에 나아갔다가 마침 그대가 없기에 집의 하인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안평 대군 집으로 갔다.’ 하기에, 즉시 사람을 보내어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니,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조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안평 대군이 우리들을 데리고 수양 대군의 집으로 나아갔다가 밤이 깊었으므로 도로 돌아왔다."

하였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수양 대군이 만약 안평 대군이 문밖에 있는 것을 알았다면 비록 삼경의 밤중이라도 어찌 나와서 보지 아니하였겠는가?"

하니, 조번이 미소지으며 말하기를,

"어찌 일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서서히 그 변화를 보아야 한다."

하였다. 이용성녕 대군(誠寧大君)의 후사(後嗣)가 되어 성녕 대군의 아내 성씨와 상피(相避)붙었다. 성씨이용(李瑢)의 집에 있었는데, 하루는 이용권은(權訔)의 아내 황보씨를 그 집에 맞이하고, 성씨성녕 대군의 옛 집으로 보내므로, 성씨가 이를 괴이(怪異)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였더니, 이용권은의 아내가 친근하게 지냈다. 이용권은의 아내에게 의상(衣裳) 등의 물건을 주었는데 이와 같은 일이 잦았다. 이용은 또 친히 권은의 집으로 가서 밤 잔치를 하며 권은의 장인 황보인을 맞이하자, 황보인도 또한 갔다. 그 뒤로부터 뇌물을 보냄이 서로 두터웠고, 자주 밤을 타서 왕래하다가 드디어 이용의 당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황보인은 오히려 평안하지 못하여 김종서와 같이 산릉(山陵)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지위가 인신(人臣)으로 극품(極品)에 이르렀고 이미 연로(年老)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편안히 자리 위에서 죽으면 또한 좋지 아니하겠는가?"

하자, 김종서가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이미 벌써 정해진 일인데, 어찌하여 이러고 저러고 하는가?"

하니, 김종서 등은 이용의 휘하로 자칭한 것이다. 이양을 도체찰사로, 민신을 이조 판서로, 조극관을 병조 판서로, 조순생(趙順生)을 사복 제조(司僕提調)로, 정효강을 병조 지사(兵曹知事)로, 윤처공을 군기 판사(軍器判事)로, 조번을 군기 녹사(軍器錄事)로, 이징옥(李澄玉)을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정이한(鄭而漢)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으니, 이용의 우익(羽翼)이 중외(中外)에 뿌리 박아 추요(樞要)187) 에 있는 자를 이루 기록할 수가 없었다. 이양은 항상 이용을 부를 때, ‘상전(上典)’이라 하며, 혹은 오래도록 뜰에 꿇어앉기도 하였다. 일찍이 이용에게 이르기를,

"금상(今上)께서는 어리고 병이 많으시니, 비록 자란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원치 못할 것입니다. 상전께서 만약 임금이 되신다면 진실로 물의(物議)에 화합할 것이니, 우리들의 뜻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27장 B면 【국편영인본】 6책 573면
【분류】 변란(變亂) / 왕실-종친(宗親)

[註 180] 이모(貽謀) : 자손을 위하여 남긴 꾀.
[註 181] 인후(仁厚) : 마음이 어질고 후덕(厚德)함.
[註 182] 주책(籌策) : 이해 관계를 헤아려 생각한 꾀.
[註 183] 부운(否運) : 막힌 운수.
[註 184] 불궤(不軌) : 모반을 꾀함.
[註 185] 병장(兵仗) : 병기.
[註 186] 이 이상(李二相) : 이 찬성(李贊成).
[註 187] 추요(樞要) : 가장 요긴한 자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3021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