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一)/대사헌공이승직

[태종실록] 제주에 있는 민무구·민무질에게 자결하게 하다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0. 16:32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3월 17일 계미 1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제주에 있는 민무구·민무질에게 자결하게 하다


○癸未/賜閔無咎無疾自盡。 成石璘金漢老偰眉壽等至行在, 與隨駕臣僚, 皆詣敬德宮, 班立方進疏, 上問: "何爲來也?" 石璘等對曰: "臣僚聞車駕久留于此, 以賊黨不可久存, 故來請耳。" 上不覽疏曰: "宰相此請非一日, 疏中之意, 予已知之矣。 寡人此行, 若一年半年, 則卿等之來宜矣。 明日行祭, 卽當還歸, 何汲汲也?" 石璘等對曰: "臣等豈不聞近日問事之由乎? 如趙瑚之言, 可謂寒心, 故今者臣僚之憤, 倍於舊日。 若不賜兪音, 雖徹夜不敢退。 願斷以大義。" 上對又如初。 石璘等啓曰: "無咎無疾等罪, 不容於覆載之間, 雖一日不可生於世, 而得至於四年之久, 誰不腐心切齒! 臣等之請, 固非一日。 昔者至有攀馬帶而諫者。 殿下雖幸千里之道, 固當從而請之。 況今庶僚聞趙瑚之言, 怨憤以謂, 賊黨蔓延至此, 爾爲首相, 何不能擧法固請! 下僚之責, 旣如此, 老臣若不得請, 將何顔而退! 若以臣言爲不是, 臣亦當乞身而退矣。" 上曰: "此不是小事, 豈可遽從?" 石璘對曰: "國非一人之私有, 臣僚之言, 豈可拒而不受乎?" 漢老啓曰: "此非唯臣等之缺望, 雖近日伏刑之徒, 若或有靈, 則亦以謂, 恕首賊而獨誅吾等, 是何意也? 必懷怏怏之心於九泉之下矣。 願斷以大義。" 上曰: "明日行祭後, 吾當更思。" 石璘曰: "自古及今, 所以維持國家者, 以忠與孝耳。 若無忠孝, 安有君父乎? 無咎等, 罪在不議, 更何思焉?" 英茂曰: "人臣苟懷不忠之心, 則雖一日尙不可延喘息。 殿下所以優游不斷者, 但以私恩耳。 以一時之私恩, 比萬世之宗社, 必有輕重矣。" 上曰: "寡人於此輩, 有何私恩! 明日覽疏, 當有處置。" 漢老啓曰: "臺諫之請, 四年于玆。 今日始聞兪音, 正當固請, 必俟判付而後退。 在庭之臣, 孰敢有先退者乎?" 石璘從而啓曰: "所司之言, 旣如此, 臣等若退, 則所司必從而劾之。" 英茂啓曰: "無咎等厚蒙上恩, 當殿下發瘡, 與李茂等會議私第, 欲何爲也? 嗾所司員構上位所無過失, 使之封章, 又何意也? 上猶且寬假, 不肯安分, 欲害兩王子, 此臣等所以日夜怨憤而欲誅者也。" 上曰: "大臣與所司, 咸來于此。 明日行祭之後, 更請何晩!" 石璘漢老等更啓曰: "今日上敎所重在祭, 若他事則固然, 此輩欲害王子, 祖宗之靈, 亦欲誅之。 如斷此事而行祭, 則先后必右享之矣。" 上曰: "予所以不能斷此事, 兒女之小情, 恐傷舅家之心耳, 今則可以斷矣。" 時夜已二鼓, 石璘等或坐或立以俟。 上召諸代言謂曰: "李茂子若使竝誅, 則刑不亦濫乎?" 乃取議政府百官臺諫疏, 親自立草, 判曰: "依申。 其李茂子, 籍沒爲奴。" 命政府曰: "予於前日李茂之事, 深有慊焉。 昔文帝薄昭使自盡。 卿等亦當依此法施行。" 乃遣巡禁司護軍李繩直、刑曹正郞金自西濟州, 賜無咎無疾自盡。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자진(自盡)038) 하여 죽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성석린(成石璘)·김한로(金漢老)·설미수(偰眉壽) 등이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거가(車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과 더불어 모두 경덕궁(敬德宮)에 나아와 반열(班列)을 지어 서서 막 상소(上疏)를 올리려고 하는데, 임금이 묻기를,

"어째서 왔는가?"

하니, 성석린이 대답하기를,

"신료(臣僚)들이 거가(車駕)가 오랫동안 여기에 머무신단 말을 듣고, 적당(賊黨)을 오래 둘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청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상소를 보지 않고 말하기를,

"재상(宰相)들의 이 청(請)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소(疏) 가운데의 뜻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과인(寡人)의 이번 행차가 1년이나 반년이 걸린다면 경들이 오는 것이 마땅하지만, 내일 제사를 행하면 곧 돌아갈 것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급히 서두르는가?"

하니, 성석린 등이 대답하기를,

"신 등이 어찌 근일에 문사(問事)한 사유(事由)를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조호(趙瑚)의 말과 같은 것은 진실로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신료(臣僚)들의 분(憤)이 옛날보다 배나 더합니다. 만일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밤을 새더라도 감히 물러갈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또 처음과 같이 하였다. 성석린 등이 아뢰기를,

"민무구·민무질 등의 죄는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할 수 없으니, 비록 하루라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4년이나 되도록 오래 끌었으니, 어느 누가 마음이 썩고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 등의 청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옛적에 마대(馬帶)를 붙잡고 간(諫)한 자가 있었으니, 전하께서 비록 천리길을 거둥한다 하시더라도 마땅히 따라가며 간(諫)해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 서료(庶僚)들이 조호(趙瑚)의 말을 듣고 원망하고 분해하며 말하기를, ‘적당(賊黨)들의 만연(蔓延)함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네가 수상(首相)이 되어 왜 법(法)을 들어 굳이 청하지 못하는가?’ 합니다. 하료(下僚)들의 책망이 이미 이와 같으니, 노신(老臣)이 만일 청(請)을 얻지 못하면 장차 무슨 낯으로 물러가겠습니까? 만일 신의 말을 옳지 않다 하시면, 신도 또한 벼슬을 사퇴하고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따르겠는가?"

하니, 성석린이 대답하기를,

"나라란 것은 한 사람의 사유물(私有物)이 아닙니다. 신료(臣僚)의 말을 어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김한로(金漢老)는 아뢰기를,

"이것은 신 등만이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근일에 형(刑)을 받은 무리라 하더라도 만일 영(靈)이 있다면 또한 말하기를, ‘수적(首賊)은 용서하고 우리들만 벤 것은 무슨 의사냐?’ 하여 반드시 앙앙(怏怏)한 마음을 구천(九泉) 아래에 품을 것입니다. 원컨대,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제사(祭祀)를 행한 뒤에 내가 다시 생각하겠다."

하였다. 성석린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충(忠)과 효(孝) 때문입니다. 만일 충과 효가 없다면 어찌 인군과 아비가 있겠습니까? 민무구 등의 죄는 의논할 것도 없는데 무얼 다시 생각하겠습니까?"

하였다. 조영무(趙英茂)는 말하기를,

"신하로서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면 비록 하루라도 목숨을 연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럭저럭 시일을 끌며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사사 은혜 때문입니다. 한때의 사사 은혜로 만세의 종사(宗社)에 비교하면 반드시 경중(輕重)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이 이 무리에게 무슨 사은(私恩)이 있겠는가? 내일 소(疏)를 보고 마땅히 처치(處置)하겠다."

하니, 김한로가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청이 이제 4년이나 되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유음(兪音)을 들었으니, 마땅히 굳이 청하여 반드시 판부(判付)를 기다린 뒤에 물러가겠습니다. 뜰에 있는 신하가 누가 감히 먼저 물러가겠습니까?"

하였다. 성석린이 따라서 아뢰기를,

"소사(所司)의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 등이 만일 물러가면 소사가 반드시 곧 탄핵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영무(趙英茂)는 아뢰기를,

"민무구 등이 후하게 주상의 은혜를 입었는데, 전하께서 종기[瘡]가 대단하시던 때에 이무(李茂) 등과 더불어 사삿집에 모여 의논하였으니,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소사원(所司員)을 사주(使嗾)하여 주상의 없는 과실(過失)을 날조하여 봉장(封章)하게 하였으니, 또 무슨 뜻입니까? 주상께서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셨는데, 분수를 편안히 하지 않고 두 왕자(王子)를 해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신 등이 밤낮으로 원망하고 분해 하며 베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소사(所司)가 모두 여기에 왔으니, 내일 제사를 행한 뒤에 다시 청하는 것이 무엇이 늦겠는가?"

하니, 성석린·김한로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오늘 상교(上敎)의 소중(所重)함이 제사(祭祀)에 있으시니, 다른 일 같으면 진실로 그러하지만, 이 무리들이 왕자를 해하고자 하였으니, 조종(祖宗)이 신령(神靈)이 또한 베고자 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 일을 결단하고 제사를 행하시면, 선후(先后)께서 반드시 잘 흠향(歆饗)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결단하지 못한 것은 아녀자(兒女子)의 작은 정으로 구가(舅家)039) 의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함에서였다. 지금은 결단할 수 있다."

하였다. 이때에 밤이 이미 2경(更)이나 되었다. 성석린 등이 혹은 서고, 혹은 앉아서 기다렸다. 임금이 여러 대언(代言)을 불러 이르기를,

"이무(李茂)의 아들을 아울러 베게 한다면, 형벌이 또한 지나치지 아니한가?"

하고, 의정부(議政府)·백관(百官)·대간(臺諫)의 상소(上疏)를 가져다가 친히 스스로 서서 판부(判付)를 초(草)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이무의 아들은 적몰(籍沒)하여 종[奴]을 삼으라."

하였다. 정부(政府)에 명하기를,

"내가 전일에 이무(李茂)의 일에 대하여 매우 겸연(慊然)스런 것이 있다.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가 박소(薄昭)를 베는데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경 등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순금사 호군(巡禁司護軍) 이승직(李繩直)·형조 정랑(刑曹正郞) 김자서(金自西)를 보내어 제주(濟州)에 가서 민무구·민무질에게 자진(自盡)해 죽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19권 23장 B면 【국편영인본】 1책 535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왕실-행행(行幸)

[註 038] 자진(自盡) :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음.
[註 039] 구가(舅家) : 시가(媤家).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03017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