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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8세손 신암공 이억] 贈兵曹參議李公墓碣銘(증병조참의이공묘갈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20:55

□판사공(判事公) 8세손 신암공(愼庵公) 이억(李檍)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贈兵曹參議李公墓碣銘(증병조참의이공묘갈명)
–橘山(귤산) 李裕元(이유원)

公諱檍。字汝樑。慶州人。高麗三重大匡月城君之秀之後。月城生諱揆。官參贊謚貞烈。再傳有諱蔓實吏曹判書。有三子。曰從直鷄川君。曰良直寺正。曰繩直大司憲。大憲之孫宗準慵齋先生。寺正之孫季孫執義。執義生瑭。寔公五代祖也。高祖諱以和都事。曾祖諱躍龍參奉。祖諱希壽郡守。考諱碩立縣監。妣咸平鄭氏。世恭女也。公以萬曆乙卯生。生有器度。性孝友。甫六歲。其大父出。雖夜不食以待之。長益魁偉。膂力有過人者。治擧業。旁涉兵家書。深得經權之術。年二十二丙子。赴會講不利。從具綾川仁垕,李忠壯義培。互相諮訪。二公絶愛之。有大用之志。以親老辭。講學德山舊廬。時建虜犯畿境。李公節度湖西。薦公于朝曰。忠義之士也。公方食。推床而起。奮然將赴召。母夫人許之。顧謂其妻曰。善養吾母。且保孩兒。我生當還也。直前廣州之雙嶺陣。我兵已亂。王城陷。公慷慨激厲。罵將佐之逃散者曰。君父在上。主帥在下。偸生何去。向鄕山揮涕再拜。脫所着藍袍。斷其袂。咋指出血。書其姓名。授從者德金曰。吾今自此訣矣。若歸遺兒。以識吾死日。卽丁丑正月初三日也。遂彎弓射賊。賊鋒逼。公植立不動。以釰擊之。釰爲之折。身被數十創。與主帥同殉嶺下。翌日公所騎馬掛血書。悲鳴門外。家人始識公遇害。而德金亦踵至。噫。公之死何其烈也。家人以血袍葬。墓在德縣外北面金峙酉坐原。逮肅宗壬午。贈兵曹參議。仍命㫌閭。表厥宅里。恩榮備矣。配竹山朴氏。挺芝女。後合祔如禮。有一男慶昌參奉。贈參判。男弘肇贈判書。弘肇男喜夏府使。喜夏系男彦培郡守。彦培男啓宗。啓宗系男浚郁守門將。浚郁男南柱。南柱男箕中。箕中男春鍵。內外旁支総屢百人。有別錄。謹按黃江漢所著陪臣傳。李忠壯雙嶺之役。諸將佐皆亡。獨李億及曺丑生在。億卽公之名。而檍之誤也。申海藏作公㫌閭記。正其訛謬。俾伸公忠魂毅魄之所沈欝。余雖竭意立論。豈有加於二太史之筆哉。余於公同源也。欽公軒天地大節。而是役也。藍浦守慶善應鄭巡察世䂓召。殉於險川。嗚呼。一門兩節。炳烈於營梱之陣。褒典幷施。而公之孫益蕃昌。困之象。君子之致命遂志。猶殺身成仁。仁者必有後。其在斯歟。其在斯歟。銘曰。

粤昔柔兆。邦國卼臲。王狩南城。天盪地裂。執殳前軀。維邦之傑。攙槍動色。雙嶺水咽。陪臣箭誓。瞻彼泉冽。蛟浮鳶沒。矢盡釰折。春孟哉明。一言而决。岡鼻拜淚。袍面書血。全軀保子。人所屑屑。疇能罔恤。激膽沸熱。生死好惡。人鮮烈烈。疇能獨奮。電目閃掣。薰燒膏煎。山銀壁鐵。一馬悲鳴。僕夫哭徹。乳孩啼呱。鶴髮隕絶。嗟臣事君。䙡在盡節。白日流名。遺恨莫雪。百載興感。握觚忍說。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3
*한국문집총간 > 가오고략 > 嘉梧藁略冊十六 月城李裕元景春著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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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고략(嘉梧藁略)은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의 文集이다.
○이유원(李裕元) 1814년(순조 14)~1888년(고종 25). 소자는 육희(六喜),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墨農),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박규수(朴珪壽), 남병철(南秉哲), 김세균(金世均) 등과 교유.


*가오고략(嘉梧藁略). ⓒ 한국고전번역원


●증병조참의신암이공묘갈명 역문
(贈兵曹參議愼庵李公墓碣銘 譯文)

-족인좌상(族人左相) 유원(裕元) 찬(撰)
-직제학(直提學) 조성하(趙成夏) 서(書)
-원임시교(原任侍敎) 민규호(閔奎鎬) 전(篆)


공의 휘는 억(檍)이요, 자는 여량(汝樑)이며 호는 신암(愼庵)이니 경주인(慶州人)이라.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의 후손이요, 휘 규(揆)는 월성군(月城君)의 아들이라. 벼슬은 참리(參理)요, 시(謚)는 정렬(貞烈)이며 재전(再傳)하여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이판(吏判)이 삼자(三子)를 생하니 장자 종직(從直)은 계천군(鷄川君)이요, 차자 양직(良直)은 시정(寺正)이요, 삼자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요, 대사헌(大司憲)의 손자 종준(宗準)은 용재선생(慵齋先生)이요, 시정(寺正)의 손자 계손(季孫)은 집의(執義)요, 집의(執義)가 당(瑭)을 생하니 진사(進士)니 공의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이화(以和)니 도사(都事)요, 증조의 휘는 약용(躍龍)이니 참봉(參奉)이요, 조의 휘는 희수(希壽)니 군수(郡守)요, 고의 휘는 석립(碩立)이니 현감(縣監)이요, 비(妣)는 숙부인(淑夫人) 함평정씨(咸平鄭氏) 세공(世恭)의 따님이다.
공의 만력(萬曆) 을묘(乙卯)에 출생했다. 공이 출생하면서 기량이 있고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 있어 나이 겨우 6세 때 그 조부가 출타하면 밤이 늦어도 조석을 굶어가며 기다리고 장성하면서 체모가 장대하여 장력이 과인(過人)하고 병서(兵書)를 읽어 병법을 해독하고 나이 22살에 강과(講科)에 갔다가 어찌 못했고 능천(綾川) 구인후(具仁垕)와 충장(忠壯) 이의배(李義培)로 상종하고 자문하니 두 공이 크게 사랑하여 앞으로 크게 쓰일 인재라 하더라. 모친 봉양으로 인하여 덕산(德山) 옛집에 가서 있었는데 그때 청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서울을 침략하니 이공(李公)이 호서절도사(湖西節度使)가 되어 조정에 공을 천거하기를 충의지사(忠義之士)라 하여 공을 부르거늘 공이 밥상을 받았다가 상을 밀고 일어나 장차 부르는데 가고자 모부인(母夫人)께 허락을 받고 그 아내를 돌아보고 일러 가로대, ‘노모를 잘 봉양하고 또 어린 것을 잘 기르라, 내가 살면 곧 돌아오리라’ 하고 바로 광주(廣州) 쌍령진(雙嶺陣) 터로 달려가 보니 아군이 무너지고 왕성(王城)이 장차 함락할 형편이라. 공이 분을 내어 도망치는 장병들을 꾸짖어 가로대, ‘군부(君父)가 위에 계시고 주장(主將)이 아래 있는데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 하고 고향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기가 입었던 남색 도포를 벗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그 성명을 혈서에 쓰고 하인 덕금(德金)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로부터 죽을 터니 너는 집에 돌아가서 나에 죽는 날이나 알리라’ 하니 그날이 정축년(丁丑年) 정월(正月) 초삼일(初三日)이라.
활을 당겨 적을 쏘니 적이 칼로 달려들 거늘, 공은 꼼짝도 안 하고 칼로 대적하더니 칼이 부러지는지라.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고 주장(主將)과 함께 영하(嶺下)에서 전사하였으니 다음 날 공이 타던 말이 혈서를 안장에 걸고 문밖에 와서 슬피 울거늘 집사람들이 처음 공이 전사할 줄 알았고 덕금(德金)이 뒤따라 와서 과정을 이야기하니 공의 전사가 어찌 그리 열열한고. 집에서 혈서 쓴 도포로 장사를 지내니 묘가 덕산(德山) 외북면(外北面) 금치리(金峙里)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숙종(肅宗) 임오년(壬午年)에 이르러 병조참의(兵曹參議) 벼슬을 증직(贈職) 받고 인하여 정려(旌閭)를 명해 동리에 세우니 은혜와 영화가 구비한 셈이 됐다. 배(配)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죽산박씨(竹山朴氏) 정지(挺芝)의 따님이니 뒷날 예(禮)에 따라 공과 합폄(合窆)하다. 아들 경창(慶昌)은 참봉(參奉)으로 참판(參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경창(慶昌)의 아들은 홍조(弘肇)이 지충추(知中樞)로 판서(判書)를 증직(贈職) 받았고 홍조(弘肇)의 아들 희하(喜夏)는 부사(府使)요, 희하(喜夏)의 양자(養子) 언배(彦培)는 군수(郡守)요, 언배(彦培)의 아들 계종(啓宗)은 통덕랑(通德郞)이요, 계종(啓宗)의 양자(養子) 준욱(浚郁)은 선전관(宣傳官)이요, 준욱(浚郁)의 아들은 남주(南柱)요, 남주(南柱)의 아들은 춘건(春鍵)이니 내외자손(內外子孫)이 누 백인지라 별지(別紙)에 수록했다.
황강한(黃江漢) 배신전(陪臣傳)에 의하면, ‘이충장공(李忠壯公)의 쌍령(雙嶺)전투에 모든 장졸(將卒)이 다 도망하되 이억(李億)과 조축생(曺丑生)이 있었다’ 하니 억(億)은 공의 이름인데 억(億)과 억(億)이 잘못 기록됨이라. 해장(海藏) 상서(商書) 신석우(申錫愚)가 공의 정려기(旌閭記)를 지을 때 억(億)을 억(檍)으로 고쳐서 공의 충혼의백(忠魂義魄)*)의 억울함을 씻었으니 내가 이에 대해 황강한(黃江漢), 신상서(申商書) 두 분보다 더 정확한 구분을 할쏜가. 내가 공의 천지(天地)와 같은 큰 절의(節義)를 흠모하는데 이 싸움에 남포군수(藍浦郡守) 경선(慶善)이 순찰(巡察) 정세규(鄭世䂓)의 부름을 받고 검천(險川)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하니 슬프다. 한 문중(門中)에서 두 절의(節義)가 전쟁터에서 빛냈고 아울러 정려(旌閭)를 했으나 특히 공의 자손이 더욱 번창하니 반드시 뒤가 있는지라 그 여기에 있을진저 명왈(銘曰)
옛날 병자년(丙子年)은 나라가 위태한 해다. 왕이 남성(南城)에 나시니 천지(天地)가 탕렬(盪裂)이라. 창을 잡고 앞에 나아가니 나라에 영결(永訣)이라. 창에 찔려 순절(殉節)하니 쌍령(雙嶺) 물도 슬피 우네. 배신(陪臣) 되기를 맹세하니 샘물도 혹독하게 차다. 도랑 용은 공중에 오르고 소래기는 땅에 떨어지니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지다. 정월(正月) 초순(初旬)에 한 말[一言]하고 영결(永訣)하니 고향을 눈물로 배별(拜別)하고 도포에 혈서 쓰니 몸을 온전히 하고 자식을 보전하는 것은 사람의 설설(屑屑)한 바다. 누가 능히 구휼(救恤)치 않으리오. 간담이 끓고 뜨겁도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은 싫어하니 사람마다 열사 되기는 어렵도다. 누가 능히 분발하여 전목(電目)을 막을쏜가. 향초가 불에 타고 기름을 따리니 산은 벽철(壁鐵)이 되었네. 타던 말이 슬피 울고 노복(奴僕)의 울음이 철천(徹天)이라. 어린 아들고 고이 울고 늙은 부모 기절하니 신하가 임금 섬김은 설의를 다하는 데 있건만 백의(白衣)로 올린 이름 맺힌 한을 풀지 못하니 백년(百年) 뒤에 느낌이 새로우니 술잔을 잡고 차마 무슨 말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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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혼의백(忠魂義魄) :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라는 뜻으로, 충성과 절개의 정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