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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8세손 신암공 이억] 丙子死義人李公檍傳(병자사의인이공억전)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8. 20:54

□판사공(判事公) 8세손 신암공(愼庵公) 이억(李檍)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丙子死義人李公檍傳(병자사의인이공억전)
–東山(동산) 趙晟漢(조성한) 撰(찬)

李公檍字汝良。慶州人。世居德山。姿貌魁偉。有勇力善騎射。甫及成童。能應擧。連捷魁選。雖老於金革者。莫之先焉。自是聲名聞一道。而且其志節忼慨。常思奮不顧身。以徇 國家之急。乃素所蓄積也。丙子冬。其年二十有二。而赴試于漢師。時綾川具相公鎭于水原。聞其膽略。辟爲軍官。旣到幕下。仍卽乞暇歸省。不意淸兵猝至。道路梗塞。不克致身於幕府。而適爲本道兵使之所募召。乃感主將之知己。幸其自效之得所。遂拜辭父母。解其衣帶。以訣妻子。仗劒赴難。直到南漢。則賊勢充斥。事無可爲。兵刃乍接。士卒奔潰。而獨立矢石。終始力戰。誓必與主將俱爲存亡。不旋踵一武地而竟死於敵。苟非臨難不可奪之節。安能從容於蒼黃顚沛之際也。當時赴戰而生還者。無不目覩而詳言之。至今傳爲鄕黨之稱訟焉。頃年 朝廷令郡縣査報前後陣亡者子孫。縣人前監察李謹行等百餘人。因擧事實。齊訴道臣。冀其上聞。而或謂敗軍之士。不可以褒美聞。事遂寢。噫自古忠臣義士之仗節死義者。必於陷敗之軍。而不在勝捷之兵。理勢固然。重峯趙先生義兵之敗。疋士應募而殉者。無不被追褒之典。而此獨無㫌美之擧。豈不惜哉。且聞其四五歲時。已有愛親之誠。大爲厥王考所鍾愛。未嘗暫離其側。或値其出外而未還。則不敢先食。得一美味。必先以奉親。每遇新物。亦未敢先嘗。盖其忠孝之誠。出於天賦者然也。其妻朴氏年十九而于歸。又七年而遭衣帶之訣。自以晝燭之身。子在襁褓。不得收屍於兵火之中。爲終天之痛。屢欲自裁。而上念舅姑之靡依。下懼遺孩之不育。隱忍未果。設其委裘。以寓哀慕。攀擗悲號。殞絶方蘇。六載居廬。一念匪懈。每遇忌辰。齋沐行事。哀痛如初。以終其身。臨終遺命。以其衣帶納于棺中。語甚悲惋。嗚呼。斯可謂節義之成雙。而恐其沉沒不傳。謹摭鄕人狀辭。無採閨範之見稱於宗黨者。以告夫世之好善者。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7
*한국문집총간 > 동산유고 > 東山先生遺稿卷之二 > 雜著 > 丙子死義人李公 檍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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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유고(東山遺稿)은 동산(東山) 趙晟漢(조성한)의 文集이다.
○조성한(趙晟漢) 1628년(인조 6)~1686년(숙종 12). 자는 본초(本初), 호는 동산(東山), 쌍괴당(雙槐堂)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윤선거(尹宣擧)의 문인. 송준길(宋浚吉), 조지강(趙持綱), 조세환(趙世煥) 등과 교유.


*동산유고(東山遺稿). ⓒ 한국고전번역원.


●신암이공절의전(愼庵李公節義傳) 역문(譯文)
-동산(東山) 조성한(趙晟漢) 찬(撰)

이공(李公)의 휘는 억(檍) 자는 여량(汝樑)이요, 호는 신암(愼庵)이니 경주인(慶州人)이라. 대대 덕산(德山)에 살았다. 공의 모습이 장대하고 힘이 과인(過人)하여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더니 겨우 성동(成童, 15살)이 되며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장원(壯元)으로 뽑히니 비록 싸움터에 늙은 사람도 당할 이 없었다. 이로부터 이름이 도내에 들리고 또한 뜻이 강경하여 몸을 돌볼 줄 모르고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는 것이 평생에 간직한 마음이라. 병자년(丙子年) 겨울에 그나마 22세에 본도(本道) 병사(兵使)가 의병을 모집할새 공을 부르니 공이 자기를 알아주는데 감격하고 몸 바칠 곳을 얻었음을 다행히 여겨 모친에게 하직을 고하고 처자에 작별하고 칼을 집고 바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하니 적세(敵勢)가 충만하여 손을 쓸 수 없는지라. 잠깐 사이 적과 접전에 아군이 전부 도주하고 혼자 남아 시종(始終) 힘껏 싸워서 주장(主將)과 생사를 함께 하기를 맹세하더니 몇 발자국 돌이키는 사이 적에 쓰러지는 어려움을 당하니 곧은 절개가 아니면 전쟁터에서 조용히 몸을 바치라.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살아온 자 본 대로 말하니 지방에서 칭송이 자자하다.
이듬해 조정에서 군(郡)과 현(縣)에 조사하여 전쟁에 죽은 사람을 찾거나 지방 사람들과 전현감(前縣監) 이근행(李謹行) 등 백여 명이 그 사실을 들어 도(道)에 호소하여 나라에 알림을 바라더니 혹자가 패군지졸(敗軍之卒)이라 표창할 수 없다 하여 나라에 고하지 않고서 그만두니 슬프다. 자고로 충의(忠義) 있는 사람으로 절개(節槪)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은 반드시 패군(敗軍)에 있고 승전한 군사에는 잊지 않는 것이 필연 지사라. 조중봉(趙重峯)의 의병이 패함에는 순직(殉職)한 병사를 뒷날 표창을 다 했건만 홀로 공에게만 표창이 없으니 어찌 애석지 않으랴. 또 들으니 공은 4~5세부터 어버이를 사랑하는 정성이 있어 조부에 사랑을 독차지한지라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혹 출타하신 후에 음식도 먼저 입에 대지 않고 맛이 좋은 음식을 보면 반드시 먼저 봉친(奉親)을 하고 세로 난 음식을 만나면 먼저 맛보지 않으니 그 나라에 충성과 부모에 효성 함이 하늘이 냈음이 분명하다.
그 아내 박씨(朴氏)는 19세에 결혼하여 7년 뒤에 남편과 생이별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처지에 어린 아들이 강보(襁褓)에 있으므로 전쟁터에 가서 남편의 시체를 거두어 오지 못한 것을 하늘에 닿는 슬픔으로 알고 여러 번 자결하고자 했으나 위로는 시부모님의 외로움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어린 아들의 양육을 생각하여 차마 자결치 못하고 빈소에 의관을 걸어 놓고 애통망극(哀痛罔極)하다가 기절하기를 몇 번이고 6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조금도 게을리 아니하고 제삿날을 당하면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받들고 슬퍼함이 처음과 같이하고 임종 시에 유언하기를 그 의관을 자기 널관 속에 넣어달라 하였으니 그 남편의 충성과 아내의 절의(節義)가 막상막하(莫上莫下)한지라. 후세에 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향중(鄕中)에 전하는 말과 문중(門中)에 전하는 말을 모아 이 세상에서 착한 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하노라.
이 글 지은 조동산(趙東山) 성한(晟漢)은 한천(漢天) 사람이니 동춘(同春) 송선생(宋先生)의 문인(門人)이라. 은일로 지평(持平) 벼슬에 뽑히셨다. 선생이 공과 동향(同鄕) 지인으로 그 충효 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절의가 나라에 빛났으나 병자년(丙子年) 순절하고도 그 표창이 없으므로 이 글을 짓고 평생 지킨 큰 절의를 문집(文集) 속에 상세히 기록하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