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탁영선생문집 임금당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8. 1. 14:59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3권(卷之 三) 기(記)

 

6. 臨錦堂記(임금당 기문)

 

<개요>

1493. 이해 륜음(綸音:조선시대에 국왕이 백성이나 백관에게 연초에 내리는 훈유의 문서)을 받들어 김해부에 도착하자 부사(府使) 우모(禹某)가 새로 지은 집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는데 바로 임금당이었다. 친구 이종준(李宗準)이 지은 이름이었다. 동서로 방이 있어 한온(寒溫)을 구비하였으며 벽마다 창문이 있어 아름다웠다. 특히 난간 밑에는 시냇물이 흘러 거문고 퉁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가장 신기로웠다. 우공(禹公)과 수작(酬酌)하던 중 술이 절반 취하자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일찍이 공의 서울집에 가보니 천석(泉石)은 화려한데 집이 협소하여 가산(家産)에 소홀한 처사(處士)의 집과 같아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금당은 천석과 집이 모두 규격을 갖추었으니 공사(公私)를 구별할 줄 아는 그대의 풍모를 졸렬한 필력(筆力)으로 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이 임금당기는 탁영연보(1874년간)에 따르면 1493년 3월7일(음) 작성하였다고 한다.

 

 

虎溪之水 出自盆山 飛鳴괵괵 流入北郭 經婆娑塔 縱一城通南郭 朝宗于海 其淺僅流 束蒲 而盛旱不渴 蓋有源之活水也

호계(虎溪)의 물이 분산(盆山)에서 흘러나와, 콸콸 소리를 내며 북곽(北郭)으로 흐르다가 파사탑(婆娑塔)을 지나면 성(城)을 가로지르고 남곽(南郭)을 관통한 뒤 바다로 흐른다. 얕아서 겨우 냇버들을 감싸고 흐를 정도이지만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것은 대체로 원천(源泉)이 있는 활수(活水)이기 때문이다.

 

在城中 左右堰石 以障其溪流 空其中而上構高樓 曰燕子 然樓高而溪潺 不相稱也 又其下五十步許 構一樓 曰淸心 樓稍低而溪稍渟 水聲可及於客枕 與水頗宜 然未盡其勝 余常爲造物恨

성 안에서 좌우로 제방 돌을 쌓아 호계의 흐름을 가로막고, 가운데는 비게 하고 그 위에 높은 누각을 지어 이름을 연자루(燕子樓)라고 하였는데, 누각은 높고 호계는 얕아서 서로 걸맞지 않았다. 그 아래 50보쯤에 또 청심루(淸心樓)라 부르는 누각을 지었는데 누각도 조금 낮고 물도 조금 깊어서 물소리가 나그네의 베갯머리에까지 들리니, 물은 적당한 편이었으나 경치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조물주(造物主)가 한스러웠다.

 

弘治癸丑春 余奉綸音 頒諭到府 時府使丹陽禹公某 館余於新堂 堂在燕子淸心之間 扁曰臨錦

홍치(弘治) 계축년(1493, 성종24) 봄에 내가 임금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지방 관리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부(府)에 이르렀을 때 부사(府使)인 단양(丹陽) 우공(禹公) 모(某)가 나를 새로 지은 당(堂)에 투숙케 하였다. 이 신당(新堂)은 연자루와 청심루 사이에 있는데, 편액을 임금당(臨錦堂)이라 한다.

 

吾友月城李侯宗準 所名而書者也 余不解所名之義 宋隆德故宮 有臨錦堂 元儒有臨錦堂前春水波之句 豈非以其波紋如錦 堂臨其上而名耶

나의 친구 월성(月城) 이종준(李宗準) 공이 명명하고 글씨를 쓴 것인데, 나는 그 이름의 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였다. 송(宋)나라 때 융덕고궁(隆德故宮)에 임금당(臨錦堂)이 있었는데, 원(元)나라의 선비가 ‘임금당 앞의 봄 물결[臨錦堂前春水波]’이라고 읊은 시구(詩句)가 있는 것을 보면 그 물결무늬[波紋]가 비단 같고 당(堂)이 그 가에 임(臨)하여 있다 하여 이와 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觀其中流 架屋不樓而爽 東西有廂 溫凉異適 曲曲欄干 枚枚窓戶 玲瓏宛轉 檻下溪流 可俯而手掬

그 중류(中流)를 보니, 집을 짓고 다락을 시설하지 안았는데도 시원하고 동서에 각각 방이 있는데 따듯하고 서늘함이 유난이 알맞았다. 굽이진 난관과 조밀한 창호(窓戶)는 영롱한 빛이 감돌고, 헌함 밑의 냇물은 허리를 굽혀 손으로 움킬 수 있었다.

 

溪與堂明媚相照 又羅天鵝海鷗數雙而游其波 其鳴雝雝 聲應棟宇 驅而出之 始覺其在吾坐下 最奇事也

시내[溪]와 당(堂)의 아름다운 경치가 서로 비추어 주고 또 고니와 갈매기 몇 쌍이 물결 위에 흩어져 놀며 자유롭게 노니는 소리가 당에까지 울렸는데 몰아서 내보낸 뒤에야 비로소 앉은 자리 밑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取琴而彈之 空聲相應 淸和疏越 大絃洞洞然益壯 小絃鏗鏗然益楚 又堂中第一奇也

거문고를 가져다 타자 빈 공중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맑고 온화하며 은은하였는데, 대현(大絃)은 동동(洞洞)하여 더욱 씩씩하고 소현(小絃)은 갱갱(鏗鏗)하여 더욱 청조하였다. 이 또한 당중(堂中)에서 또한 제일 기이한 풍경이었다.

 

酒半 禹公囑余記 余執觴而落之 仍報公曰 天壤間 凡物 必有與物相稱 不得稱則不得造物之情矣

주연(酒宴)이 반쯤 지나자 우공(禹公)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곧장 대답하기를 “친지간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다른 물건과 서로 어울리게 되어 있는 법인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곧 조물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如草堂茅廬 宜於處士 而廣廈金屋 宜於王孫 易此則不稱也 漢有滕王高閣 巴有岳陽危樓 然後壓洞庭彭蠡之浩渺 工部之堂 宜於浣花 柳州之家 宜於愚溪 隨其人與其地 莫不各有所稱

예를 들면 초가집과 띠풀집은 처사(處士)에게 어울리고 크고 화려한 집은 왕손(王孫)에게 어울린다. 이것을 서로 바꾸면 어울리지 않은 것이 된다. 파릉(巴陵)의 팽려호(彭蠡湖)에는 높다란 등왕각(滕王閣)[1]이 있고 장강(長江)의 동정호(洞庭湖)에는 드높은 악양루(岳陽樓)[2]가 있어서 동정호와 팽려호의 넓고 아득한 기운을 압도하며, 두보(杜甫)의 초당(草堂)은 완화계(浣花溪)[3]에 어울리고, 유종원(柳宗元)의 집은 우계(愚溪)[4]에 어울린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각각 어울림이 있는 것이다.

[1] 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 신건현 팽려호 가에 있는 누각으로 당 고조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 자사로 있을 때 지었다 한다. 팽려호는 파양호(鄱陽湖)라고도 한다.

[2] 악양루(岳陽樓) : 중국 호남성 악양시 서문의 공성루(古城樓)인데, 동정호 가에 있다.

[3] 완화계(浣花溪) : 중국 사천성 성도시 서쪽에 있는 시내 이름이다. 이 냇가에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가 초당을 짓고 한때 살았다.

[4] 우계(愚溪) : 중국 호남성 영주시 남서쪽에 있는 하천이다. 당나라의 문호 유종원(柳宗元)이 이곳에서 귀양살이할 때 우계라고 이름 지었다.

 

金海 古府也 府中多少樓臺館舍 沿虎溪而列者不一 得禹公構臨錦之堂而始稱 噫 擧而措之 物物皆可稱也 然欲其稱 非知造物情者 不可也

김해(金海)는 오래된 부(府)이다. 부 안에 많은 누대(樓臺)와 객관이 호계(虎溪)의 연안에 줄지어 선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우공(禹公)이 임금당(臨錦堂)을 지음으로써 비로소 어울림을 얻었다. 아, 모든 조처가 하나하나 그 사물에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어울리게 하고 싶다면 조물주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以此堂規制 審禹公胸中 有許多間架屋室 其所以使心匠而運郢斤者 其可知之矣 未知公能有得於造物之情者乎

이 당의 규모와 제도로 보아 우공의 흉중을 살필 수 있으며, 많은 칸수의 방을 들일 수 있게 한 데는 치밀하게 구상하고 이름난 장인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공은 능히 조물주의 마음을 체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吾觀公偃然熊豹之姿 早穿楊葉 其有幹局 有豪傑長城之望 屈而爲此府 亦天也

내가 보니, 공은 위엄이 있고 용맹한 모습을 지녔으며 훌륭한 활솜씨와 일 처리 수완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어서 호걸이요 나라의 기둥이 될 명망(名望)인데, 굽히어 이 부(府)의 부사(府使)를 하게 된 것은 역시 천명(天命)인 것이다.

 

高牙大纛 乃公之能事 而簿書米鹽 公亦無不能也 豈非隨事能稱者乎 然則公於造物之情 不可謂不知也 公其更勵素節毋怠

대장기(大將旗)를 휘날리며 지휘하는 것이 공에게는 능한 일인데 미곡과 소금 등 행정 처리에도 능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일에 따라 걸맞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공은 조물주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없다. 공은 더욱 힘써 평소의 절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公之宅 在漢都王城迎秋門外昭敬殿右 斯文趙伯符尙僦居而停焉 余於前年 訪趙而造其宅 泉石甚勝 而第舍甚隘 蕭然若處士之家

공의 집은 서울의 도성 영추문(迎秋門) 밖 소경전(昭敬殿) 오른편에 있는데, 유학자 조백부(趙伯符)가 일찍이 세를 들어 살고 있다. 내가 지난해에 조백부를 방문하여 댁에 이르니, 천석(泉石)은 아주 좋은데 집은 매우 협소하고 쓸쓸하여 마치 처사(處士)의 집 같았다.

 

心知公於泉石癖而産業疏也 今日來觀 又知公泉石雖癖而所在如一 治第有制於公私也

마음속으로 공은 천석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으나 가산(家産)에는 소홀하구나 하고 짐작했다. 오늘 여기 와서 보니, 역시 공은 비록 천석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있으나 거처하는 곳은 한결같으니, 집을 다스리는 법도에 공사(公私)가 분명함을 알겠다.

 

公之堂 旣與虎溪稱 而余筆力拙 奈不足稱乎堂何 然金海 吾鄕也 吾先大夫與先尊府 通家之好 雖不稱 不敢辭

공의 당(堂)은 이미 호계(虎溪)에 어울리는데 나의 필력(筆力)은 졸렬(拙劣)하여 당에 어울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김해는 나의 고향이며, 나의 선대부(先大夫)와 공의 선존부(先尊府)는 서로 혼인을 한 가까운 사이이니, 비록 어울리지는 않지만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 역주본

편집수정 : 2015. 01.19. 죽산

*출처: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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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 濯纓先生文集卷之三 / 記 > 臨錦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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