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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4세손 운파공 이재원] 秘書承雲坡月城李公墓碣銘(비서승운파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23:20

□용재공(慵齋公) 14세손 운파공(雲坡公) 이재원(李在原)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②금애공(琴厓公) 윤검(胤儉) → 3世孫 삼은공(三隱公) 민각(民覺) → 4世孫 ②상돈(尙墩) → 5世孫 득영(得英) → 6世孫 ①귀량(貴良) → 7世孫 호명(好明) → 8世孫 ②가선공(嘉善公) 영수(韺守) → 9世孫 ①의춘(宜春) → 10世孫 ③경로(景魯) → 11세손 ①호우(鎬雨) → 12世孫 통정공(通政公) 상운(相運) → 13世孫 준형(俊炯) → 14世孫 ①운파공(雲坡公) 재원(在原)

 

 

秘書承雲坡月城李公墓碣銘 幷序
(비서승운파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族姪(족질) 俊鎬(준호) 撰(찬)

 

尙州邑治之西攻城匹巖山下枕選之原有斧如而封者寔故秘書承雲坡李公衣舃之藏也公諱在原字舜卿實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也至麗季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是生諱元林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入我 朝吏曹判書是生諱繩直仕于 世宗朝大司憲以淸白見重於 朝是生諱時敏進士號琴湖以淸望名於世是生諱宗準文校理 贈副提學以佔畢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爲十四世祖累傳而高祖諱景魯曾祖諱鎬雨祖諱相運通政考諱俊炯妣慶州金氏福興女冲庵淨后高宗丁卯十二月二日生于功城以花村第甫齔而嶷然有凝重氣像旣學不煩而自勤能彊記大人公奇之期以大儒及長讀經傳講明大義不務章句傳誦之業而用力於專心爲己之工以至公私義利之辨必詳審明斷儀表端雅志行高潔與物無忤遯世無憫內而宗族外至鄕黨知舊莫不心悅誠服一辭稱之曰君子人也孝於親而友于兄弟志體之養克盡誠敬埍箎之唱務尙和悅如是而人無間言早遊京洛夙抱經綸之志而世己杪矣晩帶一啣非所不榮而苟傳性命還爲識者鄙也慨然無復有意於進就卷懷林泉優遊自適翛然作物外高標以全口保命爲終老計斯可以想仰其篤學踐實之有餘矣戊戌丁外艱己酉丁內艱守制甚苦送終凡節一遵家禮情禮俱無憾每遇忌辰必宿齋薦誠以致如在焉以戊子二月二十七日卒享年八十二配順興安氏參奉信宅女先公四十一年卒後配水原白氏箕瑞女與公同年卒生二男長鍵哲次鍵寅哲男芳澣昌澣出瑨澣苾澣女適片斗烈尹錫來寅男昌澣餘不盡錄嗚呼俊鎬在弱冠始拜公於軒下得承其高談峻論可知爲端人莊士而又拜於大田修譜之時深感乎眷戀之私者殆非花樹同原之誼實由乎包容之德施之身而及於人者也心常景仰矣日公之孫昌澣甫與其再從兄酩澣訪余於三百里之遠而其容感然若深有哀者謬屬曰吾先大父事行未克大顯而一生用公無非追先裕後恢張門戶之計而遭世艱虞竟未就而終焉聲響俱泯則爲一家三世之恨也今欲表阡而狀本未備環顧吳中略悉梗槩者無有如叔侍也願惠一言以爲闡幽之資語未半而淚蔌蔌下地余乃惕然起敬曰偉矣君之是寄也有媺不掦則非孝也繩其祖武聿修厥德今於諸君可知其爲乃家之人而顧此蔑學爲敢當也不足爲微信無謂也至再至三誠懇動人事係族先誼不敢終辭謹撮其譜牒所錄及耳之目之者撰次如右以塞其責不其僣乎系之以銘曰
安素位而身心定篤彜倫而家政成是可以全吾性名亦可以垂裕昆仍鑱墓石丕闡潛光有慕公者視玆銘

 


●비서승운파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秘書承雲坡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족질(族姪) 준호(俊鎬) 찬(撰)

 

상주읍(尙州邑) 서쪽 공성필암산하(攻城匹巖山下) 손좌(巽坐)의 언덕에 우뚝한 무덤이 옛 비서승(秘書承) 운파(雲坡) 이공(李公)의 묘소라. 공의 휘는 제원(在原)이요, 자는 순경(舜卿)이며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라.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고 이분이 휘 규(揆)를 생(生) 하니 관(官)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요, 휘 원림(元林)을 생 하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휘 만실(曼實)을 생 하니 아조(我朝, 조선朝鮮)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휘 승직(繩直)을 생 하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역임 청백(淸白)함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휘 시민(時敏)을 생 하니 진사(進士)에 호는 금호(琴湖)인데 역시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이 높았고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공에게는 14대조가 된다.
여러 대를 내려와서 고조의 휘는 경로(景魯)요, 증조 휘는 호우(鎬雨)며 조부 휘는 상운(相運)이니 통정(通政)이요, 부친의 휘는 준형(俊炯)이며 모친은 경주김씨(慶州金氏) 복흥(福興)의 따님이요, 충암(冲庵) 정(淨)의 후손이다. 고종(高宗) 정묘년(丁卯年, 1867년) 12월 2일에 공성(功城) 이화촌(以花村) 자택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무거운 기상(氣像)이 어리었고 크면서 글을 배우되 꾸지람 없이 부지런히 읽어 능히 기록(記錄)하니 부친이 기특히 여겨 큰선비 될 것을 기약하더니 장성하면서 경전(經傳)을 읽고 대의(大義)를 밝히며 긴 글귀나 외우고 하는 일은 힘쓰지 않고 몸을 위하는 공부에만 마음을 써서 공(公)과 사(私)의 이롭고 해로운 판단을 자세히 살펴서 밝게 결단하고 향용(形容)이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여 사물에 거슬림이 없고 세상을 숨어 살아도 민망히 여기지 않으니 족친(族親) 외에도 향당(鄕黨) 친구들이 즐겨 복종(服從)하지 않는 이 없고 한마디로 군자(君子)라 일컫는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하여 뜻과 마음에 봉양을 정성을 다하고 동기간에 화열(和悅)을 당하니 사람들이 이간질을 못하더라. 일찍부터 서울에 놀 때 경륜(經綸)에 뜻을 품었으나 세상이 이미 끝장이라 늦게 한 관직을 얻으니 영화가 아닌 바 아니나 구차 시리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것이 식자(識者) 간에 비열하게 여기는지라 개연히 앞으로 나아갈 뜻을 버리고 산림(山林)에 숨어 물질을 외면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여 고상함을 택하였으며 식구를 온전케 하고 무사히 늙는 것을 계교(計較)로 하니 이 가히 그 학문을 독실(篤實)히 하고 행실에 여유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술년(戊戌年, 1898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기유년(己酉年, 190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 모든 범절(凡節)을 일체 가례(家禮)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하였고 해마다 제삿날이면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사 지내는 것이 살았을 때 봉양하듯 하더니 무자년(戊子年, 1948년) 2월 27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82세라.
배(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참봉(參奉) 신택(信宅)의 따님이니 공보다 41년이나 앞서 별세하고 후배(後配)는 수원백씨(水原白氏) 기서(箕瑞)의 따님이니 공과 더불어 한해에 죽다. 2남을 생 하니 장남에 건철(鍵哲) 차남에 건인(鍵寅)이요, 건철(鍵哲) 남에 방한(芳澣)·창한(昌澣)·출계 진한(瑨澣)·필한(苾澣)이고 여는 편두열(片斗烈)·윤석래(尹錫來)에 출가했고 건인(鍵寅) 남에 양자(養子) 창한(昌澣)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준호(俊鎬)가 약관(弱冠) 나이에 공을 자택에서 뵈옵고 고상한 담화를 듣고 단정한 인사로 알았고 대전수보시(大田修譜時)에 배견(拜見)하고 권념(眷念)하는 인정이 보통일가에 지나니 포용하는 덕이 자신에 베풀고 남에게 미침을 알 수 있어 마음에 항상 경모했으니 하루는 공의 손자 창한(昌澣)이 그 종형(從兄) 명한(酩澣)으로 더불어 3백 리 먼 길에 나를 찾아왔는데 그 얼굴이 슬픈 것 같이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가로대 나의 조부 행적(行蹟)이 드러낼 것은 없으나 일생동안 한 일이 조상을 받들고 자손을 위하여 문호(門戶)를 빛나게 할 계획이었으나 어려운 세상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여 성음(聲音)이 함께 적막하니 한 집안 3대에 걸친 한이라 이제 묘소에 표(表)하고 저 하나 장본(狀本)을 감추지 못하고 문중을 돌아봐도 족숙(族叔)만큼 우리 일을 아는 이도 없다면서 비문(碑文)을 부탁하는데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이 흐르니 내 공경하는 마음이 움직여서 위대하다.
군의 이번 일이여 아름다움이 있는 데 드러내지 못하면 효도가 아니요, 그 조상의 일을 이미 그 덕(德)을 닦고자 하니 이제 군들에게 그 가문(家門) 사람임을 알았으나 나와 같은 멸학(蔑學)이 어찌 당할쏜가 하고 사양하나 두세 번 청하는 정성이 사람을 감동케 하고 일이 족선조(族先祖)에 관한 일이라 더는 사양치 못하고 그 보첩(譜牒)에 기록된 바와 보고 들은 것을 모아 위와 같이 지어 그 책임을 면하고자 하니 참람(僭濫)함이 없을까 명하여 가로대

 

나의 위치에 편이해서 몸과 마음을 인정하고 인륜을 돈독히 해서 가정교훈(家庭敎訓)으로 삼으니 이것이 나의 성명(成名)을 온전히 하고 또한, 가히 뒤 자손에게 물리리로다. 이에 비석에 새겨 잠긴 빛을 드러내고자 하니 공을 생각하는 자 이 새김을 보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