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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5세손 해암공 이석호] 海菴處士月城李公墓碣銘(해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4. 23:21

□용재공(慵齋公) 15세손 해암공(海菴公) 이석호(李碩鎬)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의달(義達) → 6世孫 ④춘식(春植) → 7世孫 예석(禮錫) → 8世孫 삼우(三友) → 9世孫 ②제권(悌權) → 10世孫 ①광진(光震) → 11世孫 주호(周顥) → 12世孫 만오공(晩悟公) 상현(相鉉) → 13世孫 系子 백은공(白隱公) 두형(斗炯) → 14世孫 系子 가산공(稼山公) 재창(在昌) → 15世孫 系子 ①해암공(海菴公) 석호(碩鎬)

 

 

海菴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해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영가) 權鎬胤(권호윤) 撰(찬)

 

小川之瑟峯山壬坐原斧如而封者故海菴處士李公之藏也公歿之二十九年己酉夏公之弟成鎬以其從兄俊鎬氏之狀請顯銘於不侫曰吾兄生而儀貌淸秀若蚌珠才調超倫甫學語己知義理輕重之分象勺而文禮夙就先考健蓄齋公甚奇愛之年十五而聘黃氏其大舅石吾公基永方秉?川下獎率後進遠邇學者枀集公日夕親灸問難質疑屢蒙獎詡時貞山金先生講道灘上設鄕飮禮于黌舍以石翁命納贄參觀多所興感而薰陶多年綽綽有佳士之稱焉此吾兄平生也願子銘焉不侫言窮人淺雖不敢當於吾友之請義不可辭謹按公諱碩鎬字茂一海菴其號也慶州之李皆出於新羅佐命大臣諱謁平節義文章連世相望蔚然爲東國著姓入李祖喬桐戊午之獄與鄭一蠹金寒暄金濯纓諸賢同時被禍諱宗準號慵齋先生其十五代祖也高祖諱周顥曾祖諱相鉉號晩悟有士望祖諱斗炯號白隱考諱在昌號稼山俱有隱德妣竹山安氏士人秀學女生考諱在學號健蓄齋有文望妣義城金氏士人鎭禧女 高宗戊戌五月十六日生于汾川佳湖里第時安夫人晩而不婏取而爲子之六年成鎬生爲兄弟也公事兩庭盡子職友于篤而人無間言辛巳十二月十三日卒享于世四十四公再娶昌原黃氏士人政銖女卽石翁孫葬虎坪隅村丁坐系配淸州鄭氏春奎女生一男五女男濟國女姜吉昌宋秉斗金周煥權寧浩金旭煥國男東春東律東元東宇東杰姜男永基順基潤基宇基東基宋男基煥金男圭泰圭鳳權男斗基輝坤餘不錄嗚呼公以慷慨有爲之資不倖遭陸海飜嬗之日蹄跡交侵周餘爲命者莫不爲桎梏之奴隷則奮然有光復之志與權景燮金昌墩權麟煥柳淵和諸公組織新幹會于地方活躍靑年事業又汲汲於維新之學所居地僻而不便故率子弟移寓春宜與某某志士嘯倣吟咏而其憂國愛族之意徃徃出於言表云公之所存於此可知也是可以爲銘銘曰
紹先業而周旋有道之席爲世道而進拓維新之學凡百樵牧愼勿毀此有志逸士之宅

 

 

●해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海菴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호윤(權鎬胤) 찬(撰)

 

소천(小川)의 슬봉산(瑟峯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우뚝 봉(封)한 곳이 옛 해암처사(海菴處士) 이공(李公)의 묘소다. 공이 죽은지 29년 기유(己酉) 여름에 고의 동생 성호(成鎬)가 그 종형(從兄) 준호(俊鎬) 씨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해 가로대 나의 형이 출생하면서 외모가 청수(淸秀)하기를 구슬과 같고 재주가 보통에 뛰어나 논어(論語)를 배울 때 의리(義理)의 가볍고 무거움을 알아 문학(文學)이 일찍이 성취되니 선친(先親) 건축재공(健蓄齋公)이 심히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시더니 나이 15세에 황씨(黃氏) 장가드니 그 처조부 석오공(石吾公) 기영(基永)이 지방에서는 우수한 문필로 후진을 가르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배우고자 하는 자 모여 오다. 공도 낮과 밤으로 친히 함양하사 어렵고 의심나는 곳은 묻고 질의하여 크게 장발함에 있더니 그 당시 정산(貞山) 김선생(金先生, 김동진金東鎭)이 도탄(道灘)에서 도학(道學)을 강론할 때 향음례(鄕飮禮)를 서당에 베풀거늘, 석옹(石翁)의 명(命)을 받은 공이 폐백(幣帛)을 드리고 참례할 때 감동한 바가 많았고 여러 해 지도를 받아 빛나는 선비라 일컬음을 받은 것이 나의 백형(伯兄) 평생사니 비명(碑銘)을 부탁한다기로 못난 내가 말이 궁하고 지식이 엷어 나의 친구 부탁을 감당하기 어려우나 의리상 사양할 수만도 없어 붓을 잡으니, 공의 휘는 석호(碩鎬)요, 자는 무일(茂一)이며 호는 해암(海菴)이라.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다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에서 나왔으니 절의문장(節義文章)이 대를 이어 나서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씨가 되었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헌(寒暄) 김굉필(金宏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제현(諸賢)과 함께 화(禍)를 입은 휘 종준(宗準)이요, 호는 용재선생(慵齋先生)이 공에게 1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주호(周顥)요, 증조 휘는 상현(相鉉)이며 호는 만오(晩悟)니 사림(士林)에 명망이 있었고 고조의 휘는 두형(斗炯)이요, 호는 백은(白隱)이며 부친의 휘는 재창(在昌)이요, 호는 가산(稼山)이니 다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은 죽산안씨(竹山安氏)니 사인(士人) 수학(秀學)의 따님이요, 생가 부친의 휘는 재학(在學)이고 호는 건축재(健蓄齋)니 문학(文學)으로 명망이 이었고 생가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니 사인(士人) 진희(鎭禧)의 따님이다.
고종(高宗) 무술년(戊戌年, 1898년) 5월 16일 분천(汾川) 가호리(佳湖里) 자택에서 출생했다. 그때 안씨부인(安氏夫人, 양모養母)이 늦도록 생산을 못 하여 공을 양자(養子)한 지 6년 만에 성호(成鎬)를 낳으니 형제간에 되었다. 공이 생양가(生養家) 부모를 섬기되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서 남이 이간(離間) 말을 못 하였다 한다. 신사년(辛巳年, 1941년) 12월 13일에 졸하니 향년이 44세라. 공의 초취(初娶)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사인(士人) 정수(政銖)의 따님이니 석옹(石翁)의 손녀가 된다. 호평(虎坪, 범들이) 구역 마을 정좌(丁坐)에 안장하다. 재취(再娶) 청주정씨(淸州鄭氏)는 춘규(春奎)의 따님이오, 1남 5녀를 두니 아들에 제국(濟國)이오, 따님은 강길창(姜吉昌)·송병두(宋秉斗)·김주환(金周煥)·권영호(權寧浩)·김욱환(金旭煥)에 출가하였다. 제국(濟國)의 아들에 동춘(東春)·동률(東律)·동원(東元)·동우(東宇)·동걸(東杰)이요, 강길창(姜吉昌)의 아들에 영기(永基)·순기(順基)·윤기(潤基)·우기(宇基)·동기(東基)이고 송병두(宋秉斗)의 아들에 기환(基煥)이며 김주환(金周煥)의 아들에 규태(圭泰)·규봉(圭鳳)이고 권영호(權寧浩)의 아들에 두기(斗基)·휘곤(輝坤)이라.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의 쓸모있는 자질로 불행하게도 산전벽해(山田碧海)의 때를 만나 금수의 발자취가 횡행하니 생명을 보존하고 사는 것도 틀에 매인 종의 모양이라. 분연(奮然)히 광복(光復)할 뜻을 품고 권경섭(權景燮)·김창돈(金昌墩)·권인환(權麟煥)·류연화(柳淵和) 등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지방에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고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또 신학문(新學問)을 배우기에 바빴으나 지방이라서 너무 궁벽(窮僻)하여 불편하므로 자제들을 데리고 춘양(春陽)에 옮겨와서 모모(某某) 뜻있는 인사들과 세상을 저주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뜻이 왕왕(往往)이 표면에 나타나니 공의 강직한 바를 가히 알지니라. 이것이 색일 만하도다. 새겨 가로대
선대 업적을 이어 도의를 숭상하고 세상을 위하여 신학문(新學問)을 개척하니 초동목수(樵童牧豎)도 삼가 뜻이 있는 선비의 집을 헐뜯지 않으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