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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2세손 송암공 이효달] 松菴李公行狀(송암이공행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00:32

□판사공(判事公) 12세손 송암공(松菴公) 이효달(李孝達)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 6世孫 系子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춘영(春榮) → 7世孫 ①인담공(林潭公) 희백(希白) → 8世孫 ②쌍오당공(雙梧堂公) 처인(處仁) → 9世孫 ①임덕공(林德公) 동윤(東尹) → 10世孫 ①홍계공(鴻溪公) 종혁(宗赫) → 11世孫 ④일재공(一齋公) 광국(光國) → 12世孫 ①송암공(松菴公) 효달(孝達)

 

 

松菴李公行狀(송암이공행장)
-族後孫(족후손) 仁根(인근) 撰(찬)

 

公諱孝達字德三自號曰松菴其先慶州人新羅開國元勳諱謁平之后累傳至高麗朝諱之秀官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入李朝太宗朝有諱蔓實文持平承政院左承旨兼漢城判尹至吏曹判書一傳而有諱良直世宗朝弘文館典籍陞禮曹判書又一傳而諱思剛成均館博士侍講院輔德吏曹參議至大司成後六傳而諱希白字鄕蓮號林潭蔭參奉於公五代祖高祖諱處仁曾祖諱東尹祖諱宗赫俱有隱德考諱光國字亨弼號一齋妣南原楊氏宗八女純廟甲子生公于帶江面水鴻里本苐公生而氣禀俊秀才藝過人自髫髦時不與凡兒遊戯常侍在親側應對惟謹與弟友愛尤篤大人公甞撫愛之曰吾家之望在此兒耳年甫七歲受學于大人公聰敏頴悟能屬文字不煩敎督至成童文理能通著述俱格文人韻士之來觀者嘖嘖稱善純祖丁亥進士試合格後六年癸巳登文科甞與同僚講經義若決江河人皆推右而悅服伊時國步漸艱朝綱日弛無復有意於進就遂退隱林樊不復夢京華軟塵懋守先業不失儒家本色每與山翁野叟日夕談話少無慼慼底意甘窮忍苦志意則優優自靖盖其浩詣之深涵瀁之工有所蓄積也或登皐嘯咏臨流酣觴暢叙幽情消遣世慮若將遯世無憫而止可勝嘆哉乙卯年十二月十一日以無何之崇考終于寢享年五十三葬于帶江面水鴻里麻田陽地上麓艮坐原配淑人順興安氏士人相奎女晦軒裕后溫桑端正克配君子高宗丙戌八月十九日卒墓與乾位同原雙墳生二男一女晹雨鐏雨女適海州吳喆常晹雨男相琪相權女適全州李顯容淸州韓圭英和順崔春燮南原楊錫周鐏雨男相煥相攝餘不錄於戯公禀英俊之資兼聰明之才而慥慥焉篤學詩文足以鳴國家智能足以需世上而妙年折桂噪鳴一時擬有大施之望不幸運剝時違蟄伏林泉壽又不永何其天之所以卑之厚而又何以施之薄也日公之玄孫在英與再從侄洋鉉珖鉉氏抄其事行責余以狀行之文余在族親之末不可以不文固辭畧叙如右焉以竢秉筆君子之有所裁正云爾

 

壬申正元 族後孫 仁根謹撰

 


●송암이공행장(松菴李公行狀) 역문(譯文)
-족후손(族後孫) 인근(仁根) 찬(撰)

 

공은 휘는 효달(孝達) 자는 덕삼(德三) 호는 송암(松菴)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다. 신라(新羅) 개국원훈(開國元勳)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여러 대를 지나 고려(高麗)에 이르러 휘 지수(之秀)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封)했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태종(太宗)에 휘 만실(蔓實)은 문과(文科) 지평(持平)을 거처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겸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자의 휘는 양직(良直)이니 세종조(世宗朝)에 홍문관전적(弘文館典籍)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고 또한, 대(代) 내려와 휘 사강(思剛)은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처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뒤 6대를 내려와 휘 희백(希白)의 자는 향련(鄕蓮)이요, 호는 임담(林潭)으로 음직참봉(蔭職參奉)이니 공에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처인(處仁)이요, 증조의 휘는 동윤(東尹)이며 조의 휘는 종혁(宗赫)이니 모두 덕(德)이 있었다. 고의 휘는 광국(光國)이요, 자는 형필(亨弼)이며 호는 일재(一齋)요, 비(妣)는 남원양씨(南原楊氏) 종팔(宗八)의 따님으로 순조(純祖) 갑자년(甲子年)에 대강면(帶江面) 수홍리(水鴻里) 본택(本宅)에서 공이 출생하시다.
공은 나면서 기품(氣禀)이 준수하고 재주가 과인(過人)하여 어린 시절부터 다른 아이들과 작란(作亂)치고 희롱하며 노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부친 곁에 모여앉아 응대하는 것을 익히고 동생으로 더불어 우애함이 돈독하니 부친께서 사랑하셔 이르기를 ‘우리 집 희망이 이 아이에 있다.’ 하시더니 나이 일곱 살에 부친께 글을 배울세 총명영오(聰明穎悟)하여 문자(文字)를 잘 이해하여 가르침에 힘이 안 들었고 성동(成童, 15세)이 되면서 문리(文理)가 통하고 짓는 글은 규칙에 맞아 글 하는 선비들이 와서 보고 다투어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순조(純祖) 정해년(丁亥年)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뒤 6년 만인 계사년(癸巳年)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동료들과 시서(詩書)를 강론(講論)할 때는 강물을 따놓은 것 같으나 사람마다 높이 인정해주었다. 그 당시 나라 운세가 취약하여 나라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니 다시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 조상의 유업을 지켜 선비 집 긍지를 잘 지키고 산옹(山翁) 야수(野叟)로 더불어 밤낮 이야기로 소일하나 마음에 척척(慼慼)함이 없었고 가난함을 극복하고 괴로움도 견디어 뜻인즉,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니 평소 인격에 도야(陶冶)가 깊고 축적(蓄積)함이 있음이라. 혹 산에 올라 휘파람 불고 시냇가에서 술잔을 기울여 심정을 풀고 세상 걱정을 잊으니 가히 탄식할 일이로다. 을묘년(乙卯年) 12월 11일에 홀연히 별세하니 춘추(春秋)가 53이라. 대강면(帶江面) 수홍리(水鴻里) 마전(麻田) 간좌(艮坐) 산에 장사지냈다.
배(配)는 숙인(淑人) 순흥안씨(順興安氏)니 사인(士人) 상규(相奎)의 따님이요, 회헌(晦軒)의 후손이다. 온유하고 다정한 성품이 능히 군자(君子)의 배필이었다. 고종(高宗) 병술(丙戌) 8월 19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부군 묘와 쌍분(雙墳)이다. 2남 1녀를 낳으시니 역우(晹雨)와 준우(鐏雨)요, 따님은 해주(海州) 오철상(吳喆常)에 출가했으며 역우(晹雨) 아들에 상기(相琪)·상권(相權)이요, 따님은 전주(全州) 이현용(李顯容), 청주(淸州) 한규영(韓圭英), 화순(和順) 최춘섭(崔春燮), 남원(南原) 양석주(楊錫周)에 각각 출가했다. 준우(鐏雨) 남에 상환(相煥)·상섭(相攝)이고 나머지 자손은 다 기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은 영준(英俊)한 기상을 타고났고 총명한 재질을 겸하여 학문에 독실하니 시문(詩文)은 족히 국내를 진동시키고 지혜는 족히 세상을 다스릴만한 포부로 정년시절(丁年時節)에 등과(登科)하여 한때 칭찬이 분분하였으니 크게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불행하게 때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산림(山林)에 묻혔고 또 수명(壽命)이 길지 못하였으니 하늘이여 어찌 좋은 인재를 내고 야박하게 빼앗아가리오, 어느 날 공의 현손(玄孫) 재영(在英)씨 재종질(再從姪) 양현(洋鉉)과 광현(珖鉉)으로 함께 공의 행적(行蹟) 가지고 나에게 행장(行狀)을 부탁하니 내가 족친(族親)의 한 사람으로 글을 잘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양할 수만 없어 위와 같이 쓰고 훌륭한 분의 시정(是正)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