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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1세손 온성부사공 이희집] 穩城府使李公傳(온성부사이공전)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5:47

□판사공(判事公) 11세손 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이희집(李喜集)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 9世孫 증호조참판공(贈戶曹參判公) 경창(慶昌) → 10世孫 ①가애공(嘉崖公) 홍조(弘肇) → 11世孫 ②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희집(喜集)

 

 

穩城府使李公傳(온성부사이공전)
-李道翊(이도익) 撰(찬)

 

一日余侍坐先君子側先君子論當世事愀然歎曰古今天下經略之士無代無之而今世余有親炙者文武兼備治亂可宜如此君子汝知之乎小子避席對曰何如人哉曰通家之子竹馬之友禮山李大成也㪅問何如德哉曰俄所謂文武治亂猶屬餘事三綱主之百度備矣語及張皇始得其詳公諱喜集大成其字也其先慶州人丙子節臣檍曾孫知樞弘肇子府使喜夏弟也公生而超凡貌傑氣邁又好讀書事親敬兄之道以孝友爲法持身處家之節以修齊爲本在齠齕成大人矣及冠當 景廟癸卯增廣試藝於龍虎兩場唱名於虎榜世皆曰是人也懷握瑾瑜蘊抱韜鈐聖賢書兵家語無不貫熱穿楊之射藝摛虎之勇力絶倫超世可謂衛國干城支廈棟樑實孚古人矣 英廟戊申初隷宣傳官時有南賊陷淸州兵使李忠愍鳳祥營將南忠壯延年俱死賊到素沙朝野悚惶 上知公智略 特命與府郞洪某往探賊情奉 命即到賊陳賊勢猖獗不得渉跡公直欲赴陳洪曰彼强我弱若不獲而先死反爲 君主之憂不如秦復興師討之公亦然之仍還待罪上怒拿入棍罰洪至杖斃公亦受杖屢度義氣益壯因大臣所秦至承再遣之 命公以紬段裏仗處匹馬尺劔直赴賊賊魁方如廁公奮身突入斷獲賊臂左右衝拓摧拉朽枯恍如華川之役高固桀石漢水之戰趙雲挺鎗雄風烈氣與日月炳矣遂復命 上喜曰快哉忠哉喜集錄奮武一等勳其後歷敭淸顯屢典州郡治績到底著一以若雄健斯於囊鞬戎壇前進無量矣歲甲申出穩城府使莅任未幾德惠洽於一境歌謠播於四鄰命道多替邑運未泰翌年乙酉考終于客舘嗚呼公之穩城即任昉之新安也及其返櫬吏民號哭如喪考妣所過列邑愚夫愚婦莫不流涕以公之抱負未展驥步惜哉痛哉公之孝友忠信修齊治平之道動輒中矩先君子稱三剛主之百度備矣實得藻鑑也夫獎忠錄勳非不榮而 恩而位未顯達人鮮能知余悶其湮沒略以謏聞所見敢構顚末以斯不朽焉

 


●온성부사이공전(穩城府使李公傳) 역문(譯文)
-이도익(李道翊) 찬(撰)

 

어느 날 내가 선친(先親)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친께서 당시에 일을 의논하다가 우연히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천하(天下)에 훌륭한 인사가 많으나 내가 본 바로는 문무겸비(文武兼備)하여 치세(治世)에서나 난세(亂世)에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네가 알겠느냐?” 하시거늘. 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옵니까?” 가라사대 “우리와는 세의(世誼)가 있는 집안이요,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예산(禮山) 이대성(李大成)이니라.” 내가 다시 물어 왈 “어떤 것을 덕(德)이라 합니까?” 가로사대 “먼저 말한 문무겸비(文武兼備)하여 치란(治亂)에 적응하는 것은 오히려 뒷일이요, 3강(三綱)이 주가 되고 백도(百度)가 구비(具備)할지니라.” 말씀이 길어짐에 비로소 그 자세한 것을 알았으니 공의 휘는 희집(喜集)이요, 대성(大成)은 그 자라. 본관은 경주(慶州) 사람이니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사절신(死節臣) 억(檍)의 증손이요, 지중추(知中樞) 홍조(弘肇)의 아들이며 부사(府使) 희하(喜夏)의 아우라.
공이 나면서부터 범인(凡人)과 달라 모양은 영결(永訣)하고 기운(氣運)은 호매(豪邁)하고 또 글 읽기를 좋아하고 어버이 섬기는 것과 형(兄)을 공경하는 도(道)는 효우(孝友)로 위법(爲法)하고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절차는 수신제가(修身齊家)로 근본 삼아서 어릴 때부터 어른과 같으니 장성 후 경묘(景廟) 계묘(癸卯)에 용방(龍榜, 문과文科) 호방(虎榜, 무과武科) 양시(兩試)에 응시했다가 호방(虎榜)에서 이름을 부르니 세인(世人)이 모두 가로대 ‘이 사람은 가슴에 경륜(經綸)을 품고 도략(韜略)을 쌓아 성현(聖賢)의 글과 병가(兵家)의 글을 고루 읽어 버들잎을 뚫는 활 쏘는 재주와 호랑이를 잡는 공력이 세상에 뛰어나니 나라에 간성(干城)이 되고 큰 집에 들보 감이라 옛사람에 못하지 않도다’ 하더니 영묘(英廟) 초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니 그때 남쪽에 도적(盜賊)이 청주(淸州)를 함락하니 병사(兵使) 충민공(李忠愍)이 봉상(鳳祥)과 영장(營將)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이다.
전사(戰死)하고 적(賊)이 소사(素沙)까지 침범하니 일국이 경동이라. 임금이 공의 지혜와 도략을 알고 특명을 내려 홍모(洪某)와 함께 가서 적정(賊情)을 탐지하라 하여 명을 받들고 적진에 도착하니 적세가 창궐하여 염탐할 수 없는지라 공이 적진으로 뛰어들고자 한 대 홍씨(洪氏) 왈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한 대 뛰어들었다가 얻는 것도 없이 죽기만 하면 도리어 임금께 근심만 끼쳐 드릴지니 돌아가 다시 상주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공도 그렇게 여겨 돌아와 보고한대 임금이 대노하사 잡아들어 곤장을 맞아 죽고 공도 여러 번 맞았으나 의기가 당당한지라 대신들이 간(諫)하여 다시 가라는 명령을 내리니 공이 가는 천을 구해서 상처를 매고 필마(匹馬) 단검(短劍)으로 바로 적진에 도착하니 적괴(賊魁)가 변소에 거거늘 공이 몸을 날려 들어가서 적괴의 팔을 끊어 좌우충돌하니 장판교(長板橋) 싸움에 조자룡(趙子龍)과 같아서 영웅의 열기(烈氣)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다. 임금께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즐겨 왈 ‘쾌재(快哉)며 충재(忠哉)로 다하시고 희집(喜集)은 분무(奮武) 1등공신(一等功臣)에 기록하라’ 하시다.
그 뒤에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을 거쳐 여러 차례 군수(郡守), 부사(府使)를 재임하는 중 치적이 항상 1등이라 영웅의 재목으로 앞길이 무궁함을 기약했으니 갑신년(甲申年)에 온성부사(穩城府使)로 나가 얼마 안되는 사이에 덕화가 한 지경에 흡족하니 노래가 사방으로 펴졌더니 운명이 다 되었는지 그 고을 운이 없는지 이듬해 을유년(乙酉年)에 관사에서 순직하니 신안(新安)에 임방(任昉)과 같은지라. 반구(返柩)하는 날 관민(官民)이 통곡하기를 부모 죽은 것과 같이하니 지나는 곳마다 평범한 남녀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 없었다. 공의 포부로 큰 포부를 펴보지 못했으니 아깝도다. 공의 효우충신(孝友忠信)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道)를 겸비하였으니 삼강(三剛)을 주로하고 백도(百度)를 구비했다는 군자(君子)의 말이 맞도다. 충신(忠臣)을 장발하고 공신(功臣)을 추대받는 것이 영화(榮華)가 아닌 것은 아니나 지위가 높지 않아 아는 사람이 적으니 내가 그 공의 행적(行蹟)이 없어지는 것을 민망히 여겨 듣고 본 바를 기록하여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전하기를 바라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