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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군 4세손 가선대부공 이주봉] 嘉善大夫慶州李公立奉墓誌銘(가선대부경주이공입봉묘지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1. 15:45

□계천군(鷄川君) 4세손 가선대부공(嘉善大夫公) 이주봉(李柱奉)

 

【계대(系代)】 ①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 1世孫 ②양평공(襄平公) 양생(陽生) → 2世孫 ②금동(金東) → 3世孫 일복(日復) → 4世孫 통정대부공(通政大夫公) 춘통(春通) → 5世孫 ①광해(光海) → 6世孫 ①가선대부공(嘉善大夫公) 주봉(柱奉)

 


嘉善大夫慶州李公立奉墓誌銘(가선대부경주이공입봉묘지명)
–光山(광산) 金憲洙(김헌수) 撰(찬)

 

盖人之在世而篤行孝友克修事業爲範於後日永世而欽慕不己者一也且享老至歸土而封築四尺楸老草宿瞻仰於後人指點而式敬無己者亦一也第念有祖而孫有墓而有右是子孫仁明之責而亦爲述家事也永嘉文東中谷楓峴 亥坐原故嘉善大夫慶州李公冠舃之修藏也山明水麗左右軆局逶迤抱似無陵谷之患距今三百餘載而中有一碣風磨雨洗刻字難讀則爲後孫圭八感愴欲改而來我㝢局責公幽宅以之文甚追孝也美事也乃固辭之餘○其狀而叙之公諱立奉字春彦系出慶州李氏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封月城君諱之秀之后至諱揆四宰貞烈公之孫諱陽生自城秋卜安東金溪後移英陽自英陽又卜砧谷累轉累泊家計荒落田園萻籍蕩失無餘曾祖諱金東祖諱光海考諱日復妣完山李氏公生于辛丑七月十五日外表儁偉而隆準廣頰兩眼如射且聲響淸越及長志氣弘遠言論定確不以一毫之苟施於外人知其人知其志者切不以私慢弄歔之說少及于晋相交之際時與知己許心之人消暢於山水亭臺之間然而素不貯畜市箱俱空無有可考影響且田園庭碩之間蒔花種樹愛賞不己而以致幽人高居之趣時則右耳足跡不近權貴之門而守我本分不失素志常德綿遠遺風永斬一心紹述絡莫修志常抱慨鬱文思而訓子教孫別樣加勵而只俟好還之日矣以疾絡于寢歲丙辰正月十九日墓在上配不載譜書而姓氏及卒墓是爲子孫文染慩汝處生六男二女長戒鳳次日伊金次一德日化益令阿只女池午山姜五山戒鳳無子以日化爲子孫曾以下多不錄銘曰
可以信而終莫信之者書也 不可信而無疑信之書也 錄於譜而漏以不載 欲爲詳而無憑可考 當日修譜不免之咎 臨時秉筆懸疑之致 配位失傳千古幽明之恨也 考位改碣現代子孫之誠也 楓峴之麓紀德改竪 有崇封士神應悅豫 山益增翠玆丁吉辰 水亦起 敢告事由
西紀一九八五年乙丑九月上浣

 


●가선대부경주이공입봉묘지명(嘉善大夫慶州李公立奉墓誌銘) 역문(譯文)
–광산(光山) 김헌수(金憲洙) 찬(撰)

 

인간이 세상에 나서 행실을 착하게 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사업에 충실하여 뒷날에 모범이 되어 길이길이 흠모하는 것이 그 한 가지요. 또한, 늙어 세상을 떠난 뒤 묘에는 백양이 늙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행인들이 가리켜 공경하고 추모를 받는 것이 또한, 가지라 생각건대 조상이 있으면 자손이 있고 묘에는 돌을 세우는 것이 자손의 책임이요. 또한, 집을 다스리는 일이다. 영가(永嘉, 안동安東) 중곡풍현(中谷楓峴) 해좌(亥坐)의 언덕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주이공(慶州李公)의 산소라. 산은 밝고 물은 고와 좌우 산세가 잘 싸여 실전할 염려가 없다. 삼백 년 동안 오래된 돌이 하나 있으나 비에 깎이고 바람에 퇴색이 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 자손들이 걱정하고 장차 돌을 고쳐 세울새 나를 찾아 비문을 부탁하니 조상을 위하여 효성 된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라 사양 타가 마지 못해 원고를 상고하여 비문을 쓰니
공의 휘는 입봉(立奉)이요, 자는 춘언(春彦)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 휘 지수(之秀)의 후손이요. 휘 규(揆) 사재(四宰) 정렬공(貞烈公)의 손자 휘 양생(陽生)이 월성군(月城郡)에서 안동(安東) 금계(金溪)로 옮겼다가 뒤에 영양(英陽)으로 옮겼고 뒤에 또 침곡(砧谷)으로 옮기니 여러 차례 옮겨 사느라고 가세는 곤란하게 되었다. 중조의 휘는 금동(金東)이요, 조의 휘는 광해(光海)며 부친 휘는 일복(日復)이고 모친은 완산이씨(完山李氏)니 공이 신축년(辛丑年) 7월 15일에 출생하다. 공이 나면서 외모가 준수하고 넓은 이마와 높은 코에 소리는 맑고 눈은 밝으니 크면서 뜻이 넓고 조금도 남을 업신여기는 말을 않고 군자(君子)와 더불어 사귀어 산수(山水) 경계 좋은 곳에 소창(消暢)하고 지은 글은 못 하는 일이 뒷날 상고할 길이 없으며 뒤안에 꽃과 나무를 심어 왕성하니 은인의 높은 취지를 엿볼 수 있다. 지위가 높고 권세 있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고 나의 본분만 지키면서 아들과 손자의 교육은 특별 유의해서 좋은 날만 기다리더니 병진(丙辰) 정월(正月) 19일에 별세하니 묘소와 배위(配位) 성씨(姓氏)도 기록이 없으니 자손에게 한이 된다. 6남 2녀를 출생하니 장(長)에 계봉(戒鳳)이요, 다음이 일이금(日伊金)이고 다음이 일덕(一德)·일화(日化)·익령(益令)·아지(阿只)이고 따님은 지오산(池午山)·강오산(姜五山)에 출가했다. 계봉(戒鳳)이 아들이 없어 일화(日化)의 자손으로 뒤를 이었다. 손·증손이 많아 다 기록 못 한다.
명왈(銘曰) 가히 믿음직하면서 믿지 못할 것이 글이요, 믿지 못할 것에 의심 없이 믿는 것도 글이다. 족보에 기록하면서 빠트렸으니 수보(修譜)할 때 소홀히 한 책임도 면키 어렵다. 더욱 배위(配位)의 실전(失傳)은 천고자손(千古子孫)의 한이요, 고위(考位) 개갈(改碣)은 지금 자손의 정성이라 풍현(楓峴) 기슭에 덕(德)을 기록하고 돌을 세우니 높은 봉숭(封崇)에 영혼은 즐겨할지라. 산은 더욱 푸르고 흔흔(欣欣)한대 길일을 바다. 이에 고합니다.
서기 1985년 9월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