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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군 17세손 농은공 이중현] 孝子慶州李公農隱墓碣銘(효자경주이공농은묘갈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15. 23:10

□계천군(鷄川君) 17세손 농은공(農隱公) 이중현(李重鉉)

 

【계대(系代)】 ①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 1世孫 ①현감공(縣監公) 길상(吉祥) → 2世孫 ③현감공(縣監公) 오(䎸) → 3世孫 돈녕도정공(敦寧都正公) 사종(嗣宗) → 4世孫 ④통덕랑공(通德郞公) 방(昉) → 5世孫 첨추공(僉樞公) 문간(文幹) → 6世孫 삼각산인공(三角山人公) 홍진(弘震) → 7世孫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민첨(民瞻) → 8世孫 ②통덕랑공(通德郞公) 준(浚) → 9世孫 첨지공(僉知公) 세기(世機) → 10世孫 系子 규(珪) → 11世孫 시화(時華) → 12世孫 ②우신(禹臣) → 13世孫 ②원태(遠泰) → 14世孫 系子 의석(義錫) → 15世孫 ①돈형(敦炯) → 16世孫 ①재선(在善) → 17世孫 ①농은공(農隱公) 중현(重鉉)

 


孝子慶州李公農隱墓碣銘(효자경주이공농은묘갈명)
–族后孫(족후손) 仁根(인근) 謹撰(근찬)


夫孝者人所當行之事而實難行者亦孝也故通古今而鮮能行之者由未克實用其誠盡其誠則天必鎰之降以不時之物古有王祥今有李公農隱也公諱重鉉慶州人也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后麗末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爲派祖入李朝諱蔓實吏曹判書是生諱從直鷄川君累傳至諱遠泰諱義錫諱敦炯是公之高曾祖也考諱在善字仁善妣孺人密陽朴氏弼漢之女西紀一八九八年戊戌一月十六日生公于連山面漁隱里第公生而容貌端正氣像淸雅自孩提時己能一心愛親克盡子識問寢親膳必誠必敬遊必有方歸即返面一無小懈恒侍親側愉色滿容出外而有見則祥告有命則疾趨有異味必手進養極志體日常孝行筆不可以盡記當兩親之先後沉痼書宵侍湯夜不鮮帶母病臥至誠着護百藥無效滿然憂灼足不履地醫云蚯蚓最良聞之即日百方求之湯獻見效父患甚重病口惟思生鯉時天寒氷合公直徃江濱泣懇漁翁反以匪時無計辭之公乃自剖氷下釣得尺鯉歸供果得神效及後丁艱祈天代命其夜夢中有神啓翌日徃先塋后則果有偸葬發掘而以延須臾哭泣頓絶更蘇初終葬祭克禮無憾三年侍墓風雨不廢於乎世降俗渝人不興孝今世如公者果幾人哉丙子五月一日考終于寢遠近聞訃者莫不泣下曰孝子亡矣葬于連山面漁隱里士實谷亥坐原配韓山李氏進士承用女亦有孝行自鄕校家表彰配光山金氏達洙女生三男六女長龍濬次虎濬象濬女適延日鄭禹鎔咸平李載完光山金永珠江陵崔昌集坡平尹太奉金海金榮完龍濬男根培根成根和女適坡平尹泰舜虎濬男根一象濬男根必餘不錄鄕人以至行不容泯晦扶餘文廟任員一同决議發闡資憲大夫完山李載現撰孝行讚揚文而頒布中外使人興孝敦倫之風豈不善哉日其嗣允龍濬甫責余以顯刻之文敢不固辭依見聞者而畧叙之如右焉系之以銘銘曰 行孝而爲世人之龜鑑至誠而爲天神之應感伐石而記生平之懿蹟鐫石而資百千之共覽
族后孫 仁根 謹撰

 


●효자경주이공농은묘갈명(孝子慶州李公農隱墓碣銘) 역문(譯文)
-족후손(族后孫) 인근(仁根) 근찬(謹撰)

 

무릇 효도(孝道)란 사람마다 행할 일이나 실지로 행하기 어려운 것도 효행(孝行)이라. 고로 고금을 통하여 효(孝)를 행함이 드문 것은 그 정성을 쓰지 않음이니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살피시어 때아닌 물건을 내리시나니 옛날에 왕상(王祥)이 있듯이 지금이 이공(李公) 농은(農隱)이 있도다.
공의 휘는 중현(重鉉)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라.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고려말(高麗末)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을 봉했으니 파조(派祖)가 되고 조선(朝鮮) 때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아들 휘 종직(從直)은 계천군(鷄川君)이요,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원태(遠泰), 휘 의석(義錫), 휘 돈형(敦炯)이 공의 고조·증조·조부가 되고 고의 휘는 재선(在善)이요, 자는 인선(仁善)이며 비(妣)는 유인(孺人) 밀양박씨(密陽朴氏)니 필한(弼漢)의 따님이다. 서기 1898년 무술(戊戌) 1월 16일 연산면(連山面) 어은리(漁隱里) 집에서 출생하다.
공이 나면서 얼굴이 단정하고 기상이 맑으며 어릴 때부터 극진히 부모를 사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잠자리를 살피고 음식에 반찬을 정성껏 해드리고 출입할 때도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드리고 돌아오면 반드시 알려드리며 어버이 곁에 모셨을 때 화한 얼굴을 하고 밖에 나갔다가 보고 들은 것은 상세히 보고하고 부모님이 부르시면 빨리 달려가고 이상한 음식이 있으면 먼저 부모님께 드려서 뜻과 마음을 확실히 봉양하니 날로 행하는 효행(孝行)은 붓으로 다 기록할 수 없다, 양친이 편치 않을 때는 밤낮으로 약을 달여드리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으니 모친이 와병(臥病)에 지병으로 간호하되 백약이 무효하니 걱정이 태산 같아 발이 땅에 붙지 않더니 의원의 말이 지렁이가 좋다 하여 듣는 즉시로 백방으로 구해서 달여드렸더니 효험을 보았고 부친의 우환(憂患)이 심할 때 잉어를 자시고 싶다 하나 때가 엄동이라 냇물이 얼어붙었는데 공이 어부를 찾아 잉어를 부탁하니 어부는 때가 아닌 잉어를 잡을 수 없다고 거절하거늘. 공이 직접 강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넣으니 월척의 잉어가 잡히는지라. 돌아와서 달여드렸더니 효험을 보았고 뒤에 부친의 병환이 위중할 때 자기 몸을 대신하겠다고 빌었더니 그날 밤 꿈에 신령의 가르침을 듣고 이튿날 윗대 산소에 가보니 과연 묘 뒤에 투장(偸葬)이 들었거늘. 파서 옮기고 몇 날 연명을 했으나 결국 세상을 뜨니 너무 슬피 울어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나다. 초상(初喪)과 장례(葬禮)와 제사(祭祀)에 유감없이 예절을 맞게 치렀고 3년간 시묘(侍墓)를 할 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하였다. 세상과 풍속은 오염되어 사람들이 효를 행치 않으니 지금에 공과 같은 이가 얼마나 될까. 병자년(丙子年) 5월 1일에 별세하니 원근(遠近) 사람들이 듣고 눈물을 흘려가로대 효자가 죽었다고 탄식하다. 연산면(連山面) 어은리(漁隱里) 사실곡(士實谷) 해좌(亥坐) 언덕에 안장하다.
배(配)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진사(進士) 승용(承用)의 따님으로 효행(孝行)이 있어서 향교(鄕校)로부터 효부(孝婦) 표창장(表彰狀)을 받았다. 계배(繼配)는 광산김씨(光山金氏) 달수(達洙)의 따님이다. 3남 6녀를 낳으니 장남에 용준(龍濬)이요, 다음이 호준(虎濬)이고 상준(象濬)이며 따님은 연일(延日) 정우용(鄭禹鎔), 함평(咸平) 이재완(李載完), 광산(光山) 김영주(金永珠), 강릉(江陵) 최창집(崔昌集), 파평(坡平) 윤태봉(尹太奉), 김해(金海) 김영완(金榮完)에 각각 출가하다. 용준(龍濬) 아들이 근배(根培)·근성(根成)·근화(根和)요, 딸은 파평(坡平) 윤태순(尹泰舜)에 출가했고 호준(虎濬) 아들은 근일(根一)이고 상준(象濬) 아들은 근필(根必)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 않는다.
지방 사람들이 공의 효행(孝行)이 묻힐까 두려워하여 부여향교(扶餘鄕校) 임원 일동이 효행발천(孝行發闡)을 결의하고 완산(完山) 이재현(李載現)이 효행찬양문(孝行讚揚文)을 지어 사방에 펴서 사람들이 효심을 가르치고 오륜(五倫)을 돈독히 하는 풍속을 진작(振作)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어느 날 공의 아들 용준(龍濬)이 나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하니 내 감히 사양치 못하고 보고 들은 바에 의하여 위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을 쓰노니 명(銘)에 왈(曰)
효(孝)를 행하여 세상 사람에 거울이 되고 정성이 지극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감동이 있었으며 비(碑)를 세워 행적(行蹟)을 기록하고 새겨서 백천만인(百千萬人)에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