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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군 12세손 초헌공 이발] 楚軒公家狀(초헌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15. 20:15

□계천군(鷄川君) 12세손 초헌공(楚軒公) 이발(李發)

 

【계대(系代)】 ①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 1世孫 ①현감공(縣監公) 길상(吉祥) → 2世孫 ②광주목사공(光州牧使公) 영(聆) → 3世孫 ①강서현령공(江西縣令公) 세양(世良) → 4世孫 ①증판윤공(贈判尹公) 호(豪) → 5世孫 ②사복시판관공(司僕寺判官公) 유정(惟精) → 6世孫 ①첨정공(僉正公) 질(晊) → 7世孫 진사공(進士公) 태응(台應) → 8世孫 ①현(絢) → 9世孫 ①봉노(鳳老) → 10世孫 ④협(莢) → 11世孫 ①사눌(思訥) → 12世孫 초헌공(楚軒公) 발(發)

 

楚軒公家狀(초헌공가장)
–男(남) 昌雨(창우) 述(술)

 

公姓李諱發字仲華號楚軒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諱謁平之後也至麗季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是生諱元林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吏曹判書是生諱從直贈判尹鷄川君於公爲十二代祖也自鷄川君五傳而有諱惟精司僕寺判官 宣廟壬辰扈 駕龍灣回路獲疾落住鳳山因以終焉鳳州之寓我李自公始也再傳而有諱台應成均進士首入於校院八人薦錄爲西州雅望是生諱絢絢生諱鳳休鳳休生諱莢莢生諱思訥即公之高曾祖禰而俱不仕以山水文籍自娛妣全州李氏範錫女公生于 正廟庚子四月二十七日天賦之姿聰明特達年纔六七便脫然欲學聖賢書十三成文章十七名冠八才士參同稧一道內識與不識莫不稱賞先王考性本嚴恪嫌其早就每當詞賦斤正之時雖文工意精必以墨塗改之曰此皆藻繪禰簿之態非典重溫雅之體也抑而責之故公之文詞絶去翰墨畦程而卒托於道德仁義炳如者以其有家庭素訓也歲在乙丑王父客於京師卒於貞洞旅次公以單身猝遭巨創半千里奔喪哀毀叫絶見者莫不掩泣送終諸節致誠致愼返葬于甘棠下泉洞子坐之原侍墓三霜晨夕號昊此非孝行疏節實是精誠所到服闋闢一精舍奉祭祀必敬處忌日如喪洞屬匪懈年踰弱冠旣失所怙遂無意於進取徜徉乎塵埃之表涵泳乎道義之源懷握瑾瑜不自衒鬻以壽終焉 哲廟甲寅四月八日也葬于泉洞先塋前子坐配白川趙氏邦蘭女生六男男長翼夏先公早卒繼男相浩相浩男晉炯其餘諸子諸孫名字以載譜牒中復何校擧哉嗚呼公之容貌溫潤如玉公之志操瀅潔若冰文以貫道詩亦脫胎固是士林冠冕述作模楷而辶+秋矣西土竟無汲引之路百世之下未免澌盡而泯滅玆豈非來許終天之痛耶顧以後生齒莾不敢爲溢美一語以俟立言君子倘或有哀其志而圖其所以不朽者歟

 


●초헌공가장(楚軒公家狀) 역문(譯文)
-남(男) 창우(昌雨) 술(述)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발(發)이요, 자는 중화(仲華)며 호는 초헌(楚軒)이니 경주인(慶州人)이다.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고려(高麗) 말 휘 지수(之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이며 휘 규(揆)를 생하니 벼슬은 사재(四宰)요, 시(諡)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을 생하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휘 만실(蔓實)을 생하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종직(從直)을 생하니 증판윤(贈判尹) 계천군(鷄川君)이니 공에 12대조가 된다. 계천군(鷄川君)부터 5대를 내려와 휘 유정(惟精)은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이니 임진란(壬辰亂) 때 어가(御駕)를 모시고 용만(龍彎)까지 갔다가 회로(回路)에 병을 얻어 봉산(鳳山)에 떨어져서 거기서 별세하니 봉산(鳳山) 땅에 우리 이가(李家)가 살게 된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이다. 2대를 내려와 휘 태응(台應)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 교원(校院) 8인 천록(薦錄)에 들어서 서주(西州)에서 명망(名望)이 있는 집이 되었고 이분이 휘 현(絢)을 생하고 현(絢)이 생 봉휴(鳳休)하고 봉휴(鳳休) 생 협(莢)하고 협(莢)이 생 사눌(思訥)하니 공의 고조·증조·조·고라. 다 벼슬을 아니 하고 산수(山水) 문장(文章)으로 즐거이 세상을 보냈다. 비(妣)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범석(範錫)의 따님으로 정묘(正廟) 경자(庚子) 4월 27일에 공이 출생했다.
하늘이 낸 공의 모습은 총명하고 활달하여 나이 겨우 6, 7에 성현(聖賢)의 글을 배우고자 하며 13세에 문장(文章)을 성취하고 17세에 이름이 여덟 재사(才士) 중에 으뜸이라 한 동네에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간에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고(王考)께서 성품이 엄격해서 너무 일찍 성취하는 것을 혐의(嫌疑)해서 매일 글을 고를 때는 비록 글이 잘 지었더라도 반드시 고르면서 말씀이 이 글은 추잡하고 경박한 태도요, 정중하고 온아한 격이 아니라면서 항상 꾸짖으니 공의 글이 화려한 문체는 버리고 결국 도덕에 의탁하여 나종 인의(仁義)가 밝아진 것은 선대훈계의 탓이라. 을축년(乙丑年)에 조부께서 서울에 가셨다가 정동여관(貞洞旅館)에서 별세하시니 공이 졸지에 대사를 당하여 5백 리 길에 분상(奔喪)을 가시어 애통혼절(哀痛昏絶)하니 보는 사람이 다 울었다. 초종장례(初終葬禮)를 예(禮)에 따라 치르고 감당하천동(甘棠下泉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고 시묘삼년(侍墓三年)에 아침저녁 하늘을 부르니 이것이 효행과 정성이 지극한 소치라. 복(服)을 마치고 집 한 채를 짓고 제사를 받들되 엄숙하고 공정하며 제삿날이 오면 상중과 같이하여 동동촉촉(洞洞屬屬)*)하고 나이 약관시절(弱冠時節)에 부친을 여의고 벼슬에 뜻이 없어 티끌 바깥세상에서 살고 도의의 근원 속에 함양하여 세상일에는 한눈도 팔지 않고 집에서 고종명(考終命)하니 철종(哲廟) 갑인(甲寅) 4월 8일이다. 천동선영(泉洞先塋) 앞 자좌(子坐)에 안장했다.
배(配)는 백천조씨(白川趙氏) 방란(邦蘭)의 따님이니 생 6남하다. 장남은 익하(翼夏)니 공보다 먼저 죽고 양자(養子)에 상호(相浩)요, 상호(相浩) 남에 진형(晉炯)이니 그 나머지 아들 손자의 이름은 보첩(譜牒)에 다 실려있으니 여기는 생략한다. 공의 용모는 따습고 맑기가 옥(玉)과 같고 공의 지조는 깨끗하고 정하기가 얼음과 같으며 글은 도(道)를 관통하고 시(詩)도 또한 탈태(脫胎)하니 사림(士林)에서 으뜸가는 인물이나 서토(西土)에서는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백세(百世) 뒤에는 점점 자취와 행적(行蹟)이 희미하게 없어지니 이 어찌 자손들의 종천(終天)의 한이 아니랴. 나 같이 우둔한 만생(晩生)이 감히 좋은 말로 꾸미랴. 할 말을 써서 뒤에 군자(君子)를 기다리노니 혹, 이 글을 어여삐 여겨 오래도록 썩지 않는 방법을 도모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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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동촉촉(洞洞屬屬) : 공경하고 삼가며 매우 조심스러움.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