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을 기리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2. 8. 23:41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을 기리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李濟珉)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와
모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선비
은행나무 아래에서 벗과 수담(手談, 바둑)을 나눈다.

 

1498년 무오년(戊午年), 어지러운 정국
점필재(佔畢齋, 金宗直)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유배(流配)된다.

 

부령(富寧)으로 귀양 가는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렀을 때
송(宋)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당개(唐介)를 송별하며 쓴 시(詩) 중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1)
한 구절을 벽에다 쓴다.

 

강직한 충성으로 쓴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인데
왕을 기롱(譏弄)한다는 걸로 여겨
다시 압송되어 국문(鞫問) 중에 생을 마감한다.

1507년 중종(中宗) 때 복관(復官)되었지만
집안은 이미 무너지고
후손들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뿔뿔이 흩어져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후학(後學)을 가르치면서 삶을 이어간다.

 

1649년 인조(仁祖) 때
춘파리사(春坡里社)에 용재공(慵齋公)을 모셨으며
현재 경광서원(鏡光書院)2)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1824년 순조(純祖) 때는
후손 이창욱(李昌郁)이 자료를 수집해서
동생인 눌재공(訥齋公, 李弘準)을 부집(附集)하여
용재유고(慵齋遺稿)를 발간하고
1911년 증보(增補), 편집(編輯)하여
용눌재양선생유고(慵訥齋兩先生遺稿) 삼간(三刊)까지 발간한다.

 

안동(安東) 금계(琴溪)에서 태어난 용재공(慵齋公)은
1477년 성종(成宗) 때 진사(進士)에 이어
14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한다.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 이조낭관(吏曹郎官)이 되고
일본(日本) 사신의 호송사(護送使)가 되어 동래(東萊)에 간다.


평안도평사관(平安道評事官)으로 가라는 명을 받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러 삼소도(三笑圖)의 시(詩)를 쓰고
1488년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1491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때
소(疏)를 올려 사간원(司諫院)의 서경거부(署經拒否)가 부당함을 알리고
1492년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의성부사인(議政府舍人)에 오른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서 시명(詩名)을 날리고
사율원(司律院)에서 율문(律文)을 가르친다.
1494년에는 의성현령(義城縣令)에 이르고
그 이듬해 연산군 때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소릉(昭陵)3)의 복위를 청한다.

 

1689년 숙종(肅宗) 때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추증(追贈)된 용재공은
의술(醫術)과 복서(卜筮)도 조예가 깊고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만들고
유양잡조(酉陽雜俎), 당송시화(唐宋詩話), 유산악부(遺山樂府) 등을 간행하고
사우(士友)들과 시(詩)를 음영(吟詠)하고
학(鶴)을 유난히 잘 그려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삼절(三節)로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장식화풍(裝飾畵風)으로 그러진 송학도(松鶴圖)
성암고서박물관(誠菴古書博物館)에
의서(醫書)인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
안동시(安東市) 풍산읍(豊山邑) 소산리(素山里)에
삼구정(三龜亭) 편액(扁額)
여러 고서박물관(古書博物館)에
문집인 용재유고(慵齋遺稿) 등이 잘 보전되어 있다.

 

5백 년도 지난 지금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공의 업적은 길이길이 빛나리라.

 

------------------------------
1)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 : 고충(孤忠)을 스스로 허여하여 중인(衆人)과 어우러지지 않도다.
2) 경광서원(鏡光書院) :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3길 131-24.

  1568년(선조 1)에 유정사(有定寺) 자리에 서당(書堂)을 창건한 뒤 1662년(현종 3)에 정사(精舍)로 이름을 바꾸어 배상지(裵尙志)와 이종준(李宗準)의 위패를 봉안했다.

  1649년(인조 27)에 다시 춘파리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이종준(李宗準)과 장흥효(張興孝)를 모셨으며, 1686년(숙종 12)에 서원(書院)으로 승격되어 세 사람의 위패를 옮겨서 함께 제사 지냈다.
3) 소릉(昭陵) : 문종(文宗)의 비(妃)이자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

 

 

<참고>

중국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 가는

당개(唐介, 송나라 강릉 사람, 1010~1069)를 송별할 때 지었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孤忠自許衆不與 / 고충을 자부한들 대중이 허여 않고,

獨立敢言人所難 / 홀로 서서 감언하긴 사람치고 어려워라.

去國一身輕似葉 / 나라 떠난 이 한 몸이 잎처럼 가볍지만

高名千古重於山 / 고명은 천만고에 산보다 무거우리.

竝遊英俊顔何厚 / 함께 놀던 영준들아 낯이 어찌 두터우냐.

未死奸諛骨已寒 / 죽지 않은 간유들도 뼈가 이미 써늘하리.

天爲吾皇扶社稷 / 하늘이 우리님 위해 사직을 붙잡을진대

肯敎吾子不生還 / 어쩌다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

 

*조선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WJA_10411011_001

*조선왕조실록 : http://sillok.history.go.kr/id/WKA_10407003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