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용재공◆이종준

용재 이종준의 생애와 추숭에 대한 연구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2. 6. 00:44

용재 이종준의 생애와 추숭에 대한 연구

 

서지정보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수록지정보 : 사학지 / 60권
저자명 : 임근실 ( Lim¸ Geun-sil )
등록일 : 2021.01.17
페이지 : 26페이지

 

한국어 초록
본고는 용재 이종준의 생애와 사후 추숭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종준은 성종과 연산군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희생된 인물이다. 그는 가학(家學)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은 후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였다. 그는 무오사화에 희생되어 유배형을 받아 귀향을 가던 중 다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가솔들은 안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고, 이후 그의 가문은 향촌 내부의 활동에만 주력하였다.

 

이종준은 언로(言路) 활동과 문명(文名)으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관료였다. 이종준은 시서화(詩書畵)에 재주를 가져 많은 일화를 남긴 문인(文人)이었다. 또한 이종준은 『유산악부(遺山樂府)』·『유양잡조(酉陽雜俎)』 등의 서적을 간행하고, 경상도 지도를 그렸으며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를 저술한 학자였다. 그리고 이종준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남효온(南孝溫)·권오복(權五福)의 친우였다.

 

이종준의 사후 추숭 과정은 그의 신원(伸冤)과 추증(追贈), 묘소 정비와 묘도문자(墓道文字) 저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의 설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종준은 16세기에 신원·복관이 되었고, 17세기에 추증되었다. 이종준의 묘소 정비와 묘도문자 저술은 주로 17세기에 이루어졌다. 묘소의 봉분을 다시 세우고 묘제(墓祭)를 지냈으며, 묘도(墓道)를 다시 세웠다. 이 시기에 묘표음기(墓表陰記)와 묘갈명(墓碣銘)도 작성되였다. 다음은 이종준을 제향하는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柏麓里社)의 설립이었다. 경상도 안동의 금계리에 건립된 금계리사(金溪里社)는 경광서원으로 발전하여 이종준과 장흥효(張興孝)를 제향하였다. 경상도 봉화의 백록리사는 이종준과 그의 동생인 이홍준을 함께 제향한 사우였다. 백록리사는 이후 봉화지역의 향현(鄕賢)을 계속적으로 추향하는 지역의 대표적인 사우였다. 이종준을 추숭하는 마지막 사업은 문집의 발간이었다. 사화로 인하여 가문이 위태로워진 이종준의 유고는 순조시대에 와서야 수습되어 간행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정리되었기 때문에 산일된 문장이 많았고, 문집이 완비되기까지 재간과 삼간을 거치며 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완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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