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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세손 천유당공 이덕연] 天有堂先生月城李公墓碣銘(천유당선생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24. 19:42

□용재공(慵齋公) 1세손 천유당공(天有堂公) 이덕연(李德淵)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天有堂先生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천유당선생월성이공묘갈명 병서)
-興海 裵東煥 撰(흥해 배동환 찬)

 

故寢郞天有堂先生李公衣屨之藏在順興府乾井古臺洞酉坐原後孫成鎬在根元根來余請顯刻之詞曰吾祖之世己近五百載矣禍家遺裔連世不振墓所亦失傳後乃捜得而尙闕表石若此而因循則恐來後又或有如前日之憂方竪短碣而世代寢懇文獻蕩然只有譜牒所載行蹟若干條惟人於吾家事不得無情幸據此而惠一言也余追思當日契分雖老洫無文敢不效誠於玆役也哉謹按公諱德淵字聖源天有堂其自署也慶州之李新羅佐命功臣謁平爲上祖中世四宰貞烈公諱揆於公爲六代祖也曾祖諱繩直大司憲錄淸白吏白祖諱時敏進士號琴湖考諱宗準進文校理 贈副提學遭燕山戊午士禍世稱慵齋先生妣永嘉權氏進士綽女無嗣公以從子入系生考諱公準訓導妣眞城李氏某女配原州邊氏生員廣女墓合窆生三男二女男胤恭胤儉俱參奉胤讓進士女權景銓生員權銘直長以下不盡錄世蹟有云公惟至孝事父母盡誠採山釣水以供滋味冬溫夏凊以適起居喪祭致哀敬敎子第必以先孝悌後文藝未甞從師遠方曰聖賢至訓自在方冊遂閉戶讀書不事擧業晩除齊郞不就甞謂吾家兩世羅禍幾無了遺而逮余無似保有軀命幸矣至於仕官爲適分隱約以終焉多著述而入於回祿不傳云云踈畧甚矣顧渺末後生何敢外是而忘僭一說以重不韙之誄也哉銘曰
名庭肖嗣晠代逸民大禍之餘戒懼持身一命奚有牢守林樊屢經燹刼世遠蹟湮幽堂茂沒莫的其眞玆孝誠求深目有人寒花寂慼雙淚延津源遠流長昆式繁琢此鐫玄石用詔千春

 

*백저문집(白渚文集) 下 卷之六 묘갈명(墓碣銘) > 천유당 이공 묘갈명‧天有堂李公墓碣銘-166

 

◈백저문집(白渚文集)은 배동환(裵東煥)의 文集이다.
○배동환(裵東煥) 1899년~1984년.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천유당선생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天有堂先生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흥해 배동환 찬(興海 裵東煥 撰)

 

옛 침랑(寢郞, 참봉參奉) 천유당선생(天有堂先生) 이공(李公)의 묘소가 순흥부(順興府) 건정(乾井) 고대동(古臺洞)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니 후손 성호(成鎬)·재근(在根)·원근(元根)이 나를 찾아 비명(碑銘)을 청해 가로대, 우리 조상의 대가 5백 년이 가까운지라 화(禍)를 당한 집 후예(後裔)가 대대로 한미(寒微)하게 살아서 묘소까지 실전(失傳)했다가 뒤에 찾았으나 아직 표석(表石)을 못 했으니 이같이 가다 보면 뒤에도 앞에 일과 같은 걱정이 있을까 두려워해서 비(碑)를 세울까 하나 세대(世代)가 오래되고 문적은 유실되어 다만 보첩(譜牒)에 실린바 약간의 행적뿐이니 남이 우리 집 일에 실정을 모를지니 이 보첩(譜牒)에 의거(依據)하여 한 말을 기록하여 달라 하거늘 나도 당일 계분(契分)을 생각하니 비록 늙고 글을 못 하나 이번 일에 정의를 본받지 않으리오. 공의 휘는 덕연(德淵)이요, 자는 성원(聖源)이며 천유당(天有堂)은 그 자호라.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상조(上祖)가 되고 중세(中世)에 사재(四宰) 정렬공(貞烈公) 휘 규(揆)가 공에 6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으며 조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진사(進士)에 호는 금호(琴湖)요. 부친의 휘는 종준(宗準)이니 문과(文科) 교리(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다. 연산(燕山)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했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모친은 영가권씨(永嘉權氏) 진사(進士) 작(綽)의 따님이다. 후사가 없어 공의 조카로서 양자로 삼았다. 생정(生庭) 부친의 휘는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이고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다. 배(配)는 원주변씨(原州邊氏)니 생원(生員) 광(廣)의 따님이요, 묘는 합폄(合窆)이다. 3남 2녀를 생하니 남에 윤공(胤恭)·윤검(胤儉)은 다 참봉(參奉)이요, 윤양(胤讓)은 진사(進士)며 따님은 생원(生員) 권경전(權景銓)과 직장(直長) 권명(權銘)에 출가했다. 이하는 다 기록 못 한다.
세적(世蹟)에 의하면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도하여 부모를 섬기되 성의를 다하고 산에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아 반찬을 궐함이 없고 겨울에 따스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케 해서 기거에 맞도록 하며 초상(初喪)과 제사(祭祀)에 슬픔과 공경을 이루고 자제를 가르치되 반듯이 효제(孝悌)를 먼저하고 문학을 뒤로하며 먼 곳으로 스승을 찾아가지 않고 가로대 「성현(聖賢)의 지극한 훈계가 서책에 있다 하고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며 과거에는 힘쓰지 않더니 늦게 제랑(齊郞)을 제수하나 취임치 아니하고 항상 이르기를 우리 집이 양대에 화를 만나서 거의 씨가 없다시피 되었는데 못난 내가 신명(身命)을 보존하니 다행이라. 벼슬 같은 것은 과분하다」하고 드디어 숨어서 세상을 마치다. 저술도 많이 했음 직하나 유실되고 전하지 않는다고 하니 소략(疏略)이 많다. 나 같은 후생(後生)이 마음대로 군말을 써서 거듭 옳지 못한 기림을 하리요.

 

명왈(銘曰)
이름있는 집 자손이 밝은 대에 먼 백성이라. 큰 사화(史禍)를 겪은 뒤라 경계와 두려움으로 몸을 가졌다. 한목숨이 어디 있었던가 산림(山林, 산속)에 살았도다. 화겁(禍劫)을 여러 번 겪고 대가 멀어지니 유적(遺蹟)이 없어졌다. 묘소까지 잃었으니 그 참을 어찌 알리오만은 효성으로 구하니 그 심복한 사람이 있도다. 찬 꽃만 적막하니 눈물만 흐르네. 근원이 멀매 흐름도 길지니 후손이 번성하리라. 이 돌에 새겨서 천추(千秋)에 밝게 고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