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기◆행장◆비명

[훈도공 이공준] 訓導月城李公墓碣銘(훈도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14. 18:39

□훈도공 이공준(訓導公 李公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④훈도공(訓導公) 공준(公準)

 

 

訓導月城李公墓碣銘(훈도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聞韶 金昌棋 撰(문소 김창기 찬)

 

永嘉府西二里琴溪村仕望洞負艮之原宰如而封者故訓導月城李公衣屨之藏也舊有短碣而迄今四百有餘年風打雨磿剝落殆盡隂記且不備恐愈久而愈無所證響諸孫爲是之懼將合謨改竪而使族人相彦憲鎬濬浩甫袖致世譜一卷責不侫以貫幽堂之述自惟藐然一後生識膚言淺何敢當是役也且今傳聞累歷公羊之世而文獻幷杞宋矣將何以闡幽其萬一哉辭之固而貴愈深乃强其所不能謹按譜而叙次之公諱公準字某姓李氏慶州人新羅佐命大臣諱謁平爲上祖高麗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中祖自後世襲圭組賢碩相承諱揆官四宰諡貞烈諱元林判司僕寺事八我 祖諱蔓實吏曹判書諱繩直大司憲以淸白見重考諱時敏俱中生進號琴湖始居今安東之琴溪里妣安東權氏縣監啓經女生四賢子長崇準忠順衛仲宗準弘文館校理贈副提學世稱慵齋先生享鏡光書院弘準成均進士號訥齋先生自琴溪移寓川城縣戊午禍後遯跡林樊無意進取獎進後學爲務縣風丕變爲士夫鄕者先生之力實多焉縣人追慕之爲先生與慵齋先生幷享于栢麓里社季卽訓導公也於乎公生長於赫世簪纓之緖薰陶於四棣詩禮之庭可謂鄧林之枝崑山之苗也宜其趍庭之訓塤箎之樂所以胚胎而培樸之者有可以藉手而禍網連仍巾衍蕩佚無片華落藻據信只以譜牒攷之則字號乃生卒年亦無記載可勝恨哉配眞城李氏墓同原上下墳畧記子孫于尾生三男德全僉樞德成僉知德淵出德全生一男一女胤培女適權瑞鯤德成生三男胤良胤淑胤賢德淵生三男二女胤恭參奉胤儉奉事胤讓僉知成均進士女適權景銓生員權銘直長胤培生一男天柱胤良生二男二女應春得春女適張門業宋福基胤淑生一男三女顥女適禹錫福申以吉裵寅吉胤賢生四男一女顗顒頔頲女適南有慶胤恭生三男一女煥燁燦壽陞嘉善女適安善興胤儉生一男一女民覺女適高應曙胤讓生二男一女廷秀民奭女適金益粹餘不盡錄系之以銘曰
肫肫惟公東都古家簪組世閥馨德揭揭制行以忠政家以禮匪勤易紹不積豈啓睠彼仕阡白楊蕭條水慷山聾雙釼同阜俾爾樵牧易不衿式我銘不諛昭示千禩

 


●훈도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訓導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문소 김창기 지음(聞韶 金昌棋 撰)

 

영가(永嘉, 안동安東) 서쪽 2리 허(墟) 금계촌(琴溪村) 사망동(仕望洞) 간좌(艮坐)의 언덕에 우뚝한 무덤이 옛날 훈도(訓導) 월성이공(月城李公)의 묘소이다. 전에 짤막한 비(碑)가 있었는데 4백 년 세월이 지난 지금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겨 다 떨어지고 글씨조차 보이지 않으니 요래가면 오래갈수록 더욱 고증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제손(諸孫)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장차 비(碑)를 고쳐 세우기로 합의하고 족인(族人) 상언(相彦)·헌호(憲鎬)·준호(濬浩) 등이 세보(世譜) 한 권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묘소의 비문(碑文)을 위촉하니 스스로 생각건대 막연한 지식에 천박한 후생이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리오.
또 이제 들으니 여러 차례 환란(患亂)을 겪고 문헌(文獻)이 다 없어졌다 하니 장차 무엇으로 그 만 분에 일을 들어낼까 해서 사양하니 사양할수록 책망이 더 심하여 부득이 붓을 들어 보첩(譜牒)에 의거하여 이 글을 쓰니 공의 휘는 공준(公準)이고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상조(上祖)가 되고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가 되고 뒤로부터 관작(官爵)이 계속되고 현인(賢人) 석덕(碩德)이 대를 이어 휘 규(揆)는 벼슬이 사재(四宰)요,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아조(我朝, 朝鮮)에 들어와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나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부친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호는 금호(琴湖)니 처음으로 안동(安東) 땅 금계리(琴溪里)에서 살다.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다. 네 분의 어진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에 숭준(崇準)이니 충순위(忠順衛)요. 가운데 분이 종준(宗準)이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으며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르고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配享)됐다. 셋째분이 홍준(弘準)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로 호는 눌재선생(訥齋先生)이니 금계(琴溪)로부터 천성현(川城縣, 지금의 奈城)에 옴겨 살았다. 무오사화(戊午史禍) 후로 자취를 산중에 숨기고 세상에 나설 뜻이 없이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데만 힘을 쓰니 고을 풍속이 크게 변화하여 사부향(士夫鄕)이 되었으니 선생의 힘이 실지로 많았다.
고을 사람들이 추모해서 선생(先生)과 용재선생(慵齋先生) 형제분을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입향시켰고 끝 분이 훈도공(訓導公)이다. 슬프다. 공이 잠영세가(簪纓世家,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온 집안)에 생장하여 사형제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가히 등림(鄧林)의 가지요, 곤산(崑山)의 싹이라 이름지라. 그 가정의 교훈과 훈호(塤箎, 형제의 낙)의 낙(樂)으로 가슴에 새겨서 행한 자취가 문적에 있으려만 화(禍)라는 그물이 연속 닥쳐 문적이 흩어져서 한 조각 증거도 남음이 없으니 다만 보첩(譜牒)에만 의지하여 상고한즉 자(字)와 호(號)와 나고 죽은 날이 또한 기록됨이 없으니 일이다.
끝으로 자손을 약간 기록건대 세 아들을 두었으니 덕전(德全)은 첨추(僉樞)고 덕성(德成)은 첨지(僉知)며 덕연(德淵)은 출계(出系)하다. 덕전(德全)이 1남 1녀를 두었으니 남에 윤배(胤培)요, 딸은 권서곤(權瑞鯤)에 출가하고 덕성(德成)이 3남을 출생하니 윤량(胤良)·윤숙(胤淑)·윤현(胤賢)이요. 덕연(德淵)이 3남 2녀를 출생하니 윤공(胤恭)은 참봉(參奉)이요, 윤검(胤儉)은 봉사(奉事)요, 윤양(胤讓)은 첨지(僉知)로 성균진사(成均進士)며 생원(生員) 권경전(權景銓), 직장(直長) 권명(權銘)에 출가했고 윤배(胤培)는 1남을 두니 천주(天柱)요. 윤양(胤良)은 생 2남 2녀하니 응춘(應春)·득춘(得春)이요, 딸은 장문업(張門業)·송복기(宋福基)에 출가했고 윤숙(胤淑)이 생 1남 3녀하니 남에 호(顥)요, 딸은 우석복(禹錫福)·신이길(申以吉)·배인길(裵寅吉)에 출가했고 윤현(胤賢)이 4남 1녀를 출생하니 의(顗)·옹(顒)·적(頔)·정(頲)이요, 딸은 남유경(南有慶)에 출가했고 윤공(胤恭)은 생 3남 1녀하니 환(煥)·엽(燁)·찬(燦) 수직가선(壽職嘉善)이요, 딸은 안선흥(安善興)에 출가했고 윤검(胤儉)은 생 1남 1녀하니 민각(民覺)이요, 딸은 고응서(高應曙)에 출가했고 윤양(胤讓)은 생 2남 1녀하니 정수(廷秀)·민석(民奭)이요, 딸은 김익수(金益粹)에 출가했다.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하고 이어 명왈(銘曰)

 

성실한 공은 동도(東都) 옛집이라. 벼슬이 대(代)로 계승(繼承)한 문벌(門閥)이니 명성(名聲)과 덕망(德望)이 양양(洋洋)하도다. 행실(行實)이 충(忠)으로 다듬었고 집은 예(禮)로 다스렸다. 부지런치 않으면 이어 가지 못하고 적덕(積德)지 않으면 어찌 열릴까. 저 사망(仕望) 언덕에는 백양목(白楊木)이 소슬 도다. 물은 슬피 울고 산은 귀먹은 체하니 쌍분(雙墳)이 언덕을 같이했네. 초동목수(樵童牧竪, 배우지 못한 식견이 좁은 사람)들은 어찌 조심하지 않으랴. 아첨(阿諂)함이 없는 글을 새겨서 밝혀 천추(千秋)에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