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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이종준, 눌재공 이홍준] 敬慕亭記(경모정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2. 16:37

□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②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 ③눌재공(訥齋公) 홍준(弘準)

 

 

敬慕亭記(경모정기)
-永嘉 權相圭 撰(영가 권상규 찬)

 

亭慕慵齋訥齋二先生而作也其地在鳳城治西水深之坊疊巘鎭其後麗水經其前淑氣所鍾名碩輩出盖南土之名勝也近者月城氏各派不謀而胥字連墻接戶頗有一家氣像一日相謂曰吾李之在嶺土者不爲不多而散住各地有若孤宗冷族尋常恨之今倖若爾家一閈相會優樂與共此殆祖先之隂相者且念吾宗之尙能冠儒腹儒齒列於人者盖慵訥二先生遺蔭也盍起一亭宇效古人羮墻之慕乎遂相地也所居後岡起棟宇四間堂室占半而溫凉適宜超忽而眺望甚敞乃顔之曰敬慕屬相圭記之圭歛袵敬歎曰有是哉天之相斯文也琴溪之杏樹火矣栢麓之社享撤矣吾黨之敬慕先生幾乎無地而斯亭之作乃於栢社㳰蒼 之地是雖出於月城氏孝慕之誠而亦豈非有陰相者存使吾黨後生有所瞻慕而興起者耶於乎二先生偉忠至德昭載史乘懔乎若秋天日月仰之如泰山北斗非後學所敢贅設然竊嘗謂仲公斥邪扶正爲王國藎臣叔公藴德抱德爲鄕黨宗師其出處事爲有若不同其心法之正問學之精則未或有異盖道無通塞達可行國窮則敎於鄕使二先生而易也則皆然也然則二先生之所異者蹟而所同者道也使登斯亭者慕先生之心講先生之道在於鄕而行叔公社約之規立於朝而效仲公廟謨之忠則庶可以見二先生道德之一致而吾之或出或處亦隨所遇而各盡其道矣苟如是則亭也不但爲一家寓慕之所其於儒紳興起之方不爲無助不亦休歟謹爲說用勉于亭中諸君子云

 


●경모정기(敬慕亭記) 역문(譯文)
-영가 권상규 찬(永嘉 權相圭 撰)

 

정자(亭子)는 용재(慵齋)·눌재(訥齋) 두 선생을 추모(追慕)해서 지음이라. 그 위치가 봉성(鳳城) 서쪽 물 깊은 마을에 있으니 첩첩(疊疊)한 산봉우리가 뒤에 진정하고 맑은 물이 앞을 지나니 남쪽에는 명승지라.
근간(近間)에 월성이씨(月城李氏) 각파(各派)가 우연히 서로 모여 담이 연(連)하고 지붕이 닿으니 자못 한집 문호를 이루었더니 하루는 서로 말하기를 「우리 성이 영토에 있는 수효가 많은 되, 각 지방에 흩어져 살아서 외롭고 냉락(冷落)한 종족(宗族) 같은지라. 항상 한탄스럽더니 이제 다행히 한 마을에 모여서 즐거움과 근심을 함께하니 이것은 조상님의 도우심이라. 또 한편 생각건대 우리 일가가 오히려 유가(儒家)의 의관(衣冠)을 쓰고 유가(儒家)의 옷을 입고 다른 사람들과 위치(位置)를 함께하는 것은 대개 용재(慵齋)·눌재(訥齋) 두 선생의 은덕(恩德)이니 어찌 한 칸 정자를 이룩하여 옛사람 갱장(羹墻)의 본받음을 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마을 뒤 언덕에 터를 정하고 네 칸 집을 지을 세. 마루와 방이 반반이라 따스하고 시원함이 적당하고 높이 솟아서 앞이 시원스레 관망(觀望) 되니 이에 정자(亭子) 이름을 경모(敬慕)라 하고 상규(相圭)에게 정자기(亭子記)를 위촉하니 내 옷깃을 여미고 경탄해 가로대 이 일이 있음은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우심이로다.
금계(琴溪)의 은행나무는 불에 타고 백록사(栢鹿社)도 훼철(毁撤)된 뒤라 우리들이 두 선생을 추모하려 해도 땅이 없으니 이 정자(亭子)의 지음이 백록사(栢鹿社) 유적지(遺蹟地)라 이 일이 비록 월성이씨(月城李氏)들의 효모(孝慕)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나 또한 음(陰)으로 돕는 자 있음이 아닐까. 우리 무리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첨모(瞻慕)하고 흥기(興起)할 바가 있게 함인가.

 

슬프다. 두 분 선생의 큰 충심(忠心)과 덕망(德望)은 역사(歷史)에 밝게 실어서 늠름하기가 가을하늘에 일월(日月)과 같고 우러러보기를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으니 후학(後學)들의 감히 군말할 바가 아니나. 생각건대 중씨(仲氏, 용재)는 간사(奸邪)한 것을 물리치고 정의(正意)를 붙들어 나라에 절신(節臣)이 됐고 숙씨(叔氏, 눌재)는 덕을 쌓고 도를 닦아 향당(享堂)에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형제분의 행한 일이 같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마음에 바름과 학문의 정일(精一)함인 즉 다름이 없으니 대개 도는 막히는 법이 없어 달할 때는 나라에 행하고 궁(窮)한즉 향당(享堂)에서 가르치니 두 분 선생으로 하여금 자리를 바꾸면 다 그렇게 할지라. 그러니 두 분 선생의 다른 바는 업적이고 같은 바는 도의라.
이 정자(亭子)에 올라서 선생의 마음을 추모(追慕)하고 선생의 도를 강돈(講敦)하여 향당(享堂)에 있어서 숙공(叔公, 눌재)의 사약규모(社約規模)를 행하고 조정에서는 중공(仲公, 용재)의 나라에 충의(忠義)를 본받으면 가히 두 분 선생의 도덕(道德)이 일치(一致)함을 볼 것이요. 나의 출입할 때 입장에 따라 각각 그 도(道)를 다 할지니 이같이 하면, 이 정자(亭子)가 비단 한 집안 추모(追慕)한 곳일 뿐 아니라 유림(儒林)의 흥기(興起)하는 데에도 도움이 없지 않으리니 아름답지 않을까. 삼가 몇 말로 정중(亭中) 모든 군자(君子)에게 면려(勉勵) 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