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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위공 이숭준] 忠順衛月城李公墓碣銘(충순위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2. 16:26

□충순위공 이숭준(忠順衛公 李崇準)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 6世孫 ①충순위공(忠順衛公) 숭준(崇準)

 

 

忠順衛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충순위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 權中煥 撰(영가 권중환 찬)

 

故忠順衛李公衣舃之藏在安東之豊山小池洞坐酉原而未遑銘欠典也後孫諸氏惕焉謀伐石表碣而使族人成鎬直東甫諸銘於中煥噫公之世己四百年餘文獻旣無徵且藐玆蔑識生乎四百年之後欲臆揣四百年前先輩爲之文無亦犯 儧妄之罪乎但事契有不可恝則謹撮其遺事所錄而叙之可乎按公諱崇準字興生姓李氏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上祖高麗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中祖入我鮮判司僕寺事諱元林吏判諱蔓實大司憲諱繩直進士諱時敏號琴湖寔公高曾祖考禰安東權氏縣監啓經女公大夫人也永嘉之琴溪村卽公降生地也公自髫齡以恬靜沈黙見稱及長與仲公慵齋宗準叔公訥齋弘準及季公公準友愛尤篤居一室共學業上以承赫世簮組之緖下以篤棣樓講磨之工其文章學術早晩將有爲於世而及當彙征之運則期顯揚於仲叔二公若事親奉先政家接物之責公實擔夯一以守先業安分命爲潜修晦養之地而未甞作趨時俯仰之態及戊午禍起眼見忠賢駢戮而邦運不古益念絶也路爲隱名終老計而遂避地于豊縣參于縣之豊岳書堂敬老會而與一時名碩互相追從寓樂書史㶊養性靈凡世之窮享得喪視之若太虛過雲每佳辰令節逍遙歌詠於煙雲水石翛然作物外高標而終爲元祐完人在公則可謂安於所爲不以窮達顯晦有所加損而在世道則豈可不慨恨也哉公生卒年月日世遠難詳配淸州鄭氏司直仁老女生一男德林蔭參奉三女鄭貴卿黃瓚參奉金鵬德男菖將仕郎萱苡莘女適朱贇縣監菖男應福應祿應祚出應祐女適朴瑞龍萱男應祐女適孫盡仁禹世隣安好仁苡嗣男應祚莘男應祉女適鄭海龍權審祿男成樑成楹祜男成橃祐男成楫女適權守道祚男成極餘不錄嗚呼公以琴湖公爲嚴父以慵訥二公爲賢弟想當日趨庭詩禮之訓塤箎唱和之蹟必多可傳於後者而禍網荐仍文籍散佚公之名與行寥蓼無聞於四百年之久深爲掌古家齎恨矣今其後孫俊鎬採菖家庭傳聞及諸家可攷文字幷述其世系子孫錄刻之石傳諸後公之潜光幽蹟庶可自此而著顯得萬一矣未知此亦隱而顯晦而明有積必發之理也否銘曰簮組之世而絶意仕路深懲乎禍網酷烈彙征之日而歛述林樊有覺乎保身明哲可想名行之卓越當時深恨事蹟之沈泯歷世謹撮其傳聞銘于石詔後裔

 


●충순위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忠順衛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 권중환 지음(永嘉 權中煥 撰)

 

충순위(忠順衛) 이공(李公) 묘소가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소지동(小池洞) 유좌(酉坐) 언덕에 있으나 비명(碑銘)을 못한 것이 떳떳지 못한 일이라 자손들이 근심하여 돌을 깎아 비(碑)를 세울 때 족인(族人) 중에 성호(成鎬)와 직동(直東)으로 하여금 나 중환(中煥)에게 비명(碑銘)을 청하거늘.
슬프다. 공이 세상에서 간지가 이미 4백여 년이라 문헌(文獻)이 없어 고증할 곳이 없고 또 아득한 옛일이라 나같이 용렬한 것이 4백 년 뒤에 나서 4백 년 전의 일을 억측하고자 하는 것이 선현(先賢)들의 쓴 글에 비해 잠람한 죄나 범하지 않을까. 다만 모든 일이 글에 의하면 고증할 수 없으면 그 유사(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바를 모아서 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공의 휘(諱)는 숭준(崇準)이고 자(字)는 흥생(興生)이며 성은 이씨(李氏)니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다.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상조(上祖)가 되고 고려(高麗) 광록대부(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가 되고 아조(我朝, 朝鮮)에 들어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과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과 대사헌(大司憲) 휘 승직(繩直)과 진사(進士) 휘 시민(時敏) 호는 금호공(琴湖公)이 공의 고조·증조·조부·부친이 된다.
안동권씨(安東權氏)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 이공(李公)의 모친이며 안동(安東) 땅 금계(琴溪) 마을이 공의 출생지이다. 공이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과묵하다는 소문이 났으니 크면서 동생 용재(慵齋) 종준(宗準), 눌재(訥齋) 홍준(弘準), 끝 동생 공준(公準) 삼 형제로 더불어 우애가 돈독하여 한방에서 학업을 함께할 세.

 

위로는 대대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형제가 갈고 닦은 공부를 독실히 해서 그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조만간에 세상에 쓰임이 있을까 했더니 중숙(仲叔) 두 동생에게 출세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기약하고 공은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을 받들며 가정을 다스리고 사물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담해서 한편으로는 조상세업(祖上世業)을 지키고 분수에 맞도록 행동하고 닦고 기르는 것은 감추고 숨겨 때에 따라서는 활동은 일체(一切) 아니하더니 무오년(戊午年) 화(禍)가 일어나서 충신(忠臣)과 현인(賢人)이 죽고 나라 운수가 기우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서는 더욱 세상과는 생각을 끊고 이름을 숨기고 무사히 늙고자 하여 풍현(豊縣)으로 피신하고 풍악서당경로회(豊岳書堂敬老會)에 참석하여 한때 명인석사(名人碩師)로 더불어 상종(相從)하고 시서(詩書)에 낙(樂)을 부처 천성을 기르고 세상에 잘된 일 얻고 잃고 하는 모든 일은 공중에 뜬구름과 같이 보고 좋은 시절을 만나면 연운수석(煙雲水石)을 찾아 놀아 딴 세상 사람이 되니 영화(榮華)와 재액(災厄)이 공에게 무관한 일이라. 일신(一身)은 편안하나 훗날 세상 도리에는 어찌 한스럽지 않을까. 공의 생 함과 죽은 날조차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상고(詳考)하기 어렵도다.

 

배(配)는 청주정씨(淸州鄭氏) 사직(司直) 인로(仁老)의 따님이니 1남을 생하여 덕림(德林) 음직참봉(蔭職參奉)이고 세 따님은 정귀경(鄭貴卿), 황찬(黃瓚) 참봉(參奉)이요, 김붕(金鵬)에 출가했고 덕림(德林)의 남에 창(菖)이니 장사랑(將仕郎)이고 다음이 훤(萱)·이(苡)·신(莘)이다. 따님은 주윤(朱贇) 현감(縣監)에 출가했고 창(菖)의 남에 응복(應福)·응록(應祿)·응조(應祚, 이苡에 출계)·응호(應祐)이고 따님은 박서용(朴瑞龍)에 출가했다.
훤(萱)의 남에 응우(應祐)고 따님은 손진인(孫盡仁)·우세린(禹世隣)·안호인(安好仁)에게 출가했다. 이(苡)의 양자에 응조(應祚), 신(莘)의 남에 응지(應祉)고 따님은 정해용(鄭海龍)·권심(權審)에 출가. 응록(應祿)의 남에 성양(成樑)·성영(成楹)이고 응호(應祜)의 남에 성벌(成橃). 응우(應祐)의 남에 성즙(成楫), 따님은 권수도(權守道)에 출가. 응조(應祚) 남에 성극(成極)이니 나머지는 다 기록 않는다.

 

슬프다. 공은 금호공(琴湖公)을 엄한 아버지로 용재(慵齋)·눌재(訥齋) 같은 어진 두 동생을 두었으니 생각건대 당시 뜰에 나가서는 시례(詩禮)의 교훈을 아버지께 받았을 것이고 형제간에 부르고 화답하는 자취가 후세에 전할 것이 많으련만 재화(災禍)가 겹쳐서 문적(文蹟)이 없어지니 공의 이름과 행적이 4백 년 동안 들림이 없으니 옛집에 한이 쌓여 이제 그 후손 준호(俊鎬)가 집에서 들은 바를 모으고 각처의 문자(文字)를 상고(詳考)하여 그 계통(系統)을 지어 자손들이 돌에 새기니 공의 잠겼던 빛과 숨었던 행적(行蹟)이 이로부터 만분의 일이나마 빛을 보리니 이 또한 숨었던 것이 드러나고 어둡던 것이 밝아지고 쌓이면 노출되는 이치가 아닐까.

 

명왈(銘曰)
대대로 벼슬하던 집에서 벼슬길을 끊으니 당한 화가 혹독한데 경계를 했고 과거 날에 자취를 산림(山林)으로 숨으니 몸 보전함이라. 명철(明哲)한 생각과 명행(名行)의 높음을 짐작은 하나 당시의 사직이 역대에 없음을 한탄하고 삼가 전해 들은 바를 모아 돌에 새겨서 후세자손(後世子孫)에게 알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