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기◆행장◆비명

[판사공 2세손 이말손] 濟用監主簿贈工曹參議蓮窩公家狀(제용감주부증공조참의연와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2. 15:53

□판사공(判事公) 2세손 연와공(蓮窩公) 이말손(李末孫)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漣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濟用監主簿贈工曹參議蓮窩公家狀
(제용감주부증공조참의연와공가장)
-后孫 承雨 述(후손 승우 술)

 

公姓諱末孫字某號蓮窩新羅佐命大臣謁平後麗季金紫光祿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諱之秀六世孫僕射生男諱揆右參贊諱貞烈是生諱元林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吏曹判書是生三男曰從直郡守贈判尹鷄川君曰良直判事曰繩直大司憲也判事公生二男三女曰思剛吏曹參議錄 扈駕功臣勳曰秦剛府使女適摠制金宗淑次適司正兪彌老次適司正吳可義吏議公生二男一女長曰季孫執義次曰公女適縣監崔慶男噫公以簪纓世家內外族孫何若是盛且大歟內以言則公之從祖考大憲公之諸子諸孫俱成均叅魁榜彬彬相望而有諱宗準官舍人號慵齋顯著名臣外以言則金摠制有三子曰礩文領相曰碏文判書曰磧文知樞是有二子曰壽童文領相曰壽卿文判書崔縣監有子女曰允孫文府使女適李禮臣贈贊成是有孫曰白沙相國恆福也然則公之數代華冑一世而洎自 世祖乙亥之後決意南下公之伯執義公則退休于湖西德山公則卜築于湖南鳳城蓮花洞與歸來判書申公契雅相孚韜晦而然公之高潔可想於百秋之下而抑亦慵齋公之被禍延及於公之昆季耶居此數世靈春數葉托根龍城不得遠揚者久矣嗚呼惜哉粤在壬丙大禍之餘公之文獻泯沒無徵極爲來裔曠世之憾何幸嚮年丁卯春愚此承雨轉到于公之舊址心切於悒寄旅於大川李老人家聯枕論懷語及我先公老人曰君家先世自是吾鄕之望族而蹟載此書授二卷册子乃邑誌也披而奉覽則公所題詠絶韻而巳公以下奉事及監役公墓所而巳愴泣之心益倍前日曰第以公之聯韻中關涯千里無窮恨句想之則必有托意於戀國懷鄕兄分弟別之歎耶古所云詩以言志者其在斯夫公墓在昇平黃田星巖村後岡配南原梁氏生員宗福女墓在禮山葛林而切於泯蹟略此顚末以備後人之考覽焉

 


●제용감주부증공조참의연와공가장 역문
(濟用監主簿贈工曹參議蓮窩公家狀 譯文)
-후손 승우 술(后孫 承雨 述)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말손(末孫)이며 자는 모(某), 호는 연와(蓮窩)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고려말에 금자광록(金紫光祿) 삼중대왕(三重大匡)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 휘(之秀)의 6대손이라.
복야공(僕射公)이 아들 규(揆)를 낳으니 우참찬(右參贊)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이분이 아들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이분이 아들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이분이 아들 3형제를 낳으니 장(長)에 종직(從直)이니 군수(郡守)로 증판윤(贈判尹)에 계천군(鷄川君)이요. 다음은 양직(良直)이니 판사(判事)요. 끝이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이라.
판사공(判事公)이 2남 3녀를 낳으니 사강(思剛)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호가공신(扈駕功臣) 훈작(勳爵)을 받고 진강(秦剛)은 부사(府使)요. 총제(摠制) 김종숙(金宗淑)에 출가하고 다음 딸은 사정(司正) 유미로(兪彌老)에 출가했고 끝에 딸은 사정(司正) 오가의(吳可義)에 출가하다. 참의공(參議公)이 2남 1녀를 낳으니 장(長)에 계손(季孫)이니 집의(執義)요. 다음이 공(公)이며 따님은 현감(縣監) 최경남(崔慶男)에 출가하다.

 

슬프다. 공은 대대 벼슬집으로 내외자손(內外子孫)이 어찌 그리 번성한고. 본손(本孫)으로 말할진대 공의 증조부 대사헌공(大司憲公) 모든 자손이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를 으뜸으로 참방(參榜)한 분이 여러분 나셨고 휘 종준(宗準)하는 분은 사인(舍人) 벼슬에 호는 용재(慵齋)니 명신(名臣)과 절신(絶信)으로 유명하고 외손으로 말할진대 김총제(金摠制)가 3자를 두었으니 질(礩)은 영상(領相)이요, 작(碏)은 판서(判書)를 지냈고 적(磧)은 중추(中樞)를 지냈고 이분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長)에 수동(壽童)이니 영상(領相)이요, 다음이 수경(壽卿)이니 판서(判書)요, 최현감(崔縣監)의 자녀로는 아들에 윤손(允孫)이니 부사(府使)요, 따님은 이례신(李禮臣)에 출가했으니 찬성(贊成)을 증직(贈職)받았고 이분의 손자가 유명한 오성대감(鰲城大監) 이항복(李恒福)이라. 그러나 공은 수대(數代)에 걸쳐 내외손(內外孫)이 공명(功名)이 한세상 으뜸이었으니 세조(世祖) 을해년(乙亥年, 1455년) 뒤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결정하니 공의 백씨(伯氏) 집의공(執義公)은 호서(湖西) 덕산(德山)으로 은퇴하고 공은 호남(湖南) 봉성연화동(鳳城蓮花洞)에 안착하니 그곳에 은퇴한 판서(判書) 신공(申公)으로 기미(氣味)가 상합(相合)하였고 숨어 살다 세상을 뜨니 공의 높고 깨끗한 정신은 백세(百世) 뒤에도 짐작할 수 있는데 또한 용재선생(慵齋先生)의 사화(史禍)의 여독(餘毒)이 공의 형제에까지 미친단 말인가. 이 땅에 산지 수세(數世)에 영춘(靈春)에 잎은 피었으나 뿌리는 용성(龍城)에 박혀 멀리 옮기지 못한지가 오랜지라.

 

오호라. 임진(壬辰)·병자(丙子) 대란을 지낸 뒤로 공의 문헌(文獻)과 행적(行蹟)이 함께 없어져 찾을 길이 없는 중 자손과 대수가 너무 멀어 추모의 심정만 애달프더니 다행히 지난 정묘(丁卯)년 봄에 승우(承雨)가 공이 살던 옛터에 이르니 심회(心懷)가 한층 더 읍읍(悒悒)하더니 그날 밤 대천(大川) 이노인(李老人) 집에서 잘 때 이야기가 공에게 이르니 노인의 말이 「당신의 집 선대(先代)는 우리 고향에서 명망 있는 씨족으로 그 사실이 이 책에 실려있다.」 하면서 두 권 책자를 내어놓는데 보니 그 고을 읍지(邑誌)라. 자세히 읽어보니 공이 지으신 절구(絶句)뿐이고 공 이하 봉사(奉事) 및 감역공(監役公) 묘소만 적혀 있는지라. 창모(愴慕)하는 마음이 두 배나 더한 중 공의 글귀 중에 「관애천리무궁한(關涯千里無窮恨)」이란 글귀를 보고 생각건대 「나라와 고향을 생각하고 형제를 연모하는 탄식이 아닌가 생각되니 옛말에 시(詩)는 뜻을 말한다.」 하더니 과연 그런가 하오이다.
공의 묘소는 승평황전성암촌(昇平黃田星巖村) 뒷산에 있고 배위(配位)는 남원양씨(南原梁氏)니 생원(生員) 종복(宗福)의 따님이요, 묘소는 예산갈림(禮山葛林)에 있다. 사적(事蹟)이 점점 없어져 감으로 시말(始末)을 대강 적어 후인(後人)이 보는 데 참고로 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