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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 이명민] 忠愍公知止堂月城李公祭壇碑銘(충민공지지당월성이공제단비명) 幷序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1. 22:59

□충민공 이명민(忠愍公 李命敏)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②충민공(忠愍公) 명민(命敏)

 

 

忠愍公知止堂月城李公祭壇碑銘 幷序
(충민공지지당월성이공제단비명 병서)
-聞韶 金周悳 撰(문소 김주덕 찬)

 

噫西來深目之人從古遇之者其誰世之赫閥巨族徃往因世故迭遷失傳祖先墳墓而每値霜露之節履之無所則設壇祭之亦義起之禮也慶州人李相善相喆在秀等爲其先祖忠愍公築祭壇於金溪仕望北麓使相載相演甫請銘於余余亦畏壘後承也常恨公文獻之杞宋今於是役也遂感而叙之曰公諱命敏宇而晦號知止堂以新羅佐命功臣謁平爲始祖自後世襲圭組高祖諱揆四宰 諡貞烈配享忠惠廟庭曾祖諱元林判司僕寺事祖諱蔓實吏判考諱繩直大司憲公其第二子也年二十七以繕工監副正造仁政殿己受 魯陵調護之命當時立朝忠賢如韓忠成皇甫仁金宗瑞鄭苯諸公最其心友也卽眞之日朝庭危懼 上在寧陽尉鄭悰第領相皇甫仁遣公啓請還 御壽康宮癸酉禍作時則金宗瑞旣死朝廷謂以公黨瑢謀叛殺之其翌還甦朝廷又使護軍朴悌諴斬之時公兄弟俱中司馬榜未展慶席而遭禍二弟俱連坐及勘罪之日以椒宮戚屬減死或謫扶餘或謫禮安公夫人許氏及三男乾金乾玉乾鐵同時被禍惟一男乾石生甫三月隱諱保命於仲父諱靡敏謫所公有遺書藏于家其略曰吾家被禍顚末事係時諱不能詳言汝以覆巢遺卵保命於斯世豈非天耶然而湖間非汝所居須徃嶠南世宇農業勿失此書則使後世子孫可爲徵信之資矣汝其服膺云於乎公數行遺書之畏約不敢喘之者距今四百餘載徃在 肅廟朝 贈兵曹參判諡忠愍旌閭享寧越八忠臣朝士壇子孫蕃衍布濩鄕邑苟非公樹德垂蔭之厚烏能然盖源深者流長根固者枝茂以是知公之積於身種於後無愧爲一家大祖也公衣屨之藏失守己久爲後孫者擧切追遠之感議公先壟側整地爲壇歲薦蘋藻從此可以免若敖氏餒矣夫孰曰不當擧而擧也乾石男碩還生二男得南胤南得南男敬立胤南男應立多不錄銘曰
秉彜之天人所同得古今幾人能全其德憲憲惟公淑愼不忒乾文一變舊主謨復誰與爲議安平大君含貞抱義絶類離群成仁斧鑊與六臣同致命不悔三子又從季兮獨保天實爲公遺書永傳子孫維則有屹斯壇先塋之側母曰非墓有誠必格卓行不著多士攸慽我銘斯石昭示千億

 


●충민공지지당월성이공제단비명 병서 역문
(忠愍公知止堂月城李公祭壇碑銘 幷序 譯文)
-문소 김주덕 지음(聞韶 金周悳 撰)

 

슬프다, 서쪽에서 눈 깊은 사람은 예부터 지기(知己)와 때를 만나자 그 누가 있든가 세상에 혁혁(赫赫)한 문벌(門閥)과 대단한 족벌들도 가끔 세상이 바뀜으로 인하여 조상분묘(祖上墳墓)를 잃고 매양(每樣) 상로지절(霜露之節)을 당하면 밟을 곳이 없어 단(壇)을 모아놓고 제사 지내는 것이, 또한 의리로 만든 예(禮)라.
경주인(慶州人) 이상선(李相善)·상철(相喆)·재수(在秀) 등이 그 선조 충민공(忠愍公)을 위하여 금계사망(金溪仕望) 북록(北麓)에 제단(祭壇)을 쌓고 상재(相載)·상연(相演)으로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하니 나 또한 외루(畏壘)의 뒤를 이은 터라 항상 공의 문헌(文獻)을 찾을 길이 없어 한탄하던 사람이라 이 일에 느낀 바 있어 붓을 드니 공의 휘는 명민(命敏)이요, 자는 이회(而晦)며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니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시조가 되고 뒤로 대대로 관면(冠冕)이 연속하여 고조의 휘 규(揆)는 사재(四宰)를 지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충혜왕(忠惠王) 사당(祠堂)에 배향됐다. 증조의 휘는 원림(元林)이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으며 조부의 휘는 만실(蔓實)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부친 휘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니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

 

나이 27세에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이란 벼슬로 인정전(仁政殿)에 불러 이미 노산(魯山, 단종)을 보호해 달라는 고명을 받았다. 당시 조정에 충성하고 어진 신하로 한충성(韓忠成)·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 제공(諸公)들과 가장 깊이 마음으로 사귄 벗이라 때에 단종(端宗)이 위에 오르던 날 조정이 불안한 상태라 상(上)이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집에 계시니 영상(領相) 황보인(皇甫仁)이 공을 보내 수강궁(壽康宮)으로 모시게 하였다. 계유년(癸酉年, 단종1 1453)에 화(禍)가 일어나 김종서(金宗瑞) 이미 화를 입고 조정에서는 공을 용(瑢, 단종 3촌)과 역모를 같이했다는 모함을 씌워 죽였는데 이튿날 새로 살아나니 조정에서 호군(護軍) 박제함(朴悌諴)으로 다시 죽이니 그때 공의 형제가 함께 과거에 급제했는데 경축하는 연석을 펴지도 못하고 두 동생과 같이 연좌되었으니 죄를 결정하는 날 초궁(椒宮, 후궁)척 속으로 사형을 면하고 혹은 부여(扶餘)로 혹은 예안(禮安)으로 귀양을 같다.
그리고 공의 부인 허씨(許氏)와 세 아들 건금(乾金)·건옥(乾玉)·건철(乾鐵)과 함께 화를 입어 죽고 한 아들 건석(乾石)은 난지 겨우 석 달(3개월)이라 유모(乳母)가 숨겨서 중부(仲父) 휘 미민(靡敏) 적소(謫所, 죄인을 귀양 보내는 곳을 이르던 말)에 피신 양육게 하니 중부께서 죽을 때 유서를 써서 집에 갈무리해두니 내용이 대략 이러하다. 「우리 집이 화를 입은 경위는 그때 형편이 바른말을 다 공개할 수 없는 형편이라 오직 너는 기울어진 집에 약간 알만 남아서 세상에 목숨을 보전하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랴. 그러나 호간(湖間, 호남)은 너의 살 곳이 아니라 영남으로 가서 대대로 농사나 짓고 이 유서를 잃지 않으면 뒤 세상 자손들로 믿는 자료가 되리니 너는 내 말을 가슴에 새겨두라」 슬프다. 공의 몇 줄 유서의 간략한 것도 감히 드러내지 못한지라. 이제 4백여 년이 지난 숙종(肅宗) 초에서 병조참판(兵曹參判) 충민(忠愍)이란 시호까지 받고 정려(旌閭)를 세우며 영월팔충신조사단(寧越八忠臣朝士壇)에 배향됐다.
자손이 번성하여 향읍(鄕邑)에 흩어져 사니 이것이 다 공의 음덕(蔭德)을 두터이 심어줌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오. 대저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길다 하고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무성 타 하니 이 일로 보아 공이 몸소 덕을 쌓아 자손에게 심어준 것이니 한집에 큰 조상 됨이 부끄럽지 않도다.

 

공의 묘소는 실전(失傳)한 지 이미 오래된지라 후손들의 추모 정성이 간절하여 공의 선대 묘소 옆에 땅을 닦고 단(壇)을 모아 해마다 산채나마 드리오니, 일로부터 가히 오씨(敖氏)와 같은 굶음은 없을지니 누가 부당한 일을 했다 하리오. 건석(乾石) 아들에 석환(碩還)이 2남을 낳으니 득남(得南)·윤남(胤南)이라. 득남(得南) 아들에 경립(敬立) 윤남(胤南) 아들에 응립(應立)이니 나머지는 다 기록지 못하다.

 

명(銘)하여 가로대, 떳떳한 하늘의 도를 사람마다 같이 얻었으나 고금(古今)을 통하여 뭇사람이나 그 은덕을 온전히 했던고 표본이 된 공은 오직 착하고 어짊이 어긋남이 없도다. 천리(天理)가 한번 변함이 옛 주인 회복을 꾀했으니 뉘와 같이 의논했던고 안평대군(安平大君, 瑢)이로다. 공은 생각과 의리를 품었으니 뭇사람에 뛰어나도다. 어진 일을 행하고 죽임을 당했으니 육신과 한가지라. 목숨을 잃어도 뉘우침이 없는데 세 아들이 따라갔다. 끝 아들만이 살았으니 하늘이 공을 위함이라 유서를 자손에 전하니 자손이 법으로 삼았도다.
높은 저 단(壇)이여 선영(先塋)의 겉이로다. 묘소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정성만 있으면 혼령이 감응하리라. 높은 행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선비들이 슬퍼하는 바라. 내 이 돌에 새겨서 천억(千億)에 밝게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