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家狀] 先府君家狀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4:27

눌재유고(訥齋遺稿) / 家狀


先府君家狀(선부군가장)
-男 弘準 撰(아들 홍준 찬)

先君子諱時敏字子修號琴號宣德庚戌生于京第自髫齡以才華聞人稱東部神童及長潛心經學又有個儻慷慨之節 魯山癸酉俱中司馬未展慶席遭門禍仲兄命敏被禍府君禁錮遂南歸永嘉之金池村癸巳六月終嗚呼痛哉先人美風席多大志器量沈重性亦嚴毅居家常不解冠帶奉養裵氏至孝滫瀡之物必進時新畋山擸水不廢風雨晨昏定省跪於門外祖母設席待以賔禮入云則入中席而坐坐不欹倚有言則對有命則唯出告反面不失其期歲癸未丁憂哀毁過禮凢喪事一從家禮獨於薦祓之事自初七以至七七歸依佛氏傾財殫力常謂諸子曰不作佛事先儒明敎余亦抱冊豈無所見但欲報昊天之恩不知虛僞爾事雖誕妄能盡在我之誠虛亦實矣然汝等勿效焉季父靡敏先人異母兄也謫居扶餘遭裵氏喪來會葬而歸贈奴婢六口卽成券慈氏進言曰吾子女亦多雖一二可世何必六也答曰吾子與兄分則雖殊義則無間兄貧而使令尙小其可忍視乎况小民懷土母子分離必相逃散舉族而歸則無此患矣令幹奴護率一行安接而來廬墓三年服闋之後繼日號痛與同里五寸姪進士裵禎讀詩至蓼莪而不覺痛哭禎亦揮涕奉慰解之哀盡乃己蔬果忝稷凢有節物必易服薦新常聚家門子弟若干人敎養不怠處於鄕黨待人接物必其禮人皆敬重靑城君之任安東府也累到公門而候焉公往謝則必揮公事待出而後裁决處置乃謂人曰李生員在坐則愧赧未取也外人有餉遺者必問其所從得而不知則不受受則償以斗穀至於緇髠芒鞋卷紙莫不皆然曰寒乞人所贈空受不仁中年慈氏得天病三年苦劇家業零賛不顧不恤迎醫貿藥急於治療病愈然後復敎誨諸子日夜望其成立嘗以詩施責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牕前坐逸意應馳野外行時獨仲兄宗準遊學亰師每書戒勗其第一書若曰須記吾戒汝之言無效前行母結狂友母敢餙非母作無益母事慢遊勤業日孜勉旃第二書曰汝之遊學非他豪倈輩之可比謹言行戒酒色母慢遊母友狂吾之祖先世爲祖家名臣及余之身坎軻終身余則己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亦不好學吾之所望者汝也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第三書曰一不言朝廷利害大臣黑白二不言人物長短評論酒色朋友過惡此其大者至於微言細行亦不可不謹當刻心勿忘以就遠道噫古人云知子莫如父先人之先見其可及乎仲兄擢第榜眼書書音律醫藥卜筮無不精巧人皆仰之取友不端引而招禍余亦好學不篤未痛經傳廑占小名累擧不第吾兄弟皆爲先人之罪人也伯父都官正郎不敏有子一人而無名焉仲父成均主簿勿敏有子三人零落殆盡只有一孫彭齡補蔭今爲鎭岑縣監而亦無後焉季父靡敏有子四人而或夭或病鰥無室者數人其在吾先人子婿登第爲縣監爲縣令爲監司若崇弘公三男雖無似有子有孫森立門庭惟祖先在天之靈豈無陰隲之功耶若子若孫能爲人而復振門戶未可之也其謹言行勤學業當以先人之戒書爲監任官職操志節當以先祖之淸白是則以是爲靑氈永世不墜則無忝小生彰厥祖之名美無竆矣其名勉之皇明正德甲戌六月日男進士弘準謹書于畏影堂

畏影先生堂各堂凢十間先生手書家訓刻揭二板于堂壁朝夕觀省而子孫欲其取則其平日修省之功可知也退溪先生爲先生胤察訪公之碣稱察訪公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常稱貸以自給察訪四子艿茹葎俱早夭而以孝旋閭其季苞銘又云季也至性誠孝無他則子孫之不忝家訓又可知也不幸後嗣絶士林營建里社移取畏影堂材爲謹堂而家訓二板依前揭壁以存古蹟後移里社于衙洞爲八間而二板依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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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家狀 > 先府君家狀



○1514. 아버지 이시민(李時敏)(1430-1473)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금고(禁錮)처분을 받은 뒤 영가(永嘉) 금지촌(琴池村)에 내려와 살게 되었으며‚ 부모의 상사(喪事)를 치를 때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불씨(佛氏)에 귀의하여 재산을 탕진하였는데 자식들에게는 이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고 함.
○또 서울에 있는 아들 종준에게 계서(戒書)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은 학문에 힘쓰며 언행을 삼가하고 조정(朝廷)의 이해(利害)와 대신들의 흑백(黑白)·사람의 장단(長短)·벗의 잘못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함.
○가장(家狀)에 이어 실린 부기(附記)에 의하면 이홍준은 이 계서(戒書)를 손수 목판에 써서 새긴 다음 자신이 사는 외영당(畏影堂)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보며 반성하고 자손들에게도 본받게 하였는데 불행히 후사(後嗣)가 끊어지니 사림(士林)들이 외영당의 목재를 가지고 리사(里社)의 강당을 지은 뒤에 그 곳에 이 계서(戒書)를 걸어두었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선부군의 가장[先府君家狀]

선친의 휘는 시민時敏이고 자는 자수子修이며 호는 금호琴湖이니 선덕 경술년(1430)에 서울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나서 동부신동東部神童이라 불렸다. 자라서는 경학에 잠심하였고, 또 기개 있고 강개한 절조가 있었다.
노산군魯山君(단종) 계유년(1453)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축하연을 펴기도 전에 가문의 화를 만나, 중형仲兄 명민이 화를 입고 부군은 금고禁錮되니, 드디어 남쪽 영가(안동)의 금지촌金池村(금계촌金溪村)으로 돌아갔다가 계사년(1473) 6월에 세상을 마쳤다.
아! 슬프다. 선친은 풍도가 아름답고 큰 뜻이 많았으며, 도량은 침착하고 성품 또한 엄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 늘 갓과 띠를 풀지 않고, 배씨를 봉양하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맛있게 조리한 음식물을 반드시 제철의 새로운 것으로 올렸고, 산에서 사냥하고 물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려도 그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할 때 문밖에서 꿇어앉아서 하였다. 할머니가 자리를 베풀어 손님 모시는 예로 대할 때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가서는 앉아야 할 자리의 가운데에 앉았으며, 앉을 때는 기대지 않았고, 말씀이 있으면 대답하고 명하면 곧바로 대답하였다. 집을 나갈 때는 알리고, 돌아와서는 얼굴을 뵈었으며, 돌아오기로 약속한 때를 놓치지 않았다.
계미년(1463)에 상을 당하자1) 슬퍼함이 예에 지나칠 정도였다. 모든 상사에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으나 오직 제물을 올리는 일은 초7일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불교의 의례에 따랐고 재물을 기울여 정성을 다하였다. 늘 자식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라는 선유先儒의 밝은 가르침은 나도 책을 안고 사는 사람인데 어찌 본 것이 없겠느냐. 그러나 하늘같은 은혜를 갚자니 허위라고 여기지 않을 뿐이다. 일이 거짓되고 망령되지만 나에게 있는 정성을 다할 수 있다면 허망한 것도 참된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본받지 마라.”라고 하였다.
계부季父 미민은 선친의 배다른 형이다. 부여扶餘에 귀양 가서 살고 있었는데, 배씨의 상을 당하자 와서 장례에 참석하였다. 돌아갈 때 남녀 종 6명을 주고 즉시 문서를 작성해 주었더니, 어머니가 “우리 자녀도 많으니 한두 명의 종을 주어도 될 터인데 어찌 굳이 여섯이나 줍니까?”라고 하자, “우리 자식과 형은 분수는 다르지만 정의情義로는 간격이 없습니다. 형이 가난하고 부리는 사람은 아직 어린데 그것을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백성은 먹고사는 것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갈라진 것은 분명히 도망하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돌아왔다면 이런 근심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간노幹奴(노비를 총감독하는 자)를 시켜 일행을 보호하여 인솔해서 편안히 살게 하고 나서 오게 하였다.
3년을 시묘侍墓하고 복을 마친 뒤에도 날마다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같은 마을 5촌 조카 진사 배정裵禎과 『시경』을 읽다가 「육아蓼莪」편에 이르면 저도 몰래 통곡하니, 배정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마음을 풀어 주어 슬픔을 극진히 하고서야 그쳤다. 채소와 과일, 기장 등 제철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옷을 바꾸어 입고 새로 난 음식물을 올렸다. 항상 가문의 자제 약간 명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마을에 있으면서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에 맞는 예로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청성군靑城君2)이 안동 부사로 있을 때 여러 번 공의 집 문에 와서 안부를 물었다. 공이 가서 답례 인사를 하면 반드시 공무를 물렸다가 공이 나가기를 기다린 뒤에 결재하고 처리하면서 사람에게 “이 생원이 자리에 있으면 부끄러워 감히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선물을 보내는 외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어디서 구했는지를 묻고, 알지 못하면 받지 않았으며, 받았으면 말곡식[斗穀]으로 갚았다. 심지어 승려의 짚신이나 두루마리 종이까지도 모두 그러하여 “남루한 거지가 주는 것을 공짜로 받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중년에 어머니가 큰 병을 얻어 3년을 몹시 앓자 가업이 쇠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사서 치료하기에 급급하였다. 병이 나은 뒤에는 다시 자제들을 가르쳐 밤낮으로 그들이 성장하여 자립하기를 바랐다. 일찍이 시로 책려하여 말하였다.

한 끼 밥에 세월의 가벼움 다 잊으니 一飯都忘歲月輕
세상에 명성 세울 줄을 어찌 알랴 豈知斯世樹風聲
부질없이 몸은 창 앞에 앉아 있으나 空身雖向窓前坐
편안하고픈 마음 들 밖으로 달리겠지 逸意應馳野外行

당시에 중형 종준宗準이 홀로 서울에 유학하였는데 늘 편지로 경계하고 힘쓰게 하였으니, 첫 번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반드시 내가 네게 경계하는 말을 기억하여 이전의 행실을 본받지 말고, 경망스런 자와 사귀지 마라. 감히 잘못을 꾸며대지 말고, 무익한 짓을 하지 마라. 태만하게 놀기를 일삼지 말고, 날마다 학업에 부지런히 힘써서 노력하고 노력해라.

두 번째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유학을 하는 것은 다른 집 호협의 무리와 견줄 바가 아니니 언행을 삼가고 주색을 경계해라. 태만하게 놀지 말고 경망스런 자와 사귀지 마라. 우리 선대는 대대로 조정의 이름난 신하였는데 내 몸에 와서 평생 기구하였다. 나는 그만이지만 오래도록 선을 쌓은 집에 어찌 조상이 주는 복이 없겠느냐. 네 형은 배우지도 않고 재주도 없으며 네 아우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이다. 그런데 너 또한 배우는 데 성실하지 않구나. 성실하지 않으면 실제가 없다. 내가 말하는 실제란 덕행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 재주가 뛰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다면 칠보시七步詩3)를 짓는 재주가 있더라도 어찌 취할 만하겠느냐.

세 번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조정의 이해와 대신의 잘잘못을 말하지 마라. 둘째, 인물의 장단점, 주색에 대한 평론, 벗의 허물과 나쁜 점을 말하지 마라. 이것은 그중에 큰 것이고 사소한 언행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잊지 말고 이것으로 먼 길을 가거라.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식을 아는 자로는 부모만 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선친의 선견지명을 그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중형이 과거에 방안榜眼(갑과甲科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으로 급제하였고, 서화나 음률, 의약과 복서卜筮까지도 정교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우러렀는데, 벗 사귐이 바르지 않아 연좌되어 재앙을 불렀다.
나도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독실하지 않아 경전에 통하지 못하고 겨우 조그만 이름을 차지하면서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형제는 모두 선친의 죄인이다. 백부 도관 정랑都官正郎 불민不敏은 아들이 하나 있으나 이름이 없다. 중부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 물민勿敏은 아들이 셋인데, 영락하여 거의 모두 죽었고, 겨우 손자 팽령彭齡이 하나 있어 음보蔭補로 지금 진잠 현감鎭岑縣監이 되었는데 역시 후사가 없다. 계부 미민靡敏은 아들이 넷 있는데, 요절하거나 병들고 홀아비로 살면서 아내가 없는 자가 여럿이다. 내 선친의 사위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고, 현령이 되고, 감사가 되었으며, 숭준崇準·홍준弘準·공준公準 세 아들은 비록 변변찮으나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어 집 뜰에 빽빽하게 서 있다. 생각건대, 하늘에 계신 선조들의 영령이 숨은 도움을 준 공로가 어찌 아니겠는가. 자손들이 사람이 되어 다시 집안을 떨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말을 삼가고 학업에 부지런히 하는 것은 마땅히 선친이 경계한 글을 귀감으로 삼고, 관직에 임하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것은 마땅히 선조의 청렴결백함을 법칙으로 삼아 이것을 집안의 전통으로 삼아 길이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않아서 그 조상의 이름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무궁할 것이니 각자 힘쓸지어다.

명나라 정덕 갑술년(1514) 6월 아무 일에 아들 진사 홍준弘準이 외영당畏影堂에서 삼가 쓰다.

외영은 선생의 당堂 이름으로, 당은 모두 10칸이다. 선생이 손수 가훈을 써서 당 벽에 두 개의 현판을 새겨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성찰하였고, 자손은 그것을 본받고자 하였으니 평소 수양하고 성찰한 공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선생의 맏아들 찰방공(이덕장李德璋)을 위해 지은 비갈4)에 “찰방공은 자제 교육에 매우 엄격했고, 향리의 후생들도 권면하고 독려하였다. 생산과 작업을 일삼지 않고 늘 양식을 빌려 생활하였다.”라고 하였다. 찰방의 네 아들 중 잉艿·여茹·율葎은 모두 요절하였는데,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막내 포苞의 명銘에 또 “막내 또한 지극한 성품으로, 정성스럽고 효도하는 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자손이 가훈을 욕되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후사가 끊어지니 사림이 이사里社를 건립하여 외영당의 재목을 옮겨 강당을 짓고, 가훈을 쓴 두 현판을 예전 그대로 벽에 걸어 옛 자취를 보존하였다. 뒤에 이사를 관아가 있는 마을로 옮겨 8칸으로 지었으며 두 개의 현판은 그대로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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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미년(1463)에 상을 당하자 : 이홍준의 할머니가 되는 배씨(裵氏)의 상을 말한다.

2) 청성군(靑城君) : 한치의(韓致義, 1440∼1473)의 봉호이다. 자는 의지(誼之),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한확(韓確)이며, 성종의 생모인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아우이다. 1464년에 안동 부사가 되었다. 1472년 병조 판서에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시호는 장도(章悼)이다.

3) 칠보시(七步詩) : 위 문제(魏文帝)가 자신의 아우인 조식(曹植)을 제거하려고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에 시를 완성하게 하고,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사형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때 조식이 지은 오언시를 칠보시라고 한다.

4) 퇴계……비갈 : 『퇴계집』 권46에 나오는 「황산 찰방 이공 갈음명(黃山察訪李公碣陰銘)」을 말한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가장家狀 > 선조고 가선대부 대사헌 부군의 가장[先祖考嘉善大夫大司憲府君家狀]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先府君家狀(선부군가장) 역문(譯文)
-아들 홍준 지음(男 弘準 撰)

선부군(先父君,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은 시민(時敏)이요, 자는 자수(子修)며, 호는 금호(琴湖)다. 선덕(宣德, 명나라 선종의 연호) 경술(庚戌, 世宗12 1430)에 서울 사제에서 출생하시니 어릴 때부터 재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동국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성장함에 따라서 경서(經書, 사서삼경)에 몰두하셨고 척당(倜儻, 높은 기상) 강개(慷慨, 분개하는 뜻) 하는 절의(節義)가 있었다.
노산(魯山, 단종) 계유(癸酉, 1452 端宗 즉위년)에 사마시(司馬試, 소과)에 합격하고, 경사의 잔치도 베풀기 전에 중형(仲兄) 명민(命敏)이 계유정란(癸酉靖亂)에 화(禍)를 입으니 1문의 연좌화(緣坐禍)로 부군(府君)도 금고(禁錮, 공민권 박탈과 같은 형)를 당하고 드디어 남쪽 안동(安東) 금계촌(琴溪村)으로 돌아와서 계사(癸巳, 1473) 6월에 하세(下世)하셨다.

아! 원통한 일이다. 우리 선인이 품위가 아름다웠고 뜻이 컸으며 도량이 침중하고 성질이 엄격하며 굳세었다, 평상시에 집에 계실 때도 의관을 벗지 않으셨고 모친을 봉양하는 데 있어 효성을 지극히 하셨다.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반드시 그때그때 새롭게 해서 드리며 산에 가서 산양하고 냇물에 가서 생선 잡기를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를 돌봐드리는 인사와 새벽에 잠자리를 살펴보는 인사를 반드시 하되 문밖에 꿇어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들어오라 하시면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니 앉은 자세가 기울지 않고 ​말씀이 있어야만 대답하며 명령이 있으면 따랐다. 출타할 때는 연유를 고하고 돌아와서는 꼭 뵙고 돌아옴을 알렸으니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
계미년(癸未年)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에 지나쳤고 장사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오직 천불(薦祓, 불전에 기도하는 제사)에는 ​초7부터 77(49일)까지 불전에 귀의하고 재산도 많이 바쳐 힘을 다하면서 항상 모든 아들에게 일러 가로대 부처(佛)를 숭상 않은 것이 선유(先儒)의 명백한 가르침이고 나도 또한 유교의 책을 배우고 있으니 어찌 생각이 없으리오 마는 다만 호천망극(昊天罔極)한 은혜(恩惠, 부모님 은혜)를 보답고자 할 따름이다.
헛된 일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고 비록 허망한 일이라고 하나 ​나의 정성에 있는 것이니 허망한 것도 실지가 될지라 그러나 너희들은 본보지 말라 하셨다.
계부(季父, 삼촌) 미민(靡敏)은 선인과는 이모(異母, 배다른 모친)의 형이다. 부여로 귀양살이 갔다가 배씨상(裵氏喪)을 당하여 달려와서 장사를 치르고 돌아갈 때 노비(奴婢, 남자종과 계집종) 여섯 명을 주고 문서까지 넘겨주시니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아들딸이 많은데 한두 명 주면 되지 어찌 6명이리오」 하시니, 대답해 가로되 「내가 형으로 더불어 어머니는 다르나 의리로는 아무 간격이 없소. 형이 가난하고 부리는 것이 적으니 그 고생을 참아보지 못한 탓이 아니겠소. 소민(小民, 어린이 또는 천한 사람)은 향토를 생각하나니 모자가 서로 헤어져 있으면 흩어지기 쉬우니 차라리 온 식구를 다 데리고 오면 이런 근심이 없을 것 아니오」 하고 건장한 종을 보내 일행을 편히 데려오다.

3년을 산소 곁에서 시묘(侍墓)하고 복(服)이 끝난 뒤에도 낮과 밤으로 통곡을 하니 한 동리에 사는 종질(從姪)되는 진사(進士) 배정(裵楨, 외종질)과 글을 읽을 때 시전육아장(詩傳寥莪章. 부모를 생각하며 지은 시)을 읽으면 부군께서 통곡하시니 정(楨)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나 슬픔이 다해야 그치시다. 또 채소 과일 곡식이 철을 따라 새로 나면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천신(薦新, 새 음식을 조상에 드리는 제사)을 하다.
항상 집안 자제들을 약간 모아놓고 가르침을 게을리하시지 않았다. 향당(鄕黨)에 처하여 남에 대할 때도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추종하였다.
청성군(靑城君)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누차 공의 댁에 가서 문후(問候, 같은 재배 간에 안부를 물음)하면 공이 또 회사(回謝, 상대에서 베푼 인사에 대하여 인사를 갚다)하려 가면 반드시 공사를 제쳐놓고 나가기를 기다려서 결재하고 처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생원(李生員)이 자리에 있으면 부끄러워서 감히 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외인이 혹 물품을 보내주면 반드시 그 물건이 어떻게 하여 생겼나를 물어보고 알지 못하면 받지 않았다. 또 받으면 반드시 한 말 곡식을 가지고라도 갚았다 치곤(緇髠)과 짚신과 두루마리 하나에 대해서라도 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려운 사람이 보내주는 것을 그대로 받고 마는 것이 불인하다는 취지에서였다.
중년에 우리 자당(慈堂)이 큰 병을 얻어서 3년 동안을 막심한 고생을 하였다. 살림은 기울었고 그러나 그런 문제는 돌아보지도 않고 개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을 맞이하여 백약을 다 써서 치료만을 서둘렀으니 급기야 병이 나았다.
그런 뒤에는 자제들을 가르쳐서 밤낮으로 성취하기를 바랐다. 항상 시로써 독려하였다.

一飯都忘歲月輕 豈知斯世樹風聲
空身雖向窓前坐 逸意應馳野外行
한 그릇의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었으니
어찌 이 세상에 풍성(風聲, 세상을 바로잡는 교화나 성명)을 세울 수 있을까.
빈 몸으로 비록 창 앞을 향하여 앉았으나
호탕한 뜻은 들 밖을 달려 다니고 싶구나.

​ 중형(仲兄) 종준(宗準)이 서울에 유학(遊學)하고 있었다. 선부군(先父君)이 매양(每樣) 서신으로 경계하고 면려(勉勵)하였으니

첫 번째 서신에 「모름지기 내가 너를 경계하는 말을 기록해 두라.
전에 하든 행동을 그대로 하지 말고, 단정치 못한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고 감히 잘못을 꾸미려 하지 마라. 몸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일은 하지 말고 부질없이 놀기를 힘쓰지 말며 열심히 공부하여 매일 노력하여 부디 힘쓰고 또 힘쓰라」고 하였다.

두 번째 서신에는 「너희 유학(遊學)은 다른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다.
말과 행동을 삼가고 술과 여색을 경계하여라. 부질없이 놀지 말고 미치광이 같은 사람과 상종하지 마라. 우리 선조가 대대로 조정의 명신(名臣, 이름 있는 신하)이 되었는데 나의 대에 이르러 때를 만나지 못하고 감가(坎軻, 초야에 있는 현달치 못함)에서 몸을 마치게 되었으니 나는 이것으로 그만이다. 오랫동안 착한 일을 쌓으면 어찌 자손에 끼쳐지는 경사가 없겠느냐 네 형은 공부도 하지 못했고 또 재주도 없다. 네 아우도 또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뿐이다. 그런데 너는 학문을 배웠는데도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하지 못하면 실(實)이 없는 것이니 성실이라고 하는 것은 덕행(德行, 덕이 있는 행실)을 말하는 것이며 재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의 재주(七步之才, 위나라 조식(曺植)이 그의 형 문제(文帝)에게 칠보 안에 글을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조식(曺植)이 응구첩대(應口輒對, 묻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함) 하여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때니 콩이 솥에서 울고 있구나. 본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삶는 것이 어이하여 이리 급한고?- 라 하였다. 문제(文帝)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후회하였다. 굉장한 재주에 비유함)가 있더라도 어디에 소용이 닿겠느냐?」고 하였다.

세 번째 서신에는 「첫째는 조정의 이해(利害)와 대신(大臣)들의 흑백(黑白)을 말하지 말 것이며
둘째는 인물의 장단(長短,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과 주색의 평론과 친구의 과오(過惡, 과실과 나쁜 점)를 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 대표적인 큰 사항만 들어서 말한 것이다. 미세한 언사나 세밀한 행동에 이르러서도 다 근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서 잊지 말고 원대한 도를 성취하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식을 아는 것은 그 아비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우리 선인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미리 미래에 대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밝음)은 아무나 따를 수 있겠는가?
과연 중형(仲兄)이 대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합격한 사람. 첫째로 합격자는 장원랑(壯元郞)이라 하고 셋째로 합격한 사람을 탐화랑(探花郞)이라고 한다)으로 합격하였다.
서화와 음악과 의약(醫藥)과 점(占)으로부터 잡된 기술에 이르도록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벗을 사귀되 단인(端人, 단정한 사람)이 아니면 같은 유에 끌려서 도로 화(禍)가 되는 것이다. 내가 또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득실하지 못하여 경서(經書)의 깊은 뜻에 통하지 못하고 겨우 조그만 명성인 소과(小科)에는 급제하였으나 여러 번 대과(大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선인에 대하여 죄인이 되었다.

백부(伯父) 도관(都官, 중앙관리) 정랑(正郎) 불민(不敏, 정랑은 정5품 벼슬 불민은 이름)의 자제가 하나 있는데 명망이 없었고 중부(仲父)는 성균(成均)으로 주부(主簿)를 지낸 물민(勿敏)이 세 아들을 두었으나 영체(零替)하였으며 다만 한 손자 팽령(彭齡)이 있어 음(陰)으로 이제 진잠현감(鎭岑縣監)이 되었으나 아들은 없다.
계부(季父) 미민(靡敏)은 자제 4형제를 두었으나 혹은 병들고 홀아비로 된 사람이 두어 사람이나 된다. 그 우리 선인의 자서(子婿, 아들과 사위)에는 급제하여 현감(縣監)도 되며 현령(縣令)도 되고 감사(監司)도 되었다.
숭홍공(崇弘公) 세 아들도 보잘것없으나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어 문안에 우쭐하게 있으니 오직 조상이 하늘에 계신 영혼의 음덕(蔭德)으로 도운 공이 아니겠는가?
우리 선인의 아들과 자손된 사람은 사람 노릇을 잘하여 문호를 다시 일으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각각 언행을 삼가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당연히 선인의 경계한 글로 거울을 삼고 관직에 소임을 다하고 뜻과 절조를 잡아서 조상의 청백을 법으로 삼고 청전(靑氈)을 삼아 대대로 추락함이 없은즉 부모에게도 욕이 없을 것이요. 조상의 이름도 드러내어 아름다운 일이 다 하지 않을 것인가 각각 힘쓸지어다.


*경주이씨 월성군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