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跋] 永嘉權相翊謹識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9:16

용재유고(慵齋遺稿) / 跋


永嘉權相翊謹識

慵訥齋兩先生之文。蒐得於禍。故兵燹之餘者。厪若干篇。 我 成孝王。甲申始。自柏社鋟。行之今慵齋。後孫道炯。極意搜訪復得。遺文數篇。及後賢論述之。辭以補翼之附以。退陶先生所撰。督郵公。訥齋子。 墓銘視舊本。稍以完備而猶不免於泰山亳芒也。嗚呼慵翁。爲戊午。賢流之首訥翁。爲吾鄕文獻之祖。其文章爾雅。又相伯仲。而惑躳罹。奇禍惑見幾遐遯。未有以。大鳴國家之盛焉。是則昔之君子。己屢稱不一稱。而歎息於。升降消長之機者也。後之人又何事於揄揚乎。今距先生之世。四白有餘載梓桑。有陵谷之感。尸祝爲鞠草之埸。而南國之士。猶想像誦慕之不。哀至於隻。字斷藳之遺。落人間者又爲之節。次收輯傳示無竆。與天球宛琰同其寶重。則其遺風餘澤之久。而可徵有如。是夫因竊惟之彼。一二宵人之煽毒於當日。者何不簿有文藝假餙張皇。而鴟梟鬼蜮之音。非人情之所。欲聞矧天道旣定之後。已雲空燼滅。而無所徵矣若是。乎節行德學之可貴。而言語文章。不足爲有無也。鳳羽豹斑奚。以多爲尙哉苟即。是善讀焉兩先生之氣。像音旨固在是矣。而淸流白馬之蹟藍。田徂徠之惠又足。以感動彝好。而有立懦敦薄之功矣。其補世敎淑士風。爲如何相翊畏壘後承也。於先生事窃賞一二有聞。而吾先君忠定公。於釋褐之初。論啓伸戊午諸賢之寃。社約推行又損益。訥翁之規者。歷世風義之感實。有異於人者。今於先生之書。雖使執役於剞劂氏之後。猶且不辭迺。寅炯甫謬屬。以卷首之叙。是則非所敢也。謹綴成書大槩及平。昔景慕之私。系之下方如。此是役也。金斯文濚模尸之徐。斯文翊洙文効力焉。皆遺敎之所漸也。寅道於慵齋爲。十三代而移寓東。都者屢世云。辛亥中秋節後學。永嘉。權相翊。謹識。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跋

*참조: 권상익(權相翊) : 본관(本貫)은 「영가(永嘉, 지금의 안동安東)」이고 호(號)는 「성재(省齋)」이다.
*참조: 성재선생문집(省齋先生文集) > 성재선생문집권십 > 跋 > 慵訥齋兩先生文集重刊跋
  http://www.ugyo.net/yk/gds/gdsKisaView.jsp?B_SUJI_ID=KSAC_M_A06000088&B_BOOK_ID=KSAC_T_A06000088_005&B_KWON_ID=002&B_STYLE_ID=002&iPage=1&B_KISA_ID=00036



◦[해제] 慵訥齋兩先生文集重刊跋 6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목숨을 잃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과 동생인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의 문집 중간본(重刊本)에 붙인 발문이다. 본래 두 선생의 유문은 많이 전하지 않았으나 용재 선생의 후손인 이도형(李道炯)이 적극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후현(後賢)들의 논술한 것을 모았으며, 퇴계(退溪) 선생이 찬(撰)한 눌재 선생의 아들 이덕장(李德璋)의 묘갈명(墓碣銘)을 붙여서 완성하였다.


발문[跋]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화란과 병란 뒤에 용재慵齋와 눌재訥齋 두 선생의 글을 얻은 것이 겨우 몇 편에 불과하였던 것을 우리 성효왕成孝王(순조純祖) 갑신년(1824)에 비로소 백록리사에서 간행하였다. 이번에 용재의 후손 도형道炯이 온 정성을 다해 수소문하여, 재차 남긴 글 몇 편과 뒷날의 현자들이 논술한 글을 확보하여 보충하고, 퇴계 선생이 지은 독우공督郵公【눌재의 아들】의 묘갈명1)을 덧붙이니 옛 판본과 비교해서 조금 완비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태산 속의 털끝에 지나지 않는다.
아, 용재옹은 무오년(1498)의 어진 이들 중 으뜸이며, 눌재옹은 우리 고장 문헌의 시조가 된다. 문장이 고상하고 반듯한 것이 또한 서로 버금가지만, 몸이 뜻밖의 재앙을 만나거나 기미를 보고 멀리 숨거나 하여 나라의 성대함을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다.2) 이에 대해서는 옛날 군자들이 이미 여러 번 언급함으로써 세상이 좋아지거나 나빠지고, 군자와 소인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기미를 탄식하였다. 훗날의 사람들이 다시 어찌 선양할 일이 있겠는가. 지금 선생이 살던 시대와는 400여 년의 거리가 있어, 묘소는 상전벽해가 되었다는 감회가 있고 제향하던 곳은 풀을 기르는 터가 되었다. 그러나 남쪽 지역의 선비들이 아직도 모습을 그리며 칭송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쇠퇴하지 않아서, 세상에 남아 있는 한 개의 글자나 자투리 원고까지도 순서를 잡고 수집하며 영원히 전해 주어 천구天球와 완염琬琰3)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남긴 풍도와 은택이 오래되어도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이와 같다.
이를 통해서 가만히 생각건대, 당시에 저 한두 소인이 악한 짓을 선동했던 것이 어찌 각박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문예가 있어 가식으로 떠벌리지만, 올빼미와 귀신과 물여우4)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은 사람 마음으로는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천도가 이미 바로잡아진 뒤에는 구름이 허공에 다 사라지듯 하여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처럼 귀하게 여길 만한 절개 있는 행실이나 덕과 학문은 언어나 문장이 있고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봉황의 깃과 표범의 가죽이 어찌 많은 것을 숭상하겠는가. 진실로 이 문집에 근거하여 잘 읽어 보면 두 선생의 기상과 말씀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사화를 당한 자취와 풍속을 교화하고 제자를 기른 은혜는 또한 본성에서 나와 덕을 좋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나 약한 자를 흥기하게 하고 경박한 풍속을 도탑게 하는 공이 있기에 충분하니, 세상의 교화를 돕고 선비들의 풍토를 맑게 하는 데 어떻겠는가.
나는 눌재가 은거했던 고장의 후예이다. 선생의 일에 대하여 일찍이 한두 가지 들은 것이 있고, 내 선조 충정공忠定公(권벌權橃)이 벼슬에 나아간 처음에 논계論啓하여 무오년 제현의 원통함을 신원하고, 모임의 규약[社約]을 미루어 시행하였으며, 또 눌옹의 규약을 가감하였던 분이다. 그래서 대대로 전해져 온 풍모와 의리에 감화되는 것이 실로 남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제 선생의 글에 대하여 비록 글자를 새기는 사람 뒷자리에서 일을 하게 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지만 인형寅炯 씨가 서문을 부탁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삼가 책이 이루어진 대략과 평소 우러르고 사모하던 마음을 엮어 이와 같이 뒤에 달아 두었다. 이 일은 사문斯文 김형모金瀅模가 시작하였고 사문 서익수徐翊洙가 또 힘을 바쳤으니 모두 남긴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도寅道는 용재에게는 13대손이 되는데, 경주로 옮겨 산 것이 여러 세대라고 한다.

신해년(1911) 중추절 후학 영가永嘉 권상익權相翊5)이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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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묘갈명 : 『퇴계집』권46에 나오는 「황산 찰방 이공 갈음명(黃山察訪李公碣陰銘)」을 말한다. 본 문집에서는 「찰방공의 갈음명[附察訪公碣陰銘]」이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2) 나라의……못하였다 : 하늘이 부여한 삶이 불우했던 탓에 태평성대를 기리는 아름다운 문장을 짓도록 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3) 천구(天球)와 완염(琬琰) : 보배로운 옥의 종류이다.

4) 올빼미와 귀신과 물여우 : 올빼미는 어미의 뇌를 쪼아 먹고, 어미가 죽고 나서야 새끼가 비로소 난다는 불효한 새이며, 물여우는 모래를 머금었다가 물속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에 모래를 뿜으면 사람이 병이 들게 한다는 물속에 사는 독충(毒蟲)이라고 한다. 음험하여 몰래 남을 해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5) 권상익(權相翊, 1863∼1935) : 자는 찬수(贊粹), 호는 성재(省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경북 봉화 출신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만국공관(萬國公館)에 보낼 호소문을 작성,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長書)에 서명하는 등의 일에 참여하였다. 국권이 상실된 뒤 후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발문[跋]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