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跋] 光州盧相稷謹書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9:18

용재유고(慵齋遺稿) / 跋


光州盧相稷謹書

右慵齋訥齋兩先生遺稿也。伯先生 詩二十。疏一。皆一。跋三。碣一。叔先生 詩一。狀錄三。丘墓文三。又家有訓。洞有約。合二編。噫佔畢先生之。門以文章。顯者六人而伯先生。居其一今其著述寥寥。如此何哉磨谷壁詩。出於古人之手尙。足爲不悅者之奇。貨茂豐正偶叅寫壁之。席而拜興五子受禍當是時。雖平日驚動。翻案珍藏訴帖者。見先生之作而無不。斂手相戒。右略而篇之。遺落人間。亦異矣。哉彼憸人。者力足以孥戮人而以。猶不能揜其。名朝野之史已屢。 書而不一書矣。 先王已歎賞而。 貤其爵矣多士。又尊慕而。尸其祝矣於。是平昔之。歛手相戒者復紛。紛然翻案而。珍藏之先生之。作始稍稍出世而。 啓焉而請復。 昭陵疏焉。而願一死國詩焉。而期扶。 宗社人皆知先生之。志斷斷無他。李師中孤忠。自許衆不知之。句只爲先生。準備於身。前而先生寫壁之。日亦安知。身後之能有知也。嗚呼先生之。孤苦顚沛如此而。人猶愈久而。愈仰之子光。克墩承健。輩譸張幻化。如彼而今乃。消落無存子。思所謂闇然日。章的然日。亡者於是。而尤不誣矣。叔先生痛兄。非罪鞱晦而。終柰城之。士猶尊慕不。衰祭社益。謹盖成敎於。家化俗於。坊而遺韻不沬也。伯先生後孫道炯。在胤示二先生。合集及附編曰。始印于永嘉懼。其約重印于。雞林冗而。失次今欲試以。鋟功圖之。久完請有以勘定之。顧藐然後生。㴱懼不堪然念。伯祖墨齋先生。與伯先生同師義。有所不敢辭者。矧身居畢翁。之鄕稔讀。戊午之史未嘗。不㴱致痛恨於。伯先生之事。又以載名卷未。爲榮謹盥手。奉閱而敘其。次仍書顚趾以。寓高景之思云爾。光州盧相稷。謹書。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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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집(小訥集)은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文集이다.
○노상직(盧相稷) 1855년(철종 6)~1931년.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 눌인(訥人), 자암병수(紫巖病叟)이고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소눌집(小訥集). ⓒ 한국고전번역원


발문[跋]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

위는 용재와 눌재 두 선생의 유고이다. 백 선생伯先生(이종준)은 시詩 20수, 소疏 1편, 계啓 1편, 발跋 2편, 갈碣 1편이고, 숙 선생叔先生(이홍준)은 시 1수, 장록狀錄 3편, 구묘문丘墓文 3편이며, 또 가훈이 있고 동약이 있어 합하여 2편이다. 아, 점필재 선생의 문하에서 문장으로 드러난 사람은 여섯 명이고, 백 선생이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제 그의 저술이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어째서인가.
마곡磨谷의 벽에 쓴 시는 옛사람의 손에서 나왔는데도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일을 꾸미는 기이한 재화가 되기에 충분했고, 무풍정(이총)은 우연히 벽에 글씨를 쓰는 자리에 있다가 다섯 아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이 당시 비록 평소라면 소송 문서조차 귀하게 여겨 보관하던 자들도 사안이 뒤집어지는 데 놀라서 선생의 작품을 보고서 손을 거두고 다들 경계하였다. 그런데도 보호하고 생략해서 편집하여 세상에 남겼으니 또한 기이하다. 저 소인들이 힘으로는 사람을 잡아 죽일 수 있었으나 그 이름을 덮을 수 없었고, 조정과 재야의 기록에는 이미 여러 번 써서 한 번만 쓴 것이 아니다. 선왕이 이미 감탄하고 칭찬하여 벼슬을 거듭 내렸고, 많은 선비가 또한 존경하고 사모하며 제향하였다. 그제야 옛날에 손을 거두고 서로 경계하던 자들이 다시 분분히 뒤바뀌어 귀하게 여겨 보관하니, 선생이 지은 글이 비로소 조금씩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계啓에서는 소릉昭陵을 회복하기를 청하였고, 소疏에서는 한 번 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하였으며, 시에서는 종묘사직을 부지하기를 기약하였으니,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안다. 이사중의 “외로운 충절을 자부해도 남들은 인정 않건만”이라는 구절은 다만 선생을 위해 선생 이전에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벽에 쓰던 날 자신이 죽은 뒤에 알아주는 자가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 선생은 이렇듯 외롭고 고달프고 불운하였으나 사람들은 오래될수록 더욱 우러르고, 유자광과 이극돈, 이승건 무리는 저렇듯 속여서 미혹하였으나 오늘날은 사라지고 없으니, 자사子思가 이른바 “군자의 도는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서 날로 없어진다.1)라고 하였던 것이 이에 속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숙 선생은 형이 죄가 없이 죽은 것을 마음 아파하며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서 세상을 마쳤는데, 내성의 선비들은 오히려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줄어들지 않고 제사를 더욱 삼갔으니, 이는 집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고을에서 풍속이 교화되어 유풍이 사라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백 선생의 후손 도형道炯과 재윤在胤이 두 선생의 합집과 덧붙인 글을 보여 주며 “처음 안동安東에서 간행하였으나 간략한 것이 염려되어 계림鷄林(경주)에서 중간重刊하였는데 번잡하고 순서가 없었습니다. 이제 간행을 하면서 오래가고 완비되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교감하여 바로잡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돌아보건대, 나는 아득한 후생이라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백조伯祖 묵재墨齋2) 선생과 백 선생은 스승이 같은 정의情義가 있어 감히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다. 더구나 내가 필옹畢翁의 고향3)에 살면서 무오년(1498)의 기록을 익숙히 읽어 백 선생의 일에 대하여 깊이 마음 아파하며 한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이름이 책 끝에 실리는 것을 영예로 여겨 삼가 손을 씻고 받들어 읽은 다음 차례대로 서술하고, 이어 전말을 써서 높이 우러르는 마음을 붙인다.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4)이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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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자의……없어진다 : 『중용장구』 제33장에 나오는 말이다.

2) 묵재(墨齋) : 노필(盧㻶, 1464∼1532)의 호이다. 초명은 조동(祖同), 자는 공서(公瑞),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성(固城) 출신이다. 경상도 도사로 재직 중 기묘사화 때 김안국의 일파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인 고성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3) 필옹(畢翁)의 고향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외가가 있는 경남 밀양(密陽) 대동리(大洞里)에 서 태어났기에 하는 말이다.

4) 노상직(盧相稷, 1855∼1931) :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밀양(密陽) 단장면(丹場面) 노곡(蘆谷)에 거주하였다.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소눌집』 등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발문[跋]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