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雜著] 琴軍威墓碣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8:21

용재유고(慵齋遺稿) / 雜著


琴軍威墓碣

公諱啓。字沃卿。奉化人。高麗英烈公儀之後。曾祖。精勇郞遇工。祖。彰信校尉前領中郞將用和。考。承訓郞恩津縣監淮。妣宜人梁氏。南原望族。公以正統己未正月十九日生。兄弟四人。皆早世。公其季也。與仲兄徽。同養大夫人。仲武科。又魁拔英試。遇知於 世廟。宦游中外。公奉母不仕。梁氏享年八十一。與仲同負土廬墓。旣服闋。年三十九。始仕補義興衛後部將。未幾。以非罪罪。公議憐之。復授忠武衛部將。弘治癸丑。階通訓。授軍威縣監。有治名。性耿直。關節不行。爲幕佐所惡而罷。嘗患軟脚病。爲部將時。冒風暑益感疾。常曰。死生有命。藥餌何補。乃不治。以丙辰六月二十一日。終于家。壽五十八。以其年十二月十二日。葬于縣之東面楓井里先人之域。公之志也。娶生員李時敏之女。生二子。千年,兆年。一女幼。李氏携孤。以禮奉喪。伐石求誌於其兄宗準。和淚略敍公壽終日月以歸之。弘治丁巳十一月日。朝散大夫義城縣令李宗準。謹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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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7. 군위현감(軍威縣監) 금계(琴啓)의 묘갈(墓碣).
가족관계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던 일을 적었다. 금계는 이종준의 매부이며‚ 어린 딸만 데리고 사는 누이의 부탁으로 씀.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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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현감 금계琴啓의 묘갈[琴軍威墓碣]

공의 휘는 계啓이고 자는 옥경沃卿이며 본관은 봉화奉化이니, 고려 영렬공英烈公 의儀의 후예이다. 증조부는 정용랑精勇郞 우공遇工이고 조부는 창신교위彰信校尉 전 영중랑장前領中郞將 용화用和이며, 아버지는 승훈랑承訓郞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이다. 어머니 의인宜人 양씨梁氏는 남원南原의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이다.
공은 정통正統 기미년(1439) 정월 19일에 태어났다. 위로 네 명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공이 그 막내이다. 중형 휘徽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중형이 무과에 급제하고 또 발영시拔英試1)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여 세조 때 능력을 인정받아 조정 안팎으로 벼슬하였는데, 공은 어머니를 모시며 벼슬하지 않았다. 양씨梁氏가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나니 중형과 함께 봉분을 만들고 시묘살이하였다. 복을 마치고 나서 나이 서른아홉에 비로소 벼슬하여 의흥위 후부장義興衛後部將에 보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가 아닌 것으로 처벌되니 공의公議가 가엾게 여겼고, 다시 충무위 부장忠武衛部將에 임명되었다.
홍치弘治 계축년(1493)에 통훈의 품계로 군위 현감軍威縣監에 임명되어 잘 다스린다는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뇌물청탁이 통하지 않으니 막좌幕佐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일찍이 각기병을 앓았는데 부장으로 있을 때 바람이나 더위를 무릅쓰고 근무하다 보니 병이 더욱 심해졌다. 늘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약을 먹는 것이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치료하지 않아 병진년(1496) 6월 21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8세였다. 그해 12월 12일 현의 동쪽 풍정리楓井里 선조의 묘역에 장사 지내니 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공은 생원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천년千年과 조년兆年이며, 딸이 하나인데 어리다. 이씨가 고아를 이끌고 예로 상을 치른 다음 비석을 세워 그 오빠 종준에게 묘지墓誌를 구하기에 눈물과 함께 대략 공이 수명을 마친 달과 날을 서술하여 돌려준다.

홍치 정사년(1497) 11월 아무 일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종준李宗準이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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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영시(拔英試) : 조선 세조 때 임시로 베푼 과거이다. 세조 12년(1466) 단오절에 종친과 문무백관을 모아 술을 내려 주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는데, 이때 선발에 합격한 사람은 중추부 지사 김수온(金守溫) 등 모두 40인이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선생유고 > 묘갈墓碣 > 군위 현감 금계琴啓의 묘갈[琴軍威墓碣]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봉화금씨 군위공 종택(奉化琴氏 軍威公 宗宅)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에 있는 봉화금씨 군의공 금계(琴啓)의 종택이다.
○군위공(軍威公) 금계(琴啓) 1439년(세종 21, 을미)∼1497년(연산군 3, 정사). 자는 옥경(沃卿)으로 성품이 어질고 강건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그 안에서 3년 동안 소금과 죽만을 먹고 살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종택의 건립시기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초기에 봉화금씨 시조인 영렬공 금의(琴儀)가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고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후 수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인 효정이 잘 보존되어 있다. 2005년 12월 2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팻말 내용
봉화금씨 군위공 종택은 고려초기에 봉화 금씨 시조인 영렬공 금의(英烈公 琴儀, 1153~1230)선생께서 이곳에 내려와 터전을 잡고 1450년대에 창건한 후, 그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수차 증·개축을 하였고, 현재 종택은 영렬공 금의의 12대손으로 은진현감을 지낸 금회(琴淮)의 넷째 아들인 금계(琴啓)의 종가집이다. 종가입구에는 영렬공께서 심었다는 괘화나무 3그루가 있으며, 20m 정도 떨어진 곳에 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인 효정(孝井)이 원형대로 남아있고, 종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마산(斯馬山)은 고구려시대의 군명(郡名)인 '고사마(古斯馬)'의 지명이 변치 않고 전해 내려오는 등 봉화금씨 발원지이자, 봉화의 산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봉화 금씨 군위공 종택은 튼 ㅁ자형 건물로 수차례 중수로 인해 건립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지금의 사랑채와 안채가 중건시의 평면구성과 구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19세기 후반 이후 건축유형을 보여주는 등 종택의 입지환경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사)경북문화유산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