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6세기 중반 이후 재지사족들은 각 고을과 동리별 향약 시행을 매개로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향약은 대체로 재지사족의 勢가 강한 고을일수록 빠른 시기에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재지사족이 형성되었던 慶尙道安東府의 屬縣인 奈城縣에서는 16세기 전후 무렵부터, 洞約이라는 이름으로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내성의 동약은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치폐를 거듭하였고, 명칭도 성격의 변화에 따라 洞契 또는 社約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기도 하며, 19세기말가지 그 전통이 존속될 수가 있었다.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876년 내성 출신의 재지사족 金喆銖가 마련한 향약의 제 규정으로, ‘奈城社約節目 幷小序’이란 이름으로 엮여져 있으며, 序文, 社約節目, 讀約之禮, 開講之規, 契中立約, 附寒岡契議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문에서는 내성에서 향약이 실시된 연혁과 절목의 제정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奈城社約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皇明 弘治 연간(1488~1505)에 訥齋 李弘準이 規例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우리 선조 鶴汀公(金秋吉, 1603~?)에 이르러 完議를 이어서 마련하였으며, 蒼雪權公(權斗經, 1654~1726)께서 藍田의 朱子增損呂氏鄕約을 참작하여 규정을 만들었었다. 우리 고장은 문헌이 彬彬하여 가히 볼 만하였으나, 세속이 멀어지고 풍속이 타락하면서 籍은 있으나 講會를 열지 않은지 거의 200년이 되어 간다. 이에 丙子(1876) 가을 여러 군자가 慨然해 하며 이를 다시 한 번 행하고자 하였다. 權璉夏(1813~1896)가 都契長이 되었고, 나 喆銖가 외람되게 副契長을 맡았다. 힘써 사양하였으나 부득이 溪院에 나아가 社約을 잃고, 『心經』을 강론하였으니 모인 자가 180여인이나 되었다. 아! 畏壘의 象設을 모두 나라에서 금하는바 先聖과 先師를 參謁하는 예는 감히 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章甫들의 성한 모습과 絃誦의 洋洋함은 역시 가히 볼만하였다. 밤늦게까지 천둥소리처럼 울리니 하늘과 땅의 마음에 과연 實心으로 능히 공부를 하여 끝과 처음이 같다면, ‘邇之事父 遠之事君(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하게 될 것이니, 모두 우리 彛性 중의 物事인 것이다. 先聖과 先師의 道는 사람이 모두 가히 배울 수 있는 것이니, 어찌 古今의 차이가 있겠는가? 契長의 勸諭文은 나의 조부 文泉公(金熙紹, 1758~1837)이 講會한 일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喆銖가 두려워하며 힘써 遵修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國朝鄕禮合編』을 취하고, 蒼老(權斗經)의 社約을 참작하니, 모두가 스스로 경계하고 또한 같은 뜻을 보이는 것으로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서문과 같이 奈城社約은 弘治 연간에 제정되었으며, 金秋吉, 權斗經 등에 의해 朱子增損呂氏鄕約을 참작하여 정비되었다. 17세기 이후 내성사약은 溪院, 즉 三溪書院과 연계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鄕射堂 대신, 내성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삼계서원에 지역의 사족들이 모여 讀約, 講會 등을 개최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제 조항은 서문 뒤에 부기되어 있는데, 權斗經이 1716년에 제정한 「社約節目」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社約節目」은 권두경의 문집인 『蒼雪齋先生文集』과 역대 내성에서 실시된 향약관련 기록을 엮어 놓은 「社約一統」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서문 가운데 부계장을 맡고 있던 김철수가 畏壘의 象設을 모두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면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삼계서원이 1871년의 서원정책으로 훼철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김철수는 서원훼철령 이후, 이에 반발하여 유건을 찢고 성균관에서 퇴소하다 한 동안 유배당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서문 다음에는 향약의 4대강령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을 설명하고 있는데, 4대강령을 비롯한 이하의 조항은 「社約節目」에 수록된 내용과 상당수 동일하다. 4대강령에서는 각 강목별로 의미를 설명하고 세칙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즉 朱子增損呂氏鄕約을 바탕으로 한 約員들의 행동규범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향촌사회의 지배층인 재지사족들의 자기규제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다. 강령의 조목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德業相勸에서는 德이란 善을 보면 반드시 행하고 과실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며, 능히 자신을 다스리고 부모를 잘 섬기며, 능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어른을 잘 섬기며, 능히 자제를 가르치고 다른 사람과 親睦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을 善한 길로 인도하고 과실을 규제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위하여 꾀를 내고 다툼을 풀어 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고 관직에 머무를 때 그 職을 다할 수 있으며, 능히 제사를 삼가고 아랫사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 孝悌, 忠恪, 接朋友 및 讀書와 治田, 營家, 그리고 租賦의 성실함과 六藝의 익힘을 業이라 이른다고 했다. 이어 이상의 德業은 동약의 사람들이 각자 닦고 서로 권면하며, 會集하는 날에 능한 자를 籍에 기록하여 다른 사람을 警勵케 하라고 했다.
過失相規에서는 罪科를 세 종류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하였다. 먼저 의리를 저버린 죄로 첫째 酗博鬬訟(술에 취해 주정부리며 소란스럽게 하는 자, 도박하는 자, 때리고 욕하며 싸우는 자, 訟事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자), 둘째 行止踰越(행동거지가 잘못되어 예에 어긋나고 법을 어기는 자), 셋째 行不恭遜(어른을 모욕하거나 힘을 믿고 약한 아랫사람을 능멸하는 자), 넷째 言不忠信(모략하여 다른 사람을 죄과에 빠뜨리는 자, 다른 사람과 함께 동약을 배반하는 자, 헛된 말로 事端을 일으키는 자), 다섯째 造言誣毁(다른 사람을 무고하여 없는 죄를 있게 하는 자, 작은 것을 큰 것으로 꾸며대는 자, 앞에서는 옳고 뒤돌아서는 그르다고 하는 자, 익명의 문서로 다른 사람의 사사로움을 드러내는 자, 다른 사람의 지난 잘못을 희롱하며 이야기하는 자), 여섯째 營私太甚(다른 사람과 교역함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 이익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자, 약한 자를 侵虐하는 자)이다. 다음은 약조를 어기는 허물로 첫째 덕업을 서로 권면하지 않는 것, 둘째 과실을 서로 규제하지 않는 것, 셋째 禮俗을 서로 이루지 않는 것, 넷째 患難 때 서로 돌보지 않는 것 네 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몸을 닦지 않는 과실로 첫째 交非其人(그 사람이 아닌 자들과 사귀는 것), 둘째 遊戲怠惰(놀고 희롱하고 태만하고 게으른 것), 셋째, 動作無儀(움직임에 예의가 없는 것), 넷째 臨事不恪(일에 임하면서 조심하지 아니하는 것), 다섯째 用度不節(사용하는 법도가 검소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과실은 동약의 사람들이 각자 성찰하고 규제하여, 작은 허물이면 조용히 타이르고 큰 허물이면 무리에서 이를 규제하는데, 고치지 않으면 會集하는 날에 月有司가 契長에게 알리고 계장이 의리로 그를 誨諭하는 데, 고침이 있으면 그만두고 불복하고 爭辨하며 끝내 고치지 않으면 出約시켜 버린다고 했다.
禮俗相交에서는 예속의 교류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첫 번째는 尊幼輩行으로 어른에서 아이까지 등급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20세 이상은 尊者로 모시며 아버지처럼 섬기고, 10세 이상은 長者라 하여 형처럼 섬긴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래위로 10세 이상 차이가 나지 않을 때는 敵者라 하며, 10세 이하는 少者, 20세 이하는 幼者로 분류하였다. 두 번째 造請拜揖은 손님을 뵙고 拜揖하는 절차를 尊幼輩行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其一은 歲首나 慶事가 있을 때 幼者가 尊者와 長者를 찾아뵙고 인사하는 절차이며, 其二는 尊者와 長者를 방문하는 절차로 중간에 客이 찾아오거나, 先客이 있는 경우와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의 처신해야할 방도이고, 其三은 길에서 尊者와 長者를 만났을 경우 인사하는 방법이다. 세 번째는 請召迎送으로 청하여 대접할 때 맞이하고 보내는 예절로 역시 세 가지로 나누는데, 其一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절차이며, 其二는 모임 때 자리에 않는 방법이다. 기본적으로 나이에 따라 자리를 하지만 특별한 경우 上客으로 모신다고 했다. 특히 異爵者는 나이에 따라 서열하지 않고 상객으로 모시는데, 異爵者는 堂上과 侍從臺諫을 역임한 인사가 해당된다. 其三에서는 燕集, 즉 여러 잔치 모임에서 酬酌하는 갖가지 절차와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其四는 멀리 떠나는 자와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을 迎送하는 내용이다. 네 번째는 慶吊贈遺로 慶吊가 발생했을 경우 約員들이 도와주는 규정으로 其一은 同約 상호 간에 축하해주는 吉事를 설명하였고, 其二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주는 凶事를 설명하였다. 其三에서는 동약 계원 자신의 喪禮와 葬禮 때 도와주고 조문하는 규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其四에서는 먼 곳에서 約員의 喪事가 발생했을 경우 護喪하는 규정이다. 이상 禮俗相交는 月有司가 주관하였다. 아울러 월유사는 예속에 대한 약원들의 違慢을 감독하는데, 만약 약조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契長에게 고하여 이를 꾸짖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규제한다고 나타나 있다. 만약 거듭 어김이 있으면 過籍에 기록하였다.
患難相恤에서는 일곱 가지의 사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수재나 화재를 당했을 때, 둘째는 도둑 당했을 때, 셋째는 질병이 있을 때, 넷째는 喪을 당했을 때, 다섯째는 나이 어린 고아가 있을 때, 여섯째는 무고한 일을 당했을 때, 일곱째는 가난하고 궁핍하게 되었을 때, 契中에서 도와주는 원칙을 나열하였다. 이상 患難相恤은 그 집에서 契長에게 알리되 同約이 대신 알려주기도 하였다. 월유사는 어른들의 의견을 쫒아 救濟를 주관하는데, 만약 도와주는 財物을 내놓는 자가 있으면, 그 선행을 善籍에 기록하였다.
이상 향약의 4대강령으로 이루어진 4條는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기본으로 하고, 『國朝鄕禮合編』 및 權斗經의 「社約節目」을 참고했으며, 약간의 조항을 부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권두경은 「사약절목」에 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규정을 주자증손여씨향약과 寒岡 鄭逑先生의 契會立議및 文憲書院立約을 참고하였으며, 時俗에 맞추어 약간의 조항을 부기했다고 기록하였다. 寒岡의 立議는 본 자료 뒷부분에 부기되어 있다. 文憲書院立約은 栗谷에 의해 마련된 文憲書院學規이다. 문헌서원은 율곡이 향약을 제정하였던 海州에 위치한 서원이다. 한편 『國朝鄕禮合編』은 1797년 正祖의 명으로 간행된 것으로, 향약을 비롯하여 각종 禮書에서 확인되는 향촌에서의 鄕射禮와 鄕飮酒禮를 풀이하여 설명한 책이다.
향약 4조 뒤에는 讀約之禮와 開講之規, 契中立議, 附寒岡契議가 차례대로 부기되어 있다. 먼저 讀約之禮는 讀約하는 절차와 규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四孟朔에 서당에서 講約을 열며 나머지 달의 약회는 각동에서 개최했다고 한다. 「사약절목」의 講會讀約法과 거의 동일한 내용인데, 여기에서는 서당이 아닌 서원에서 讀約을 개최했다고 나타나 있다. 서당은 훼철된 삼계서원의 舊址에 임시로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하는 尊幼輩行에 따라 강약하는 절차, 契長, 副契長, 月有司 등 동약 임원의 의식 절차 등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 일반적인 讀約의 절차를 따르고 있으며 幼者 아래에 卑者와 庶孼도 참여하였다. 讀約을 통해 향촌 내 상하질서관계를 뚜렷이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讀約에 이어 講會를 열고, 討論과 著述을 하거나 習射를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讀約之禮 뒤에는 여덟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講會讀約 절차 때의 約任과 尊幼輩行에 따른 자리 배치로, ‘先聖先師參謁之圖’, ‘契長約員齊拜尊者之圖’, ‘契長約員拜長者之圖’, ‘契長約員拜稍長者之圖’, ‘稍少者拜契長之圖’, ‘少者拜契長之圖’, ‘幼者卑者拜契長之圖’, ‘禮畢就坐之圖’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사약절목」에 수록되어 있는 社契約講會行禮之圖를 간략하게 그린 것이다.
이어 開講之規는 講會를 여는 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講會의 구성원으로 선생의 역할을 한 講長과 여러 학생의 우두머리인 東西班首가 확인된다. 이들은 進講하기 전에 朱子의 白鹿洞規를 읽었다고 한다. 이는 「사약절목」에 없는 조약인데, 그 대략이 서원에서 進講하는 절차와 거의 동일하다. 내성에서는 삼계서원이 고을의 향사당 역할을 해 왔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삼계서원이 훼철된 시기로, 결국 開講之規는 서원에서 進講하는 전통을 향약을 통해 유지시키려는 의도에서 부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契中立約은 모두 8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처음 立約할 때에 약문을 동지들에게 보여준 뒤, 향약을 하나같이 따르는 것으로 마음에 새기고 몸을 단속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入約을 허락한다. 一, 都契長이 有故로 불참할 경우에는 副契長이 會集 때 예를 행하며, 존자 이하는 부장의 나이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一, 洞約은 멀고 가까움이 일정하지 않아 혹은 30~40리 떨어져 있는 자도 있어, 吉凶事 때 인사를 함에 큰 慶吊事와 큰 재해가 있을 때 형세를 한 결 같이 하기가 어렵다. 이에 10리 내에 거주하는 자는 일제히 나아가 행하되 10리 밖에 거주하는 자는 편지로 대신 행한다. 비록 10리 내에 거주하더라도 病老하거나 有故한 자도 편지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한다. 一, 歲時에 어른을 배알하는 데에는 禮의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約員은 매우 많아 유자와 소자의 존자가 되는 자가 심히 많다. 몸소 두루 인사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어서 한정하는 방도를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60세 이상과 10리 이내 거주자로 제한한다. 비록 60세 미만이라도 만약 副長이면 마땅히 나아가 인사드린다. 집이 가난하여 奴馬가 苟艱하여 나아가기 어려운 경우는 같은 마을 사람들과 연명으로 단자를 올려 인사드리되 반드시 15일 내에 행한다. 一, 喪事는 成服하기 전에 일제히 나아가 조문하는데, 역시 10리 이내 거주자를 한도로 한다. 혹 폭우를 만나 나아가기 어려울 때에는 護喪所에 단자를 보내는 걸 허락한다. 만약 10리 내의 거주자가 세 달이 지나도록 조문하지 않거나, 30리 밖에 거주하는 약원으로 해가 마치도록 아무 이유 없이 조문하지 않는 자는 월유사가 이를 過籍에 기록한다. 葬時 때는 가까이 거주하는 자의 경우 부자형제가 모두 나아가며, 먼 곳에 거주하는 자는 한 집에 한 사람만 나아가 호상한다. 一, 지금 이 契約은 진실로 인륜과 풍속은 敦厚케 하는데 있으니 후손들에게 권장하고 가르침에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모이는 날에는 모름지기 한 달 동안 익힌 공부를 살펴보았는데 계원이 너무 많아 講會 때 여러 계원이 誦讀할 겨를이 없는 형세이다. 매월 朔望에 먼저 하루 동안 각자 各里에서 私講하는데, 講師는 계원마다 익히는 바의 정도를 기록한다. 30세 이하는 등을 돌리고 암송하며, 40세 이상은 『小學』과 『家禮』 및 經史 등을 臨講한다. 만약 製述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려는 자는 半月에 詩賦 3首 이상 지으며, 疑義함이 있으면 5首를 짓는다. 朔日에 講誦함을 마치며 禮容을 함께 익힌다. 一, 옛적 사람들의 향약은 길흉사 때 보내어 주는 것과 患難 때 賙恤하는 것을 모두 米, 布, 錢, 幣, 酒食을 사용하였다. 지금 우리 州는 가난한 고을인 까닭에, 貨財로 예를 차리고자 해도 거의 無麵한 상태여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왕복하며 살피고 문안하여 같은 契의 두터운 뜻을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으니, 禮服과 冠靴와 같은 것 또한 가난한 선비가 힘써 마련할 것이 아니다. 다만 時俗에 맞게 입고, 착용함에 간편함을 쫒는다. 一, 30리 안에 거주하는 約員으로 세 번 연속 아무 이유 없이 모임에 불참하는 자와 30리 밖에 거주하는 약원으로 해가 마치도록 아무 이유 없이 모임에 불참하는 자는 誠意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모두 出約한다.
이상 8개조는 실질적인 동계의 운영과 관련된 조항으로 주로 길흉사 때의 상부상조와 이를 매개로 한 후학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다. 19세기는 재지사족이 新鄕세력으로부터 강력한 사회적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이는 곧 재지사족 상호 간의 돈독한 결속력을 요구하였는데, 위의 조항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제정된 것이다. 한편, 「사약절목」에는 모두 12개조의 契中立約이 나열되어 있다. 위의 8개조는 김철수가 「사약절목」의 12개조를 참고하여 시의에 맞게 간략화한 것이다.
契中立約 다음에는 그 모태가 된 것으로 여겨지는 附寒岡契議 6개조가 부기되어 있다. 이는 鄭逑가 1583년 星州檜淵書院에서 鄕友와 문인들로 이루어진 契를 조직하고 난 뒤 만든 규정이다. 정구의 문집인 『寒岡集』의 「契會立議」에서는 모두 17개조가 확인되는데, 여기에 부기한 것은 契中立約에 없는 조항을 보충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6개조 역시, 「사약절목」에 부기되어 있다.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매월 초하룻날 와서 모임을 갖는다. 30리 밖에 거주하는 자는 사계절의 첫 달 초하룻날에만 오는데, 매월 온다면 더욱 좋다. 一, 약조를 읽은 후에는 朱子의 白鹿洞規를 강독한다. 一, 朞年과 大功으로 아직 葬事를 치르지 않은 자는 모임 불참을 허락한다. 一, 모든 길흉사에 서로 돕는 일은 直月이 약정에게 알려 나누어 주는 수를 정한다. 힘은 크고 작음이 있고 정분에는 두텁고 박함이 있으니, 아울러 마땅하게 參量하되 本家의 형편을 고려해야 한다. 一, 비록 入約했다 하더라도 모임에만 참석하고 분발하는 뜻이 없고 한가로이 날을 보낼 뿐 나아가는 성과가 없는 자가 있으면 出約시킨다. 혹 글은 잘하지 못하나 善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는 실효가 있는 자는 入約을 허락한다. 一, 入約한 사람은 각자 마음을 가다듬어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야 한다. 비록 학문에 淺深이 있고 재능에 高下가 있다 하더라도 그 뜻하는 바와 의향은 반드시 옛 사람을 배우며 이익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도를 밝히고 功을 계산하지 않으며, 부귀에 급급하지 말며 빈천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야 儒者의 기미가 있게 된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이는 이미 우리 무리와 어울릴 수 없는 자이니, 비록 約中의 벌칙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모임에 따라 참석하여 우리 약중에 수치를 끼칠 수 있겠는가? 誼를 바르게 하고 道를 밝히는 자는 군자이며 이해를 계산하는 자는 소인이다.
자료의 마지막에는 이 해(1876) 여름, 삼계서원을 대신하는 三溪廚舍의 낙성이 있었다는 사실과 여러 임원들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당시 都監이 權載珽, 別任이 權世淵과 金浩永이었다고 한다. 또한 社約의 임원으로는 執禮 金耆永, 月有司 權重淵과 金魯銖, 同主 金夔永, 異爵者 權泳夏로 명기되어 있다. 이중 동주였던 김기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약일통」의 1876년 讀約 후의 續契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유사였던 권중연은 「사약일통」을 편찬한 인물이며, 권영하는 文科 급제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어서 異爵者가 될 수 있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奈城의 향약은 16세기 전후한 시기에 洞約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어 19세기 말까지 시행되었었다. 현존하는 내성지역 향약 관련 기록에서는 사회적 변동에 따른 향약의 시행 추이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본 향약은 1876년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19세기 후반 사회적 변동 상에 따라 종전의 동약을 변통하여 제정한 것이다. 종전과 같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기초로 하되 尊幼輩行에 따른 年齒 서열 이외에도 異爵者, 卑者, 庶孼과 같이 士族 내 신분에 따른 서열화가 확인된다. 또한 奈城社約節目의 처벌 조항은 사족 스스로의 실천을 권장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향약을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고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기 보다는 신분 내 결속력 강화를 위해 제정되던 조선후기 향약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한편, 본 향약이 제정될 무렵에는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讀約과 講會의 장소였던 삼계서원이 훼철된 상태였다. 즉 본 자료에서는 서원이 훼철된 가운데, 향약을 매개로 서원의 전통을 지속시키려던 당시 재지사족들의 동향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