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6세기 중반 이후 재지사족들은 각 고을과 동리별로 향약을 시행함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도모하였다. 향약은 대체로 재지사족의 勢가 강한 고을일수록 빠른 시기에 실시되었는데, 慶尙道安東府의 屬縣인 奈城縣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6세기 전후 무렵부터, 洞約이라는 이름의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내성에서의 향약은 이후 약 400년 동안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치폐를 거듭하였고, 명칭도 성격의 변화에 따라 洞契 또는 社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내성에서의 향약 관련 자료는 역대 내성 출신의 재지사족이 남긴 文集類에 序文과 雜著 등에서 간헐적으로 확인된다. 또한 일부 사족 가문에서는 내성에서의 역대 향약자료를 엮어 놓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본 자료는 내성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인 酉谷의 安東權氏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9세기 후반 權重淵(1830~1883)이 역대 내성의 향약관련 기록을 「社約一統」이란 제목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사약일통」은 序文, 節目, 立議, 完議, 座目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가 작성된 시대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가장 먼저 수록되어 있는 것은 16세기 전후 李弘準가 작성한 「洞約序」이다. 이홍준이 내성현에 정착한 시기는 戊午士禍 이후로 본 동약이 작성된 것은 무오사화가 있었던 1498년과 그의 沒年인 1504년 사이로 추정된다. 「내성사약」 자료 중 가장 앞선 것으로, 최초 내성에서 동약이 결성될 때 작성된 서문이다. 「동약서」는 이홍준의 遺稿인 『慵齋訥齋遺稿』에 「洞約」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성현은 본래 지세가 편벽하여 民物이 드물고 인심이 頑惡하여, 禽獸에 가까워 禮義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대개 子弟를 거느린 자는 詩와 書를 가르치지 않고 漁獵을 일삼았으며, 책을 가지고 다니면 오히려 齟齬人이라고 조롱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면 釣名人이라고 비난하였다. 또 부모의 喪을 당하고도 힘써 삼가지 않고 不義를 자행하였다. 혹은 서로 원망하고 모함하기를 일삼았고, 혹은 비열하고 인색하여 몰래 속여 이로움을 다투었다. 그런 까닭에 근년에 두셋 長老가 이처럼 不美한 풍속을 개탄하여 사람들은 깨우치고 이끌어 조금 좋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습속 때문에 제대로 교화되지 않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오직 우리 洞中 사람들은 모두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어찌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쪽에 잘못이 있으면 내가 규정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저쪽에서 바로 잡아 주어 다시 잘못이 없게 하니, 이는 동중에서 서로 勸勉하는 義이다. 그러나 잘못이 있어도 잘한 것처럼 속이고, 혹 남의 잘못을 떠들어 공개하며 덮어 주거나 참을 줄 모르는 자는 연배와 지위의 대접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일 규정하고 충고해도 이를 소홀히 여기며 회개함이 없는 자나, 동약을 지키지 않으며 남에게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제와 함께 쫒아내어 자손들에게 龜鑑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중의 사람들은 한 몸이 되어 다음을 시행해야 될 것이다.
이상 서문에서는 동약 시행의 명분을 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 시행범위가 내성현 일대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동약서」 다음에는 16세기 전후 동약이 결성될 때 당시의 座目이 수록되어 있다. 이홍준을 비롯하여 모두 18명의 성명을 기재하였다. 해당 인물의 字와 관직 같은 비고 사항은 성명 아래에 세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이 좌목에 기재된 자들은 이홍준과 교유한 인물이거나 친인척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내성에 정착한 재지사족으로, 좌목의 규모는 후대에 비해 훨씬 작은 편이다. 즉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동약의 구성원은 혈연적 관계가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약의 결성이 古來로 이어져온 촌락 중심의 공동체 조직과 族契와 같은 혈연조직과 무관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좌목 기재 인물 가운데는 모두 4명이 損徒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지만 연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좌목 다음에는 제 규정 위반자에 대한 처벌조항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홍준의 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죄질의 輕重에 따라 처벌조항은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무거운 벌은 永永損徒秩로 인륜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거나 조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 해당되며, 이들은 영원히 동중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음은 損徒秩로 사족으로의 체통을 어지럽히거나 부정을 저지른 자가 해당되며, 이들도 동중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다만 永永損徒秩과는 달리 사후에 죄를 뉘우치거나 물건을 내면 다시 동중에 참여 할 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約任으로 부정을 저지르거나 約會에서 불성실한 임원에 대한 처벌로 輕重에 따라 重罰秩, 中罰秩, 下罰秩로 처리하였다.
「追設約條」는 동약 제정 후 추가로 마련된 규정으로, 壬寅 10월 28일에 제정되었다고 세주되어 있으며, 이홍준의 유고 「동약」에도 부기되어 있다. 그런데 「추설약조」는 이홍준 다음 세대에 제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추설약조」 다음에 수록된 追入 좌목 기재 인물의 생몰 연도를 비교해 볼 때, 임인년은 1542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약조는 約員들 간의 相互扶助와 관련된 내용으로 吉凶事를 喪事, 婚姻, 付火, 慶事, 疾病로 나누어 부조 물품과 양을 명기하였다. 부조 물품으로는 米, 太, 紙, 空石, 助役人, 淸酒, 濁酒, 鷄雉, 炬火, 實果, 成造木, 藁索, 白米, 木棉, 藥 등이 있다. 가장 많은 부조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 喪事로 凶事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추설약조」 다음의 좌목은 追入과 後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약 결성 무렵 작성된 좌목 입록자의 한 두 세대 후손이다. 역시 字와 관직 같은 비고 사항을 세주로 부기하였다. 追入된 자는 己卯士禍와 乙巳士禍 때 被禍되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權橃(1478~1548)을 비롯하여 모두 12명, 後入된 자는 모두 8명이다. 최초의 좌목 입록 인물과 합치면 모두 38명으로 성씨별로는 李氏 6명, 南氏 6명, 裵氏 5명, 金氏 4명이며, 權氏, 琴氏, 余氏, 鄭氏, 柳氏, 禹氏, 呂氏, 黃氏, 朴氏가 확인된다. 이 중 이홍준의 慶州李氏와 英陽南氏, 義城金氏, 宜寧余氏, 光山金氏, 全州柳氏, 丹陽禹氏 등은 16세기 이전에 이미 내성의 재지사족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단양우씨의 경우 최초 좌목에 2명이 입록되었으나 후대의 좌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追設이 이루어진 동약은 16세기 중반 사회적 변화상에 따라 새롭게 마련된다. 生講條, 死講條, 定罰例, 約行, 約戒가 추가된 것이다. 이에 앞서 嘉靖甲寅(1554) 10월에 작성된 李文奎(1518~?)의 「洞約後序」가 수록되어 있어 새롭게 동약이 마련되는 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동약후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듣건대 孔子가 말하기를 “군대의 훈련을 그만두고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있으나, 신뢰는 버려서는 안 된다(去兵去食 而信則不可去也)”고 했다. 그러한즉 ‘信’이란 글자 한 자는 실로 크다. 우리 무리는 대개 이것을 가르쳤고 행해 왔으니, 이는 우리 외조 李弘準 공께서 우리 고을의 장로 약간인과 함께 고을에서 가르쳐 왔던 것이다. 우리 先人들이 이를 준수하고 행하였었다. 아! 이로부터 後人들은 없고, 제도만 남아서 末流에 행하지 않게 되었으니, 비록 고을의 한 두 장로가 古今의 일에 상심하고 있으나 누가 이들과 함께 행하겠는가? 이에 후대의 사람이 다시 가르치는 것을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 奎가 妄量되게 孝悌, 忠恕, 禮義, 哀敬의 도리로써 이를 더하여 옛 제도에 增益하였다. 生講과 死講 10目을 그 왼쪽에 기록하여, 父老와 이미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이를 함께 하고자 한다. 奎가 말한 바는 살아서는 서로 신뢰하고, 죽어서는 또한 족히 저버리지 않으니, 이 말은 死講의 條는 다만 父母와 夫婦에게만 쓰이고 下喪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에는 오직 남편의 죽음에서만 이를 사용하였으니, 이 법은 남편이 죽은 후에 그 아내에게는 미치지 않아 가히 안타깝다. 이후로 남편이 비록 죽었다하여도, 그 아내도 가히 쓰도록 해야 한다. 대저 우리 洞約의 사람 가운데 만일 이를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有司가 回文을 諸員에게 돌려 그 집에서 한 번 齊馬首하게 한다. 순순하게 함께 힘써 격노치 않게 하는데, 만약 끝내 고치지 아니하면 그를 損徒하는 것이 옳다. 그를 損徒한 후에 만약 뉘우치고 깨닫는 것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모여 다시 들어오게 하는데, 모두가 ‘좋다’라고 한 연후에 그를 들인다. 내가 이른바 ‘들인다’라고 한 것은 그 약속을 사모하여 행실을 고친 까닭이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은 들고 더하는 때에, 그 죄의 크고 작음을 계산하여 그 벌의 輕重을 정하여 이들이 먹고 마시게 하고 있다. 무리들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까닭이다. 지금부터 옛 제도를 고치는 것이 옳다. 詩經에서 “시작이 어찌 없으랴! 그 끝을 마치기가 드문 일이다(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 한 것과 같이, 끝을 맺는 방법은 이를 성심껏 하는 것이니, 이를 성심껏 한다면 오래 지속되어 처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러한즉 이미 이를 성심껏 하고 또한 이를 지켜 경외한다면, 거의 우리 洞約은 비록 天地가 함께 나란히 한다 해도, 서로 저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삼가 여러 大員이 留心하기 바란다.
서문과 같이 이문규는 이홍준의 외손으로, 내성에 거주하며 선대의 동약을 계승해 이를 새롭게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약 시행이 예전처럼 활발해지지 않고 시류가 변하였기에 고을의 장로들과 더불어 새롭게 제 규정을 추가했음이 나타난다. 특히 서문에서는 남편이 죽은 후 아내의 장례도 부조한다는 내용과 齊馬首를 폐지한다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1554년 무렵 제정한 동약의 규정은 크게 生講條 5개조와 死講條 5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조항 모두 이문규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生講은 동약의 구성원이 평상시 행하는 것이요, 死講은 동약 구성원이 죽었을 때 행하는 것들이다. 生講의 제1조는 孝悌를 밝히는 내용으로, 예전과 달리 지금 사람들이 효제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며 이를 다시 밝힐 필요가 있기에 만든 조항이다. 하지만 효제에 관련된 것은 예전 성현들이 밝혀 놓은 것이 있어 망령되게 자신의 뜻을 첨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부모에 대한 侍奉과 자리 살핌, 외출 때 부모에게 알리고 밖에서 잘못을 저질러 근심을 끼치지 않으며, 家廟에서 돌아가신 부모를 모셔야 되며, 형제끼리 서로 공경하고 아끼며 인사하고 편지하는 예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해 놓았다. 이어 『孟子』에서 “曾參은 曾晳을 봉양함에 남음이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대답하였으며, 曾元은 曾子를 봉양함에 남음이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였으니, 무릇 曾參은 뜻을 봉양한 것이고, 曾元은 입과 몸을 봉양한 것이다(曾參養曾晳 問之其餘曰有 曾元養曾子 問之其餘曰無 夫曾參養志者也 曾元養口體子也)”와 같이 부모를 모셔야 되나, 지금은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만을 좋아하며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好貨財 私妻子 不顧父母之養)”며 시속을 한탄하고 있다. 또한 『詩經』에서처럼 “처자와 마음이 맞는 것이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고, 형제가 화합해야 和樂하고 또 즐겁도다(妻子好合 如皷琴瑟 兄弟旣翕 和樂且湛)”와 같이 부부와 형제가 화목해야 하나, 또한 시속은 그렇지 못하다며 子弟들에게 孝悌의 밝힘을 힘써 가르쳐야함을 강조하였다.
生講 제2조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차례를 잡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모이는 날에 아랫사람이 먼저 와서 윗사람을 기다리며, 윗사람이 도착했을 때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하는 절차를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동약의 임원인 有司가 자리하는 것, 避座하는 것, 자리 잡은 후의 행동거지, 참석자의 貴賤을 구분하기 위해 옷의 착용을 달리하는 것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 규정은 훗날 보강되는 讀約 절차와 거의 유사하며, 신분과 나이에 따른 향촌 내에서의 질서 확립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다. 제3조는 患難 때 도와주는 규정이다. 患難 때 도와주는 의리는 모이는 날에 서로 講信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쉽게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동약 사람 중 患難을 당한 이가 있으면 즉시 도와 줄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향약의 4대강령 중 患難相恤 조항에 대한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生講 제4조는 鄕俗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문규는 지금 동약의 사람들은 아직 禮義를 모르기 때문에 上下의 구분, 長幼의 차례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따라서 동약의 사람들은 子弟와 奴輩에게 父兄과 上典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유사는 그들을 살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관청에 알려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어 勸農과 里正의 임을 수행함에 私奴를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마지막 제5조는 동리에서 講信을 행하는 것이다. 천지에 빗대어 봄과 가을에 각각 모임을 가지고 동약 사람에 대한 賞罰을 내려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만약 風雨를 만나면 縣亭에서 실시한다고 했다. 이때 유사는 한 달 전에 모임 때 지출되는 비용을 계산하여 동약 사람에게 비용을 거두는데, 貧富를 고려하였다.
死講 5개조는 喪葬禮 때의 제 규정으로, 특히 부조와 관련된 조항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동약의 시행 비중이 患難相恤을 통한 相扶相助에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死講 제1조는 부조하는 물품을 갖추는 규정이다. 동약 구성원에게 草席 1立, 大索 10把, 常紙 3卷씩 거두어 유사가 관리하고 있다가 부음을 들으면 초석 6립, 대삭 50파, 상지 20권을 지급한다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弔禮를 들으면 듣는 즉시 상가집에 빨리 가서 예를 행하라고 하였다. 제2조는 弔奠을 행하는 규정이다. 成殯하는 날에 유사 2원이 음식 마련을 맡으며, 諸員은 각자 壺果를 가져오는데 弔奠은 座首가 먼저하고, 이어 유사, 마지막에 諸員이 행한다. 제3조는 葬事 때 도와주는 규정으로, 각자 일꾼들에게 먹일 白酒 한 동이씩 마련하여 하루 전 장례 치르는 집에 보내주며, 또 각자 저녁 식사 후에 壺果를 가지고 참여한다. 제4조는 喪奠에 참알하는 규정이다. 小祥 때에는 저녁 식사 후 각자 壺果를 가지고 참알하는데, 좌수, 유사, 諸員 순으로 한다. 大祥도 이와 같이 하되 상갓집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규정하였다. 제5조는 상갓집에서 슬픈 예를 다해야 된다는 규정이다.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지 말 것이며, 예를 다해 조의를 표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술판을 벌이지 말되, 다만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한 음주는 허용한다고 했다.
生講條와 死講條 다음의 定罰例는 위의 10조를 어겼을 때 해당 인물을 처벌하는 규정이다. 처음 규정을 어겼을 때에는 開諭하고, 두 번 어겼을 때에는 모든 사람 앞에서 面責, 세 번 어겼을 때에는 損徒하되, 추후 뉘우침이 있으면 僉議를 통해 동약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罰酒에 대해서는 매우 무거운 벌이니, 사정을 헤아려 시행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齊馬首를 폐지하자는 「洞約後序」의 내용과 상통하는 것이다.
定罰例 다음에는 1554년 새롭게 동약 규정이 마련될 때의 座目을 수록하였다. 좌목에는 「동약후서」를 작성한 이문규 포함 모두 13명을 기재하고 있다. 좌목 다음에는 새롭게 동약이 마련된 연유를 밝히고 있는 이문규의 글을 수록하였다. 여기에서는 「洞約前序」의 글자가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정도이며, 좌목의 경우 탈락되어 후일에 다시 살펴보기가 어려운 까닭에 이문규 자신이 妄量되지만 몇 조를 추가하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동약전서」는 이문규가 작성한 「동약후서」 이전의 것으로, 50여년 전 이홍준에 의해 처음 마련된 내성동약이다. 추가된 조항은 앞서 수록된 生講條와 死講條를 이른 것이다. 이어 동약을 통해 사람들이 孝悌, 忠恕, 禮義, 廉恥, 誠意, 正心, 修身, 齊家의 도리를 힘쓰도록 당부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1554년 새롭게 마련된 동약의 마지막에는 約行과 約戒를 수록하였다. 약행은 ‘順父母’를 비롯해 15개 조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約員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행동지침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으로 상하 간의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妻妾, 嫡庶, 貴賤 구별과 奴僕에 통제를 언급하고 있어, 동약을 매개로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엿 볼 수 있다. 약계 역시 ‘角鬪’를 비롯해 15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족 자신의 자기규제 항목에 속한다. 無斷, 打人, 營私와 같이 하층민 침탈을 방지하는 조목이 주목된다. 약계 다음에는 이상의 兩條는 一鄕의 약속임과 동시에 一洞의 약속이라 하였다. 최초 이홍준의 동약이 내성현에 거주하는 재지사족들이 혈연을 중심으로 결속력과 향촌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면, 이 시기에 와서는 내성현 전체를 아우르는 鄕規 수준의 鄕約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약행과 약계 다음에는 1554년경 마련된 좌목 이후, 5차에 걸쳐 追錄된 約員들을 기재하였다. 後入이라 명기되어 있는데, 1차에 9명, 2차에 19명, 3차에 6명, 4차에 5명, 5차에 5명으로 모두 44명이 입록되었다. 앞선 1554년 경 좌목 입록자 13명과 합치면 모두 57명이며, 입록자의 성씨는 李氏 12명, 權氏 9명, 裵氏 7명, 南氏 6명, 金氏 5명, 柳氏 3명, 余氏, 鄭氏, 邊氏, 趙氏 각 2명, 黃氏, 尹氏, 郭氏, 具氏 각 1명 순이다. 16세기 전후와 16세기 전반기에 작성되었던 좌목 보다 참여 가문의 수적 증가가 확연히 나타나는데, 특히 이, 권, 남, 배씨의 비중이 높아짐이 나타난다. 경주이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興海裵氏 가문이 주축이 되어 동약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종전의 단양우씨는 초창기 좌목에 損徒된 이후 박씨와 더불어 이때부터 확인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昌原黃氏나 奉化鄭氏의 비중은 적어짐이 나타나고, 陵城具氏, 原州邊氏가 새롭게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거나 미약해진 성씨는 족세의 쇠퇴나 타 고을로의 移居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이때 많은 좌목을 차지한 가문의 족세는 조선후기 社約이라 부르던 시기까지 유지된다.
1611년 3월 李權에 의해 작성된 「重修洞約後序」는 임진왜란 이후 동약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동약후서」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향촌복구의 일환으로 고을과 동리에서 시행되던 동약과 향약을 새롭게 제정하거나 重修하였다. 이때 마련된 동약 역시 향촌복구 과정에서 중수된 동약으로, 전란으로 무너진 향촌질서를 종전과 같이 사족중심의 질서체제로 복구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이때 重修된 동약은 이권의 서문과 1634년까지 추록된 좌목만이 남아 있다. 서문에 따르면 時宜에 맞추어 몇 조항의 규정을 새로 제정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권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우리 洞中에서는 立約하여 서로 규제한지가 오래되었으나, 난리 이후 인심이 게을러져 오랫동안 규약이 폐해지고 있었으니, 어찌 信義를 알 것이며, 어찌 과실을 서로 규제할 수 있으리. 옛날을 생각하고 지금을 안타까워하니 가슴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 아! 洞案을 살펴보며 수록된 성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누구는 누구의 조부이며,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다. 이들의 조부와 부친은 일찍이 서로 한 시대의 사람이었으니, 다시 서로 糾正하고 다시 서로 敦睦한 것은 올해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인즉, 지금 자손이 되어 누가 폐함을 참으리. 이 까닭에 洞中의 몇 사람이 발분하고 탄식하며, 폐하고 실추된 것을 다시 닦아 거행하려 하니, 어찌 불행 중 하나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 선대의 허다했던 條件이 혹 예전에는 마땅하였으나 지금은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시의에 따라 이를 덜어서 간략히 하여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이 열에 대여섯도 되지 않아 가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에 마땅하지 않은 것은 형세가 형세이니, 어찌 할 수가 없다. 지금에 가장 마땅한 것을 행하되 소홀이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대개 吉凶 때 부조하는 것과 봄과 가을에 講信하는 것은 어찌 古今의 다름이 있겠는가? 대대로 이어 받아 永世토록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치의 흙은 둑을 쌓은데 별 보탬이나 손해가 없는 것 같으나, 거친 물이 갑자기 흘러 내려와 진실로 한 치의 흙으로 인해 잠기지 않는다면, 가히 수해를 면할 수 있다(尺寸之土 若不能爲隄之損益也 然狂潦暴至 苟猶有尺寸之土 未沒則可勉其水患也)”라고 했으니, 하물며 이 몇 가지 조항을 거행한다면, 어찌 한 치의 功이라 말하지 않으랴? 가히 옛 제도를 남겨두는 뜻이라 할 수 있으니, 무릇 우리 洞中의 사람들은 비통해 하거나 잊지 말고, 바라건대 영원토록 그만둠이 없으면 다행이겠다.
전란 후 동약이 중수될 무렵부터의 좌목은 모두 5회에 걸친 입록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모두 88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萬曆庚戌(1610) 後入이 44명, 泰昌庚申(1620) 후입 1명, 天啓癸亥(1623) 후입이 14명, 崇禎戊辰(1628) 후입이 20명, 崇禎甲戌(1634) 후입이 9명이다. 전란 이후 이권에 의해 새로운 규정이 추가되기 이전부터 동약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는 「중수동약후서」의 내용으로 보아, 1610년 후입자가 동약 중수를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5차에 걸친 입록자의 성씨는 權氏 14명, 裵氏 12명, 金氏 11명, 余氏 8명, 柳氏와 李氏 각 7명, 具氏 6명, 琴氏, 南氏, 邊氏 각 5명, 洪氏 4명, 孫氏, 尹氏, 任氏, 趙氏 각 1명 순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비해 안동권씨의 비중이 높아졌음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酉谷의 안동권씨가 조선후기 嶺南 南人을 대표하는 명문 사족으로 성장함으로써 이와 맞물려 향촌 내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부터 南陽洪氏의 족세가 내성에서 번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입록자의 범위가 초창기에 비해 확대되었음이 주목되는데, 이는 기존의 동약 시행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리 중심의 동약이 타 고을의 鄕規처럼 일향을 통제하는 규모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내성의 동약은 17세기 중반 다시 규정상의 변화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17세기를 전후하여 제정되거나 중수된 향약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 의도와 맞물려 일향을 통제하는 규범으로 제정된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향촌 내 사족들 간의 주도권 경쟁, 新鄕 세력의 성장과 그들의 입록을 둘러싼 갈등, 중앙정권의 閥閱化에 따른 관로 진출의 어려움 등 複雜多技한 현상으로 향약 운영에 있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성에서도 새롭게 동약이 제정되었으며, 동약이란는 이름 대신 상부상조의 특징이 부각된 里社完議라는 이름으로 제정되었다. 당시 里社의 규정은 金秋吉(1603~?) 주도로 만들어졌는데, 본 자료에는 1650년 3월 하순에 작성된 序文과 당시의 約條, 罰條, 禁戢下人條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里社完議 작성을 주도하고 서문을 작성한 김추길은 앞선 崇禎甲戌(1634) 後入 座目에 이름을 올린 인물로, 서문과 제 규정은 義城金氏의 문집인 『聞韶世稿』의 「鶴汀逸稿」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里社完議序」는 다음과 같다.
우리 乃城縣은 후미진 곳에 위치하여 本府(安東府)에서 幾百里 떨어져 있다. 무릇 善惡이 있으면 수시로 勸懲하였으니, 지난 正德(1506~1521) 연간에 先正 權忠定公(權橃, 1478~1548)과 여러 父老가 함께 洞規를 창립함으로써 기강이 서고 풍속이 온후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 후 서로 이어 준수한 것이 거의 100여년이 된다. 불행히 난리 이래 일들이 많이 廢墜하고 거행되지 않았으니, 오직 그 문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己丑(1649) 여름 여러 父老들이 개연히 탄식하며 故事를 중수하니 옛 사람들의 규범이 환연히 새롭게 되었다. 정성을 다해 一縣에서 盛擧하나 古今의 절목이 마땅히 달라 혹 지금 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 좌측에 條例를 다시 講定하니, 대개 옛 것을 말하고 약간의 증감이 있을 뿐이다. 아! 옛 문서를 살펴보니 어제와 같이 완연하다. 성명을 잇달아 쓰고 아울러 한 종이에 나란히 하니, 모두 우리 무리의 祖先이고, 그렇지 않으면 傍親이며, 또 그렇지 않으면 모두 우리 祖先의 親朋이고 이웃이다. 당시의 흔적을 추상하며 한 자리에서 講好하고 陶然히 함으로써 그 절차와 유적을 밝힘이 책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우리 무리의 후손들이 정녕 마음에서 감동이 일어나지 안으리오! 하물며 敬老하고 尊賢하는 人道의 큼은 秉彛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스스로 그치는 것이 불가하니, 이 두 가지를 행한 연후에 화목을 닦고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실로 里社의 先務이다. 우리 慵齋李公(李宗準, ?~1499)은 畢齋(金宗直, 1431~1492)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여 文章과 節行이 濯纓(金馹孫, 1464~1498)과 睡軒(權五福, 1467~1498) 및 여러 公相과 伯仲이었다. 訥齋李公(李弘準, ?~1504)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漁獵의 풍속을 詩禮의 場으로 교화시키고 폐를 없애며 縣人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文峯鄭公(鄭惟一, 1533~1576)은 남다른 자질로써 李先生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였다. 禮를 가르치고 학문을 논하는 공이 이 斯文들에게 있어 流風과 글의 향기가 족히 一世의 尊仰을 받기 충분하니, 하물며 枌楡의 고향이라! 祭社의 거행에 예에 允合한 바를 여러 同實에게 물음을 기다렸다. 지금 우리 縣의 사람들은 모두 정성껏 힘을 다해 三賢을 奉妥한 연후, 매년 春秋와 令辰에 社中에 다함께 모여 먼저 齋戒하고 祠宇에 籩豆를 옮기며, 이어 一堂에서 화목을 다지고 신의를 다지는 義를 다하니 노인을 노인으로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고, 귀한이를 귀하게 가까운 이를 가깝게 하였다. 揖讓으로 서로 공경하고 술잔을 돌리며 서로 주고받으니, 선행이 있으면 서로 권하고 잘못이 있으면 서로 규제하였다. 기뻐함에 화목함이 있고 찬연한 文이 있으니 孝悌婣睦의 마음이 구름 피어나듯 생겨났다. 풍속이 어찌 순박해지지 않고,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후에 오는 사람으로 지금을 계승하는 자 또한 반드시 우리 무리가 금일에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가 뒤에 권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다면 바로 옛날 사람들이 創立한 뜻이 된다. 금일 중수하는 일은 장차 무궁하게 이어가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 무릇 우리 여러 군자들은 각각 힘쓸지어다.
위의 서문에서 김추길은 권벌과 제 부로들에 의해 洞規가 창립되었다고 하는데, 실상 공동체 조직은 앞선 이홍준 대부터 동약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앞선 「추설약조」 다음의 追入 좌목에 권벌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정덕 연간 권벌이 창립했다는 동규는 바로 이홍준의 동약을 중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문 다음에는 約條, 罰條, 禁戢下人條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조약은 모두 20개조로 다음과 같다. 一, 봄과 가을 享祀는 3월과 9월 中丁에 행할 것. 약속 한 날 2일 전에 入齋하고, 罷齋 다음날 講信을 행한다. 一, 公事員 1인, 有司 2인을 택정할 것. 공사원은 2년마다 교체하고, 유사는 1년마다 교체한다. 寶上이 혹 畢捧되지 않았으면 교체하지 않는다. 一, 봄과 가을 講信 때에는 각 15석을 내어 쓸 것. 一, 3년에 1회 사람을 천거하여 追錄할 것. 三參이면 바로 쓰되 二參이면 권점한 후에 添錄을 허락하고, 25세로 나이를 제한하되 會員은 30세 미만이면 천거하지 않는다. 一, 傳與는 11월로 정하여 행할 것. 공사원과 座上이 參看한다. 一, 유사는 60세가 되지 않는 자로 삼고, 凡物은 70세가 되지 않는 자로 收合할 것. 一, 使喚은 各里에서 1명씩 낼 것. 面任이 혹 侵責함이 있으면 僉議하여 重罰로 처리한다. 一, 자리는 나이순으로 하되, 오직 관직이 당상에 이르면 나이로 하지 말 것. 유사는 別坐하는데, 저편에 避座하는 자는 유사 아래에 않는다. 나이가 비록 많다 하나 유사 자리 위에 자리하지 않는다. 一, 무릇 出文할 때에는 座首 3원이 單子를 따로 적을 것. 一, 무릇 聚會 때, 長老가 모이고 난 뒤 연소자가 늦게 오면 入座 시키지 말 것. 一, 歲首에는 장로에게 인사드릴 것. 一, 무릇 큰 일이 있으면 유사는 반드시 장로들에게 먼저 稟告할 것. 一, 효자와 열녀는 관청에 보고하여 포상할 것. 一, 患難相求할 것. 작으면 보고 위로하고, 크면 救助하는 것을 상의한다. 一, 무릇 喪葬 때에는 齊會하여 看護하며 또 각기 쌀과 콩 각 한 되로써 부조할 것. 一, 유사는 임시로 出文하여 거두어 보내는데, 身喪이 아니면 하지 말 것. 一, 무릇 경사가 있으면 임사로 상의하여 부조할 것. 一, 강당에서는 사사로운 모임을 열지 말 것. 장로가 서로 약속하여 會話한다면 이 例에 두지 않는다. 一, 벌을 받은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한다면 僉議하여 벌을 풀어 줄 것. 만약 불복하는 자는 僉議하여 벌을 더 준다. 一, 面任의 일을 맡은 사람이 폐단을 만들거나 사사로움을 행하면, 僉議하여 혹 鄕堂에 알리고, 혹은 官家에 알려 죄를 논할 것. 一, 각리의 하인 가운데 행실의 남다름이 크면 관청에 보고하여 포상하도록 하고, 작으면 강신 할 때에 불러와서 賞酒를 내려 그로 하여금 興起케 할 것.
이상 조약은 里社의 기본 운영 규정으로 춘추향사와 강신의 날짜 및 절차, 里社 임원의 구성과 行禮 때의 자리 배치, 포상과 상호부조의 규정 등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입록자의 자격으로 三參 규정이 있다는 점이다. 三參은 三鄕이라고도 하는데 부계, 모계, 그리고 처가에 신분상의 결격사유가 없어야 된다는 규정으로 17세기 전후 성립된 각종 鄕案 입록 규정과 유사하다. 이는 향약 및 동약 운영에 있어 사족 중심의 배타적 운영을 위해 마련된 규정으로, 당시 里社의 성격을 짐작 할 수 있다. 面任이 作弊를 저질렀을 경우 鄕堂이나 官家에 알려 논죄한다는 규정도 주목된다. 여기서 향당과 관가는 本府인 안동부의 향청과 관청인데, 내성의 里社가 수령에서 面里任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 기구에 대항하는 자치행정 기구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약 다음에는 벌조 27개조가 上罰, 中罰, 下罰로 나뉘어져 나열되어 있다. 상벌은 不孝를 비롯해 綱常을 침범했을 때 적용되며, 중벌은 대체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폐단을 저지르는 경우에 적용되며, 하벌은 里社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자가 해당된다. 이렇게 상중하로 나누는 경향은 1556년 退溪에 의해 마련된 禮安鄕約에서 極罰, 中罰, 下罰로 나누는 것과 유사하며, 그 절반 이상은 예안향약 32개조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이상 벌조의 대상은 士族으로, 일종의 자기규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禁戢下人條는 벌조와는 달리 下人, 즉 하층민을 대상으로 하는 처벌 규정이다. 모두 14개 조항으로 不孝, 不忠과 같이 기본적으로 綱常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향촌 내에서 하층민을 통제하는 내용이 주목된다. 특히 양반을 능욕하는 자, 禁地에서 起耕하는 자, 折草를 함부로 하는 자, 墓山에서 斫伐하는 자 등은 사족의 신분과 경제적 이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속한다. 이상의 조항을 어겼을 경우 무거우면 관청에 알리고, 가벼울 경우 직접 笞杖을 가하거나 贖바치게 하는 처벌을 내린다고 나타나 있다. 里社 규정을 통해 이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사족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里社라 불리던 내성의 향약은 丙申年(1716) 다시 한 번 새롭게 마련된다. 이때의 동약은 洞契 또는 社約으로 불렸으며, 16세기 이래 내성의 동약을 주도했던 안동권씨 출신의 權斗寅(1634~1719)과 權斗經(1654~1725) 등이 중심이 되어 마련된 것이다. 당시 동약의 마련 과정은 본 자료에 수록되지 않은 권두인의 문집 『荷塘先生文集』 수록 「洞契重修序」를 통해 그 대략을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먼저 ‘洞契가 萬曆(1573~1619) 연간에 시작되었는데, 내가 그 해를 잃어버렸고, 이것이 중간에 중지되었다가 崇禎戊子(1648)에 중수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여기서 언급한 만력 연간의 동계 중수는 이전 시행되던 동약이 중간에 중단되어 동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되던 시점을 의미한듯하다. 이어 중수된 동계는 불행히도 己巳年(1689)의 재난으로 문적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庚午年(1690)에 권두인의 季父와 洞員이 중수를 倡議하였는데, 본인은 관직 생활 중이라 참석 못했다며 아쉬웠다고 나타나 있다. 하지만 경오년으로부터 20년이 못된 지금 다시 洞案의 座目이 찢어지고 없어진 것이 태반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상이 「洞契重修序」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 1716년 동안 중수 이전의 상황이다. 앞서 김추길의 주도로 里社의 조항이 새롭게 마련되었지만 지속적 시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약일통」에는 1716년 당시 동계 중수를 논의하던 당시의 約案, 그리고 「社契約行禮時告先聖先師文」, 「誓告約員箴」, 「社約節目」, 「契中立約」, 「附寒岡先生契會立議」, 「講會讀約法」, 「社契約講會行禮之圖」가 수록되어 있다.
우선 約案에 앞에는 丙申(1716) 9월 초하루 石泉에서 회의가 있었으며, 모두 60명의 회원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의 都契長 1인, 副契長 2인, 執禮 1인, 月有司 2인의 이름을 수록하였는데, 당시 도계장은 권두인이었으며, 권두경은 부계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편, 회의가 있었던 石泉은 유곡 인근에 마련된 안동권씨의 精舍로, 당시 안동권씨 일족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약안 수록 인물은 권두인 이하 총 143명이다. 수록 인물의 字, 출생 干支, 그리고 本貫을 기재하고 있으며, 본관 아래에는 세주로 거주 고을을 명기하였다. 총 26명이 내성이 아닌 다른 고을에 거주하는 것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本府인 안동을 비롯하여 인근의 榮州, 順興, 英陽, 楓井, 春陽, 奉化가 나타난다. 이중 풍정과 춘양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안동부의 任內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내성에 거주하는 사족 위주로 동약이 운영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인근 고을로 이주하는 후손이 늘어난 관계로 타 지역 거주 사족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의 수단으로 이용되던 향약이 18세기 이후, 사회적 변화에 따라 사족 간 결속력 강화 수단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거주지 중심의 동약이 아니라, 일족 중심의 동약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約案 수록 인물의 성씨 분포는 安東權氏 51명, 완산(全州)이씨 20명, 光山金氏 12명, 義城金氏 10명, 奉化琴氏 9명, 完山(全州)柳氏 8명, 唐城(南陽)洪氏 7명, 豐山金氏 4명, 沃川全氏 4명, 綾城具氏 3명, 宜寧余氏 3명, 禮安金氏 2명, 咸陽朴氏 2명, 昌寧成氏 2명, 原州李氏 1명, 羽溪李氏 1명, 西河任氏 1명, 西原鄭氏 1명, 八溪鄭氏 1명, 海州崔氏 1명 순으로 확인된다. 안동권씨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는데 비해, 18세기 이전에 확인되던 경주이씨, 영양남씨, 흥해배씨, 원주변씨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경주이씨의 경우 동약이 처음 만들어지던 16세기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내성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으나 1716년의 약안에 나타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앞선 김추길의 「里社完議序」와 『荷塘先生文集』 수록 권두인의 「洞契重修序」에서는 이홍준 때부터 동약이 시행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동약 구성원의 족세 변화에 따라 동약 시행의 연원을 달리 보는 시각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社契約行禮時告先聖先師文」은 1716년 동약 중수와 관련하여 이를 先聖과 先師인 孔子와 朱子에게 아뢰는 글이다. 1716년 10월 9일에 작성된 것으로, 부계장이었던 李琓과 권두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속이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한 관계로 이를 회복하기 위해 동지들과 개연히 일어나 선사들이 만든 朱子增損呂氏鄕約을 講修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誓告約員箴」 역시 성실한 동약 시행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李光庭(1674~1756)이 작성한 것이다. 이광정은 그 무렵 동약의 월유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이어 수록되어 있는 「社約節目」, 「契中立約」, 「附寒岡先生契會立議」, 「講會讀約法」, 「社契約講會行禮之圖」는 권두경의 주도로 제정된 것으로, 그의 문집인 『蒼雪齋先生文集』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중 가장 앞에 수록된 「社約節目」은 鄕約의 四大綱目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에 대해 각 강목별로 의미를 설명하고 세칙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즉 朱子增損呂氏鄕約을 바탕으로 한 約員들의 행동규범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향촌사회의 지배층인 재지사족들의 자기규제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다.
먼저 德業相勸에서는 善을 보면 반드시 행하고 과실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며, 자신과 가정을 잘 다스리고 부모를 잘 섬기며, 임금을 섬김에 충언으로 諫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勤恪하며, 자제를 잘 가르치고 어른을 잘 섬기며,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고 다른 사람과 親睦하는 까닭에 후학을 잘 가르칠 수 있고 交遊함을 가리며, 염치와 절개를 지키고 患難을 구제하며, 다른 사람을 善한 길로 인도하고 과실을 규제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위하여 꾀를 내고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이루어 주며, 싸워 다툼을 풀어 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며 이로움은 생기게 하고 해로움을 없앨 수 있으니 이를 德이라 하였다. 이어 讀書하고 述作하며, 六藝와 子史의 論說을 익혀 의리를 밝히며, 科文을 공부하는데 절로 무방하며, 禮를 익히고 藝를 講하며, 제사를 지내고 가정의 다스림을 능히 하며, 童蒙을 능히 가르치고 어진 행동을 하며, 약조를 잘 지키고 租賦의 성실한 납부를 業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상의 德業은 동약의 사람들이 각자 닦고 지키며 서로 권면하며, 會集하는 달에 籍에 기록하라고 했다. 約人의 행실을 기록한 善籍과 惡籍(또는 過籍) 작성을 통해 다른 사람을 警勵케 하고, 약원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이다.
過失相規에서는 먼저 의리를 저버린 죄로 첫째 酗博鬬訟(술에 취해 주정부리며 소란스럽게 하는 자, 도박하는 자, 때리고 욕하며 싸우는 자, 訟事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자), 둘째 行止踰越(행동거지가 잘못되어 예에 어긋나고 법을 어기는 자), 셋째 行不恭遜(어른을 모욕하거나 힘을 믿고 약한 아랫사람을 능멸하는 자), 넷째 言不忠信(모략하여 다른 사람을 죄과에 빠뜨리는 자, 다른 사람과 함께 동약을 배반하는 자, 헛된 말로 事端을 일으키는 자), 다섯째 造言誣毁(다른 사람을 무고하여 없는 죄를 있게 하는 자, 작은 것을 큰 것으로 꾸며대는 자, 앞에서는 옳고 뒤돌아서는 그르다고 하는 자, 익명의 문서로 다른 사람의 사사로움을 드러내는 자, 다른 사람의 지난 잘못을 희롱하며 이야기하는 자), 여섯째 營私太甚(다른 사람과 교역함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 이익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자, 약한 자를 侵虐하는 자) 이상 여섯 가지 죄과를 나열해 놓았다. 이어 약조를 어기는 허물로 첫째 덕업을 서로 권면하지 않는 것, 둘째 과실을 서로 규제하지 않는 것, 셋째 禮俗을 서로 이루지 않는 것, 넷째 患難 때 서로 돌보지 않는 것 이상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몸을 닦지 않는 과실로 첫째 交非其人(그 사람이 아닌 자들과 사귀는 것), 둘째 遊戲怠惰(놀고 희롱하고 태만하고 게으른 것), 셋째, 動作無儀(움직임에 예의가 없는 것), 넷째 臨事不恪(일에 임하면서 조심하지 아니하는 것), 다섯째 用度不節(사용하는 법도가 검소하지 아니한 것)을 들고 세부 사항을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이상 과실은 동약의 사람들이 각자 성찰하고 규제하여, 작은 허물이면 조용히 타이르고 큰 허물이면 무리에서 이를 규제하는데, 고치지 않으면 會集하는 날에 月有司가 契長에게 알리고 계장이 의리로 그를 誨諭하는 데, 고침이 있으면 그만두고 불복하고 爭辨하며 끝내 고치지 않으면 出約시켜 버린다.
禮俗相交에서는 예속의 교류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 놓았다. 첫 번째는 尊幼輩行으로 어른에서 아이까지 등급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20세 이상은 尊者로 모시며 아버지처럼 섬기고, 10세 이상은 長者라 하여 형처럼 섬긴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래위로 10세 이상 차이가 나지 않을 때는 敵者라 하며, 10세 이하는 少者, 20세 이하는 幼者로 분류하였다. 두 번째 造請拜揖은 손님을 뵙고 拜揖하는 절차를 언급해 놓은 것으로, 앞서 언급한 尊幼輩行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된다. 其一은 歲首나 慶事가 있을 때 幼者가 尊者와 長者를 찾아뵙고 인사하는 절차이다. 其二는 尊者와 長者를 방문하는 절차로 중간에 客이 찾아오거나, 先客이 있는 경우와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의 처신해야할 방도를 설명하고 있다. 其三은 길에서 尊者와 長者를 만났을 경우 인사하는 방법이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도중 발생하는 여러 상황 하에서 처신해야할 인사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세 번째는 請召迎送으로 청하여 대접할 때 맞고 보내는 예절이다. 역시 세 가지로 나누는데 其一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절차로 尊幼輩行에 따른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其二는 모임 때 자리에 않는 방법이다. 기본적으로 나이에 따라 자리를 하지만 특별한 경우 上客으로 모신다고 했다. 특히 異爵者는 나이에 따라 서열하지 않고 상객으로 모시는데, 異爵者는 堂上과 侍從臺諫을 역임한 인사를 뜻한다. 其三에서는 燕集, 즉 여러 잔치 모임에서 酬酌하는 갖가지 절차와 방법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其四는 멀리 떠나는 자와 떠났다가 돌아오는 자를 迎送하는 내용이다. 네 번째는 慶吊贈遺로 慶吊가 발생했을 경우 約員들이 도와주는 규정이다. 이것은 네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其一은 同約 상호간에 大小科 급제, 筮仕, 堂上 승진, 70세 및 80세가 된 契員, 자식의 冠禮, 사위와 며느리를 얻는 경우와 같이 吉事가 있으면, 일제히 축하해주며 재물을 모아 주거나 물품을 빌려준다고 했다. 其二는 喪事나 火災로 재난을 당했을 경우 이를 위로하고 동약에서 도와준다는 내용이다. 其三에서는 동약 계원 자신의 喪禮와 葬禮 때 도와주고 조문하는 규정을 설명하였다. 其四는 먼 곳에서 約員의 喪事가 발생했을 경우 護喪하는 규정이다. 이상 禮俗相交는 月有司가 주관하였다. 아울러 월유사는 예속에 대한 약원들의 違慢을 감독하는데, 만약 약조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契長에게 고하여 이를 꾸짖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규제한다고 나타나 있다. 만약 거듭 어김이 있으면 過籍에 기록하였다.
患難相恤에서는 일곱 가지의 사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수재나 화재를 당했을 때, 둘째는 도둑 당했을 때, 셋째는 질병이 있을 때, 넷째는 喪을 당했을 때, 다섯째는 나이 어린 고아가 있을 때, 여섯째는 무고한 일을 당했을 때, 일곱째는 가난하고 궁핍하게 되었을 때, 契中에서 도와주는 원칙을 나열하였다. 이상 患難相恤은 그 집에서 契長에게 알리되 同約이 대신 알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월유사는 어른들의 의견을 쫒아 救濟를 주관하는데, 만약 능히 도와주는 財物을 내놓는 자가 있으면, 그 선행을 善籍에 기록하였다.
節目 마지막에서는 이상의 鄕約 4조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즉 朱子增損呂氏鄕約을 기본으로 하되 寒岡 鄭逑先生의 「契會立議」와 「文憲書院立約」을 참고하였으며, 時俗에 맞추어 약간의 조항을 부기했다고 한다. 「契會立議」는 退溪의 문인인 鄭逑가 1583년 星州檜淵書院에서 鄕友와 문인들로 이루어진 契를 조직하고 난 뒤 만든 규정이다. 그 중 6개조는 후술하는 「附寒岡先生契會立議」에 부기되어 있다. 「文憲書院立約」은 栗谷에 의해 마련된 「文憲書院學規」이다. 문헌서원은 율곡이 향약을 제정하였던 海州에 위치한 서원이다.
「社約節目」 다음에는 동계 운영 규정인 「契中立約」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附寒岡先生契會立議」와 「講會讀約法」을 부기하였다. 契中立約은 모두 12개조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都契長이 有故로 불참할 경우에는 副契長이 會集 때 예를 행하며, 존자 이하는 부장의 나이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一, 처음 立約할 때에 약문을 동지들에게 보여준 뒤, 향약을 하나같이 따르는 것으로 마음에 새기고 몸을 단속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入約을 허락한다. 一, 뒤에 入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약문을 보여주고 그로 하여금 충분히 헤아리고 생각케 하여, 스스로 능히 끝까지 隨行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단자를 갖추어 참여를 會集 때 논의한다. 계장이 約中 인사에게 물어보고 모두 허락한다고 말한 연후에 답서로 알리며, 다음 會集 때부터 참여 할 수 있다. 一, 告由文은 먼저 草文을 지어 동약의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고 처음 강회 때에 先聖과 先師에게 고한다. 만약 뒤에 入約한 자가 있으면, 또한 처음 參會할 때에 미리 고유문을 찬하며 신입하는 사람이 先聖과 先師에게 고한다. 一, 지금 이 契約은 대개 선을 닦고 위반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으로 吉凶禮俗을 아우르고 있다. 진심으로 入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重服이라도 구애하지 않고 參錄을 허락한다. 一, 지금 우리 洞約은 멀고 가까움이 일정하지 않아 혹은 30~40리 떨어져 있는 자도 있어, 吉凶事 때 인사를 함에 큰 慶吊事와 큰 재해가 있을 때 형세를 한 결 같이 하기가 어렵다. 이에 10리 내에 거주하는 자는 일제히 나아가 행하되 10리 밖에 거주하는 자는 편지로 대신 행한다. 비록 10리 내에 거주하더라도 病老하거나 有故한 자도 편지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한다. 一, 소자와 유자는 존자에게 歲時에 안부를 묻고 배알해야 하며 禮를 드림에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約員은 매우 많아 유자와 소자의 존자가 되는 자가 심히 많다. 몸소 두루 인사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어서 한정하는 방도를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시에 안부를 묻고 인사드리는 자는 다만 60세 이상과 10리 이내 거주자로 제한한다. 비록 60세 미만이라도 만약 副長이면 마땅히 나아가 인사드린다. 집이 가난하여 奴馬가 苟艱한 경우, 동거하는 부자와 형제가 함께 나아가기가 어려운 경우, 그외 몸소 나아가기 어려운 경우는 같은 마을 사람들과 연명으로 단자를 올려 인사드리되 반드시 15일 내에 행한다. 一, 喪事는 成服하기 전에 일제히 나아가 弔慰하는데 역시 10리 이내 거주자를 한도로 한다. 그러나 부자와 형제가 같은 집에 거주하는 자가 혹 폭우를 만나 보행에 어려움이 있어 또한 일제히 나아가기 어려울 때에는 護喪所에 단자를 보내는 걸 허락한다. 만약 10리 이내 거주자가 아무 이유 없이 한 달 동안 조위를 하지 않으면, 同契의 뜻이 없는 것으로 보고 월유사가 이를 규제하며 過籍에 기록한다. 葬時에는 일제히 동거하며 호상하는데 역시 10리 이내 거주자를 한도로 한다. 10~20리 사이에 거주하는 자는 한 집에 한 사람만 나아가 호상한다. 一, 지금 이 약조를 만든 것은 진실로 인륜과 풍속은 敦厚케 하는데 있으니 후손들에게 권장하고 가르침에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寒岡先生契議」에는 모이는 날 이전 한 달 동안 익힌 공부를 살펴보았는데 30세 이전인 자는 등을 돌리고 암송하며, 그 이후인 자는 책을 보고 강독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지금 계원이 너무 많아 講會 때 여러 계원이 誦讀할 겨를이 없는 형세이다. 里 안에 講師를 정하여 매월 朔望에 各里의 강사가 會講하며, 만약 朔日에 約會가 있으면 먼저 하루 동안 私講하여 계원마다 익히는 바의 정도를 기록하여 근면함과 게으름을 살피되, 역시 30세 이전은 등을 돌리고 암송하며 그 이후인 자는 책을 보고 강독한다. 30세 미만이라도 배움을 잃어버려 魯鈍한 자 또한 책을 보고 강독하는 것을 허락한다. 『小學』, 『家禮』, 『統監』은 비록 30세가 지났더라도 등을 돌리고 암송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준다. 만약 製述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려는 자는 半月에 詩賦 3首 이상 지으며, 疑義함이 있으면 5首를 짓는다. 朔日에 講誦함을 마치며 禮容을 함께 익힌다. 一, 옛적 사람들의 향약은 길흉사 때 보내어 주는 것과 患難 때 賙恤하는 것을 모두 米, 布, 錢, 幣, 酒食을 사용하였다. 지금 우리 州는 가난한 고을이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貨財로 예를 차리는 것은 無麵한 상황이어서 실로 患難은 지속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다만 왕복하며 살피고 문안하여 같은 契의 두터운 뜻을 보존하는데 힘쓰는 것으로 환난을 일절 제거하고 있다. 禮服과 冠靴와 같은 것 또한 가난한 선비가 힘써 마련할 것이 아니니, 다만 時俗에 맞게 입고 신어 간편함을 쫒는다. 一, 四孟朔에는 서원에서 모여 講禮를 행하며 나머지 달에는 각동에서 約會한다. 그러나 각동에서 많은 계원을 모으기 어려우니 酉谷, 吐日, 塔坪, 巨村에서 一會하고, 浦底, 松內, 海底, 虎坪, 黃田, 北坪, 山井에서 一會한다. 皆丹과 부근은 榮順 등지에서 一會하되, 차차 달마다 돌아가면서 행한다. 각동의 모임에서는 先聖과 先師의 위패를 설치하지 않고 다만 講會와 讀約의 예만 행한다. 一, 30리 안에 거주하는 約員으로 세 번 연속 아무 이유 없이 모임에 불참하는 자와 30리 밖에 거주하는 약원으로 해가 마치도록 아무 이유 없이 모임에 불참하는 자는 誠意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모두 出約한다.
이상 12개조는 실질적인 동계의 운영과 관련된 조항으로 주로 길흉사 때의 상부상조와 이를 매개로 한 후학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는 사회적 변동 하에 재지사족들이 향촌사회의 지위를 新鄕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이는 곧 재지사족 상호 간의 돈독한 결속력을 요구하였는데, 위의 조항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제정된 것이다. 한편, 講禮를 서원에서 행했다고 나타나는데, 이곳은 三溪書院로 권두경의 선조인 權橃을 배향하고 있다. 보통 고을 단위 향약의 경우 향사당에서 약회가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내성현이 안동의 屬縣인만큼 향사당 대신 지역을 대표하던 서원에서 약회가 열렸다는 점이 특징이다.
「契中立約」 다음에는 그 모태가 된 것으로 여겨지는 「附寒岡先生契會立議」 6개조가 부기되어 있다. 『寒岡集』의 「契會立議」에서는 모두 17개조가 확인되는데, 여기에 부기한 것은 「契中立約」에 없는 조항을 보충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거리가 30리 안에 있는 자는 매달 초하룻날 와서 모이고 30리 밖에 있는 자는 사계절의 첫 달 초하룻날에만 온다. 그 사이에 혹 매달 와서 참여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一, 약조를 읽은 후에는 朱子의 白鹿洞規를 강독한다. 朞年과 大功으로 아직 葬事를 치르지 않은 자는 모임 불참을 허락한다. 一, 모든 길흉사에 서로 돕는 일은 直月이 약정에게 알려 나누어 주는 수를 정한다. 힘은 크고 작음이 있고 정분에는 두텁고 박함이 있으니, 아울러 마땅하게 參量하되 本家의 형편을 고려해야 한다. 一, 비록 入約했다 하더라도 모임에만 참석하고 분발하는 뜻이 없고 한가로이 날을 보낼 뿐 나아가는 성과가 없는 자가 있으면 出約시킨다. 혹 글은 잘하지 못하나 善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는 실효가 있는 자는 入約을 허락한다. 一, 入約한 사람은 각자 마음을 가다듬어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야 한다. 비록 학문에 淺深이 있고 재능에 高下가 있다 하더라도 그 뜻하는 바와 의향은 반드시 옛 사람을 배우며 이익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도를 밝히고 功을 계산하지 않으며, 부귀에 급급하지 말며 빈천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야 儒者의 기미가 있게 된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이는 이미 우리 무리와 어울릴 수 없는 자이니, 비록 約中의 벌칙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모임에 따라 참석하여 우리 약중에 수치를 끼칠 수 있겠는가? 誼를 바르게 하고 道를 밝히는 자는 유자이며 이해를 계산하는 자는 유자가 아니다.
「附寒岡先生契會立議」 다음에는 「講會讀約法」이 부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四孟朔에 서원에서 講約을 열며 나머지 달의 약회는 각동에서 개최하는데, 院任과 상의하면 사맹삭이 아니더라도 서원에서 약회를 열수 있다고 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약회를 개최하는 서원은 삼계서원이다. 이하는 尊幼輩行에 따라 강약하는 절차, 契長, 副契長, 月有司 등 동약 임원의 의식 절차 등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 일반적인 讀約의 절차를 따르고 있으며 幼者 아래에 卑者와 庶孼도 참여하였다. 讀約을 통해 향촌 내 상하질서관계를 뚜렷이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社契約講會行禮之圖」는 여덟 가지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선 契中立約에 부기되었던 講會讀約 절차 때의 約任과 尊幼輩行에 따른 자리 배치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그림은 ‘先聖先師參謁之圖’, ‘契長及約員齊拜尊者之圖’, ‘契長約員拜長者之圖’, ‘契長約員拜稍長者之圖’, ‘稍少者拜契長之圖’, ‘少者拜契長之圖’, ‘幼者卑者拜契長之圖’, ‘禮畢就坐之圖’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1716년 중수된 동약은 1876년 다시 한 번 새롭게 제정된다. 「사약일통」에는 1876년 삼계서원 舊址에서 개최되었던 讀約會 때의 기록을 수록하고 있어, 이 시기 동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가 있다. 1876년 讀約會 관련 기록은 「讀約講會時回文」, 「社約節目」, 「讀約時笏記」, 「開講時笏記」, 「讀約講會時諸生文」, 「讀約講學日謹賦四韻呈諸長老兼示諸生」, 「丙子八月晦日讀約後續契案」 순으로 수록되었다.
1876년 독약의 시행과정과 의의는 金喆銖(1822~1887)의 문집인 『魯園集』 수록 「奈城社約節目 幷小序」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奈城社約節目 幷小序」의 서문은 「사약일통」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자료이다. 이 서문에서는 먼저 奈城社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皇明 弘治 연간(1488~1505)에 이홍준이 規例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김추길에 이르러 完議를 이어서 마련하였으며, 權斗經가 藍田의 朱子增損呂氏鄕約을 참작하여 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속이 멀어지고 풍속이 타락하면서 籍은 있으나 講會를 열지 않은지 거의 200년이 되었기에 丙子(1876) 가을 여러 군자가 慨然해 하며 이를 다시 한 번 행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權璉夏(1813~1896)가 都契長이 되었고, 자신이 외람되게 副契長을 맡았다고 나타나 있다. 이때 김철수는 삼계서원에서 社約을 읽고, 『心經』을 강론하였으며, 모인 자가 180여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國朝鄕禮合編』을 취하고, 권두경 社約을 참작하여 규약을 새롭게 마련했다고 나타나 있다. 이상 서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1716년에 권두인, 권두경 주도로 새롭게 동약이 마련되었으나 200년 가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8세기 이후 사회적 변화에 따라 一鄕 사족을 대상으로 한 향약 시행의 어려운 실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이때 서문을 작성한 김철수는 앞서 「동계중수서」를 작성했던 김추길의 후손이며, 大院君의 서원 훼철령 이후 서원 복설 운동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당시 讀約會가 삼계서원에서 열렸다고 되어 있는데, 삼계서원은 이때 훼철된 상태였으며 실제로 독약회가 열렸던 곳은 그 舊址였다.
「사약일통」에 수록된 「독약강회시회문」은 독약회에 앞서 1876년 윤5월 14일에 작성된 것이다. 회문은 院底, 즉 삼계서원 舊址에서의 회의 때 權世淵(1836~1899)에 의해 작성되었다. 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縣의 洞約社契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訥齋 李先生께서 전에 이를 창설하였고, 뒤이어 荷唐, 蒼雪齋, 龜厓, 訥隱 선생이 이를 계승하였으니, 향리 안에는 規條가 질서있고 조리 있었으며 樽俎의 사이에는 예법의 엄정함이 있었다. 이로써 선비의 길을 바로 세우고 風敎를 도탑게 할 수 있었으니, 우리 縣에서 300년 간 문헌이 드러나고 일컬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앞선 이들의 규범이 날로 멀어지고 옛 풍속이 점점 한미해져, 이 규약이 폐해지고 행하지 않게 된 것이 몇 해나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지금 斯文의 陽九로 學舍가 폐허가 되어 絃誦하던 장소와 緜蕝의 터에 초목이 침범하여 成俗을 농단하였다. 前輩가 振勵한 良規는 蕩然하여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 다만 적은 분량의 흔적들이 겨우 구덩이의 재만큼 남아 있어, 만겁 가운데 남은 것을 어루만지고 받들었으니 누가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이로 인해 溪址에 집을 지은 후 一縣의 老少 약간이 모여 옛 규약을 다시 행하기를 도모하였다. 아! 이것은 금일 우리 縣의 人士가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頹靡한 풍속은 振刷하여 바로 잡기가 어렵고 사나운 습속은 바른 모양을 세우기가 쉽지 않으나, 揖讓하고 磬折하는 바탕과 威儀는 가히 볼 만하며 모여서 講討하는 자리에서는 학문 강마를 서로 돈독히 하고 있다. 한 번 보고 거듭 봐서 이것이 浸漬하여 물들어 가니, 무릇 우리 고을의 章甫는 모두 約中 여러 인사들의 遺昆이거나 後承이다. 누가 감히 惕然히 은혜에 감동이 일어나 만에 하나라도 몸소 행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옛날 서원을 설치했던 것은 진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바라건대 이것을 돌리고 鄕風이 크게 변하여 私習이 옛날로 되돌아간다면 天心이 정해질 것이다. 모이는 날은 때가 있으나 눈 아래의 무성한 遺墟를 모니 어찌 황무지를 개척하는 날을 알 수 있겠는가? 논의가 이미 規模를 돈독히 하는 것으로 정해졌으니 8월 25일에 처음 한 번 모여 讀約하고 講禮한 것을 볼 수 있게 한 두 권의 책으로 써서 서로 사귀며 힘쓰기를 권장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생각건대 아름다운 일을 성취하는 뜻은 앉으나 서나 차이가 없다. 금일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각 문중의 諸員 역시 어찌 다르고 같은 의논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기약에 맞추어 모두 도착하여 능히 돈독하게 모임을 盛하게 된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다.
위의 회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溪址는 앞서 언급한 훼철된 삼계서원이다. 이 시기 讀約會의 실시는 서월 훼철 등과 같은 사회정책의 변화와 맞물려 실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사약절목」이 수록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위에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생략한다고 나타나 있다. 즉 생략된 「사약절목」은 앞서 권두경이 작성한 것과 동일한 내용일 것이다. 이어 수록된 「독약시홀기」와 「개강시홀기」에서는 讀約과 講禮 때의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독약시홀기」는 都契長, 副契長, 月有司 등의 임원과 여러 約員, 나이에 따른 尊者, 異爵者, 長者, 敵子, 少者, 幼者 등이 독약 때 자리에 위치하는 절차와 인사하는 절차 등을 설명하였다. 「개강시홀기」에서도 講禮 때의 임원인 講長과 東西班首, 東西曺司, 그리고 諸生이 자리하는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독약과 강례를 통해 동약 내에서의 상하 질서를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讀約講會時諸生文」은 諸生들에게 독약과 강례를 행하는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三代의 鄕序, 宋代의 呂氏鄕約과 陳古靈의 仙居勸諭文, 朱子가 제정한 白鹿洞과 嶽麓書院의 學規를 계승하여, 川城(내성현의 별칭)에서도 訥齋 李先生에 의해 동약이 시행되었다며, 동약 시행의 오랜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이어 내성에서 先賢들이 배출되어 동약 시행을 계승해 나갔으나 근래 10년 塾舍가 모두 廢해져 讀約과 講禮를 할 수 있는 場이 사라졌음을 통탄하였다. 塾舍의 철폐는 다름 아닌 대원군에 의한 서원 훼철이다. 내성에서 동약이 시행되던 삼계서원도 이때 훼철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계서원의 옛 터에 규모는 작지만 종전처럼 집을 짓게 되었으니, 이곳에서 옛 규약을 다시 시행하며 독약하고 강례를 행하는 자리로 삼았다고 한다. 이 글에서도 확인되듯이 오랫동안 중지된 것으로 여겨지던 내성의 동약이 1876년에 새롭게 시행된 것은 훼철된 서원 복설을 주장하는 내성 지역 재지사족들의 의지와 맞물려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약강회시제생문」의 중간 이후부터는 독약과 강례 시행의 의의와 이를 돈독히 시행해 줄 것에 대한 바람을 언급하였다.
「讀約講學日謹賦四韻呈諸長老兼示諸生」은 9월 초1일 삼계서원의 舊址에서 동약의 사람들이 모여 작성했던 四韻詩를 수록하였다. 權璉夏(1813~1896) 이하 58명이 작성한 사운시 58편을 수록하였으며, 이어 成鍾震 이하 8명이 작성한 사운시 8편도 追錄하고 있다. 사운시를 추록한 8명은 뒤 이어 수록되어 있는 附契案에 등재된 인물들로, 附契案은 이때 독약회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후일 같은 뜻을 가지고 동약에 관여한 자들이다. 사운시는 모두 7언시로 明, 程, 聲, 行, 情字를 운으로 사용하였다. 사운시의 내용은 내성에서 실시된 동약의 오랜 유래와 새로운 동약의 중수를 기리는 것들이다. 또한 김추길의 후손인 金在鏞, 金益銖, 金魯銖는 중간에 사운시와 더불어 동약의 유래와 행사의 전반적인 과정을 밝힌 글들을 각각 서술해 놓았다. 이들의 글에 따르면 川城에서의 社約은 이홍준이 이 고을에 정착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옛적 藍田에서 실시된 규약의 4대강령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때 임진왜란으로 동약이 중지되었으나 김추길, 권두인, 권두경, 이광정에 의해 계승되었고, 지난 戌巳(1862~1869) 연간에 유림들이 화변을 당해 州序黨庠이 모두 蕩然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이 시기는 서원 훼철로 인해 상당수의 祠宇가 훼철된 시기이다. 이에 丙子年(1876) 봄에 훼철된 삼계서원 옛 터에 집을 짓고 講信하는 자리로 삼을 것으로 의논하였으며, 임원을 뽑고 절목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그믐에 모여 讀規를 하였고, 『心經』을 講했다고 하는데, 「내성사약절목」에 따르면 이때 『심경』 강의자는 김철수로 확인된다. 이어 약원에게 斗粟을 거두어 春秋講信의 바탕으로 삼기로 했으며, 契案 1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의 「丙子八月晦日讀約後續契案」은 1876년 8월 그믐 삼계서원 옛 터에서 실시된 독약회 참여 인사의 명단이다. 성명, 字, 출생간지, 본관, 그리고 거주지가 내성이 아닐 경우 해당 동리도 기재하였다. 모두 180명을 수록하였으며, 이날 참여하지 못했으나 뒤이어 계안에 입록한 49명은 附契案에 수록하였다. 附契案 수록 인물의 거주지는 대부분은 안동, 순흥, 영주 등의 외지로 확인된다. 입록자는 도합 229명으로 성관은 安東權氏 94명, 義城金氏 52명, 全州柳氏 13명, 完山李氏 9명, 奉化琴氏 9명, 光山金氏 9명, 原州邊氏 6명, 南陽洪氏 5명, 西原鄭氏 4명, 昌寧成氏 4명, 平山申氏 3명, 務安朴氏 3명, 順天金氏 3명, 羽溪李氏 3명, 安東金氏 2명, 昌原黃氏 2명, 그리고 固城李氏, 延安金氏, 靑松沈氏, 河東鄭詩, 眞寶李氏, 晉陽鄭氏 각 1명 순이다. 종전과 같이 안동권씨와 의성김씨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으로 확인되며, 그 외 전주류씨, 광산김씨, 완산이씨, 봉화금씨, 원주변씨가 적지만 일정 비율의 인원을 참여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중 고성이씨, 안동김씨, 순천김씨, 연안김씨, 우계이씨, 진보이씨, 남양홍씨, 창원황씨, 청송심씨, 하동정씨, 진양정씨, 서원정씨, 무안박씨, 창녕성씨, 평산신씨처럼 소수의 인원만 참여시킨 가문은 1876년의 讀約會에 참여했던 가문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附契案에 수록되어 있으며, 거주지 역시 타 고을이 대다수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내성동약에 참여했던 가문이 아니라, 1876년 당시 있었던 독약회에 공감을 가지고 후일, 이 모임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당시 이들이 참여한 까닭은 동약 중수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이 모임이 서원 훼철 이후 지역 유림들이 추진한 서원복설 운동과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약일통」 말미에 기재된 「日記」와 「後序」는 본 자료를 엮으면서 동약을 정리하는 의미로 작성된 듯하다. 이중 「일기」는 역대 내성에서의 동약 연혁과 1876년의 독약회 시행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일기」에 나타난 동약의 연혁과 독약회 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正德 연간에 이홍준이 내성현에 정착하였다. 이때까지 내성현의 사람들은 漁獵을 생업으로 삼고 서로 싸우고 소송하기를 좋아했으며 유교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다. 이에 縣의 여러 가문들과 협의하여 社約을 창설하였으니, 이때부터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이후 권벌이 이를 계승하였으며, 정유일, 洪浚亨(1606~1666), 김추길 등의 여러 선배가 뒤이어 옛 규약을 遵修했었다. 그리고 권두인, 권두경, 이완, 이광정 등의 諸賢이 約法의 침체를 개연해 하며 이 규약을 다시 증손하였다. 지금 約案에 참여한 가문이 10여가이나, 이때부터 약법은 폐지되고 더 이상 시행되지 않은 채 100여년이 흘렀다. 삼계서원은 萬曆 연간에 창건되어 斯文들이 講習하고 敎諭하는 자리로 삼았으니, 이로 인해 嶠南에서 文學의 淵藪라 불릴 수 있었다. 사약과 강학 이상 두 가지는 우리 현에서 수백년간 지속되어 온 舊規였으나 근래 풍속이 날로 달라지고 士習이 점차 무너지더니, 급기야 辛未年(1871) 때 조정에서 사액된 서원마저 일시에 훼철시켜 버리니, 本院 또한 철거되고 말았다. 지난 5~6년간 여러 유림들이 이를 한탄해 했는데, 올 丙子年(1876) 봄에 우리 縣의 장로들께서 院宇를 復設하는 것으로 의논을 모았다. 이에 삼계서원 옛 터 강당 서편에 수십칸의 건물을 건립하니, 도유사 金蘷銖씨가 이를 주관하였으며, 도감 權載珽(1813~1887)과 유사 金浩永, 권세연이 간사를 맡으니 윤5월 14일에 落成되었다. 건물이 낙성되자 도감과 두 유사는 조악하나마 건물이 지어졌으니, 더욱 노력하여 옛날과 같이 돌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만들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 縣의 士友들이 約法을 새롭게 마련하고 강회를 여는 모임을 갖자고 건의하였다. 院長 金老永과 金在鏞, 進士 權承夏, 參議權泳夏, 正言柳星杓(1816~?)가 모두 이 의견에 찬성하였고, 이어 도계장에 권연하, 부계장에 김철수, 집례에 金耆永을 薦出하였으며, 월유사에는 金魯銖와 권중연, 직월에는 李命周, 柳震欽, 金聖銖, 權玉淵, 金復林, 金鍾遠, 權相泰, 邊應均, 洪思永을 임명하였다. 처음 독약과 강회는 7월 25일에 개최하는 것으로 發文을 돌렸으나, 그때까지 무더위가 가시지 않아 8월 30일에 개최하는 것으로 다시 정하였다. 8월 29일 도유사와 계장, 집례 및 여러 임원들이 모여 讀法의 儀節을 상의하였으며, 8월 30일에 우리 고을의 유림들이 모이니 180여명이나 되었다. 이웃 고을에서도 이를 듣고 참석한 자가 있으니, 안동晩對軒의 權靖夏(1806~1892)도 노구를 이끌고 왔다. 독약회는 삼계서원의 누각이었던 觀物樓 터 東庭에서 열렸다. 먼저 異爵者, 尊者, 長者, 少者 및 제 임원이 위차에 맞추어 위치하였으며, 집례가 옛 제도에 따라 唱笏하는데로 위차에 따라 서로 예를 갖추었다. 월유사가 한 차례 독약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손을 모아 경청하였으며, 마친 후에는 계장과 여러 존자가 旨義를 推說하는 시간을 가진 후 질서 있게 서로 예를 갖추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독약을 마치고 강회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이때 唱忽은 金禧永, 讀規에 권세연, 직월은 권옥연과 김복림, 東班首와 曺司에 김성수와 류종흠, 西班首와 曺司에 金文銖와 成永植이 맡았다. 兩班首가 諸生을 이끌고 東庭과 西庭에 나란히 위차에 따라 정열한 뒤 먼저 서로 간에 예를 갖추었으며, 마친 뒤에는 경건하게 白鹿洞規를 讀規하였다. 이어 諸生이 中堂에서 設講을 하였고, 뒤 이어 『心經』을 進講을 하였으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강회는 날이 저물어서야 마쳤다. 다음날인 9월 초1일에는 勸諭文과 四韻詩를 내 보이며, 전날과 같이 예를 갖추어 設講하였다. 이날의 창홀은 이명주, 독규는 金泰林, 직월은 權錫夏, 申泰雲, 黃基道가 맡았으며, 동반수는 권세연, 조사는 鄭東泰와 權相弼, 서반수는 金震林, 조사는 洪承禹가 맡았다. 강회는 오후 네 시 무렵에 마쳤고, 諸生은 모두 귀가하였으나 장로와 여러 임원은 남아 宿夜로 머물며 남은 일들을 논의하였다. 이때 장로는 먼저 여러 임원들에게 오늘의 행사가 매우 뜻깊었다고 찬하였으며, 이어 독약과 강회를 지속시킬 수 있게 몇 가지 방안을 건의하였다. 결국 여러 임원들이 장로의 뜻에 동의하여 새롭게 契案을 작성하고, 계원들은 각기 1斗의 租를 내어 향후 독약 및 강회 개최 비용으로 집행할 것으로 의견을 모았으며, 오는 10월 20일에 修約會를 열기로 하였다. 10월 20일 여러 임원들이 서원에 모여 各洞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납부하였는데, 이날 새로운 契案을 작성하니 모두 182員이 입록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타른 고을에 거주하면서 동약에 참여하길 원하는 士友는 附案을 만들어 여기에 이름을 등재하니, 모두 49원이었다. 이날 수합된 곡식은 월유사가 관리하며, 향후 봄과 가을 모임 때의 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미 수록된 「후서」는 1876년 9월 권중연이 작성한 것으로 「사약일통」 편찬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앞서 수록되었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三代 때부터 있어왔던 塾과 庠의 제도가 후대에 향약으로 계승되었으며, 내성에서도 어진 인사들이 등장하여 사약을 결성하고 시행해 왔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 사약 시행을 주도했던 여러 인사들을 거론하였는데, 앞선 글과 차이가 있다면 16~17세기 사약 중수에 참여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권벌, 정유일, 홍준형, 김추길 이외에 裵三益(1534~1588), 具贊祿, 金秋任(1592~1654)을 추가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 18세기 초반에 권두인, 권두경, 이완, 이광정 등에 의해 여씨향약, 해주향약, 寒岡의 立議를 참고하여 사약을 중수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인심이 무너지게 되었고, 급기야 독약과 강학의 장소마저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였으며, 다행히 여러 장로들의 건의로 독약과 강학을 실시할 장소가 마련되고 모임이 새롭게 결성되었다며 앞으로 후손들이 열심히 시행할 것으로 다짐하였다. 그래서 이상의 사실을 기록한 1책을 엮게 서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후 글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본 향약은 내성이라는 任內를 대상으로 한다는 지역적 특징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동약, 동계, 사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시대에 따른 성격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내성에서 동약이 시행된 것은 16세기 전후 이홍준에 의해서이다. 이 시기는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정착되던 시기로 사족들 간의 상부상조와 자기규제의 목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사족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상부상조 조항이 주목되며, 구성원의 범위도 족적 유대가 뚜렷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약 또는 동계라 불리는데 이때의 동약은 고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향약과 성격이 유사하다. 16세기 중반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약의 조항을 鄕規에 접목시킴으로써 향약과 留鄕所를 매개로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확립하려 했다. 이러한 향약은 지역별로 시기적 차이가 있지만, 재지사족이 형성된 고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향촌사회 복구와 더불어 활발하게 향약을 실시해 나갔다. 내성에서도 이때 새롭게 동약이 중수되면서, 하층민까지 통제하는 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규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제정된 禁戢下人條는 하층민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조항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세기 이후부터 동약은 社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때의 제 규정에는 전대에 확인되었던 하층민 통제 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향촌에서의 재지사족의 지위가 흔들림에 따라 하층민을 통제하는 향약 시행이 어려워진 것이다. 하층민 역시 사족의 통제를 받는 향약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종의 香徒를 결성해나가던 추세였다. 이에 따라 당시의 내성사약은 향촌 규제보다는 사족 상호 간의 결속력 강화와 위계질서를 확립하는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규정은 상호부조 규정과 讀約과 講會 때 約員의 위차에 따른 의례와 절차를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은 내성의 향약이 중수된 것은 1876년이다. 이시기 새롭게 마련된 향약 규정은 18세기의 것과 유사하다. 다만 이때의 향약 중수는 전국적으로 단행된 서원훼철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이다.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내성에서 동약을 시행하던 三溪書院가 혁파되었으며, 이에 내성의 유림들은 각기 서원 복설에 주력하고 있었다. 서원의 훼철은 재지사족이 운집할 수 있는 구심점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이에 내성의 재지사족들은 향약의 복설을 매개로 서원 복설을 추진하고 사족이라는 신분 간 결속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