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詩] 題友人扇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6:57

용재유고(慵齋遺稿) / 詩


題友人扇

相知八年內。會小別離多。臨分千里手。掩泣聞淸歌。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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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부채에 쓰다1)[題友人扇]

서로 알고 지낸 팔 년 사이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이별은 많았네 會小別離多
눈물 훔치며 맑은 노래 듣노라 掩泣聞淸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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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벗의 부채에 쓰다 : 이 시는 『연려실기술』 권6 「무오당적」과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에 의하면 무풍정(茂豐正) 이총(李摠)이 지은 것이며, 그와 보제원(普濟院)에서 이별할 때 써 주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선생유고 > 시詩 > 벗의 부채에 쓰다[題友人扇]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秋江集] 冷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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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고전번역서 > 추강집 > 추강집 제7권 > 잡저(雜著) > 냉화(冷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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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집(秋江集)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文集이다.
○남효온(南孝溫)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거사(秋江居士),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 등과 교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百源天姿冠世。不讀書史。屬詩文大奇。嘗別我普濟院上。賓客皆自歌舞。百源題我扇子詩曰。相知八年內。會少別離多。臨分千里手。掩泣聞淸歌。坐中辟易閣筆。仲鈞見此詩。嘆曰。大好絶倫。

○ 백원(百源)은 타고난 자질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서사(書史)를 읽지 않았으나 시문을 지은 것이 크게 기이했다. 일찍이 보제원(普濟院)에서 나를 전별할 때에 빈객이 모두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백원이 나의 부채에 시를 적기를,

서로 안 지 팔 년 사이에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이별은 많네 / 會少別離多
천리 멀리 헤어지는 자리 / 臨分千里手
눈물 흘리며 맑은 노래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자리를 피하며 붓을 던졌다. 중균(仲鈞)이 이 시를 보고 탄복하기를 “매우 좋다. 출중하다.” 하였다.

子挺嘗不快李太白,蘇東坡及前朝李相國詩。李宗準仲鈞戲書其門曰。子挺拳歐太白。子挺與東坡昧平生。子挺與相國不相能。子挺讀之。拈筆獨汚與東坡昧平生六字。余問之曰。相國東人。其文章固下矣。如靑蓮居士。風雅以後一人而已。足下甘受仲鈞拳歐之筆。是以靑蓮居士下東坡耶。子挺笑不答。


○ 자정(子挺)이 일찍이 이태백(李太白), 소동파(蘇東坡) 및 고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상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중균 종준(李仲鈞宗準)이 그의 문에 장난삼아 쓰기를 “자정은 태백을 주먹으로 때린다. 자정은 동파와 평소에 잘 알지 못한다. 자정은 상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였다. 자정이 이를 읽고 붓을 들어 유독 ‘동파와 평소에 잘 알지 못한다.’는 구절만 지워 버렸다. 내가 묻기를 “상국은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 문장이 진실로 변변찮다고 하더라도 청련거사(靑蓮居士)* 같은 이는 《시경》 이후의 오직 한 사람뿐이거늘 족하가 중균의 ‘주먹으로 때린다’는 글을 달갑게 받아들이니, 이는 청련거사가 동파보다 못하다 여기는 것이오?” 하니, 자정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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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련거사(靑蓮居士) : 이백(李白)의 호이다.

李宗準字仲鈞。號浮休居士。性風流倜儻。少有時譽。乙巳試。登科第二名。丁未秋。差日本護送官。至東萊縣。有妓年可十二三。李鍾愛。改名曰榜眼兒。待汝未嫁。再受使命。定作因緣也。謂其合琴徽曰改名。此其志也。是年冬。受平安評事之命。南北悠悠。重來無由也。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거사(浮休居士)이다. 성품이 풍류스럽고 대범하여 젊은 시절에 명성이 있었다. 을사년(1485, 성종16) 과거시험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정미년(1487) 가을에 일본호송관(日本護送官)에 차임(差任)되었다.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렀을 때에 나이 열두셋가량의 기녀가 있었다. 이종준이 매우 사랑하여 개명(改名)하며 말하기를 “방안아(榜眼兒)*는 네가 시집가기 전에 다시 사명(使命)을 받아서 꼭 인연을 맺을 것이다.” 하였다.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합하는 것을 개명이라 하니, 이것은 기념의 표시였다. 이해 겨울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의 명을 받으니, 남북의 거리가 아득하여 다시 올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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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아(榜眼兒) : 과거에서 갑과(甲科)의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余嘗遊關西。詩近百餘篇。李仲鈞獨取箕子殿詩首二聯。曰。武王不憎受。成湯豈怒周。二家革命間。聖人無怨尤曰。此詩可駕古作。餘無足取。友儕疑其論太過。余惟李齊賢詩。拙翁全稿塗抹。只留應嗔宿客開門早。要看庭前雪壓松之句。李之詩才。可步大元。詩集不啻千萬篇。僕之學詩日淺。而關西詩數至少。且仲鈞詩眼過於拙翁。則取僕四句亦過分矣。歸而思之。李論甚穩。

○ 내가 일찍이 관서(關西)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근 100여 편이다. 이중균(李仲鈞)이 유독 기자전(箕子殿) 시의 첫머리인

무왕이 수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 武王不憎受
성탕이 어찌 주를 노여워했으랴 / 成湯豈怒周
상나라 주나라 혁명할 즈음에 / 二家革命間
성인은 원망도 탓함도 없었다네 / 聖人無怨尤

하는 두 연(聯)만 취하고, 말하기를 “이 시구는 옛사람의 작품을 능가할 만하고 나머지는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벗들은 그의 논평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를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전체 원고를 지워 버리고, 단지 「응당 성내리라, 유숙하는 손님이 일찍 문을 열어 뜰 앞에 눈이 소나무를 누른 것을 보려는 것을.〔應嗔宿客開門早 要看庭前雪壓松〕」이라는 구절만 남겨 놓았다. 이제현의 시재(詩才)는 원나라에서도 활보할 수 있었고, 시집에 실린 시는 천만 편도 넘는다. 내가 시를 배운 것은 시일이 얼마 안 되고, 관서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는 편수가 지극히 적으며, 또 중균의 시를 보는 안목은 졸옹보다 높으니, 나의 네 구절을 뽑아 준 것만도 분수에 넘는 일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


禪陸行近間號得道。仲鈞之父時敏嘗邀行。爲亡父設齋。時敏問曰。地獄信有之乎。行曰。措大信不識耶。若體夫象敎二字則可知耳。

○ 선승 육행(陸行)이 근간에 도를 터득했다고 일컬어졌다. 중균(仲鈞)의 부친 시민(時敏)이 일찍이 육행을 맞이하여 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재(齋)를 지냈다. 시민이 묻기를 “지옥은 참으로 있소?” 하니, 육행이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참으로 모른단 말이오. 만약 저 상교(象敎)*라는 두 글자를 체득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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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교(象敎) : 불교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