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慵齋先生遺稿序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6:43

[용재유고(慵齋遺稿)]


慵齋先生遺稿序[金熙周]

我朝宣陵之世。治化郅隆。群哲騈肩。如權睡軒,金濯纓,南秋江諸公,以文章名節。冠冕一世。而慵,訥齋二先生。其所屈指甲乙者也。慵齋先生早游佔畢齋之門。與一時諸賢。出入經幄。裨補弘多。四方想望其風采。世値百六。奸讒盤牙。淪胥奔突。不可捄藥。而東市之難作矣。自古國家大運不造。殺氣將作。則必有忠臣志士適逢其會。犯陰陽之冶。入天地之籠範。有不知其所以然者。天乎人與。誰執其咎。此可爲拊膺慟哭者也。訥齋先生與慵齋先生金昆玉友。塤唱篪和。文章德行。亦嘗伯仲焉。及當淪亡顚覆之時。斂跡山林。隱遯不悔。挈家入于府北之川城。川在小白之下。山高水流。泉甘土肥。允爲君子盤旋之地。而及夫 中廟改玉。宇內幽陰鬼殺之氣。蓋已蕩爲和風而化爲淸塵矣。先生素性靡改。遐心莫回。漠然無意於世。而成就後進。丕變風俗。遂使漁獵之鄕。化爲詩禮之俗。至今數百年之間。彬彬多文學之士者。皆先生之力也。嗚呼。後人之仰二先生。如秋天烈日。如泰山北斗。而禍亂之後。慵齋之文。已經塵沙積劫。訥齋素不喜著述。又并不蓄。今搜輯於殘篇斷簡之餘者。無異桑海遺錄。詩與文摠若干篇。而一臠可以知全鼎。何必多乎哉。俯而讀之。則二先生之性情在焉。二先生之精神咳唾在焉。激昻掉厲。淸新疏越。湫乎攸乎。使人跼蹐屛營。彷徨惻愴。北風雨雪之思。淸流白馬之恨。可以考見其一般。孰不展卷吟諷。涕涔淫漬紙乎。慵齋之文。文不掩其質。訥齋之文。質不掩其文。蓋慵齋以節義爲文章。故其文如雄劍之出水。使人閃鑠而不可狎。訥齋以隱德爲文章。故其文如醇酒之醺人。使人沈醉而不自知。其輪囷輻塞奇偉而高古則一也。夫文者氣也。當天地閉塞之日。是氣也鬱鬱然盤互結轖于退筆故紙之間。未嘗與烟煤墨丸同歸於壞滅者。亦時運之使然。豈不異哉。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今讀其書論其人。則慵齋卽濯纓,睡軒之徒。而蕭散灑落過之。訥齋卽秋江之倫而沈晦淪沒甚焉。世之人讀二先生之書。則可以想見二先生之風烈。亦可以想見一時諸先生之志節。而有使人興起者矣。有使人慷慨者矣。有使人慷慨者矣,李君昌郁。慵齋先生後孫也。日踵門而告曰。吾先祖遺文。賴川城人士之辛勤采輯。僅成篇體。附訥齋集于其下。合爲一帙。權上舍思浹,李徵士野淳。實相考校而纂次之。執事其可無一言以弁其首乎。自視藐然。何以堪是寄。竊以熙周於訥齋先生。忝在外裔之末。平日所感于心者。不但蒯通讀樂毅傳而已。書其端以歸之。

上之二十四年甲申七月下浣。聞韶金熙周序。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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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4. 김희주(金熙周: 정조때의 문신)가 지음.
이종준 형제의 사우(師友)관계와 본 문집의 간행경위를 기록하였으며‚ 정계에 나설 뜻을 버리고 후진양성에 힘써 그 문하에 심성(心性)의 근본과 문채를 함께 갖춘 문학지사(文學之士)가 많이 나왔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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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천집(葛川集)은 갈천(葛川) 김희주(金煕周)의 文集이다.

○김희주(金熙周) 1760년(영조 36) ~ 1830년(순조 30).

자는 공목(公穆), 성사(聖思), 호는 갈천(葛川)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권사민(權思敏),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이병운(李秉運), 권사협(權思浹), 유심춘(柳尋春) 등과 교유.

*출처: 갈천집 6권 慵齋集序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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慵齋集序 18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피화(被禍)된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 1498)의 문집 서문(序文)이다. 그의 후손 이창욱(李昌郁)의 부탁으로 쓴 것으로, 문집 후반부에는 이종준의 동생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1482~1523)의 유고(遺稿)가 함께 실려 있다. 용재는 절의(節義)로 문장(文章)을 만들어 그 질박함이 감추어져 있지 않는 데다 웅장함이 드러내고 있는데 비해, 눌재는 은덕(隱德)으로 문장을 만들어 질박함을 감추고 있는 데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술에 취한 듯한 몽롱한 기분을 느끼도록 한다고 평가했다.

*출처: 유교넷. 갈천집 예(葛川集 禮) > 葛川先生文集卷之六 > 序 > 慵齋集序 18 상세해제

 http://www.ugyo.net/yk/hejNew/hejKisa.jsp?B_SUJI_ID=KSAC_M_A01000015&B_BOOK_ID=KSAC_T_A01000015_003&B_KWON_ID=002&B_STYLE_ID=002

 

*갈천선생문집(葛川先生文集) > 갈천집 예(葛川集 禮) > 葛川先生文集卷之六 > 序 > 慵齋集序

 

http://www.ugyo.net/yk/gds/gdsKisaView.jsp?B_SUJI_ID=KSAC_M_A01000015&B_BOOK_ID=KSAC_T_A01000015_003&B_KWON_ID=002&B_STYLE_ID=004&iPage=1&B_KISA_ID=00027

 

 

용재 눌재 두 선생의 유고 서문[慵齋訥齋兩先生遺稿序]

갈천葛川 김희주金煕周

우리 조선 성종成宗 시대에는 다스림과 교화가 크게 융성하여 여러 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이를테면 권수헌權睡軒1)·김탁영金濯纓2)·남추강南秋江3) 공 등은 문장과 명예와 절조로 한 시대에 으뜸이었고, 용재慵齋와 눌재訥齋 두 선생은 그들과 갑을甲乙로 손꼽을 분들이다. 용재 선생은 일찍이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당시 어진 이들과 경연에 출입하면서 임금을 보좌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사방에서 그 풍채를 흠앙하였다. 액운의 시대를 만나 간사스럽고 참소하는 무리가 도사리고 있다가 서로 연루시키고 미친 듯이 날뛰니, 약藥으로도 구할 수가 없어서 사화가 일어났다.

옛날부터 나라의 큰 운이 불행하여 살기殺氣가 일어나려 하면 반드시 충신과 지사志士가 마침 그때를 만나, 음양이 빚어내는 움직임을 거스르고 천지의 조롱에 들어가면서도 그 까닭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하늘이 한 짓인가! 사람이 한 짓인가! 누가 그 허물을 잡겠는가. 이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할 만한 일이다. 눌재 선생은 용재 선생과 금옥金玉 같고 훈지壎篪 같은4) 형제로 문장과 덕행이 또한 엇비슷하였다. 나라가 무너지고 뒤집어질 듯하던 당시에 산림으로 자취를 감추고 은둔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아, 가족을 이끌고 부府 북쪽 천성川城(영주榮州의 옛 이름)으로 들어갔다. 천성은 소백산 아래에 있어 산이 높고 물이 흐르며 샘물이 달고 토양은 비옥하니, 참으로 군자가 머물 만한 땅이다. 중종이 반정을 하였을 때 나라 안의 땅속 음기와 귀신의 살기가 대개 이미 싹 사라져 온화한 바람이 되고 맑은 먼지로 변하였다. 선생은 본래 성품을 고치지 않고 세속을 멀리하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며 아득히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고, 후진을 성취하게 하며 풍속을 크게 변화시켜, 드디어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고장을 시와 예를 아는 풍속으로 변화시켰다. 지금까지 수백 년 사이에 문질文質5)을 겸비한 문학의 선비가 많았던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다.

아, 훗날 사람이 두 선생을 우러르는 것이 가을의 빛나는 해와 같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건만, 재앙을 겪은 뒤에 용재의 글은 이미 끝없는 재난을 겪었고, 눌재는 평소 저술을 달가워하지 않고 또 모아 놓지도 않았으니, 이제 떨어져 나가고 빠져 조각난 글의 나머지에서 수집하는 것은 상전벽해 속에 남은 기록과 다름없다. 시문詩文을 모두 합해 약간뿐이지만 한 덩이의 고깃점으로도 전체 솥의 음식 맛을 알 수 있으니, 어찌 굳이 글이 많아야만 하겠는가. 고개 숙여 읽어 보면 두 선생의 정신과 말씀이 담겨 있어 격앙되고 우뚝하며 청신하고 자유분방하여, 사람들이 두려워 몸 둘 곳을 모르고 방황하며 슬퍼하게 한다. 나라를 염려했던 마음과 사화에 희생된 것을 한스러워한 점을 통하여 두 분의 같은 점을 살펴볼 수 있으니, 누군들 책을 펴 읊고 외우면서 눈물이 흘러 흥건히 책을 적시지 않겠는가. 용재의 문장은 꾸민 것이 바탕을 가리지 않으며, 눌재의 문장은 바탕이 꾸민 것을 가리지 않으니, 대개 용재는 절개와 의리로 문장을 지었기 때문에 그 문장이 마치 보검이 물에서 솟아 나오는 것 같아 번쩍거려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갈 수 없게 하고, 눌재는 드러내지 않는 덕으로 문장을 지었기 때문에 그 문장이 진한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 같아 사람들이 깊이 취하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기백이 웅대하고 꽉 차서 기이하고 빼어나면서도 고상하고 예스러운 점은 같다.

대개 문장이란 기운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꽉 막힌 시대6)를 만나 이 기운이 낡은 붓과 묵은 종이 사이에 답답하게 서로 서리고 얽혀 있으나, 먹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은 것은 또한 시운時運이 그렇게 한 것이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맹자가 “그의 시를 읽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제 그분들의 글을 읽고서 인물됨을 논하자면 용재는 탁영·수헌과 같은 부류이지만 산뜻하고 깨끗한 점이 그들보다 뛰어나고, 눌재는 추강과 같은 부류이지만 드러나지 않고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점이 그들보다 더하다. 세상에서 두 선생의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두 선생의 풍도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같은 시대 선생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상해 볼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본받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강개하게 할 것이다. 이창욱李昌郁 군은 용재 선생의 후손이다. 하루는 내 집을 찾아와 “저의 선조 유문遺文이 천성川城의 인사들이 애써 수집한 덕분에 겨우 책 모양을 이루었습니다. 『눌재집』을 그 뒤에 붙여서 합하여 한 질을 만들고, 상사上舍 권사협權思浹7)과 징사徵士 이야순李野淳8)이 실로 서로 살피고 교정하여 편찬하였으니 그대께서 책머리에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스로 살펴보건대,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눌재 선생에게는 외손이 되고, 평소 마음에 감화된 것이 괴통蒯通이 「악의전樂毅傳」을 읽은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9) 서문을 써서 드린다.

금상(순조) 24년 갑신(1824) 7월 하순에 문소聞韶 김희주金熙周10)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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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수헌(權睡軒) : 수헌은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호이다. 자는 향지(嚮之), 본관은 예천(醴泉)으로 예천 출신이다. 봉교·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2) 김탁영(金濯纓) : 탁영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이다. 자는 계운(季雲), 또 다른 호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저서로는『탁영집』이 있다.

3) 남추강(南秋江) : 추강은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이다. 자는 백공(伯恭),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 등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4) 금옥(金玉)……같은 : 훌륭하면서 화목하고 우애가 돈독한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훈은 질그릇으로 만든 나팔이고, 지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 이 두 악기는 소리가 서로 잘 어울린다. 형제의 우애를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하인사(何人斯)」에서 “형님이 훈을 불면 아우가 지를 분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5) 문질(文質) : 문은 외면적인 꾸밈, 질은 본바탕이다. 외관과 실질, 형식과 내용이란 뜻으로 쓰인다.

6) 하늘과……시대 : 연산군이 다스리던 시대를 은유한다.

7) 권사협(權思浹, 1753∼1832): 자는 사선(士善)·열보(說甫), 호는 취죽(醉竹),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봉화 유곡(酉谷)에 거주하였고, 권벌(權橃)의 후손이다.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8) 이야순(李野淳, 1755∼1831) : 자는 건지(健之), 호는 광뢰(廣瀨),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이황의 9세손으로, 이상정(李象靖)·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이황의 성리학을 이었다. 젊어서 과장(科場)의 무질서와 폐습을 보고는 벼슬길을 단념, 일생을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추천으로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임명되었고 국장도감 감조관, 장악원 주부에 승진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광뢰집』 이외에도 다수의 저서와 도설 등이 있다.

9) 괴통(蒯通)이……아니니 : 이홍준의 우국충정에 몹시 감격하였다는 말이다. 괴통은 한(漢)나라 때 유방(劉邦)의 책사(策士)인데, 연(燕)나라의 악의(樂毅)가 연왕(燕王)에게 보낸 답서(答書)를 읽을 때마다 그 우국충정에 감동되어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漢書』 卷45 「蒯通傳」)

10) 김희주(金煕周, 1760∼1830) : 자는 공목(公穆), 호는 갈천(葛川),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권사민(權思敏)과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9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간과 함길도 감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 경북 봉화에 갈천정(葛川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 저서로는 『갈천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 눌재 두 선생의 유고 서문[慵齋訥齋兩先生遺稿序] 김희주金熙周 / 이재집李在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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