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봉화지역◇유적

[폐허] 만오재(晩梧齋), 외영당(畏影堂)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4. 15:14

15. 만오재(晩梧齋)


소천면 분천리(小川面 汾川里) 가호(佳湖)마을에 소재(所在)하였으며 만오 이상현〈晩梧 李相鉉 · 朝鮮 第23代 純祖 16年(1816)~?〉이 낙동강변(洛東江邊) 암벽상(岩壁上) 아름다운 곳에 후학배양(後學培養)을 위(爲)하여 건립(建立)한 정자(亭子)이다. 현재 건물(建物)은 폐허(廢墟)되고 없다.


37. 외영당(畏影堂)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호평(虎坪)마을 후강(後崗)에 소재(所在)하였으며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이 조선조 성종(朝鮮朝 成宗) 17年(1486) 진사(進士)를 하고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그의 형(兄)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이 참혹한 변을 당한 후 일체 관직을 바라지 않고 내성현연수봉(乃城縣延壽峯) 밑으로 이사하여 외영당(畏影堂)을 건립(建立)하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等 국내유현(國內儒賢)들과 교유(交遊)하며 시사(時事)를 논의(論議)하던 곳이다. 참봉 김명중(參奉 金命仲), 묵재 김영권(黙齋 金永權), 죽헌 김균(竹軒 金筠) 等 영남(嶺南)과 안동지방(安東地方) 사림명현(士林名賢)들과 회동강론(會同講論)하며 사회정화(社會淨化)를 爲한 천성향약(川城鄕約)을 구상하던 곳이라 전한다. 건물(建物)은 폐허(廢墟)되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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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금당(覺今堂)

법전면 풍정리(法田面 楓井里)에 所在하였으며 각금당 심장세〈覺今堂 沈長世 · 朝鮮 第14代 宣祖 27年(1594)~제18代 顯宗 元年(1660)〉가 학문(學問)에만 정진(精進)하다가 인조(仁祖) 2年 이괄(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포의(布衣)로서 임금을 호가(扈駕)하다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으며 仁祖 5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江華)까지 호가(扈駕)하였다. 그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태백산 봉화(太白山 奉化)에 와서 亂을 避하고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태백오현(太白五賢)인 홍우정(洪宇定), 강흡(姜恰), 홍석(洪錫), 정양(鄭瀁)과 함께 절의(節義)를 지키며 교유(交遊)하던 곳이다. 現在 亭子는 廢墟되고 없다.


2. 경체당(景棣堂)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 사제(沙堤)마을에 所在하였으며 계산 이종보〈溪山 李鍾輔 · 朝鮮 第24代 憲宗 12年(1846~1918)〉가 광무(光武) 3年(1899)에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사양하고 만년(晩年)에 향리(鄕里)에 경체당(景棣堂)을 建立하여 그의 아우 종헌(鍾軒), 종철(鍾轍)과 함께 강학(講學)하고 여기서 늙도록 함께 거처하며 우애(友愛)를 극진히 하여 단란하게 지냈다 한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 계산정(桂山亭)

봉화읍 거촌리(奉化邑 巨村里) 외거촌(外巨村)에 所在하며 면와 변태균〈勉窩 邊台均 · 朝鮮 高宗 4年(1867~?)〉이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며 후학(後學)들의 문예진흥(支藝振興)을 爲해 창건(創建)한 서재(書齋)며 一名 勉窩亭이라고도 한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 고암정사(高巖精舍)

봉성면 원둔리(鳳城面 遠屯里) 고좌암(高佐巖)에 所在하였으며 참의공(參議公) 고암 금은〈高巖 琴? · 朝鮮 第11代 中宗 28年(1533~?)〉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門下)에서 修學하고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던 곳이다.
現在 건물은 廢墟되고 연못이 남아 있다.


5. 광림대 (廣臨臺)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입구 병풍암상(屛風巖上)에 所在하였으며 호군(護軍) 권상중(權尙中)이 명사거유(名士巨儒)들을 영접하여 청론교유(請論交遊) 爲하여 건립(建立)하였으며 후세에 포재 권달준〈包齋 權達準 · 朝鮮 第22代 正祖 6年(1782)~第26代 高宗 2年(1865), 敦寧府都正)〉, 권계화(權啓和 字 繼賢, 號 菊園 成均館博士)등의 학자(學者)들이 이곳에 기거수학(起居修學)하여 대성(大成)하였던 곳이라 傳하며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6. 구방재 (求放齋)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용담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용담 임흘〈龍潭 任屹 · 朝鮮 第13代 明宗 12年(1557)~第15代 光海 12年(1620)〉이 선조(宣祖) 15年에 진사(進士)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學問)에만 전념하다가 宣祖 25年(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유종개(柳宗介)의 휘하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태백산(太白山) 소천전투(小川戰鬪)에 나아가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며 광해(光海)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령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等 일당의 만행을 상소하고 물러나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후학배양(後學培養)에 힘썼다 한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小築仍佳境 좋은 경치에 작은집 지어 놓으니
宜晴又可陰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언제나 좋구나

蔚藍供活畵 짙은 남색 그림물감 아니리
虛籟響瑤琴 바람 소리는 거문고 소리 같이 울린다.

古義參黃卷 옛뜻은 책에서 찾아보고
幽期賞素心 그윽히 本性을 기으려 한다.

灑然香一炷 깨끗이 香불피워 놓고서
休問去來今 오고가는 世五事는 묻지 않으리


7. 귀후정(歸厚亭)

법전면 풍정리 곡촌(谷村)에 있었다. 李梁萬 慕所이다.


8. 나부정사(羅浮精舍)

명효면 관창리(明湖面 觀漲里) 나분들에 所在하였으며 용담 임흘〈龍潭 任屹 · 朝鮮 第13代 明宗 12年(1557)~第15代 光海 12年(1620)〉이 宣祖 15年(1582)에 進士를 하였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學問에만 전념하였다. 1592년 壬亂後 동몽고관(童蒙敎官)에 除授되었으나 光海때 이이첨(李爾瞻) 等의 誤國을 叫彈하는 上疏를 하고 辭歸하여 淸凉山 기슭 경치 좋은 곳에 羅浮精舍를 建立하여 소요자적하며 篤學精進하던 곳이다라. 現在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蓬萊山一朶 봉래산 아름다운 한봉우리가
再浮今薄此 물에 떠서 금방 여기 왔구나

自是神仙境 이로부터 신선이 사는곳되어
江山如畵裏 강산이 온통 그림같구나

龍潭散髮人 나같이 못난 산발한 사람이
來棲心獨喜 여기서 살고 보니 홀로기쁘네

掉臂謝塵囂 세상사 시끄러움 떨쳐버리고
從遊赤松子 적송자와 함께 노닐까 한다


9. 낙간정(樂間亭)

봉성면 창평리(鳳城面 昌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진사(進士) 박승준(朴承俊)이 학업정진(學業精進)을 爲하여 建立한 亭子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10. 낙전당(樂全堂)

상운면 문촌리(祥雲面 文村里) 웃기촌에 所在하였으며 농수 금원정〈聾叟 琴元貞 · 朝鮮 第9代 成宗 3年(1472)~第13代 明宗 12年(1557)〉이 연산(燕山) 7年에 進士, 중종(中宗) 10年에 장사랑(將仕郎), 영해훈도(寧海訓導)를 역임(歷任)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以後 관직(官職)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 낙전당(樂全堂)을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석축만 남아있다.


11. 덕곡서당(德谷書堂)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 사가막곡(砂加幕谷)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독립운동지사(獨立運動志士)이며 한국유림(韓國儒林)의 대표인물로 학행(學行)이 높이 알려졌던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 · 朝鮮 第25代 哲宗 14年(1863)~1934〉이 일제(日帝)를 피하여 은거(隱居)하며 후학문하 유생(後學門下 儒生)들의 구학(求學)을 접견하며 강학훈도(講學訓導)하기 爲해 창건한 서재(書齋)이다. 현재는 廢墟되고 없다.


12. 덕봉정사(德峯精舍)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型) 망도 덕봉산하(望道 德峯山下)에 所在하였으며 갈천 김희주〈葛川 金熙周 · 朝鮮 第21代 英祖 36年(1760)~第23代 純祖 30年(1830)〉가 정조(正祖) 19年에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及第하여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弘文館, 司憲府, 司諫院)의 요직을 거쳐 안병(安兵) 영흥부사(永興府使),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한 후 이곳에 德峯精舍를 건립하여 동일양절(東日養正)하며 서일입교(西日立敎)라 하야 제유생(諸儒生)이 찾아와 강학(講學)을 받아온 서재(書齋)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13. 덕산정(德山亭)

봉화읍 문단리(奉化邑 文丹里) 원구(院邱)마을에 所在하였으며 도천 이인화〈陶川 李寅和 · 朝鮮 第24代 憲宗 12年(1846)~隆熙 3年(1909)〉가 통정대부중추원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을 지내고 만년(晩年)에 院邱의 앞산에 덕산정(德山亭)을 建立하여 퇴계(退溪)의 도학(道學)에 전력하는 한편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지방사림(地方士林)들과 교유(交遊)하던 곳이다. 1988年에 건물은 廢墟되고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14. 류정(柳亭)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에 所在하였으며 김수문(金秀文)이 建立한 亭子로서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豁若開衿坐柳亭 널리 옷깃을 열고 버들정자에 앉으니
淸風簫灑掃塵情 맑은 바람 소쇄해서 티끌정을 씻어라

良朋日日閒來往 좋은 벗이 발로 한가히 왔다 갔다하니
却恨談餘主客醒 문득 말하는 나머지 주객 깬 것을 한하네 -原韻-

當日風流說柳亭 당일 풍류는 류정을 말해
至今溪水尙含情 지금 시냇물이 오히려 정을 머금었노라

緣陰正合兒孫醉 푸른 그늘 정히 아손 취한데 합하니
爲報黃口莫喚醒 위해 황구에 아뢰 불러 깨우지 말게. -周世朋-


15. 만오재(晩梧齋)

소천면 분천리(小川面 汾川里) 가호(佳湖)마을에 所在하였으며 만오 이상현〈晩梧 李相鉉 · 朝鮮 第23代 純祖 16年(1816)~?〉이 낙동강변(洛東江邊) 암벽상(岩壁上) 아름다운 곳에 후학배양(後學培養)을 爲하여 建立한 亭子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16. 만취당(晩翠堂)

봉화읍 거촌리(奉化邑 巨村里)에 所在하며 만취 변영순〈晩翠 邊永淳 · 朝鮮 第11代 中宗 18年(1523)~?〉이 사마시(司馬試)에 合格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을 한뒤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잠심(潛心)하였다. 내성현 거수리(乃城縣 巨樹里) 깊숙한 임천(林泉)을 찾아 만취당(晩翠堂)을 建立하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쓰는 한편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으며 懸板만 保存되고 있다.


17. 망선암(望仙巖)

명호면 관창리(明湖面 觀漲里) 초방산에 所在하였으며 농수 금원정〈聾叟 琴元貞 朝鮮 第9代 成宗 3年(1472)~第13代 明宗 12年(1557)〉이 연산(燕山) 7年(1501)에 진사(進士)를 하고 중종(中宗) 10年(1515)에 장사랑 영해훈도(將仕郎 寧海訓導), 中宗 14年 현량(賢良)에 추천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이후 관직에 뜻을 버리고 청량산하(淸凉山下) 초야(草野)에서 망선암(望仙巖)을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고 명현(名賢)들과 교유(交遊)하며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을 토론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佳境空抛葛洞中 좋은 지경을 공연히 갈동가운데 던지니
女論厥直百金同 그 값을 이론컨데 백금과 같으리

三方偃蹇雲根繞 삼방에 은건하니 구름뿌리가 둘렀고
一面平寬眼界通 일면이 편하고 너그러워 안개가 통하구나

古井靜涵明琥珀 옛우물 고요하게 잠겨 구슬이 밝았는데
仙山參列玉芙蓉 신선산이 벌었으니 옥부용이다.

阿誰向此開茅棟 누가 여기 향해 떼집을 열었든고
應有奇觀獨擅雄 응당 기이한 경이있어 홀로웅을 천단했다네


18. 망오당(忘吾堂)

봉화읍 화천리(奉化邑 花川里)에 所在하였으며 망오재 권언신(忘吾齋 權彦臣 · 朝鮮 第14代 宣祖 元年(1568)~第17代 孝宗 3年(1652)〉의 수학지소(修學之所)로 創建하였다. 建物은 約 20年前에 榮豊郡 浮石面 甘谷里로 移建하였다.


19. 문천정(文泉亭)

봉화읍 해저리(奉化邑 海底里)에 所在하였으며 문천 김희소〈文泉 金熙紹 · 朝鮮 第21代 英祖 24年(1748)~第24代 憲宗 2年(1836)〉가 정조(正祖)때 생원(生員)을 한 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곳에 문천정(文泉亭)을 건립하여 학문(學問)에만 정진(精進)하여 당대(當代)의 석학(碩學)으로 문망(文望)이 높았다. 現在 建物은 폐허(廢墟)되고 없다.

深深隱隱臥川曲 깊고 깊은 은은한 내 굽은데 누었으나
何許老翁營築亭 어느 늙은이 경영해 정자를 쌓는고

地秘天亻堅 留古甲 땅의 신비 하늘 갈무림은 옛갑자에 머무르고
岩開石穿屬園丁 바위열고 돌을 뚫음 원정에 부쳤노라

風生碧間囂塵遠 바람은 푸른 간수에 나니 수떨린 티끌먼데
雲在平林醉夢惺 구름이 편한 숲에 있어 취한 꿈을 께우노라

也識化公偏餉我 알거나 화공이 편벽되이 나를 먹여서
一潭秋水萬山靑 한못 가을물에 일만산이 푸르고야 -原韻1-

一川三瀑繞池臺 한내 세폭포가 지대를 둘러서
小洞天晴同地雷 작은 마을 하늘 갠 땅 우뢰가 움직이네

謾村桑麻爲職事 부질없이 상마에 붙여 직업을 삼아서
幸逢泉石任徘徊 다행히 천석을 만나 배회에 맡겼노라

幽軒吐納煙雲濕 유헌은 토하고 드리는 연기 구름에 젖었고
靜室蕭疎卷軸開 고요한 집 소소한데 권축을 열었다네

好是山間淳俗在 좋고나 산간에 순순한 풍속이 있어서
野人持酒過墻來 들사람 술을 가지고 담을 지내 오나니 -原韻2-


20. 물로당(勿老堂)

소천면 남회룡리(小川面 南回龍里)에 所在하였으며 호참(戶參) 김용익(金龍翼)이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1. 반학정(伴鶴亭)

명호면 북곡리(明湖面 北谷里) 청량산동구(淸凉山洞口) 낙동강 동록(洛東江 東麓)에 박성집(朴聖輯)이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2. 벽강정사(碧崗精舍)

춘양면 서벽리 (春陽面 西碧里)에 所在하였으며 벽강 이종진(碧崗 李鍾軫)이 建立한 亭子이다. 現在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3. 수운재(水雲齋)

법전면 소천리에 있었다. 參奉 李鎭裕의 所建이다.


24. 서수정(西水亭)

물야면 가평리 (物野面 佳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서수 권확〈西水 權穫 · 朝鮮 第19代 肅宗 10年(1684)~第21代 英祖 33年(1757)〉이 英祖 11年(1735)에 생원(生員)을 하고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5. 석거정(石居亭)

봉성면 창평리(鳳城面 昌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석거정 이택룡〈石居亭 李澤龍 · 朝鮮 第22代 正祖~?〉이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전념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石居亭 懸板만 忠孝堂에 보관되고 있다.


26. 석류정(石留亭)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왕암중층(旺巖中層)에 所在하였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암 권이번(東巖 權以璠)의 시영 강론지소(詩詠 講論之所)로 建立하였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7. 석문정사(石門精舍)

상운면 구천리(祥雲面 九川里) 석문동(石門洞)에 所在하였으며 야옹 전응방〈野翁 全應房 · 朝鮮 第9代 成宗 22年(1491)~第13代 明宗 9年(1554), 中宗때 進士〉이 학업 강학지소(學業講學之所)로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28. 선암초당(仙巖草堂)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에 所在하였으며 선암 권홍〈仙巖 權霐 · 朝鮮 第16代 仁祖 4年(1626)~第19代 肅宗 25年(1699)〉이 시가풍류(詩歌風流)로 진세(塵世)를 멀리하며 이곳에 草堂을 지어 隱士의 기풍을 지키니 마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았다. 지금도 그 바위를 ?선암바위?(仙巖屛)이라 하며 두응(斗應)의 글씨가 남아 있다.


29. 선오정(仙梧亭)

소천면 서천리(小川面 西川里)에 所在하였으며 선오 구광두(仙梧 具光斗)가 진사(進士)를 하고 이곳에 仙梧亭을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0. 송안정(松顔亭)

소천면(小川面)에 所在하였으나 位置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현감(縣監) 송안 구찬록(松顔 具儹祿)이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1. 송호정(松湖亭)

소천면(小川面)에 所在하였다 하나 정확한 位置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송은 이문규(松隱 李文奎)가 建立하였다고 한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2. 쌍호정(雙湖亭)

춘양면 소로리(春陽面 小魯里) 방전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쌍효 홍도식(雙湖 洪道植)이 建立한 亭子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太白遙臨百里湖 태백이 멀리 백리 호수에 임하고
群山中掛顧吳圖 군산 가운데 고오도를 걸었노라

仙碁巧列運磯石 신선바둑 공교히 벌여 깃돌에 연했으며
匹練橫鋪繞郭途 필베를 빗겨펴서 성길에 둘렀노라

柳綠門前猶有五 버들은 문앞에 푸르러 오히려 다섯이 있고
松高頂上不勝孤 솔정상보다 높아 외로움이기지 못하네

莫將眞境浪傳說 참경을 가져 자랑하게 전해 말하지 잘라
雲月煙霞足自娛 구름, 달, 연기, 나오리 족히 스스로 즐겨 하리

-李師延-


33. 아양루(峨洋樓)

물야면 수식리(物野面 水息里) 석람(石嵐) 동쪽산 아래 所在하였으며 이효린〈李孝麟 · 朝鮮 第13代 明宗 元年(1546)~第15代 光海 14年(1622)〉이 만년(晩年)에 이곳에 아양루(峨洋樓)를 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잠심(潛心)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4. 어풍정(御風亭)

법전면 소천리(法田面 召川里)에 所在하였으며 풍대 홍석범(風臺 洪錫範)이 건립(建立)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며 후학배양(後學培養)에 힘쓰던 곳이다. 現在 亭子는 廢墟되고 없다.


35. 염선정(念先亭)

법전면 소친리(法田面 召川里) 졸천전록(拙川前麓)에 所在하였으며 송와 권중형〈松窩 權重亨 · 朝鮮 第26代 高宗 16年(1879)~1944年〉이 충재 권벌(冲齋權橃)을 비롯한 그의 선조(先祖)들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기 爲하여 建立하였다. 現在 亭子는 廢墟되고 없다.


36. 영봉루(迎鳳樓)

봉성면 봉성리(鳳城面 鳳城里)에 所在하였으며 건립년대(建立年代)와 작자(作者)는 알 수 없으나 객사문루(客舍門樓)로서 관찰사(觀察使)나 경관(京官)이 오면 지방유림(地方儒林)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하던 곳이다. 1908年 소실(燒失)되었다.


37. 외영당(畏影堂)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호평(虎坪)마을 후강(後崗)에 所在하였으며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이 조선조 성종(朝鮮朝 成宗) 17年(1486) 進士를 하고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그의 兄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이 참혹한 변을 당한 후 일체 관직을 바라지 않고 내성현연수봉(乃城縣延壽峯) 밑으로 이사하여 외영당(畏影堂)을 建立하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等 국내유현(國內儒賢)들과 交遊하며 時事를 論議하던 곳이다. 참봉 김명중(參奉 金命仲), 묵재 김영권(黙齋 金永權), 죽헌 김균(竹軒 金筠) 等 영남(嶺南)과 安東地方 사림명현(士林名賢)들과 회동강론(會同講論)하며 사회정화(社會淨化)를 爲한 천성향약(川城鄕約)을 구상하던 곳이라 전한다.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38. 용암정(龍巖亭)

법전면 눌산리 (法田面 訥山里) 하눌(下訥)에 所在하였으며 용암 정남규〈龍巖 鄭南圭 · 朝鮮 第24代 憲宗 8年(1842)~第26代 高宗 30年(1893)〉가 사마시(司馬試)에 合格 진사(進士)를 하고 이곳에 龍巖亭을 建立하여 學業에 精進하던 곳으로 現在 建物은 廢墟되고 없으며 큰 바위에 龍巖亭이라는 陰刻된 글씨와 遺址만 남아있다.


39. 유암정(楡巖亭)

물야면 두문리(物野面 斗文里) 천곡동(泉谷洞)에 所在하였으며 안촌 배응경〈安村 裵應褧 · 朝鮮 第11代 中宗 39年(1544)~第14代 宣祖 35年(1602), 淸道郡守, 順天府使, 羅州牧使, 大邱府使, 禮曹參判追贈〉의 고덕(高德)과 충의(忠義)를 흠모(欽慕)하기 爲하여 유암 배유장〈楡巖 裵幼章 · 朝鮮 第15代 光海 10年(1618)~第19代 肅宗 14年(1688)〉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삼전도(三田渡) 치욕에 분개하여 官職에서 물러나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後學들의 문예진흥(文藝振興)과 지방사림(地方士林)이 회동(會同) 시사공론(時事公論)과 시유(詩遊)를 즐기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0. 이산정(二山亭)

봉성면 동양리(鳳城面 桐陽里) 두동(杜洞)에 所在하였으며 이산 홍석우〈二山 洪奭祐 · 朝鮮 第25代 哲宗 2年(1851)~1927〉가 구한말(舊韓末)에 建立한 亭子로서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1. 이선정(二仙亭)

명호면 북곡리 (明湖面 北谷里)에 所在하였으머 건립년대(建立年代), 작자(作者)는 알 수 없으며 청량산(淸凉山)에서 도학을 닦던 사람들이 建立하였다고 한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2. 이우당(二于堂)

봉화읍 거촌리 (奉化邑 巨村里) 학동(鶴洞)에 所在하며 만초 김택현(晩樵 金澤鉉)의 유덕(遺德)을 영모(永慕)하고 후학(後學)들의 학업면려(學業勉勵)를 爲하여 設置한 書室이다.


43. 이우당(二友堂)

물야면 북지리(物野面 北枝里)에 所在하였으며 매계 정탁〈梅溪 鄭鐸 · 朝鮮 第17代 孝宗 10年(1659)~?〉이 숙종(肅宗) 3年(1677)에 진사(進士)하고 肅宗 25年(1699)에 문과급제(文科及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으나 당의(黨議)가 어지러워 상소환향(上疏還鄕)하여 후학배양(後學培養)과 독학정진(篤學精避)을 爲하여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4. 이유정(二酉亭)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유교약수(酉橋藥水) 부근에 所在하였는데 삼은 김재륜(三隱 金載輪), 석우 김재기(石愚 金載琪), 학산 김준호(鶴山 金峻鎬)의 학행유덕(學行遺德)을 추모(追慕)하기 爲하여 그의 자손(子孫) 국사 김성호〈菊史 金成鎬 · 朝鮮 第26代 高宗 2年(1865)~1946, (中樞院議官)〉, 석아 김진원〈石我 金進源 · 朝鮮 第26代 高宗 9年(1872)~1945, 進士〉, 와은 김극원(臥隱 金克源)이 建立하여 이유정(二酉亭) 삼노당(三老堂)이라 稱하여 왔는데 현재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45. 이화정(梨花亭)

봉화읍 도촌리 (奉化邑 都村里) 사제(沙堤)마을 동산대(東山臺) 아래에 있었다. 첨지(僉知), 이유〈李庾 · 朝鮮 第14代 宣祖때~第16代 仁祖때〉가 책을 벗삼고 자연을 사색(思索)하기 爲해 만년(晩年)에 이곳에 이화정(梨花亭)을 건립(建立)하여 당대의 명사(名士)인 창석 이준(蒼石 李埈),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과 교유(交遊)하였다. 동암 권성오(東巖 權省吾)의 서시(序詩)에 이 亭子를 일컬어 일명 경사정(景謝亭)이라고도 했으니 이는 대개 東山이란 이름이 진(晋)나라 때 사안(謝安)이 살던 데와 같아서이다. 지금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으며 아직도 이 일대를 마을 사람들은 이화정(梨花亭)이라 부르고 있다.


46. 일로당(逸老堂)

춘양면 의양리(春陽面 宜陽里) 운곡(雲谷)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일로당 권두광〈逸老堂 權斗光 · 朝鮮 第17代 孝宗 4年(1653)~第21代 英祖 元年(1725)〉이 후학(後學)들의 학예진흥(學藝振興)을 爲하여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현판만 보관되고 있다.


47. 자연정(自然亭)

물야면 수식리(物野面 水息里) 봉황산 당동(鳳凰山 唐洞)에 所在하였으며 계곡(溪谷)이 깊숙하고 바위가 기이한 곳에 선비 이성유〈李聖兪 · 朝鮮 第16代 仁祖 8年(1630)~第19代 肅宗 42年(1716)〉이 만년(晩年)에 亭子를 建立하였다. 아호도 自然翁이라하여 헤어진 옷에 나물밥으로, 소요자적하며 독학정진(篤學精進)하였다 한다. 그의 당동계암십절(唐洞溪岩十絶)과 제명승수창록(諸名勝酬唱錄)이 있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48. 죽간사(竹間舍)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에 所在하였으며 랑간헌 권모(琅玕軒 權謩)가 창건(創建)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며 현재는 廢墟되고 없다.

容問 主人翁 손이 주인 늙은이를 물어
心知在竹間 마음이 대밭에 있음 알았네

不見齋中人 집가운데 사람보지 못하고
時聞行間語 때로 대사이 말이 들리더라

簫簫竹間舍 소소한 대사이 집은
淸靜更幽深 맑고 고요하고 다시 그윽하고 깊으다.

不與人境絶 사람사는 지경을 끊지 않으나
自然生隱心 자연히 숨는 마음 생기네


49. 청간대(聽潤臺)

상운면 구천리(祥雲面 九川里) 회병곡(回屛谷)에 所在하였으며 청간 전재용〈聽潤 全在鏞 · 朝鮮 第26代 高宗 14年(1877)~1963〉이 회병곡 천연암상(回屛谷 天然巖上)에 청간대(聽潤臺)를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사림(士林)에서 회동(會同) 시영(詩詠)을 즐기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雲屛幾疊待人開 구름 병풍이 몇첩인데 사람오기를 기다려
中有嗚泉一道來 중간에는 우는 폭포 한길 오는대 있었드라

斜掛林端仍作瀑 비낏 수풀끝에 걸었는데 거듭 폭포를 지었고
平鋪巖面自成臺 평하게 펼친 바위에 스스로 대를 이루어

靜聽夜屋琴書冷 고요한 밤집에 거문고와 글서느러운걸 들었고
好護春園花木裁 좋은 봄동산을 보살펴 꽃과 나무를 심었노라

瀬省不爲幽澗愧 세수를 하고 살펴 그윽한 시내에 부끄러움이 되지 아니하니
山靈容我此間廻 산신령이 나를 이사이에 배회하는걸 용납했더라


50. 청휴재(淸休齋)

명호면 도천리(明湖面 刀川里) 갈래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의 孫 청휴재 김양열(淸休齋 金揚烈)이 朝鮮 孝宗 2年(1651)에 生員을 하고 學問에만 專念하여 學德이 높았으며 文集이 있다. 顯宗 9년(1668)에 淸休齋를 建立하여 後學들의 講學之所로 하여 오다가 哲宗 5年(1854)에 建物은 廢墟되고 遺址만 남아있다.


51. 추운각(秋韻閣)

춘양면 서벽리(春陽面 西碧里)에 所在하였으며 송재 이우(松齋 李堣)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爲하여 후손(後孫)이 建立하였으나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52. 춘포재 (春浦齋)

춘양면 의양리(春陽面 宜陽里) 낙천당(樂天堂)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청사 권두기〈晴沙 權斗紀 · 朝鮮 第17代 孝宗 10年(1659)~第20代 景宗 2年(1722)〉가 숙종(肅宗) 13年(168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숙종 22年(1696)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郎)이 되었으나 관직(官職)에 뜻이 없어 향리(鄕里)에 돌아와 숙종(肅宗) 36年(1710)에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였다.


53. 취규정(翠虬亭)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용담 임흘〈龍潭 任屹 · 朝鮮 第13代 明宗 12年(1557)~第15代 光海 12年(1620)〉이 建立한 亭子로서 現在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이곳의 옛지명은 도지본리이다.

斲破千年地 천년묵은 이곳에 터를 닦아서
移來小洞天 옮겨오니 어느듯 내 동네로다

龍頭涵晩翠 푸른 용머리는 더욱 빛나고
鶴頂帶淸煙 붉은 학머리는 맑은 연기속에 보이도다

有興時修? 흥이나서 때때로 찾아올때엔
無心早着鞭 나귀타고 오는것도 잊어버렸네

陶山知不遠 도산이 예서 멀지 않으이
遺躅好相傳 유적은 오래도록 잘 전해지리라.


54. 학소정(鶴巢亭)

봉화읍 적덕리(奉化邑 赤德里)에 所在하였으며 학소 김잠〈鶴巢 金潛 · 朝鮮 第23代 純祖때 出生〉이 건립(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던 곳이라 한다. 현재 건물은 廢墟되고 없다.


55. 학정정사(鶴汀精舍)

봉화읍 해저리(奉化邑 海底里)에 所在하였으며 학정 김추길(鶴汀 金秋 吉 1603~168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建立하였으나 199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56. 해은서당(海隱書堂)

법전면 척곡리(法田面 尺谷里) 양지(陽地)마을에 所在하였으며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 · 朝鮮 第21代 英祖 40年(1764)~第24代 憲宗 14年(1848)〉가 建立하여 이곳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修學)하며 후진배양(後進培養)을 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57. 회산정사(檜山精舍)

물야면 가평리(物野面 佳坪里)에 所在하였으며 회산 성종진〈檜山 成鍾震 · 朝鮮 第23代 純祖 9年(1809)~第26代 高宗 23年(1886)〉이 헌종(憲宗) 1年(1835) 생원(生員)을 하고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던 곳이다. 현재 建物은 廢墟되고 없다.


58. 추원재(追遠齋)

재산면 상리 묘곡에 있었으며 문화재자료 제218호(1989. 5. 29) 지정되었으나 1991. 10.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초에는 及時庵이라는 庵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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