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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일보] 경모정(敬慕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3. 15:36

우리고장문화재 = 경모정(敬慕亭)


2011년 11월 14일(월) 14:07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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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읍 석평리 호평(虎坪:범들)마을 후강(後崗:뒷산등성이) 에 소재하며 조선조 연산군 시대 지방사림의 대표인물이었던 눌재 이홍준이 건립한 외영당이 폐허됨에 그의 후손들이 용재 이종준(李宗準)과 눌재 이홍준(李弘準)형제의 학덕을 영모하기 위해 약 82여년전에 건립한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정자는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어 시멘트담장을 철거하고 토담으로 쌓아야한다고 본다. 정자에는 경모정(敬慕亭)현판이 걸려있고 마루위에는 용재(?齋),눌재(訥齋)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형인 이종준(1454(세조원년) - 1499)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균(仲鈞)이며, 호는 용재(?齋) ·용헌(?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륙거사(藏六居士)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이승직(李繩直), 아버지는 이시민(李時敏),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현감을 지낸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제작했다. 그 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어 가던 도중 단천군(端川郡)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 송(宋)나라의 강릉 사람)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한바 , 연산군은 이종준이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부제학(副提學)이 추증되었다. 안동(安東)의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麓里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용재유고가 있다.

동생 이홍준(李弘準)은 생몰년 미상이며, 자는 군식(君式), 호는 눌재(訥齋)이다. 이홍준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으며,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했다.

연산군의 정사가 위태로움을 보고 지은 시에서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데, 삶이 있으니 죽음도 있는 게지. 생사는 모두 아득한데, 조물주는 시작과 끝이 없구나.”라고 읊었다.

그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형 이종준이 참변을 당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안동부 내성현(奈城縣, 현 봉화군 봉화읍 일대)으로와서 후학들을 지도 양성 하였다.향리에서 가례(家禮)를 준수하고 남전여씨(藍田呂氏)의 유규(遺規)를 바탕으로 내성동약(奈城洞約)를 행하면서 매월 초하루에 회강(會講)하고 후진을 깨우쳐 교화에 노력하여 내성현의 기풍을 크게 바꾸었다.

내성동약의 좌목(座目)에는 서로 준수할 것을 맹세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 내성현을 주도하고 있던 양반 사족들의 향안으로 볼 수도 있다. 이홍준은 은덕(隱德)으로 문장을 만들어 질박함을 감추고 있는 데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중종반정 후 덕행으로 천거되어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652년(효종 3)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제향되었다. 저술로 그의 형 이종준의 시문집과 함께 엮은 《용재눌재양선생유고(?齋訥齋兩先生遺稿)》가 있다.

백록리사(栢麓里社):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송내마을 233번지에 있던 재실로, 교리(校理)이종준(李宗準), 진사(進士) 이홍준(李弘準), 대사간(大司諫) 정유일(鄭惟一), 참봉(參奉) 홍준형(洪俊亨), 관찰사(觀察使) 김성구(金聲久), 현감(縣監) 권두인(權斗寅), 수찬(修撰) 권두경(權斗經),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 등 8현(賢)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사림에서 1774년(영조 50) 설치하였던 것인데, 2007년 송천서원(松川書院), 반천서원(槃泉書院), 백록리사(栢麓里社) 등 3개 서원을 한곳에 통합 복원한 송록서원(봉화읍 해저2리솔안마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장관(書狀官):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부경사행(赴京使行)의 일행인 정사(正使)·부사(副使)·기록관(記錄官) 등의 3사신 중 기록관으로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분담하였다.
서장관은 사행(使行: 사신의행차)중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뒤에는 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동약(洞約) :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자신들 중심의 신분질서와 부세제(賦稅制)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동단위의 자치조직으로,동계(洞契).동의(洞議).동안(洞案)이라고도 한다. 즉, 동계(洞契)의 규약과 계원의 명단을 적은것이 동약(洞約)이다.

동계(洞契)는 족친들의 길흉사 상호부조와 환난상구(患難相求),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부조는 곡물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대상은 부·모·처·자신을 포함한 4상(四喪)이 원칙이다. 만약 부모가 없을 경우에는 처부모가 대상이 되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에 처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동약이란 명칭은 향약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15, 16세기에 나타나고, 현존하는 최고의 동약은 1510년경에 이홍준(李弘準)이 만들어 경북 봉화군 내성면(乃城面)에서 시행한〈내성동약 奈城洞約〉이다.

현재까지 경북북부지역에서 발견된 동계는 안동부의 내성현(奈城縣,현 봉화군) 내성면의 내성동약, 예안면 온계동(溫溪洞)의 온계동계, 예안면 부포동(浮浦洞)의 족계와 동약, 예안면 오천동(烏川洞)의 오천동계, 풍천면 하회동(河回洞)의 하회동계, 와룡면 주촌동(周村洞)의 주촌동계 등이다.<정리= 봉화군문화재지킴이회장 방유수>

봉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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