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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사] 第2節 없어진 亭子 만오재(晩梧齋). 외영당(畏影堂)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4. 15:09

[봉화군사] 第 2節 없어진 亭子


o 만오재(晩梧齋)
소천면 분천리(小川面 汾川里) 가호(佳湖)마을에 소재(所在)하였으며 만오 이상현 〈晩梧 李相鉉․純宗 16年(1816) ~ ?〉 이 낙동강변(洛東江邊) 암벽상(岩壁上) 아름다운 곳에 후학배양(後學培養)을 위하여 건립(建立)한 정자(亭子)이다. 지금은 없다.

o 외영당(畏影堂)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호평(虎坪)마을 후강(後崗)에 소재(所在)하였으며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이 건립(建立)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等 국내유현(國內儒賢)들과 교유(交遊)하며 시사(時事)를 논의(論議)하던 곳이다. 참봉 김명중(參奉 金命仲), 묵재 김영권(黙齋 金永權), 죽헌 김균(竹軒 金筠) 等 사림명현(士林名賢)들과 회동강론(會同講論)하며 천성향약(天城鄕約)을 구상하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은 없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봉화군사 > 第 9篇 文化 · 古蹟 > 第 2節 없어진 亭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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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각금당(覺今堂)
법전면 풍정리(法田面 楓井里)에 所在하였으며 각금당 심장세〈覺今堂 沈長世․朝鮮 宣祖27年(1594)~顯宗 元年(1660)〉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태백산 봉화(太白山 奉化)에 와서 亂을 避하고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태백오현(太白五賢)인 홍우정(洪宇定), 강흡(姜恰), 홍석(洪錫), 정양(鄭瀁)과 함께 절의(節義)를 지키며 교유(交遊)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경암정(耕巖亭)
가구(可丘) 남쪽 냇가에 있었다. 선비 권일경(權一經)이 지었다. 亭子는 바위 위에 있고 못을 파서 둘렀는데, 못에는 연(連)을 심었다. 亭子 둘레에는 송죽(松竹)과 오동을 심어 안개도 시원스러웠다. 눌은 이광정의 기(記)가 있고 강좌(江左) 권만(權萬)의 12景詩가 있다.

o 경체당(景棣堂)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 사제(沙堤)마을에 所在하였으며 계산 이종보 〈溪山 李種補(1846~1918)〉가 建立하여 그의 아우 종헌(種軒), 종철(種轍)과 함께 강학(講學)하고 여기서 늙도록 함께 거처하며 우애(友愛)를 극진히 하여 단란하게 지냈다 한다. 지금은 없다.

o 계산정(桂山亭)
봉화읍 거촌리(奉化邑 巨村里) 외거촌(外巨村)에 所在하며 면와 변태균 〈勉窩 邊台均(1867 ~ ?〉 가 창건(創建)한 서재(書齋)며 一名 면와정(勉窩亭)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없다.

o 고암정사(高巖精舍)
봉성면 원둔리(鳳城面 遠屯里) 고좌암(高佐巖)에 所在하였으며 참의공(參議公) 고암 금은 〈高巖 琴?․中宗 28年(1533 ~ ?〉 이 건립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고 바위와 연못만 남아있다.

o 광림대(廣臨臺)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입구 병풍암상(屛風巖上)에 所在하였으며 호군(護軍) 권상중(權尙中)이 건립(建立)하였으며 후세에 포재 권달준(苞齋 權達準), 권계화(權啓和 字 繼賢, 號 菊圃 成均館博士) 先生이 이곳에 기거수학(起居修學)하여 대성(大成)하였던 곳이라 傳하며 지금은 없다.

o 구방재(求放齋)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용담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용담 임흘〈龍潭 林屹ㆍ明宗 12年(1557) ~ 光海(1620)〉이 建立하여 후학배양(後學培養)에 힘썼다 한다. 지금은 없다.

小築仍佳境 좋은 경치에 작은집 지어 놓으니
宜晴又可陰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언제나 좋구나
蔚藍供活畵 짙은 남색 그림물감 아니리
虛籟響瑤琴 바람 소리는 거문고 소리 같이 울린다.
古義參黃卷 옛 뜻은 책에서 찾아보고
幽期賞素心 그윽히 本性을 기으려 한다.
灑然香一炷 깨끗이 香불피워 놓고서
休問去來今 오고가는 世五事는 묻지 않으리

o 귀후정 (歸厚亭)
법전면 풍정리 곡촌(谷村)에 있었다. 李梁禹 慕所이다.

o 나부정사(羅浮精舍)
명호면 관창리(明湖面 觀漲里) 나분들에 所在하였으며 용담 임흘〈龍潭 任屹ㆍ明宗12年(1557) ~ 光海 12年(1620)〉에 建立하여 소요자적하며 篤學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蓬萊山一㭆 봉래산 아름다운 한 봉우리가
再浮今薄此 물에 떠서 금방 여기 왔구나
自是神仙境 이로부터 신선이 사는 곳 되어
江山如畵裏 강산이 온통 그림 같구나
龍潭散髮人 나같이 못난 산발한 사람이
來棲心獨喜 여기서 살고 보니 홀로 기쁘네
掉譬謝塵器 세상사 시끄러움 떨쳐버리고
從遊赤松子 적송자와 함께 노릴까 한다.

o 낙간정 (樂間亭)
봉성면 창평리(鳳城面 昌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진사(進士) 박승준(朴承俊)이 建立했다 지금은 없다.

o 낙전당(樂全堂)
상운면 문촌리(祥雲面 文村里) 웃기촌에 所在하였으며 농수 금원정 〈聾叟 琴元貞ㆍ成宗 3年(1472) ~ 明宗 12年(1557)〉이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건물은 없고 석축만 남아있다.

o 덕곡서당(德谷書堂)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 사가막곡(砂加幕谷)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ㆍ哲宗 14年(1863) ~ 1934> 이 창건한 서재(書齋)이다. 지금은 없다.

o 덕봉정사(德峯精舍)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망도 덕봉산하(望道 德峯山下)에 所在하였으며 갈천 김희주 〈葛川 金熙周ㆍ英祖 36年(1760) ~ 純祖 30年(1830)〉 가 건립하여 동일양정(東日養正)하며 서일입교(西日立敎)라 하야 제유생(諸儒生)이 찾아와 강학(講學)을 받아온 서재(書齋)이다. 지금은 없다.

o 덕산정(德山亭)
봉화읍 문단리(奉化邑 文丹里) 원구(院邱)마을에 所在하였으며 도천 이인화 〈陶川 李寅和(1864 ~ 1909)〉가 建立하여 퇴계(退溪)의 도학(道學)에 전력하는 한편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지방사림(地方士林)들과 교유(交遊)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고 유지(遣址)만 남았다.

o 류정(柳亭)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 망년 동쪽에 있다. 선비 김수문(金秀文)이 建立한 亭子로서 지금은 없다. 200년 된 버드나무가 볼만하다.

豁若開衿坐柳亭 널리 옷깃을 열고 버들정자에 앉으니
淸風簫灑掃塵情 맑은 바람 소쇄해서 티끌정을 씻어라
良朋日日閒來往 좋은 벗이 날로 한가히 왔다갔다 하니
却恨談餘主客醒 문득 말하는 나머지 주객 깬 것을 한하네
當日風流說柳亭 당일 풍류는 류정을 말해
至今溪水尙含情 지금 시냇물이 오히려 정을 머금었노라
綠陰正合兒孫醉 푸른 그늘 정히 아손 취한데 합하니
爲報黃口莫喚醒 위해 황구에 아뢰 불러 깨우지 말게
周世鵬

님 가신지 언제인데 아직 그 亭子 안개가지 이슬잎이 못내 정겨워
전하기 여섯 대에 옛 모습 그대로 긴긴날 밝은 그늘 졸음 못깨네
학사 김응조

o 만오재(晩梧齋)
소천면 분천리(小川面 汾川里) 가호(佳湖)마을에 所在하였으며 만오 이상현 〈晩梧 李相鉉․純宗 16年(1816) ~ ?〉 이 낙동강변(洛東江邊) 암벽상(岩壁上) 아름다운 곳에 후학배양(後學培養)을 위하여 建立한 亭子이다. 지금은 없다.

o 만취당(晩翠堂)
봉화읍 거촌리(奉化邑 巨材里)에 所在하며 만취 변영순〈晩翠 邊永淳ㆍ中宗 18年(1523) ~ ?〉 이 내성현 거수리(內城縣 巨樹里) 깊숙한 임천(林泉)을 찾아 建立하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쓰는 한편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지금은 없고 懸板만 保存되고 있다.

o 망선암(望仙庵)
명호면 관창리(明湖面 觀漲里) 초방산 초방사 터에 所在하였으며 농수 금원정〈聾叟 琴元貞ㆍ成宗 3年(1472 ~ 1557)〉이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고 명현(名賢)들과 교유(交遊)하며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을 토론하던 곳이다. 1998년경에 철거됐다. 琴元貞의 詩가 있다.

佳境空抱葛洞中 좋은 지경을 공연히 갈동가운데 던지니
如論厥直百金同 그 값을 이론컨데 백금과 같으니
三方偃蹇雲根繞 삼방에 은건하니 구름뿌리가 둘렀고
一面平寬眼界通 일면이 편하고 너그러워 안개가 통하구나
古井淨涵明琥珀 옛우물 고요하게 잠겨 구슬이 밝았는데
仙山森列玉芙蓉 신선산이 벌였으니 옥부용이다
阿誰向此開茅棟 누가 여기 향해 띠집을 열었든고
應有奇觀獨壇雄 응당 기이한 경이있어 흘로 웅을 천단했다네

o망오당(忘吾堂)
봉화읍 화천리(奉化邑 花川里)에 所在하였으며 망오재 권언신〈忘吾齋 權彦臣ㆍ宣祖 元年(1568) ~ 孝宗 3年(1652)〉 의 수학지소(修學之所)로 창건(創建)하였다. 建物은 約20年前에 榮豊郡 浮石面 甘谷里로 移建하였다. 김동진(金東진)이 記하다.

o 매학당(海鶴堂)
문단 사암(沙浩)에 있다 군수 김선(金鍌)이 도강(道講) 松內에 우거할 때 두어칸 초정(草亭)을 孤山 위에 짓고 매학당이라고 이름했는데 중년에 화재로 없어지고 그 증손 행추(行秋)가 여기 사암에 옮겨지었다.

o문천정(文泉亭)
봉화읍 해저리(奉化邑 海底里)에 所在하였으며 문천 김희소〈文泉 金熙紹ㆍ英祖24年(1748) ~ 憲宗 2年(1836)〉가 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당대(當代)의 석학(碩學)으로 문망(文望)이 높았다. 지금은 없다.

深深隱隱臥川曲 깊고 깊은 은은한 내 굽은데 누었구나
何許老翁營築亭 어느 늙은이 경영해 亭子를 쌓는고
地秘天堅留古甲 땅의 신비 하늘 갈무림은 옛 갑자에 머무르고
岩開石穿屬園丁 바위 열고 돌을 뚦음 원정에 부쳤노라
風生碧澗器塵遠 바람은 푸른 간수에 나니 수떨린 띠끌먼데
雲在平林醉夢惺 구름이 편한 숲에 있어 취한 꿈을 깨우노라
也識化公偏餉我 알거나 화공이 편벽되이 나를 먹여서
一潭秋水萬山靑 한못 가을물에 일만산이 푸르고야
-原韻1-

一川三瀑繞池臺 한내 세 폭포가 지대를 둘러서
小洞天晴同地雷 작은 마을 하늘 갠 땅 우레가 움직이네
謾付桑麻爲職事 부질없이 상마에 붙여 직업을 삼아서
幸逢泉石任徘徊 다행히 천석을 만나 배회에 맡겼노라
幽軒吐納煙雲濕 유헌은 토하고 드리는 연기 구름에 젖었고
靜室蕭疎卷軸開 고요한 집 소소한데 권축을 열었다네
好是山間淳俗在 좋고나 산간에 순순한 풍속이 있어서
野人持酒過墻來 들사람 술을 가지고 담을 지내 오나니
-原韻2-

o물로당(勿老室)
소천면 남회룡리(小川面 南回龍里)에 所在하였으며 호참(戶參) 김용익(金龍翼)이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반학정(伴鶴亭)
명호면 북곡리(明湖面 北谷里) 청량산동구(淸凉山洞口) 낙동강 동록(洛東江 東麓)에 박성집(朴聖輯)이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벽강정사(碧崗精舍)
춘양면 북곡리(春陽面 北谷里)에 所在하였으며 벽강 이종진(碧崗 李鐘軫)이 建立한 亭子이다. 지금은 없다.

o 산당(山堂)
용담(龍潭)의 수십 보쯤에 있었다. 동부(洞府)가 깊고 환경이 조용하여 장수(藏修)의 처소로 좋은 곳이다. 처사(處士) 황세후가 세웠다.

o 서수정(棲水亭)
물야면 가평리(物野面 佳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서수 권확〈西水 權穫ㆍ肅宗10年(1684) ~ 英祖33年(1757)〉이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서은정(棲隱亭)
상운면 문촌리(祥雲面 文村里)에 있었다. 진사 금원정(進士 琴元貞) 所構이다.

o 석거정(石居亭)
봉성면 창평리(鳳城面 昌坪里)에 所在하였으며 석거정 이택룡〈石居亭 李澤龍ㆍ正祖 ~ ?〉이 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전념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고 石巨亭 懸板만 忠孝棠에 보관되고 있다.

o 석류정 (石留亭)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왕암중층(旺巖中層)에 所在하였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암 권이번(東巖 權以璠)의 시영 강론지소(講論之所)로 建立하였다. 지금은 없다.

o 석문정사(石門精舍)
상운면 구천리(祥雲面 九川里) 석문동(石門洞)에 所在하였으며 야옹 전응방〈野翁 全應房ㆍ成宗 22年(1491) ~ 明宗9年(1554), 中宗때 進士〉이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지금은 없다.

o 선암초당(仙巖草堂)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에 所在하였으며 선암 권홍〈仙巖 權霐 ㆍ仁祖 4年(1626) ~ 肅宗 25년(1699)〉이 시가풍류(詩歌風流)로 진세(塵世)를 멀리하여 이곳에 草堂을 지어 隱士의 기풍을 지키니 마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았다. 지금도 그 바위를 “선암바위”(仙巖屛)이라 하며 두응(斗應)의 글씨가 남아 있다.

o 선오정(仙梧亨)
소천면 서천리(小川面 西川里)에 所在하였으며 선오 구광두(仙梧 具光斗)가 진사(進士)를 하고 이곳에 仙梧亭을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송안정(松顔亭)
소천면(小川面)에 所在하였으나 位置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현감(縣監) 송안 구찬록(松顔 具儹祿)이 建立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송정(松亭)
송내(松內) 동쪽 고산(孤山) 앞에 있었다. 여울에 임하여 안개가 시원하다. 군수(郡守) 김선(金鍌)이 세웠다. 지금은 없다.

o 송호정(松湖亭)
소천면(小川面)에 所在하였다 하나 정확한 位置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송은 이문규(松隱 李文奎)가 建立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o 수운재(水雲齋)
법전면 소천리에 있었다. 參奉 李鎭裕의 所建이다.

o 쌍호정(雙湖亭)
춘양면 소로리(春陽面 小魯里) 방전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쌍호 홍도식(雙湖 洪道植)이 建立한 亭子이다. 지금은 없다.

太白遙臨百里湖 태백이 멀리 백리 호수에 임하고
群山中掛顧吳圖 군산 가운데 고오도를 걸었노라
仙碁巧列運磯石 신선바둑 공교히 벌여 깃돌에 연했으며
匹練橫鋪繞郭途 필베를 빗겨 펴서 성길에 둘렀노라
柳綠門前猶有五 버들은 문앞에 푸르러 오히려 다섯이 있고
松高頂上不勝孤 솔 정상보다 높아 외로움이기지 못하네
莫將眞境浪傳說 참경을 가져 자랑하게 전해 말하지 말라
雲月煙霞足自娛 구름, 달, 연기, 나오리 족히 스스로 즐겨하리
-李師延-

o 아양루(峨洋樓)
물야면 수식리(物野面 水息里) 석람(石嵐) 동쪽산 아래 所在하였으며 이효린〈李孝麟ㆍ明宗 元年(1546) ~ 光海 14年(1622)〉이 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잠심(潛心)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어풍정(御風亭)
법전면 소천리(法田面 召川里)에 所在하였으며 풍대 홍석범(風臺 洪錫範)이 建立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며 후학배양(後學培養)에 힘쓰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염선정(念先亭)
법전면 소천리(法田面 召川里) 졸천전록(拙川前麓)에 所在하였으며 송와 권중형〈松窩 權重亨(1879) ~ 1944年〉 이 建立하였다. 지금은 없다.

o 영봉루(迎鳳樓)
봉성면 봉성리(鳳城面 鳳城里)에 所在하였으며 영조(英祖) 14年(戊午 1738)에 현감 이광직(縣監 李匡直)이 세웠다. 객사문루(客舍門樓)로서 관찰사(觀察使)나 경관(京官)이 오면 지방유림(地方儒林)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하던 곳이다. 1908年 소실(燒失)되었다.

o 외영당(畏影堂)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호평(虎坪)마을 후강(後崗)에 所在하였으며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이 建立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等 국내유현(國內儒賢)들과 交遊하며 時事를 論議하던 곳이다. 참봉 김명중(參奉 金命仲), 묵재 김영권(黙齋 金永權), 죽헌 김균(竹軒 金筠) 等 사림명현(士林名賢)들과 會同講論하며 천성향약(天城鄕約)을 구상하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은 없다.

o 용암정(龍巖亭)
법전면 눌산리(法田面 訥山里) 하눌(下訥)에 所在하였으며 용암 정남규〈龍巖 鄭南圭ㆍ憲宗 8年 (1842) ~ 高宗 30年(1893)〉가 建立하여 學業에 精進하던 곳으로 지금은 없으며 큰 바위에 龍巖亭이라는 陰刻된 글씨와 遺址만 남아있다.

o 유암정(楡巖亭)
물야면 두문리(物野面 斗文里) 천곡동(泉谷洞)에 所在하였으며 유암 배유장〈楡巖 裵幼章ㆍ光海 10年(1618) ~ 肅宗 14年(1688)〉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전도(三田渡) 치욕에 분개하여 官職에서 물러나 이곳에 亭子를 建立하여 後學들의 문예진흥(文藝振興)과 지방사림(地方士林)이 회동(會同) 시사공론(時事公論)과 시유(詩遊)를 즐기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이산정(二山亭)
봉성면 동양리(鳳城面 桐陽里) 두동(杜洞)에 所在하였으며 이산 홍석우〈二山 洪奭祐ㆍ哲宗 2年(1851) ~ 1927〉 가 구한말(舊韓末)에 建立한 亭子로서 학문(學問)에 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이선정(二仙亭)
명호면 북곡리(明湖面 北谷里)에 所在하였으며 건립 년대(建立年代) 작자(作者)는 알 수 없으며 청량산(淸凉山)에서 도학을 닦던 사람들이 建立하였다고 한다.

o 이우당(二于堂)
봉화읍 거촌리(奉化邑 巨村里) 학동(鶴洞)에 所在하며 만초 김택현(晩樵 金澤鉉)의 유덕(遺德)을 영모(永慕)하고 후학(後學)들의 학업면려(學業勉勵)를 위하여 設置한 書室이다.

o 이우당(二友堂)
물야면 북지리(物野面 北枝里)에 所在하였으며 매계 정탁〈梅溪 鄭鐸ㆍ孝宗 10年(1659) ~ ?〉 이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지금은 없다

o 이유정(二酉亭)
봉화읍 석평리(奉化邑 石坪里) 입석(立石)마을 유교약수(酉橋藥水) 부근에 所在하였는데 국사 김성호〈菊史 金成鎬ㆍ高宗 2年(1865) ~ 1946〉, 석아 김진원〈石我 金進源․高宗 9年(1872) ~ 1945〉, 와은 김극원(臥隱 金克源)이 建立하여 이유정(二酉亭) 삼노당(三老堂)이라 稱하여 왔는데 현재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o 이화정(梨花亭)
봉화읍 도촌리(奉化邑 都村里) 사제(沙堤)마을 동산대(東山臺) 아래에 있었다.
첨지(僉知), 이유(李庾ㆍ宣祖때 ~ 仁祖때)가 건립(建立)하여 당대의 명사(名士)인 창석 이준(蒼石 李埈),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과 교유(交遊)하였다. 동암 권성오(東巖 權省吾)의 서시(序詩)에 이 정자를 일컬어 일명 경사정(景謝亭)이라고도 했으니 이는 대개 東山이란 이름이 진(晋)나라 때 사안(謝安)이 살던 데와 같아서이다. 지금은 유지(遣址)만 남아 있으며 아직도 이 일대를 마을 사람들은 이화정(梨花亭)이라 부르고 있다.

o 인오당(忍五室)
와단면 운곡(臥丹面 雲谷)에 있었다. 권재휘(權載彙)가 세웠다.

o 일로당(逸老堂)
춘양면 의양리(春陽面 宜陽里) 운곡(雲谷)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일로당 권두광〈逸老堂 權斗光ㆍ孝宗 4年(1653) ~ 英祖 元年(1725)〉이 建立한 서재(書齋)이다. 지금은 없고 후손 권주섭이 현판만 보관하고 있다.

重建逸老堂記
吉永上之二十三年丙戌春族侄圭夏重建逸老堂盖述先志也君之先大人公遭古家傾否之運齎恨沒世今是堂之作不但不墜祖烈抑亦肯考之堂者守堂舊在正寢祠廟之間勢偭勢相連古語以爲未安迺梢移數武而前六楹舊架無改前規而但舊材鴈桀木都料之用只恢爲室於南者兩楹其餘盡堂而飾以板扉前廣欞肅肅陰陰雖朱夏盛熱不知i熇今人之力量不及古昔但用拙規爲苟完計虛中而堂室其兩旁宏麗雄偉誠多讓於前而適用堅緻或勝之旣落顧索記于不佞不佞非其人不敢堂爾而但忽篠陳迹有七年舊感余於是堂之作爲得無情且有氣數之感不能自己者也盖自泉祖開山之後吾宗氣數大於宜春試登堂而西望層欄曲檻隱映於灘聲樹影之間者寒水先亭也亭之外一兮地卽春浦故址逃也由堂而南桑麻掩翳烟火櫛比枕小間而茅棟者靜黙舊堂也計一代偉人鉅公文學風流照耀於斗嶺以南而是堂乃東主人之居北海佳寶之會也其江山之勝觴 之樂蒼江兩樑楣之頌至今猶在而吟諷起感己屬過劫前鹿其數之變人事從之固理之然也嗚呼記余在童艸遊嬉日猶見渠渠快宇前臨大野東頭旣而化爲兎葵燕麥之場人事之變遷一至此哉君以十餘年後輩早治太常業以爲無用而謝之居家還從撲實頭做去鳩材据貨述先人未遑之志繼七世貽燕之謨而竟見眼前突一几是可但人謀之誠意必有造物者以回環之數黙佑於其間乎且念宜春吾宗不振亦久而頃年修寒水亭翌年成春浦齋逸老舊堂又作於今東西相望若有待於期會將見溪山間好氣數次第方至與是堂而俱新矣
昭陽 淸和節 門孫 載珽 謹記

중건 일로당기
지금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지 23년 되는 해인 병술년(丙戌年) 봄에 족질(族侄)인 규하(圭夏)가 일로당(逸老堂)을 중건하니 대저 선조의 유지(遺志)를 쫓은 것이다. 군(君)의 선대인공(先大人公)께서는 고가(古家)가 기울고 막히는 운세를 만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이 당(堂)을 지은 일은 선조의 위열(偉烈)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고(先考)의 당(堂)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당(堂)은 예전에 본채와 사당(祠堂) 사이에 있었는데, 면세(偭勢)가 서로 이어진 것은 옛말에도 좋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몇 걸음 옮겨지었다. 앞쪽의 여섯 기둥과 옛 시렁은 이전의 규모를 고치지 않았고, 다만 남쪽의 양 기둥을 넓혀 실(室)을 지었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당(堂)을 다하여서 널빤지와 문짝을 달았다. 앞쪽의 넓은 격자창은 서늘하고 그늘져서 비록 한 여름의 뜨거운 열기에도 더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의 역량이 옛날에 미치지 못함은 다만 졸렬한 규식을 써서 구차스럽게 완성된 계책인양 여기기 때문이다. 가운데를 비워 당(堂)을 짓고 그 양쪽에 실(室)을 지으니 크고 곱고 웅장함은 진실로 예전보다 모자람이 많지만, 적당한 쓰임새와 견고하고 치밀함은 혹 예전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건물이 완성되자 이 못난 사람에게 기문(記文)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나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감히 써 줄 수가 없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파피리를 불던 옛 자취에 70년의 오랜 감회가 서려 있는 이 당(堂)을 지음에 내 어찌 무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운세의 감개를 어찌할 수 없는 데에 있어서랴?
대저 석천공(石泉公)께서 이곳에 집을 지은 이후 우리 집안의 운세는 바람과 비가 고른 봄보다 성했었다. 당(堂)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노라면 겹겹이 굽은 난간이 물소리와 나무 그늘 사이로 어리비치는 곳이 한수정(寒水亭)이다. 한수정 바깥의 한쪽 땅은 춘포(春浦)의 유지(遺址)이다.
당(堂)을 따라 남쪽으로는 모시와 삼으로 가리워지고 활짝 핀 꽃이 즐비하며 작은 시내를 베개 삼을 만한 곳에 띠풀로 이은 집이 있으니 옛 정묵당(靜墨堂)이다. 헤아려 보건대 한 시대의 위인(偉人)과 거공(鉅公)의 문학(文學)과 풍류(風流)가 두령(斗嶺) 이남(以南)에서 빛났으니, 이 당(堂)은 곧 동주인(東主人)이 살던 곳이요 북해(北海)의 가빈(佳賓)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강산의 아름다움과 수창(酬唱)하는 즐거움은 창설공(蒼雪公)과 강좌공(江左公) 두선조의 양미지송(樑楣之頌)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읊으면 감개를 불러일으키건만, 이미 지나간 날의 일이 되고 말았으니 그 운세의 변천에 인간사가 따라감은 진실로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오호라, 내 어릴 적 즐거이 노닐던 날을 기억하건대 널찍하고 탁 트인 집이 앞쪽으로 너른 들판의 동쪽 끝을 향하고 있었건만 이미 토끼가 놀고 풀이 우거진 곳으로 변해 버렸으니 인간사의 변천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군(君)은 나의 10여년 후배이다. 일찍이 ①태상(太常)의 업(業)도 하릴없다고 여겨 사양하더니, 집에 거주하면서는 도리어 박실(樸實)함을 좇아 재화(財貨)를 힘써 모으니, 이것은 선인(先人)이 미처 겨를을 두지 못했던 뜻을 잇고, 칠세(七世)에 이르렀던 계획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눈앞에 한 계책을 보이는 것이야 다만 사람이 도모하는 정성일 뿐이므로, 생각컨대 반드시 조물주(造物主)가 돌고 도는 운세로써 그 사이에 남몰래 도와줌이 있었으리로다. 또한 풍우(風雨)가 고른 봄날 같았던 옛 선조들의 영화를 돌이켜보니 우리 집안이 진작되지 못한 것이 역시 오래되었는데, 몇 년 전에 한수정(寒水亭)을 수리하고 그 이듬해에 춘포재(春浦齋)를 짓고 또 지금 일로당(逸老堂)을 지은바, 동서(東西)로 서로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마치 약속을 기다렸던 듯하다. 장차 이 계곡과 산 사이에 좋은 운세가 바야흐로 차례로 이르러 이 당(堂)과 더불어 모두 새롭게 됨을 볼 것이다.
소양(昭陽) 청화절(淸和節) 문손(門孫) 재정(載珽)이 삼가 쓰다.

〈註〉
① 太常業 : 구경(九卿)의 하나로 종묘(宗廟)의 제사를 맡던 관직

o 자연정(自然亭)
물야면 수식리(物野面 水息里) 봉황산 당동(鳳凰山 唐洞)에 所在하였으며 계곡(溪谷)이 깊숙하고 바위가 기이한 곳에 선비 이성유〈李聖兪ㆍ仁祖 8年(1630) ~ 肅宗42年(1716)〉가 만년(晩年)에 建立하였다. 아호도 自然翁이라하여 헤어진 옷에 나물밥으로 소요자적하며 독학정진(篤學精進)하였다 한다. 지금은 없다.

o 죽간사(竹間舍)
봉화읍 유곡리(奉化邑 酉谷里)에 所在하였으며 랑건헌 권모(琅玕軒 權謩)가 창건(創建)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이며 지금은 없다.

客問主人翁 손이 주인 늙은이를 물어
心知在竹所 마음이 대밭에 있음 알았네
不見齋中人 집 가운데 사람보지 못하고
時聞竹間語 때로 대사이 말이 들리더라
簫簫竹間舍 소소한 대사이 집은
淸靜更幽深 밝고 고요하고 다시 그윽하고 깊으다
不與人境絶 사람사는 지경을 끊지 않으나
自然生隱心 자연히 숨는 마음 생기네

o 청간대(聽澗臺)
상운면 구천리(祥雲面 九川里) 회병곡(回屛谷)에 所在하였으며 청간 전재용〈聽澗 全在鏞(1877 ~ 1963)〉이 회병곡 천연암상(回屛谷 天然巖上)에 建立하여 학문연구(學問硏究)와 사림(士林)에서 회동(會同) 시영(詩詠)을 즐기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雲屛幾疊待人開 구름 병풍이 몇 첩인데 사람오기를 기다려
中有嗚泉一道來 중간에는 우는 폭포 한길 오는대 있었드라
斜掛林端仍作瀑 비낏 수풀 끝에 걸었는데 거듭 폭포를 지었고
平鋪巖面自成臺 평하게 펼친 바위에 스스로 대를 이루어
靜聽夜屋琴書冷 고요한 밤 집에 거문고와 글 서느러운걸 들었고
好護春園花木裁 좋은 봄 동산을 보살펴 꽃과 나무를 심었노라
瀨省不爲幽澗愧 세수하고 살펴 그윽한 시내에 부끄러움이 되지 아니하니
山靈容我此間廻 산신령이 나를 이 사이에 배회하는걸 용납했더라

o 청휴재(淸休齋)
명호면 도천리(明湖面 刀川里) 갈래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의 孫 청휴재 김양열〈淸休齋 金場烈․顯宗 9年(1668)〉이 建立하여 後學들의 講學之所로 하여 오다가 哲宗 5年(1854)에 廢墟되고 遺址만 남아있다.

o 추운각(秋韻閣)
춘양면 서벽리(春陽面 西碧里)에 所在하였으며 송재 이우(宋齋 李堣)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後孫)이 建立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o 추원재(追遠齋)
재산면 상리 묘곡에 있었으며 문화재자료 제218호(1989.5.29)로 지정되었으나 1991.1.10.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초에는 及時庵이라는 庵子였다.

o 춘포재(春浦齋)
춘양면 의양리(春陽面 宜陽里) 낙천당(樂天堂) 마을에 所在하였으며 청사 권두기〈晴沙 權斗紀ㆍ孝宗 10年(1659) ~ 景宗 2年(1722)〉가 建立하여 독학정진(篤學精進)하던 곳이었다.

o 취규정(翠虯亭)
봉화읍 적덕 동쪽에 있다. 낭떠러지 기슭 냇물가에 절벽이 솟아 용의 머리 같은 데 아래에 깊은 못이 있어 용담이라고 이른다. 참봉 임흘(參奉 任屹)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시가 있다.

斲破天年地 천년 묵은 이곳에 터를 닦아서
移來小洞天 옮겨오니 어느덧 내 동네로다
龍頭涵晩琴 푸른 용머리는 더욱 빛나고
鶴頂帶淸煙 붉은 학머리는 밝은 연기 속에 보이도다
有興時修屐 흥이 나서 때때로 찾아올 때엔
無心早着鞭 나귀타고 오는 것도 잊어 버렸네
陶山知不遠 도산이 예서 멀지 않으이
遺躅好相傳 유적은 오래도록 잘 전해지리라

o 침구정(枕龜亭)
골래에 있다. 참봉 이세현(參奉 李世鉉)이 서식했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記하다.

o 태허정 (太虛亭)
道知村 옥봉(玉峰)아래 망년리(忘年里)에 있었다. 權省吾가 세웠다. 창석(蒼石) 이준(李俊)의 題詠이 있다.

o 통승정(統勝亭)
봉화읍 도촌리(都知本里)에 있었다. 활짝 열린 절승이었다. 진사 금시해(進士 琴是諧)가 건립했다. 公의 8영시(八詠詩)가 있으며 동천 박경의 기(記)가 있다.

o 학소정 (鶴巢亭)
봉화읍 적덕리에 所在하였으며 학소 김잠〈鶴巢 金潛〉이 건립(建立)하여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없다.

o 학정정사(鶴汀精舍)
봉화읍 해저리(奉化邑 海底里)에 所在하였으며 학정 김추길(鶴汀 金秋吉 1603 ~ 168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建立하였으나 199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o 해은서당(海隱書堂)
법전면 척곡리(法田面 尺谷里) 양지(陽地)마을에 所在하였으며 해은 강필효〈海隱 姜必孝ㆍ英祖 40年(1764) ~ 憲宗 14年(1848)〉가 建立하였다. 지금은 없다.

o 회산정사(檜山精舍)
물야면 가평리(物野面 佳坪里)에 所在하였으며 회산 성종진〈檜山 成鍾震ㆍ純祖 9年(1809) ~ 高宗 23年(1886)〉이 建立하여 학업정진(學業精進)하던 곳이다. 지금은 없다.

o 환수정(環水亭)
봉화읍 해저리 자라바위 위에 있었으나 유형(柳炯)이 세웠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현판은 송천서당에 보관되어 있다. 이우(李堣)의 記가 있다.

환수정기
내성은 현(縣)이 작고 부(府)에서 멀며 또 영주(榮州)와 봉성(鳳城)사이에 끼었다. 땅은 다하여도 길은 궁벽하여 손님이나 나그네가 일이 긴급하지 않으면 오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부(府)의 관리된 사람들은 도두 응대(應待)는 소용이 없다고 하므로 관우(舘宇)는 땅이 낮고 좁아 원우(院宇)의 더러움과 다름이 없다. 하물며 누대(樓臺)나 정사(亭謝)를 가히 바라겠는가. 구습에 따라 그대로 지내며 거행하지 못하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병으로 여긴지 오래되었다. 봉성(鳳城)의 금군(琴君) 치잠(致啿)은 관리로서 부(府)에서 정치를 능히 잘 도우므로 뽑혔는데 부사(府使) 박후(朴候) 인지(認志)와 더불어 함께 꾀하여 폐단을 제거하고 정치를 새롭게 하고자 하더니 곁으로 작은 현(縣)에까지 미치어서 장차 정자를 지어 심부름의 명을 받은 자들을 받들고자 하였다. 현(縣)의 곁 두 물 사이에 땅을 택하여 빼어난 지경을 얻어서 구획을 헤아려 그으니 산은 가깝고 물은 세어 재목이 쉽게 떠내려 왔다.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은 기쁘게 힘써 임무를 편리하게 하였다. 정자는 작으며 제도는 간단하고 번거롭지 않다. 건축함에 갈고 깎고 하는 공은 만 한 달도 걸리지 않았는데 맑고 조용하고 한가한 모습이 이미 생겨나니 정자가 되었더라. 물은 나누어지고 흐름은 사면(四面)을 두룬다. 출렁출렁거리며 졸졸 흐르니 혹 거문고나 피리가 울리는 것 같고 혹 바람과 우뢰가 치는 것 같아 뛰는 물결, 뛰어 흩어지는 물방울이 빈 창문에 어지러이 뿌려진다. 비록 두려운 경치가 사람을 녹이고 장마의 무더위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더라도 마치 얼음을 저장해 놓은 굴에 들어가는 것 같고 눈을 모아 놓은 구멍에 들어간 것 같아 그 서늘함을 감소할 수 없으니 마치 높이 사는 사람(高人)이나 떠나온 신선의 거처 같더라. 만약에 관부(官府)의 장소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다투어 놀랄 것이다. 멀리를 바라봄에 이르러서는 청산이 서북쪽에서 지느러미를 묶고 눈썹을 검게 칠하여 누웠다 일어나니 곧 소백산이요, 산이 나뉘어져 남으로 튀어나와 뭉쳐지고 벗기어 잘라져 척추가 되는 것은 죽령(竹嶺)이고, 구름이 걷히고 안개의 장막이 나타나서 은은히 하늘 끝에서 보이는 것은 학가산(鶴驚山)이다. 용개가 동쪽에서 우뚝 솟고 문수(文殊)산이 북(北)을 누르는데 양 산을 끼고 중간에 웅거한 것은 태백이다.
대개 관동(關東)을 잘라서 남으로 달려 동남쪽 두 도(道)의 요충에 당하여 진(鎭)이 된 것이다. 관동의 경치는 동방에서 이름이 있는데 이 산이 그 정맥(正脈)을 바로 나눈다. 정자의 물은 여기에서 발원하니 정자를 둘러서 경치가 되는 것이다 그 맑고 기묘함과 빼어나게 아름다움은 동방에서 양보함이 없으리니 장차 홀로 남쪽에서 이름을 내리라. 살핀진저, 다른 날 손님이나 그 다음분이 오심에 관동의 경치와 같음이 있으니 보지 못한 사람은 한 번 이 정자에 오르면 한발을 발돋움치 않고도 풍악산(楓岳山) 오대(五臺)의 청고(淸高)함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하물며 나는 일찍이 동에서 부절(符節)을 가졌으니 그 이름난 산과 좋은 물을 눈으로 보지 않음이 없어 발로 지났는데 지금 한 번 가서 정자에 올라 산수가 관동과 더불어 같은지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전날 관동에 있었을 때의 귀와 눈을 거듭 위로하지 못하고 가서 구경하지 못함을 아파하며 부질없이 누워서 구경하는 흥취만을 더 일으키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도다. 아, 산수의 경치를 미루어서 정자의 좋음을 알고 정자의 좋음을 미루어서 박(朴)과 금(琴) 두 후(候)의 정치를 알겠다. 이미 이로써 앞에 내가 관동의 산수를 그리워하는 회포를 겸하여 붙여 정자의 기(記)를 삼는다.
황명(皇明) 갑술년 절충무위호군(折衝武衛護君) 이우(李遇)가 쓰노라.

이 우(李 遇)의 시
여태껏 산수는 관동(關東)만 말했더니
태백(太白)산은 남으로 이어 지세(地勢)는 다하였네.
가운데 외로운 성(城)있어 눈앞에 다다르고
개인 물결 푸른 봉우리 네 면은 비었구나
사람 세상에서 무더위에 예복을 갖춰 입는 벼슬길은 궁한데
더위 먹고 정자에 오르느라 뜨거운 가슴 헐떡인다
양 언덕 서늘하여 낮잠을 낳는데
바스락 바람불어 치마에 한 떠돌이 쑥이 차였구나

권 시(權 偲)의 시
정자 열어 땅 얻으니 두 시내 끼고
삽상한 기운 가을은 더한데 홀(笏)을 지탱하여 서쪽을 향한다.
지극히 한하노니 깊고 그윽하여 먼 손님 없음이라
물고기 통발에 물 떨어지고 해오라비 가지런히 나르는구나.
사년이나 잠기고 얽히어 뼈는 반으로 마르니
거울 속의 백발 보고 놀라서 묻는다.
어떻게 하여 취해서 가을 정자 물가에 기대어
한결같이 흐르는 물 향하여 병든 가슴 소생시킬까.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봉화군사 > 第 9篇 文化 · 古蹟 > 第 2節 없어진 亭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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