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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사] 第1節 文科 이종준(李宗準), 금의(琴椅), 정유일(郵惟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3. 16:35

[봉화군사] 第 3 章 人 物


第 1節 文 科

이종준(李宗準) ?~l499
字는 중균(仲均), 호는 용재(傭齋), 본관은 경주, 진사 시민(時敏)의 아들이다. 성종 8년(1477)에 진사하고, 1485년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이조정랑이 되었다.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일본사신이 공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천하의 보물을 얻었다고 하였다. 舍人으로 승진하여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고 수찬에 올랐으며 서장관으로 연경(現 北京)에 다녀왔다. 의성현감으로 재직시에는 봉급을 털어 교학 진흥에 이바지하고 경상도 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민들은 그를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권오복, 박한주, 남효온 등과 도의로 사귀었는데 연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모진 국문을 받고도 신색이 변하지 않았다.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던 중 단천 마곡역에 이르러 이사중(李師中)의 시구를 벽에 써 붙였더니 감사 이승건이 공이 왕을 원망한다고 일러바쳐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운명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수양산이 멀거니 내 묻힐 땅이 어디랴.” 하니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중종 1년(1506)에 관직이 복구되고 숙종 때 홍문관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경광서원(號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와 주강정사(周岡精舍)에 배향되고 저서로는 용재집(傭齋集)이 전한다.

금의(琴椅) 1489~l552
字는 중재(仲材), 호는 해재(海材), 본관은 봉화로 영렬공의 후예이다. 중종 4년에 진사를 하고 14년(1519)에 문과에 급제, 교관 등 내직을 거쳐 통훈대부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지원해서 외직 5군을 역임하였다. 관직 40년 동안 몇 차례의 사화가 있어 모두 사기가 죽어 있었으나 공은 사필(史筆)을 바르게 썼다. 한림학사로 재직 중 주례요초일질(周禮要抄一秩)을 초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정조 때 왕에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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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

정유일(郵惟一) 1533~l576
字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 본관은 동래로 군자감정을 지낸 목번(穆蕃)의 아들이요 눌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한번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알았다. 나이들면서 권충재에게 배우다가 이퇴계 문하에 나아가 수학한 뒤 1552년에 사마시를 거쳐 명종 13년(1558)에 문과에 급제 이조좌랑, 직제학, 좌우승지와 형조, 예소, 공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대사간에 승진하였다. 문집 4권이 있고 「백록이사」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한중필록(閒中筆錄), 관동록(關東錄), 송조명신록(宋朝名臣錄) 등 저서가 있으나 왜란 때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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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外孫)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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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의(琴 儀) l153~l230
자는 절지(節之) 시호는 영렬(茶烈) 본관은 奉化로 太師三韓功臣 용식(容式)의 6세손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도량이 크며 성품이 강직하여 청도감무(淸道監務)로 있을 때 철상공(鐵柏公)이라 불렀다. 고려 명종 14년(1184)에 장원급제하여 주부당후관, 합문지후, 상서이부원외항 등을 거쳐 병부시랑 한림시강학사 동궁시강학사를 역임하고 시관을 맡아 인재들을 선발하고 60세가 되던 해 강종 1년(1212)에 金나라 사신이 정문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아 사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왕은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히 여겨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한림원학사 승지(銀靑光祿大富大夫 簽書樞密院事政唐 左散騎常待翰林院學士承旨)에 임명하고 1215년에 종1품관인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좌목야 보문각태학사수국사(金紫光祿大夫(종1품관), 政堂文學左僕射, 寶文閣太學士修國吏)가 되고 고종 4년(1217)에는 재상의 품계에 올라 문하시랑수문전태학사(門下侍郎修文殿太學士)가 되었다. 일찍이 팔관회에서 대리(臺吏)가 臺正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하니 장군들이 돌을 던져 연회석과 재상들이 있는 천막까지 스치자 공이 뜰에 내려가 크게 꾸짖어 그치게 하였다.
외직에 나가서는 민폐를 없애고 시관을 3번이나 하여서 당대의 명사들을 뽑았다. 1220년에는「벽상삼한대광수태보문하시랑(璧上三韓大匡守太保門下侍郎)」동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同中書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렀다. 벼슬을 그만둘 때는 벽산공신(壁上功臣)을 가자(加資)했다. 퇴직한 뒤에는 기로회를 조직하여 바둑과 詩와 거문고를 즐기면서 유연자적하였다. 78세에 세상을 마치니 국왕은 매우 슬퍼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고 「영렬(英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가 뽑은 선비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로서 세칭 금학사의 옥순문생(玉筍門生)이라 하였다. 고려가사 ‘한림별곡’에 있는 琴學士는 公을 칭한 것이다. 문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금 훈(琴 薰)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왕 8년(1267) 3월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제주초유사로 있다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원종 15년(1274)에는 경상도 안찰사(安察使)를 역임하였다.

금 숙(琴 淑)
본관은 봉화로 丈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충선왕 5년(1313)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정운정(鄭云敬) 1305~l366
본관은 봉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상주사록 전교 교감들을 역임한 뒤에 지밀성사(知密城事)로서 재상 조영휘(趙永暉)로부터 밀성(密域)사람들에게 대여했던 布의 징수를 위임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 뒤에 복주판관(福州判官)으로 전임되어 송사를 잘 다스렸으므로 명성이 높았으며 충목왕(忠穆王) 때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양광도(楊廣適) 교주도(交州道)의 안렴사(安廉使) 전법총랑(典法攄郎 : 재정을 맡고 호세를 담당하면 부서의 차관)을 거쳐 공민왕 때 전주목사 병부시랑(현 국방부 차관)으로서 강릉도, 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가 되고 형부상서(形部尙書)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가 고향에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봉화 문촌에 있는 문계서원과 文川 慕賢祠에 제향되었으며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 부른다.

정도전(鄭道傳) ?~l398
자는 宗之, 호는 三峯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형부상서 云敬의 아들이다. 재주와 智謀가 매우 뛰어났으며 총명이 절륜했다. 목은 이색(李穡)문하에서 수학하고 공민왕 11년(1362)에 문과에 급제하여 忠州司錄을 거쳐 1370년 성균박사가 되었다. 그 후 태학박사 예조정랑 겸 태학박사가 되어 관리 뽑는 일을 관장하였다. 우왕 때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 나주로 유배되어 2년 뒤 풀려나와 三角山 아래 움막을 짓고 선비들을 모아 경학을 가르치다가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의 참모가 되었고 이듬해 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에 승진하고 1388년 위화도(威化島)회군을 계기로 신진세력이 집권하자 이성계의 우익으로 知貢擧 知申事로 있다가 趙浚의 전제개혁을 단행토록 건의하고 척불(斥佛)을 주장하여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개국의 정지작업을 다져나갔다. 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앞장서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봉화백충의군(奉花泊忠義君)에 봉작되었다.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하자 우군도총제(右軍都總制)가 되고 한때 구세력이 득세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정몽주의 탄핵으로 甫州(예천) 옥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암살된 후 복작되고 배극렴,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한 공으로 개국 1등공신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한양 천도와 함께 축성, 궁궐 건축, 궁궐과 8대 문의 이름도 짓고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훈련, 군량미 비축 등 준비를 하였다. 영의정에 올랐으며 각종 법전도 편찬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되었다. 三峯은 유가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법률, 군사, 외교 등 각 방면에 뛰어난 경략가로서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 그는 눌지가, 정동방곡(靖東方曲), 文德曲, 新都歌 등 시가는 물론 경제육전, 경제문감, 심기이편불(心氣理篇佛)소법서 금남잡제(錦南雜題)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三峯文集을 제외하고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이 억(李鎲) 고려 말~조선 초
字는 신지(信之)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판증추원사(종2품) 思誠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친 뒤 장군으로서 변방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에는 강계원수로서 선봉장으로 요동에 쳐들어가 명군을 격파하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친히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렸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자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군이 요동을 공락하려는데 이성계는 四不可論을 제창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실권을 잡았다. 조선의 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공에게 도평의사사 겸 의흥친군 위동 절제사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小白山 및 순흥 땅에 이거하였다. 태조는 중히 쓰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사절하니 특별히 교지를 내렸는데 “내 휘하에서 어렵고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도와 나의 오늘이 있음이 바로 그대 공이 아님이 없으니 원종공신 1등에 봉하고 논밭과 종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은 내 어찌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왕의 공물을 받겠는가 하고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이 일대 각 고을에서 보내온 곡물이 해마다 쌓이고 쌓여서 큰 노적가리가 여기저기 아홉 무더기가 되어 여기를 일친 공세구구리(貢稅九丘里)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공의 관직은 고려 말 공양왕 때(1390년경) 밀직부사(密直副値)였다. 봉화읍 도촌리 사제마을에 그를 모신 별묘(別廟)가 있다.

송 문(宋 文)
고려조에 급제하여 조선개국 후 공이 있어 자헌대부(資憲大夫 : 정이품)호조판서가 되고 덕성(德成君)에 봉해 졌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금극해(琴克諧)
본관은 봉화로서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다. 우왕 11년(1383)에 문과급제 담양군사(潭陽郡事)를 지냈다.

정도복(郵道復) ?~1435
자는 來之, 호는 逸峯으로 三峯의 아우이다. 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좌윤 성균관 대사성을 겸했다. 양촌 權近과 형 三峯이 저술한 心氣理三篇에 주해를 하니 학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嘉善大夫 判尹에 승진 大司成을 겸임하고 태묘공신(太廟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형이 화를 당하자 물러나 향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영주이산(榮州 伊山)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다.

금 유(琴 柔)
호는 청원정(淸遠亨)이며 克諧의 아들이다. 태조 5년(1396)에 문과에 급제, 대사간대사성을 지내고 세종 때 전라감사, 이조판서가 되었다. 남지(南智)와 함께 「영남지리지」를 만들었으며 4고을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송 구(宋 璆)
문과에 급제하여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냈다.

송 계(宋 啓) 1373~1462
호는 동강(東岡),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공민왕 22년(1373)에 생원하고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문과급제, 조봉대부, 사헌부장령, 군기사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고 明에 사신도 다녀왔다. 단종이 물러나자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데리고 남하하여 화천리에 우거하여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그곳을 부정탄(副正灘)이라 한다.

송인창(宋仁昌) 1403~l479
호는 구암(龜岩), 본관은 여산으로 啓의 아들이다. 세종 14년(1432)에 문과 급제하여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 사헌부의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낙향하였다. 그가 놀았던 곳을 「집의대」라고 한다.

송원창(宋元昌) 1426~l496
호는 잠암(潛岩), 본관은 여산으로 仁昌의 아우이다. 생원을 거쳐 조선 문종 원년(1451)에 문과에 급제, 通訓大未 刑曹正郎에 올랐다. 거창(居昌) 의성(義城) 고을을 다스릴 때 깨끗한 정치를 하였으며 녹봉을 털어 향서당(鄕書堂)을 짓는 역사(役事)를 도왔다.

김극행(金克行) 1416~?
자는 振五, 호는 옥봉(玉峯), 본관은 英陽으로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박사에 이르렀다. 成任 韓繼禧와 함께 청백리에 뽑혔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생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정문형(鄭文炯) 1427~l501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야수(野叟)이며 시호는 양경(良敬)으로 三峯 道傳의 증손이다. 세종 29년(144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감찰을 거쳐 단종 원년(1453)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에 예조정랑 사인(舍人)을 거쳐 1464년 한성부윤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왔다. 이듬해 晋州에 거주하던 소훈(昭訓 : 내명부종 5품) 尹氏의 모친 병을 보살피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1466년 함길도 절도사. 다음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성종 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한 뒤 우찬성을 거쳐 연산 2년(1496) 우의정에 오르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다시 영 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금 휘(琴 徽) 1435~l495
자는 자헌(子獻) 호는 文谷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英烈公의 후손이며 思津縣監을 지낸 회(淮)의 아들이다. 조선세조 7년(1462)에 무과에 합격하고 동 11년(1466)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무겸전하였다. 공은 임금과 시를 주고받은 연회석에서 술에 취하여 문루에 누우니 왕이 홍의로 덮어 주도록 명하였다. 내적을 거쳐 경산현감으로 재직시 사우계(四友鍥)를 조직하여 운영한 계첩이 전하며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서 金宗直, 李三灘, 徐四佳 등과 친하게 지낼 때 지은 시편과 文谷集이 전하고, 문제서원에 제향되었다.

금이영(琴以詠)
본관은 봉화로 이조판서 柔의 둘째아들이다. 세종 29년(1447)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院)에 들어갔고 문종 때(1452) 侍敎 성종 2년(1471)에는 승문원 교리를 역임하고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금 곤(琴 崑)
본관은 봉화, 관찰사 淑의 아들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금 숭(琴 嵩)
본관은 봉화, 영렬공의 후예로 관찰사 淑의 둘째아들이다. 1447년에 생원하고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현감과 大同諫을 지냈다.

유승조(柳崇祖) 1452~l512
자는 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이며 본관은 전주로 之成의 아들이다. 세조 때 진사(進士)를 하고 성종 20년(1489) 문과급제, 검열 봉교(奉敎) 정언을 거쳐 연산 7년(1501)에는 부교리로서 공안상정청(貢案詳定廳)의 낭청이 되고 그 후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원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판결사가 되었다. 그 후에 공조참의 겸 경연참찬관을 거쳐 大司成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공은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선구자로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는 동안 성리학에 전념하여 대학강목잠(犬學綱目箴),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와 우리나라 최초로 경서를 우리말로 해석하였고 眞一齋文集을 남겼다. 그의 학풍은 조광조(趙光祖), 金安國, 金正國, 金麟厚, 김식(金湜), 李珥 등 기호학파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세상을 떠나자 中宗임금은 애석하게 여겨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다시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이종준(李宗準) ?~l498
字는 중균(仲均), 호는 용재(傭齋), 본관은 경주, 진사 시민(時敏)의 아들이다. 성종 8년(1477)에 진사하고, 1485년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이조정랑이 되었다.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일본사신이 공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천하의 보물을 얻었다고 하였다. 舍人으로 승진하여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고 수찬에 올랐으며 서장관으로 연경(現 北京)에 다녀왔다. 의성현감으로 재직시에는 봉급을 털어 교학 진흥에 이바지하고 경상도 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민들은 그를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권오복, 박한주, 남효온 등과 도의로 사귀었는데 연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모진 국문을 받고도 신색이 변하지 않았다.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던 중 단천 마곡역에 이르러 李師中의 시구를 벽에 써 붙였더니 감사 이승건이 공이 왕을 원망한다고 일러바쳐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운명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수양산이 멀거니 내 묻힐 땅이 어디랴.” 하니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중종 1년(1506)에 관직이 복구되고 숙종 때 홍문관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경광서원(號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와 주강정사(周岡精舍)에 배향되고 저서로는 용재집(傭齋集)이 전한다.

권 벌(權 橃) 1478~l548
字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 시호는 충정공(忠定公), 본관은 안동으로 성균생원 사빈(士彬)의 둘째아들이다.
연산 2년(148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都承旨, 예조참판 겸 동중추부사가 되었다. 당시 사림파와 훈구파의 반목이 심하자, 양자간을 조정하려다가 잘 안 되어 삼척부사로 나왔다가 42세 되던 해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닭실에 터를 잡아 15년간 은거했다. 다시 부름을 받아 밀양부사, 한성좌윤을 거쳐 1538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형조와병조의참판, 한성판윤을 지냈다.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오위도충부의 도총관,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여 원상(院相)이 되었다.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억울한 선비들을 구하려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평안도 삭주(朔州)에 유배되어 71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간신 정막개, 이극돈, 유자광을 논죄하였으며, 소릉(단종 모후)의 복위와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여러 차례 주청하였다. 선조 1년에는 좌의정, 24년(1591)에는 영의정에 증직되고 종계변무의 공로로 광국공신에 추서되었다. 삼계서원에 배향되고 충재집을 남겼다.
유물로는 충재일기 6책(보물 제252호), 근사록 4권, 그 밖에 전직류, 고문서, 유묵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총재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 기(琴 椅) 1489~l552
字는 중재(仲材), 호는 海材, 본관은 봉화로 영렬공의 후예이다. 중종 4년에 진사를 하고 14년(1519)에 문과에 급제, 교관 등 내직을 거쳐 통훈대부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지원해서 외직 5군을 역임하였다. 관직 40년 동안 몇 차례의 사화가 있어 모두 사기가 죽어 있었으나 공은 사필(史筆)을 바르게 썼다. 한림학사로 재직 중 주례요초일질(周禮要抄一秩)을 초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정조 때 왕에게 올렸다.

박승간(朴承侃) 1508~?
字는 子悅, 호는 忍庵, 본관은 潘南으로서 퇴계 李滉의 문인으로 중종 26년(153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 첨정을 거쳐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냈다. 1543년 承任과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서 글을 읽고 돌아온 뒤 개형현감, 밀양부사를 역임하고 명종 24년(1551) 강릉부사,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었으며 경상도 점마어사(點馬御史)를 지냈다. 그는 중년 이후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서 봉성에 은퇴하여 유유자적하였다. 그와 소고(嘯皐)를 가리켜 금곤옥수(金昆玉秀)라 일컬었다. 유고 1권이 전한다.

김정준 (金廷準)
字는 평보(平甫)요 본관은 安東으로서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증손이다. 조선 중종 35년(1540)에 문과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다.

박 전(朴 全) 1514~l558
字는 면부(勉夫),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무안이다.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及第), 戶曺 正郎으로 있을 때에 大王大妃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지나치게 불사를 숭상, 폐단이 있자 상소를 올려 옳지 못함을 밝혔다. 학덕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구병가(九病歌)와 팔애시 (八哀詩)를 지었다.

김우굉(金宇宏) 1524~l590
字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본관은 의성으로 충청도병마절제사(忠淸道兵馬節制使) 문절공(文節公) 七峯 희삼(希參)의 둘째아들이다. 퇴계 李滉, 남명 조식(曹植)의 문인으로 1552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명종 21년(1566)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삼사, 사인, 대사간을 거쳐 대사성과 관찰사를 역임한 뒤 부제학에 이르렀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요승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20회나 상소하였다. 尙州의 涑水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재암집(開巖集)」이 전한다. 또한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우세신(禹世臣)
호는 三山, 본관은 단양으로 재질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 7년(1552)에 문과에 급제하여 正言 佐郎을 거쳐 판관을 역임하였다.

정유일(郵惟一) 1533~l576
字는 子中, 호는 文봉, 본관은 동래로 군자감정을 지낸 목번(穆蕃)의 아들이요 눌래 李弘準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한번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알았다. 나이들면서 권충재에게 배우다가 이퇴계 문하에 나아가 수학한 뒤 1552년에 사마시를 거쳐 명종 13년(1558)에 문과에 급제 이조좌랑, 직제학, 좌우승지와 형조, 예소, 공조의 참의를 역임한 뒤 대사간에 승진하였다. 문집 4권이 있고 「백록이사」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한중필록(閒中筆錄), 관동록(關東錄), 송조명신록(宋朝名臣錄) 등 저서가 있으나 왜란 때 소실되었다.

배삼익(裵三益) 1533~l588
字는 汝友요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며 본관은 흥해로서 증 병조참판 天錫의 아들이다. 명종 13년(1558)에 진사가 되고 19년(1564)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 좌랑, 正郎, 正言을 거쳐 풍기군수, 양양(襄陽)부사, 홍문관교리, 좌승지, 대사성 등을 거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을 두 번이나 하여 종계이정초본(宗系釐正草本)을 받아왔으며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떠나니 선조임금이 영구를 잘 호송하라고 명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公은 명필(名筆)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저서로는 「임연재집」6권 3책이 전한다.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신도비명을 짓고 유품으로는 명나라 神宗皇帝로부터 받은 상홀(象笏), 옥적(玉笛), 앵무잔(鸚鵡盃), 일산(日傘), 교자(轎子)와 선조임금의 내사품인 책자 여러 권과 유묵 약간이 있다. 특히 사인교자(四人轎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권사공(權士恭) 1535~l618
字는 子安, 호는 성암(醒庵),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39년(1606)에 증광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병조와 호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광해군의 폐모론을 반대 상소하다가 평안도 창성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 후에 예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홍사제(洪思濟) 1539~?
자는 제경(濟卿), 호는 승제(承濟), 본관은 남양으로 좌의정 休休棠 應의 후예이고 충재의 외손이다.
선조 10년(158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弘文正字를 하였으며 필법이 뛰어났다.

김 늑(金 玏) 1540~1616
字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본관은 선성(禮安)으로서 문절공 김담(金淡)의 현손으로 현 봉화읍 문단 1리 사암에서 태어나 생원하고 선조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홍문관 사헌부의 요직을 거쳐 영월군수 안동부사시 선정을 베풀었고 이조참의에 승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안집사로 수령 백성들을 안도시켜 초모문(招募文)을 충의로 지어 격문으로 하였더니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그 후 경상우도 관찰사, 이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이 되었다. 광해 2년 대북영수 정인홍의 약정을 반대하고 5현 문묘 종향에 적극성을 띠어 이루었다. 광해 4년 김직재(金燾載)의 무옥사건에 연루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나 이항복, 이덕형 등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대학연의(大學衍義) 20권과 시초(蓍草), 예판(禮板) 등을 받았으며 영월군수 때 단종 능을 수축한 업적으로 선무훈에 녹권되었다. 임란후원종공신이 되었고 시호는 민절이며 저서로는 백암집이 전한다.

홍세공(洪世恭) 1541~l598
字는 仲安, 호는 봉계(鳳溪), 본관은 남양, 시호는 충헌(忠憲)으로 군수를 지俌의 아들이다. 명종 22년(1567)에 생원이 되고 선조 6년(1573)에 문과에 급제 현감, 부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전주부윤에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부윤을 겸했다. 1594년 평안도조경사(平安道調慶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다가 재임 중에 순직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追封되었다.
저서로 봉계일고(鳳溪逸稿)가 있다.

강덕서(姜德瑞)
본관은 진주, 사마시를 거쳐 선조 19년(1586)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참봉과 응교를 역임하였다.

배응경(裵應褧) 1544~l602
자는 회보(誨甫), 호는 安村, 본관은 성주로 茂元의 아들이다. 朴承任의 문인으로 선조 6년에 진사하고 9년(1579)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 교리를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 중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595년에 順天府使가 되고 정유재란 때 나주목사로서 이순신과 함께 후퇴하는 적의 길을 막으려 했으나 관찰사 황신의 무고로 도리어 투옥되었다. 1601년 대구부사를 지낸 뒤 은퇴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고, 예조참판에 추증, 安村集이 전한다. 왜란시 괴목(槐木) 한 그루를 斗月에 심어 조정에 경사나 난이 발생하면 큰 북을 걸어놓고 궁성을 향해 두들겨 후세인이 이를 忠義林이라 하였다.

김개국(金蓋國) 1548~l603
字는 공제(公齋) 또는 공징(公澄)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 또는 양진재(養眞齋), 노봉(蘆峰)이며 본관은 연안으로서 夢得의 아들이다. 司馬進士하고 선조 26년(159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를 지내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공을 세워 원훈공신(凉勳功臣)이 되고 持平, 郡守를 지낸 후 正郎 등 요직을 지냈다. 左承旨에 추증되고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만취집이 전한다.

박선장(朴善長) 1555~l616
字는 여인(汝仁), 호는 水西,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진사 남몽오(南夢鰲)의 문하에 수학하니 남공이 그의 재주를 기특히 여겨 사위를 삼았다.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둘째아들 ?이 급제를 하니 홀로 계신 모친을 위하여 선조 38년(1605) 증광시에 급제하니 모친 선씨의 나이는 88세였다. 예안현감, 경상도도사(廉尙道都事)를 역임했고, 증직으로 승정원도승지, 또다시 이조참판에 가증하였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명나라 군대가 지원 왔는데 정응태(丁應泰)란 사람이 공이 왜적을 끌어들여 모반한다고 본국에 무고하자 공은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글로써 변명하였다.
그는 문장 덕행이 당대에 빛나서 십물잠(十勿箴)과 오륜가(五倫歌)를 지어 후세를 교육하였다. 오륜가(五倫歌)는 국문 가사로 고산 尹善道의 五友歌보다 30여 년 앞섰으며, 구만서원(龜彎書院)에 배향하고 있으며 수서문집이 전한다. 고종 을유년(1885)에 이조판서에 다시 증직되었다.

금 업(琴 ?) 1557~1638
字는 언신(彦愼) 또는 만수재(晩修齋)며 본관은 봉화로서 현감 난수(蘭秀)의 아들이다. 선조 25년(1592)에 진사하고 34년(1601)에 동생 愷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간, 집의, 지제교, 승지를 거쳐 昌原府使를 하였다. 月川趙穆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망이 높았으며 일고가 전한다.

정사신(鄭士信) 1558~l619
字는 자부(子孚)이고 호는 매창(梅窓)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문인이다. 청량산에서 3년간 수업 후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감찰, 정언 등을 거쳐 왜란 때는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산군수가 되고 광해 원년(1609) 문과 증시을과에 급제 判決事에 이르렀다.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저서에 매창집(梅窓集)이 있으며 학암서원(鶴巖書院)에 배향되었다.

금 개(琴 愷) 1562~l630
字는 彦康이며 호는 망월헌(望月軒), 본관은 봉화로서 僕의 아우다. 선조 24년에 생원하고 동왕 34년(1601)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여주목사를 역임하였다. 月川趙穆의 문인으로 문학이 크게 뛰어났다. 저서로는 望月軒集이 전해 오고 있다.

성안의(成安義) 1562~l629
字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童), 본관은 창녕으로 참봉 훼(績)의 아들이다. 한강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부용당’이라는 호를 받았다. 당시 월천 趙穆, 愚伏 鄭경세와 李蒼石, 鄭桐溪, 全河西 등과 도의로 교제하고 1591년(선조 2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영주 두암촌으로 피난시키고 창녕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 김륵 등을 도왔다. 정유재란에는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결사방어 하였다. 그 뒤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의 명을 받고 후원 온 명나라 군병들의 양식을 원활하게 조달하고 영해, 남원부사, 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李适의 亂)을 당하여서는 왕을 공주까지 호위하고 제주목사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을 증직하고 청백리에 녹선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 물계서원에 배향한다.

김중청(金中淸) 1565~l629
字는 이화(而和), 호는 구전(苟全), 본관은 安東으로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후손이요 성균생원 극례(克禮)의 현손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 때는 문경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광해 2년(1610)에 식년(式年)문과 갑과 제2인자로 합격하여 한성부 참군에 임명되고 사헌부감찰,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예조정랑 겸 지제교(知製敎)로 승진하였다. 1614년에는 천추겸사은사(千秋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 7년(1615)에는 시강원이 文學, 通訓大夫兼弼善을 거쳐 사간원 正言으로서 이원익(李元翼)을 논죄하라는 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물러났다가 고령현감, 신안(성주)현감으로 나왔다. 1619년에 通政大夫에 승진하고 2년 뒤에는 계장동(桂場洞) 九未堂을 세웠는데 九未란 자미차(慈未且), 배미전(配未全), 교미박(交未博), 서미독(書未讀), 학미취(學未就), 도미수(道未修), 거미정(居未定), 사미신(仕未信), 방미지(謗未止)이다. 1622년 승정원 승지로서 선유사가 되어 영남지방을 안찰(按察)하였고 인조반정 후 지제교에 임명되었다가 李适(이괄)난 때 영남의병을 일으켰는데 본향의 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에 산직(散職)에 머물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봉성, 반천서원(盤泉書院)에 배향되었다. 公의 저서로는 苟全文集과 서장관으로 明나라에 다녀올 때 조정에 함께 있던 여러 名賢들이 친필로 쓴 부경별장(赴京別章)이 있으며 환국 시에 공자영정(孔子影幀)을 받아와 영정각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병호면 풍호리 종택에 있다.

박 한(朴 ?) 1576~l652
字는 윤보(潤甫), 號는 悔易堂이다. 본관은 무안으로 水西 善長의 아들이다. 선조 36년(1603)문과에 급제하여 5읍을 역전(歷典)하며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선산부에는 그의 청덕비가 있고 임진록(壬辰錄)에는 원종훈(原從勳)으로 기재되었고, 추원사(追遠祠)에 배향되었다. 풍기군수 재임시 「청탁민폐소」를 올렸다. 문집을 남겼다.

김영조(金榮祖) 1577~1648
字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본관은 풍산으로 현감 대현의 둘째아들이며 鶴奉金誠一의 사위이다. 선조 34년(1601)에 진사가 되고 광해 4년(1612)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올랐으나 대북파의 난정은 그칠 줄 몰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조정이 날로 어지럽자 향리에 돌아와 10년간 은거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관하여 예조, 형조의 정랑이 되었다. 그가 명나라 毛文龍의 문안사로 가도에 다녀왔는데 이때 지은 서정록(西征錄)이 있다. 그 후에 삼사의 벼슬을 역임하고 54세에는 통정대부에 승진 길주목사에 부임하고 1633년 세자책봉주청사로북경에 다녀왔다. 가선대부 한성우윤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고 병자호란 때에는 대사헌이 되어 척화신 처벌이 불가함을 상소하고 병조, 예조의 참관이 되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뒤에 1624년에는 이조참판에 홍문관 제학을 겸임했다.
구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되고 저서로 「망와집」이 있다.

배상익(裵尙益) 1581~1631
字는 익재(益哉), 호는 치암(癡巖), 본관은 성주로 應褧의 아들이다. 寒岡 鄭逑의 문하에서 배우고 광해 8년에 진사 생원하고 성균관에 재학 중 폐전론(廢田論)에 불참하여 배척받았다. 인조 2년(162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원종공훈에 책록되었고 만년에는 향촌에서 독서에 전념하였다. 치암집과 강화일기(江華日記)를 지었다.

금시조(琴是調) 1584~1658
字는 경평(景平)이고 호는 신암(新岩)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광해 4년에 생원하고 인조 2년(1624)에 문과에 합격하여 4개 군의 군수를 역임한 후 봉상시 첨정으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겸직하였다. 광해군의 폐모에 반대 상소하였다. 저서로는 新岩集이 있다.

홍익한(洪翼漢) 1586~1635
처음 휘는 습(霫) 字는 백승(伯昇) 호는 화포(花浦) 또는 운옹(雲翁) 시호는 忠正 본관은 남양으로 진사 以成의 아들로 문단 2리(院邱)에서 태어났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延龜)의 문인으로 광해 7년(1615)에 사마시를 거쳐 인조 2년(1624)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司書를 거쳐 인조 13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굴욕적인 조건을 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그를 죽일 것을 주장했고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을 적극 반대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고자 평양부서윤(平壞府庶尹)으로 나갔으나 끝내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가서 순절(烹刑 斬刑未詳)한 三學士의 한 분이다. 경기도 광주「현절사」, 평택「포의사」, 평양「거산서원」, 부안「동도서원」, 영주「狀巖書院」, 고령「雲川書院」등에 제향되고 출생지인 봉화문단에 충렬신도비와 정충각(旌忠閣)이 있고 저서로는 花浦集, 以行錄, 西從錄이 있으며 효종 4년에 증 도승지, 숙종 12년 증 이조판서 숙종 31년에 領議政에 증직하고 영조 33년에는 부조위(不祧位)가 내렸다.

권성오(權省吾) 1587~1671
字는 子守, 호는 東巖, 본관은 안동. 호신(虎臣)의 아들이다. 광해 4년(1612)에 26세로서 문과에 급제, 권지성균관학유, 박사 전적겸사관직을 경유 강계판관(江界判官) 현감을 거쳐 공조좌랑, 경상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공조, 형조의 正郎, 보령현감을 역임, 通政大夫에 올랐다. 저서로 東巖集과 見聞錄이 전한다.

김응조(金應祖) 1587~1667
字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본관은 풍산으로 忘窩 영조의 아우이다. 어려서 權斗文에게 배우고 17세에 서애 柳成龍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7세 때(16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 공부하다가 인조원년(1623)에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덕현감, 선산도호부사 지평을 거쳐 병자호란 때 仲兄 榮視와 함께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1640년 선산도호부사가 되어 스승 장현광의 사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사직 후 학가산 기슭에 정자를 지어 아호를 鶴沙라 하였다. 1637년(인조 15년) 빈번한 청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재원 염출 방법으로 삼분모작목법(三分耗作木法)을 제안 실시하고 그 후에 필요없게 되자 폐기케 하였다. 밀양도호부사에 부임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폐습을 없앴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다스림은 겨우 5개월이로되 그 은혜는 천 년에 뻗으리라.” 하였다. 公은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工曹參議로 발령되어 부임길에 효종이 승하하자 병을 빙자하여 낙향하였다. 현종 8년(1667)에 嘉善大夫 漢城右尹에 발령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학사집」6권 四禮問院答, 山中錄, 변무록 등이 있다. 勿溪書院, 伊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금상현(琴尙絃) 1587~l663
字는 景五, 호는 반천(磻川), 본관은 봉화로 영렬공의 후예다. 인조 2년(1624)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郎)을 거쳐 통훈대부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역임하였다. 학행과 덕망으로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고 직위와 권세에는 관심 없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권극명(權克明) 1587~?
字는 회보(晦甫), 본관은 안동으로 성암(醒庵) 士恭의 아들이다. 백부인 東江 四溫에게 배워 1610년 생진, 인조 2년(1612)에 문과에 급제, 성균전적을 지냈고 文行으로 당대에 이름났다. 주부금응석(主簿琴應石)의 묘갈명이 전한다.

이진철(李晋哲) 1591 ~
字는 明淑, 호는 쌍계(雙溪),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 13년(1621)에 문과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다.

금충달(琴忠達) 1594~l649
字는 달지(達之), 호는 사계(泗溪), 본관은 봉화로서 인조 2년(1624)에 문과에 급제하며 전라도사(全羅道事) 좌랑(佐郎)을 역임하였다.

여상규(余尙珪) 1595~l664
字는 휘언(輝彦)이고 호는 양졸재(養拙齋)이며 본관은 의령으로서 광해 9년(1617)에 생원,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사랑 교서관정(校書館正), 형조좌랑을 거쳐 朝奉大夫 해미현감(海業縣監)을 지냈다.

성이성(成以性) 1595~1664
字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으로 부용당 安義의 아들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배우고 1616년에 생원을 거쳐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 注書를 시작으로 응교, 지제교, 통정대부 府使에 이르렀다. 正言으로 있을 때 원종(인조의 生父)의 추숭(追崇)을 논하고 인성군 珙의 아들이 모역을 범했을 때 용서하기를 주청하여 죽음을 면케 했다. 嶺湖南御使로 네 번이나 암행하여 권선징악의 본을 모두 시행하였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윤방, 심기원, 이민구 등의 불충함을 탄핵하였고 각 고을 수령으로 재직시에는 청렴 정직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빈번히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김자점(金自點)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숙종 임금께서 두 차례 쌀과 콩을 내렸다.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고 오천(梧川)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계서집(溪西集)이 있다.

김주우(金柱宇) 1598~1644
字는 萬古, 호는 역면재(易眠齋) 본관은 안동으로 苟全의 셋째아들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문하에서 수학하여 15세에 진사하고 인조 2년(1624)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지평을 거쳐서 울진 현감으로 재직 중 별세하였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진주 촉석루의 현판이 공의 글씨다.

박안복(朴安複) 1601~1652
字는 중뢰(仲雷),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무안으로 ?의 아들이다. 인조 2년에 생원하고 동왕 17년(1639) 식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다. 문집이 있으며 四桂堂亭子가 있다.

장준남(張俊南) 1606~?
字는 제경(濟卿), 본관은 仁同, 세훈(世勳)의 아들로 영주군 장수에서 태어났다. 경서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두루 통했으며 인조 27년(1649)에 문과에 급제 正字, 주부, 지평, 正言을 거쳐 佐郎을 재직 후 외직을 청하여 찰방(察訪)을 하였다. 만년에 봉화 小池로 이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면서 독서하며 山水를 벗삼아 유연자적하였다.

이시암(李時馣) 1611~?
字는 내형(內磬) 호는 만문(晩聞), 본관은 전주로 효종 원년(1650)에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송광심(宋光心) 1614~l668
字는 子野, 호는 수봉(秀峰), 본관은 야성(冶城)으로 진사 상헌(尙憲)의 아들이다. 163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 24년(1646)에 문과에 급제, 병조정랑을 지냈다. 부친이 손수 쓴 주자훈몽칠조(朱子訓蒙七條)를 항상 경독했으며 성리강요(性理講要)를 저술하였다. 창계사(晶溪祠)에 배항되었다.

유정립(柳貞立) 1616~?
字는 공륜(公輪)이고 호는 경은(耕隱)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인조 24년(1646)에 문과에 급제, 현감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유고가 있다.

송광정(宋光井) 1617~1686
字는 경지(經之), 호는 용암(龍岩), 본관은 야성으로 광심의 아우이다. 형과 함께 선우당 李蒔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현종 11년(1670)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 정언 등을 거쳐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유고가 있고 창계사에 배향되었다.

유경립(柳經立) 1622~?
字는 문수(文叟), 호는 일원(逸園), 본관은 전주로서 貞立의 아우이다. 효종 5년(1654)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류영립(柳英立) 1622~?
字는 이수(爾叟), 호는 삼객당(三客堂), 본관은 전주로 경립의 아우이다. 현종 4년(1663)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송광벽(宋光壁) 1628~1701
字는 文星, 호는 응봉(應峯), 본관은 야성으로 光井의 동생이다. 현종 4년(1663)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친제군감십책(親題君鑑十冊)을 하사 받았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려들자 불가함을 상소하다가 낙남하여 공신대(拱晨臺)를 세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북향분향 하였고 일층대를 설립하여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順天府使와 청송부사로 재직시에 흉년이 들자 녹봉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창계사에 제향되었다.

권 주(權 霔) 1627~1677
字는 덕우(德雨), 호는 남계(南溪)로 충재의 玄孫이다. 사마시를 거쳐 숙종 1년(1675)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학유(學諭)를 했다. 注書에 증직되었다.

이 선(李 瑄) 1640~1687
字는 봉언(奉彦)이고 호는 허직재(虛直齋)이며 본관은 전주로 승정원 좌승지 추만(秋巒) 영기(榮基)의 손자이다. 진사가 되어 태학에 들어갔으며 정릉참봉을 지냈다. 숙종 9년(1683)에 문과 급제한 뒤 전적, 은계도(銀溪道) 찰방을 역임하였다. 시문이 있다.

금성규(琴聖奎) 1636~l700
字는 文叔, 호는 易安堂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공(軍威公) 계(啓)의 후예이다.
숙종 3년(1677)에 진사를 하고 동왕 4년에 정시에 급제하여 通訓大夫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필법이 뛰어나 명필로 크게 칭송받았으며 학문과 덕망이 높아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저서에 易安集이 전한다.

김성구(金聲久) 1641~1707
字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 본관은 의성으로 진사 秋吉의 아들이며 開巖우굉(宇宏)의 현손이다. 현종 3년 생원시에 장원하고 동 10년(1669)에 문과에 급제한 뒤 직장, 전적 무안현감을 제수 받은 다음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부승지여주목사 강원도관찰사와 大司成을 두루 거쳤다. 그는 항상 청빈과 진실을 생활의 지표로 삼고 여덟 가지 수칙을 지키며 그것으로 스스로 호를 八吾軒이라 하였다. 그 후 강원도 관찰사의 배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 돌아와 耕吾田, 採吾顚, 釣吾川, 撫吾絃, 守吾玄, 終吾年의 8대 수칙을 실천하였다. 숙종은 다시 호환하여 성금관대사성을 제수하고 청백리로 녹선하였다. 그 뒤 해저에 학록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 八吾軒集과 南遷錄이 전하며 백록리사에 배향되어 오고 있다.

이동표(李東標) 1644~1711
字는 군칙(君則), 호는 난은(懶隱), 본관을 眞城으로 송재(松齋) 우(堣)의 6대 손이다. 숙종 원년(1675)에 진사하고 동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전적, 수찬이 되자 빠른 승진이라고 사양하였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畇)을 세자로 책봉하고 인현왕후를 폐함에 西人 吳斗寅, 朴奉輔, 宋時烈 등이 극진히 간하자 왕은 이들을 역률로 다스리려 하니 공은 좌우의 만류를 무릅쓰고 반대상소를 올리니 그 내용 하나하나가 합당하였으나 숙종은 몹시 노하여 벼락을 내릴 듯하였는데 영의정 權犬運이 어진 선비는 아껴야 한다고 하여 형벌은 면하고 폐출에 그쳤다. 수찬이 되었을 때도 인현왕후의 백부인 閔鼎重의 죄를 청하는 논계에 반대하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양양군수를 거쳐 수찬이 되어 임금을 모시고 단종 릉에 참배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할 것을 건의하여 실천되었다. 집의가 되어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가 방자히 굴자 그 가인을 잡아다가 호되게 족치니 모두가 통쾌히 여겼다. 통정대부 도부승지겸지제교 경연참찬관추추관수찬 광주목사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695년 삼척부사로 가는 길에 산수가 좋은 춘양으로 이사하라고 이르고 임지에 도착하니 흉년이 심해 고장의 터전을 팔아 백성들을 구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저서에 난은집이 전한다.

이징도(李徵道) 1652~?
字는 以時, 호는 武陵 또는 광문옹(廣丈翁), 본관은 우계로서 挑村 수형(秀亨)의 후예이며 부호군을 지낸 聖兪의 아들이다. 숙종 36년(1710)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찰방, 전적, 진강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지역에서 거병하여 무신창의(戊申倡義)를 일으켰다. 당시 순흥지방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활약을 하였다.

권두경(權斗經) 1654~1725
字는 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본관은 안동으로 유(濡)의 맏아들이며 충재의 5대손이다. 숙종 5년(1676)에 사마시에 합격, 학행이 조야에 알려져 1694년 현감에 임명되고, 1710년 문과급제 하였을 때 이기설에 대한 이론이 분분하자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소문(疏文)을 초하니 사단칠정에 대한 분별이 밝고 말이 엄했다. 정언, 지평,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도산서원의 모든 의식절차를 정비하였고 저서로는 문집 18권 9책, 퇴도언행통록(退陶言行通錄), 溪門諸子錄을 저술하였으며 백록이사에 배향되었다.

조덕린(趙德鄰) 1658~1739
字는 宅仁, 호는 玉川, 본관은 한양으로 군(頵)의 아들이다. 1677에 진사하고 숙종 17년(1691)에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고 교리와 사간을 거쳐 1725년 필선(弼善)으로 당쟁의 폐해를 상소한 문장 속에 老論의 득세를 비난한 구절이 있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귀양에서 풀려나와 부응교에 등용되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慶尙道號召使가 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후 동부승지에 올랐다. 영조 12년(1736)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제주로 귀양 가는 중 당진(唐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상소문을 발단으로 수차에 걸친 소론의 재집권을 위한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玉川集이 전한다.

정 탁(鄭鐸) 1659~?
字는 汝宣, 호는 매계(梅溪), 본관은 청주로서 생원 숙(淑)의 손자로서 효종 때(1677) 진사하고 효종 25년(1699)에 문과 급제,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다.

권두기(標斗紀) 1659~1722
字는 叔章, 호는 晴沙로 창설재 斗經의 아우이다. 숙종 13년(1687)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6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낙상했다는 핑계로 향리에 돌아오니 조정에서 해운판관으로 옮겨 주었다. 숙종 33년(1707)에 상소한 것이 화근이 되어 海南으로 유배되어 4년만에 풀려나 正言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청사문집 4권 2책이 있다.

금 섬(琴 暹) 1659~1696
字는 중서(仲舒)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부사 文谷 휘(微)의 후이다. 숙종 9년(1683)에 진사하고 동왕 16년(16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지냈다.

김여건(金汝鍵) 1660~1697
字는 天開,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 聲久의 맏아들이다. 숙종 13년(1687)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다. 조사석(趙師錫) 일파가 정국을 어지럽히고 있어 이들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저서로 「수찬유고」와 北行錄이 있다.

권두굉(權斗紘) 1668~1747
字는 小章, 호는 西巖, 본관은 安東으로 斗紀의 아우이다. 171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3년 문과에 급제, 承文院 正字를 지냈으나 진취의 뜻이 없어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큰형 斗經, 셋째형 斗紀, 아들 萬도 급제하여 일문의 영광을 세인이 칭송하였다.

김 정(金 ) 1670~1737
字는 士達, 호는 蘆峯, 본관은 풍산으로 鶴沙 應祖의 현손이다. 숙종 22년에 진사, 동왕 34년(1708)에 문과 급제하여 직장, 감찰, 도사를 역임한 뒤 53세 때에 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옥천군수에 부임하여 불탄 민가 600호와 공청 수백 칸을 복구시킨 공으로 왕에게 옷 1벌을 하사 받았다. 강릉도호부사에 부임하여서는 삼십 리나 되는 긴 골짜기에 유동민들이 모여들어 수백 결의 토지를 개간하여 살고 있었는데 세자궁의 소유라 하여 관원이 내려와 稅를 독촉하니 주민들이 떠나려 하기에 강원감사에 상신하여 임금께 알려 세를 감하도록 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에는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揚武從勳一等에 책록되고 통정대부에 올라 강계부사 겸 관서우방어사를 거쳐 65세에는 제주목사 겸 호남방어사가 되어 쌀 50석, 포목 200필을 내어 섬 주민들을 교육토록 하였다. 그 뒤에도 쌀 50석, 포목 100필을 서당 경비에 충당케 하고 각종 선정을 베풀다가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梧川書院과 제주 象賢祠에 제향되고 저서에 노봉집이 있다. 공이 제주에서 씨를 받아와 심은 소나무 숲은 지금도 물야초등학교 주변에 있는데 그 장관은 실로 볼만하다.

성세욱(成世頊) 1677~l753
字는 謹元, 호는 松坡, 본관은 창녕으로 증이조참판 文夏의 아들이며 계서 以性의 손자이다. 숙종 41년(1715)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신녕현감으로 밝은 정치를 하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물러가 詩文과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하당 권두인, 창설 권두경, 약산 오광운, 눌은 이광정 등으로 도의로 교제하였다. 자경잠(自警箴)과 계자시(誡子詩)는 유명한 작품이며 그 밖에 많은 유고가 전한다.

김한운(金翰運) 1680~1749
字는 붕로(鵬路), 호는 부옹(浮翁), 본관은 안동으로 숙종 37년(1711)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진주목사를 하였다. 유고가 있다.

홍 우(洪 楀) 1661~?
字는 천경(天擎), 본관은 남양으로 생원을 거쳐 숙종 25년(1699)에 문과에 급제하고 典籍벼슬을 지냈다.

이제겸(李濟兼) 1683~1742
字는 善慶, 호는 杜陸이며 본관은 진성으로 난은 東標의 둘째아들이다.
숙종 40년에 진사하고 영조 1년(1725)에 문과 급제하고 栗峰察訪에 부임하기 앞서 별시과거의 참시관이 되었다. 李麟佐의 반란으로 청주 성이 짓밟히고 진천과 안성이 짓밟히자 역마를 민가에 숨겨두고 서울로 향해 가다가 도원수 吳命恒을 만나 함께 적을 토벌한 뒤 다시 현직에 와 있던 중 역모에 가담했던 강필신의 무고로 신천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봉화 노루골에 숨어 山水를 벗삼아 시서로 소일했다. 저서로는 「상례절(喪禮節)」과 杜陵集이 있다.

권일기(權一夔) 1683~1767
宇는 요경(堯卿), 호는 치암(恥庵),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예이다. 사마시를 거쳐 경종 원년(1721)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본명은 夔였는데 왕명으로 一字를 더했다고 한다.

권 만(權 萬) 1688~1749
字는 一甫, 호는 江左, 본관은 안동으로 西巖 斗紘의 아들이다. 172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영조 원년(1725) 증광시에 급제하고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붓을 들어 격문을 초하니 그 글이 비분강해하여 경상일도가 호응하여 공을 추대하여 의병장을 삼았다. 안무사 朴師洙가 군문에 들어가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권모가 자기 가문의 충의의 풍도에 따라 기율이 심히 엄하구나.” 하였다.
영조 22년(1741)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며 영조가 공의 집에 간직했던 6대조 권벌의 근사록과 함께 종계변무사로 연경에 갔을 때 명 황제에게서 받은 「박두난금(瞨頭爛衿)」을 가져오게 하여 구경한 다음, 근사록 강의를 듣고 책 1부를 더 하사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제 너로 인하여 皇朝의 옛 물건을 보매 이미 공경하는 마음이 많고 감화가 깊으니 중국에서 만든 물건을 갖다가 본받을 것이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을 滋仁亨에 두었다가 원자에게 입혔으면 좋을 뻔했다.” 이에 안동 사람들이 이것이 보배임을 알았다. 이에 어제시 한수를 내렸으며 尙衣院에 명하여 똑같은 음을 만들어 영구히 생원진사 합격자에게 쓰도록 하였다.
공은 문자와 음률에 밝아 경서를 읽을 때에 중국 음으로 읽었다 한다,
저서로는 강좌집 10권 5책, 홍범책 역설 등이 있고 梁山 忠賢祠에 배향되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임명태(任命台)
字는 응삼(應三)이고 호는 서파(西坡)이며 본관은 풍천으로서 세중(世重)의 아들이며 금양신(琴養神)의 외손이다. 영조 2년(1726) 식년문과에 을과 2인자로 합격하였는데 宋儒武과 동방급제하였다. 관직은 찰방을 역임했다.

송유식(宋儒式) 1688~
字는 士範, 호는 뇌재(瀨齋)이며 본관은 야성(冶城)으로서 진사를 거쳐 영조 2년(1726)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에 이르렀다.

금옥심(琴沃心) 1693~1739
字는 계여(啓汝), 호는 송간(松澗)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현감 尙絃의 증손이다. 숙종 41년에 생원하고 英祖 11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苑)에 들어갔다. 문장, 효도, 우애로 이름났으며 저서로 유고가 전한다.

이 장(李槳) 1696~1737
字는 叔通, 호는 호산(毫山)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의 후예이다. 숙종 45년(1719)에 진사하고 경종 3년(1723)에 문과 급제하여 全井道察訪, 典籍, 直講을 거쳐 輪對官으로 입시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날 이렇듯 훌륭한 관리가 있었겠느냐?” 하니 답하기를 “신은 牛山君 踵의 후손으로 안동사람이 되었고 大父 瑄이 宏詞科에 올랐으나 한 일은 없다.” 하니 “그대는 김성탁(金聖鐸)과 같은 고향이니 함께 공부하였는가?” 하니 “상종은 좀 했으나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쓰기가 어렵구나. 안동에도 이장 같은 인물이 있을 줄이야.”라고 하였다. 곧 예조, 병조좌랑, 전라도도사를 거쳐 호남시사(湖南試士)를 지냈다.

김경침(金景沈) 1700~1732
字는 중묵(伸黙), 호는 송와(松窩)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 성구의 후예이다. 영조 원년(1725)에 문과에 급제하여 正字를 역임했다.

정항령(鄭恒齡) 1700~?
字는 현로(玄老), 호는 겸재(兼齋), 본관은 河東으로 진사를 거쳐 영조 19년(1743)에 문과 을과에 제1인자로 합격하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김경필(金景泌) 1701~1748
字는 원중(源中), 호는 학음(鶴陰)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여당(汝钂)의 아들이다.
영조 11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유고가 전한다.

권정침(權正枕) 1710~ 1767
字는 子誠, 호는 平庵, 시호는 忠憲,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예이다.
영조 30년(1754)에 진사가 되고 3년 뒤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세자의 신임을 받았다. 1762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모함하여 세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고은 임성(任誠) 박덕제와 함께 세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했다. 공은 낙향하여 두문불출 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직제학(直提學)에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라 시호가 내렸다. 그의 저서로는「중용총론」 「근사록의의」 「사단칠정변」 「평암집」 등이 있다.

강 윤(姜 潤) 1711~1782
字는 德以, 호는 法川, 본관은 진주로서 174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을 거쳐 예조좌랑에 승진한 뒤 지령, 장령, 세손시강원익선(世孫侍講院翊善) 등에 수차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수찬, 校理, 江界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부임하지 않았다. 1779년 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저서로는 法川集이 있고 사덕사(俟德祠)에 제향되었다.

김필원(金泌源) 1722~1770
字는 幼達, 호는 삼구당(三瞿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참판 榮祖의 5대손이다. 英祖 30년에 진사하고 동 35년(1759)에 문과에 급제하여 法書와 持平을 역임하였다.

권문도(權文度) 1740~l807
字는 사아(士雅)요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예이다. 正祖 4년(1780)에 문관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이르렀다.

김한동(金翰東) 1740~l811
字는 翰之이고 호는 와은(臥隱)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佐郎 景汝의 맏아들이다. 영조 때 진사하고 正祖 13년(1789) 문과 乙科에 급제하여 전적, 지평, 정언, 교리의 내직을 거쳐 정조 21년(1797)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내직에 들어와 승지, 大司諫을 역임하고 순조 즉위와 더불어 돈녕부도정,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천주교도로 몰려 함경도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순조 52년(1805)에 풀려났다. 저서로는 와은집이 있다.

김희직(金熙稷) 1742~1797
字는 公叔, 호는 표림(豹林)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虎東의 長子이며 聲厚의 후예이다. 영조 때 생원하고 정조원년(1777)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詩集이 전한다.

김희성(金熙成) 1742~1804
字는 成之, 호는 海隱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宅東의 長子이며 聲久의 후예이다. 영조 때 생원하고 正祖 14년(17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과 지평을 역임하였다.

김서복(金瑞復) 1743~1793
字는 景心, 호는 三陽齋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참판 영조의 현손이다. 정조 1년(1777)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고 금교(金郊)찰방 성균전적을 거쳐 이조좌랑을 지냈다.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전기를 지었다.

강 노(姜 栳) 1747~1841
字는 수보(壽甫), 호는 道泉이고 본관은 晉州로서 美胡 金元行의 문인이다. 英祖 50년(1774)에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내고 正祖 때(1784) 추은을 입어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의 증직을 받았다. 「도천유고」2권이 있다.

김상온(金相溫) 1760~l812
字는 友直, 호는 피연처(避烟悽)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정조 13년(1789) 진사하고 同王 21년(1797)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전적을 지냈다. 유고 한 권이 전한다.

권교준(權敎準) 1760~l804
字는 違可, 본관은 안동인데 선돌(立石)에서 출생하여 헌종 12년(1846)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김희주(金熙周) 1760~1830
字는 공직(公稷), 호는 갈천(葛川)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聲厚의 후손이다. 大山 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조 13년(1789)에 생원하고 19년(1795)에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다. 弘文館, 司憲院, 司憲府의 요직을 거쳐 安岳, 安州 郡守와 영흥부사, 영해부사의 외직을 역임한 뒤 병조참판을 지냈다. 저서에 葛川集이 있다

김희락(金熙洛) 1761~1803
字는 明淑, 호는 고식헌(故寔軒)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현손이다. 정조 때 장원으로 생원하고 도산과에서 진사를 한 다음, 정조 18년(1794)에 문과 급제하여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지평을 지냈다. 그는 大山 이상정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故寔軒講義 3권이 전한다.

김 형(金 瑩) 1765~
字는 의범(義範), 호는 괴헌(槐軒)이며 본관은 연안으로서 순조 4년(1804)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강시환(姜時煥) 1766~1842
字는 성흥(架興), 호는 가은(稼隱)이며 본관은 晋州로서 정조 13년(1789)에 문과에 급제하여 양양부사,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825년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헌종 2년(1836)에 副司直으로 있으면서 순조왕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규탄하고 학문 장려, 빈민 구제 등 6개조의 시정책을 상소했다가 전라도 추자도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헌종 6년(1840)에 헌종이 친정한 뒤에 풀려났다. 저서로 稼隱集이 전한다.

강 운(姜橒) 1773~1834
字는 경하(景夏)이고 호는 송서(松西)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1798년 생원을 하고 180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필선(弼善)에 이르렀다. 근사록 집해를 朱書로 토를 달아 10권을 완성시켰다. 저서로는 송서집(松西集)이 전한다.

강태중(姜泰重) 1778~1862
字는 성등(聖登), 호는 유하(柳下), 본관은 진주로서 1807에 생원하고 순조 9년(180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목릉별검(穆陵別檢), 전적, 주부, 正言, 세자시강원사서, 戊長현감, 교리, 수찬, 대사간, 한성우윤을 역임한 뒤에 兵曹參判, 동지중추관사 등을 지냈다. 저서에 柳下집이 있다.

강기환(姜基煥) 1778~1812
字는 聖汝, 호는 송간(松澗)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3년(1803)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니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承文院正字, 成均館典籍, 司憲府監祭, 連遠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松澗集이 있다

강두환(姜斗煥) 1781~1854
字는 七瑞, 호는 기헌(起軒),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7년(1807)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이조정랑, 사간원정언, 헌납, 지평, 장령, 홍원현감을 거쳐 대간에 올라 헌종 임금에게 2차에 걸친 직간으로 함경도 경성에 유배되었다가 방환되고 다시 헌종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고 음풍영월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起軒集이 있다.

강필로(姜必魯) 1782~1854
字는 아가(雅可), 호는 노와(魯窩),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9년(180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응교(三司應敎), 同副承旨, 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固城, 서산(瑞山), 회양(淮陽)府使를 역임하였다.

권달준(權達準) 1782~1865
字는 公立, 호는 포재(苞齋)로 본관은 安東이다. 순조 16년(1816)에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도정에 이르렀고 문사와 행실이 士林에 알려졌다. 저서로는 苞齋集이 전한다.

김중하(金重夏) 1784~1860
字는 치상(穉常), 호는 동소(桐巢)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참판 榮祖의 후손이다. 헌종 원년(1835)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正言을 거쳐 1837년 사헌부지평, 1852년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어 돈녕부도정을 지내고 1855년 통정대부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니 세상이 그를 「南州高士」라 일컬었다. 저서로 桐巢集이 있다.

김여서(金驪書) 1789~1837
字는 중연(仲淵), 호는 담운(澹雲)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熙質의 아들이며 聲久의 후예이다. 순조 때 생원하고 동 26년(1826)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건수(金建銖) 1790~1854
字는 公立 호는 晩海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在仁의 아들이며 八吾軒의 후예이다. 순조 때 생원하고 同王 30년(183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 부사, 승지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晩海集이 있다.

강 도(姜 導) 1792~1831
字는 擇之, 호는 괴암(槐菴), 본관은 진주이다. 순조 19년(1819)에 식년문과에 소년등과 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전적, 직강 좌랑을 거쳐 함경도도사를 역임하고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다시 정언, 지평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傀菴集이 전한다.

권종헌(權宗憲) 1795~?
字는 聖則, 본관은 안동으로 野翁 檥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역임하였다.

김종태(金宗泰) 1800~1883
字는 계진(季鎭), 호는 취헌(翠軒)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의금부도사 瑞安의 증손이다. 헌종 3년(1833)에 사마에 합격하고 철종 元年(1850)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 교리, 도승지와 가선대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유고 2권이 전해지고 있다.

강 연(姜 鍊) 1800~1853
字는 成百, 본관은 진주로서 병조참판 泰重의 아들이다. 철종 원년(1850)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교리, 부안현감을 역임하였다.

김규운(金奎運) 1801~l881
字는 景晦이고 호는 梧材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형조참의 重夏의 아들이다. 철종 원년(1850)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홍문관 제학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저서로는 유고 2권이 전한다.

강면규(姜冕奎) 1804~1862
字는 周五, 호는 면와(俛窩)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헌종 6년(1840)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三司, 좌승지를 거쳐 제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김우수(金禹銖) 1804~1874
字는 乃惜, 호는 학포(鶴浦)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순조 34년(18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를 지냈다. 저서로는「학포유집」이 전한다.

강장환(姜長煥) 1806~l871
字는 善之, 호는 主一齋이다.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33년(1833)에 문과에 급제하고 찰방, 현감, 선전관을 거쳐 충청도사핵어사(忠淸道査覈御史) 홍문관 부교리 등을 지냈다.

강세규(姜世奎) 1809~l861
字는 而瑞, 호는 부오재(負誤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4년(1853)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다.

권영하(權泳夏) 1810~1879
字는 성유(聖遊), 호는 퇴일(退逸), 본관은 안동으로 참판 載大의 아들이다. 철종 원년(182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大司成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강하규(姜夏奎) 1813~l883
字는 夏五, 號는 백초(白樵), 본관은 진주로 忠烈公 위빙(渭聘)의 8대손으로 송서(松西) 橒의 손자이다. 헌종 12년(1846)에 문과에 급제하여 栗峰察訪, 장령, 校理, 司鍊, 執義를 거쳐 철종 임금의 국상에 연주도감(練主都監)을 맡아 通政大夫 堂上官에 올랐으며 1865년 이후 병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 예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 北靑府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1875년 내직의 승지로 들어왔다가 만년에는 고향인 춘양으로 낙향했다. 저서로 白山集이 있다.

홍재순(洪載順) 1815~l895
字는 응여(應汝), 본관은 南陽으로 고종 4년(1867)에 문과에 亞元(2등)으로 급제하고 녹당교리, 지평, 정랑 등을 거쳐 참의를 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류성표(柳星杓) 1816~?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전주로 眞一齋 崇祖의 후손이다. 고종 2년(186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다.

강진규(姜晉奎) 1817~l891
字는 晋五, 호는 역암(櫟庵) 본관은 진주로서 白樵 夏奎의 동생으로 증이조참의 必輔의 양자로 들어갔다. 헌종11년(1845)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正言, 持平이 되어 철종에게 피폐한 정치를 바로잡을 것을 상소했다가 귀양을 갔다. 다시 부수찬으로 복관하여 교리로 있을 때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1866년 通政大夫에 올라 병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 예조참판이 되었다. 1881년 김홍집이 왕에 바친 「조선책략」의 내용 중에 일본과 조약 체결하라는 대목에 영남유생 李晩孫 등이 올린 만인소에 당색을 초월하여 협찬한 관계로 與陽 땅에 유배되기도 했다. 저서로 「역암집」이 있다.

강 건(姜鍵) 1818~1881
字는 啓玄, 호는 춘고(春皐), 본관은 진주로서 참판 泰重의 아들이다. 철종 10년(185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正言, 持平, 병조참의, 동부승지를 거쳐 禮曹參判 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강 기(姜?) 1824~
字는 국보(國資), 호는 石堂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3년(1852)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역임하였다.

권호연(櫂好淵) 1824~l865
字는 희안(希顔), 호는 二山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현감 宅夏의 아들이다. 헌종 14년(1848)에 진사하고 철종 10년(1859)에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권노연(權魯淵) 1825~1878
字는 聖源, 호는 하석(霞石), 본관은 안동으로 正言 文度의 현손이다. 철종 6년(1855)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를 지낸 다음 1876년에 문과 중사에 또 합격하여 通政大夫에 승진, 승지를 역임하였다.

강준환(姜駿煥) 1825~l876
字는 文聲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고종 10년(1872)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三司校理를 역임하였다.

권재철(權載喆) 1826~1884
字는 치운(致雲), 본관은 안동으로 大拙子 斗應의 후예이다. 철종 12년(1861) 생원이 되고 고종 6년(1869)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을 지냈다.

이면주(李冕宙) 1827~1910
字는 윤래(允來)요 호는 계은(桂隱)이며 본관은 全州로서 추만 榮基의 후예이다. 철종 9년(18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정언, 장령, 헌납, 집의, 부교리 등을 거쳐 통정대부 병조참의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 을사조약에 五賊을 베일 것을 상소하고 1910년 亡國의 비보를 듣자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조상 사당에 배례한 뒤 산에 올라가 서울을 향하여 四拜하고 식음을 폐하나 죽지 않으니 독약을 마시고 시를 읊으니
“노란 국화는 좋은 때를 만났는데 푸른 산에는 고인의 무덤도 많네.
별이 흩어져 땅 위에 떨어지니 이 모두가 살기 싫은 사람이라네.”
(黃菊好時節 靑山多古人 晨星散落地 俱是厭生人)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훈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桂隱集 4권이 있다.

강경규(姜景奎) 1827~1880
字는 순가(舜歌),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여 三司校理를 역임하였다.

강운중(姜運重) 1827~l880
字는 성회(聖會), 호는 斗山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6년(185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정언, 부수찬등을 역임하였다.

이계로(李啓魯) 1828~1886
字는 聖建, 호는 石林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松齋堣의 후손이며 都正 會相의 아들이다. 성재(性齋) 許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철종 2년(185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옥당교리, 이조좌랑, 지평, 응교 등 三司의 요직을 거쳐 현풍, 안동의 수령을 역임하고 강원도의 어사로 나가서는 민정을 잘 살펴 通政大夫에 올라 부승지, 참의, 부제학을 지내고 이조, 호조 등 6조의 참판을 고루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石林集이 전한다.

김위균(金渭均) 1830~1860
字는 경견(景堅)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철종 9년(1858)에 문과에 급제하여 正言을 지냈다.

이유로(李有魯) 1831~l872
字는 聖若, 호는 華山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 東標의 6대손이다. 철종 9년(18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저서로는 「화산집」이 전한다.

강 만(姜 滿) 1831~1895
字는 자정(子鼎)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校理 世奎의 아들이다. 고종 20년(1883)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다.

강 탁(姜 鐸) 1833~1904
字는 子木, 호는 桂下,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11년(186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교리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강 호(姜 濩) 1836~
字는 차소(次韶), 호는 二果,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27년(18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를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승지를 한 다음 1900년에 안동부사를 지냈다.

권옥연(權玉淵) 1839~1900
字는 景德, 호는 素虛齋로 본관은 안동이다. 54세인 고종 29년(1892)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시독관을 지내고 을미사변 이후로 安東, 서울 등지로 국권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저서로 소허유고가 있다.

이만도(李晩燾) 1842~1910
字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이며 본관은 진성으로 봉성면 동양리 와한에서 대사성 휘준(彙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 3년(1866)에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 정언, 집의를 거쳐 양산 군수가 되어 봉급 九百량과 의연금 2천량, 사창미 5백석으로 굶주린 고을 백성을 구휼하고 1882년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발령되었으나 간신들의 행패가 거슬려 낙향하였다. 을미사변에 황후가 왜적에게 시해되자 상복을 입고 매양 통곡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멋대로 발표되어 충신들이 순국하니 공은 조약철폐와 5적 처단의 상소를 올리고 죄인이라 자처하면서 산골로 전전하였다. 순종 원년(1907)에 가선대부에 임명되나 부임치 않으니 다시 정2품 자헌대부에 임명하였다. 1910년 나라가 왜적에게 망하는 것을 보고 종일 통곡하고 食飮을 전폐하고 단식한 지 24일 만인 9월 8일 숨을 거두었다. 26년 뒤 문집을 만들고 비를 세웠으나 왜병이 와서 책을 태우고 비석을 파괴했다. 순국 60년 뒤인 1970년에 다시 비를 세웠다. 저서로「향산집」이 전한다.

강 연(姜 演) 1842~
字는 경심(景深),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28년(1891)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좌통례를 거쳐 광무 6년(1902)에 통정대부에 승진하여 승지를 지냈다.

배한주(裵漢周) 1848~
字는 順朝, 호는 번은(樊隱), 본관은 홍해이다. 고종 29년(1892)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안을 지냈다.

김정룡(金正龍)
字는 君正, 호는 계은(溪隱)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고종 29년(1892)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황희영(黃熙英)
字는 군백(君伯), 호는 수암(殊庵)이며 본관은 평해로서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였다.

김규영(金奎永) 1851~1896
字는 화국(華國)이고 호는 月巖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聲厚의 후예이다. 고종조에 생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를 역임하였다.

황효공(黃孝恭)
字는 敬之, 본관은 창원으로 진(璡)의 아들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 급제하여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저서에 역범도설(易範圖說)이 있다.

신윤안(申允安)
본관은 平山으로 관찰사 중전(重全)의 아들인데 문과 급제하여 판서 벼슬을 하였다.

신 분(申 賁)
호는 시남(市南)이고 본관은 平山으로 문과 급제하여 校理를 역임하였다.

신응지(申應之)
본관은 平山으로 賁의 아들이다. 문과 급제하여 司諫에 이르렀다.

유양회(柳養晦)
본관은 전주로서 진일재의 후예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신 상(申 商)
字는 得志, 본관은 정산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공도공(恭度公)이다.

권운채(櫂雲彩) ?
字는 용보(龍甫)요 본관은 안동으로서 사복재(思復齋) 定의 후예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正字를 역임하였다.

이치명(李致明 혹은 治明)
字는 덕보(德甫), 호는 회와(晦窩)이며 본관은 여주로서 순조 때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談院 正言)을 하였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봉화군사 > 第 16篇 人 物 > 第 1節 文 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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