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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사] 第 3節 司馬(生員·進士) 이홍준(李弘準), 금치담(禁致湛)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3. 4. 18:19

[봉화군사] 第 3節 司馬(生員·進士)


이홍준(李弘準)
字는 군식(君式)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경주로서 용제의 동생이다. 성종 17년에 진사하고 무오사화 때 그 형 용재가 참혹한 변을 당한 이후 관직에는 뜻을 버리고 내성현 연수봉 밑으로 이사하여 외영당(畏影堂)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는데 감사가 그 뛰어난 재능과 덕망을 중히 여겨 관직을 추천하였으나 병을 빙자로 나아가지 않았다. 의성김씨 중시조 눌재, 광산김씨 중시조 습득공과 같이 천성향약(川城=乃城鄕約)을 지어 생활 훈으로 삼게 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금치담(禁致湛) 1461~l524
字는 가구(可久) 본관은 봉화로서 판관 간(衎)의 아들로 연산 17년에 생원하고 음사로 인동현감을 역임하고 그 후 망호헌을 지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인 금의(琴椅, 1489~l552)의 父.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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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해(琴 嵇) 1399~1487
字는 백겸(白謙) 호는 쌍송정(雙松亭) 본관은 봉화로 영렬공(英烈公)의 후예이다. 태종 때 생원하고 물야면 북지촌으로 옮겨 쌍송정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김극례(金克禮) 1464~l525
字는 문숙(文淑) 본관은 안동이다. 성균 생원을 하였다. 보백당의 제3자로 봉화 입향조이다.

권사빈(權士彬) 1449~l535
字는 자야(子野) 호는 오선정(五先亭) 성종 3년 때 성균 생원을 하고 橃의 귀로써 영의정을 하였고 안동에서 출생하여 유곡으로 전거한 후 학문에 잠심하여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김영권(金永權) 1477~l546
字는 평숙(平叔) 호는 묵제(黙齋) 본관은 의성으로서 고려 平章事 門下侍中 文貞公椿의 7세손이다. 연산 5년(1499)에 성균진사가 된 후에 기자전참봉(業子殷參奉)을 제수 받았다. 그 당시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정국이 혼란한 틈을 따라 관직에 출사할 것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511년 안동 예안에서 봉화 상운면 운계리 익곡(益谷)마을로 이거한 뒤에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죽헌(竹軒) 김균(金筠) 등 지방의 이름 높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이들과 같이 천성향약(川城鄕約)과 안동향약을 차례로 제정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향약의 효시가 되었다. 저서로는 묵재유고(黙齋遺槁)가 있다.

금간(琴 衎) 1439~1503
字는 낙지(樂只)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이다. 성종 5년에 생원하고 음직으로 통훈대부 성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이홍준(李弘準)
字는 군식(君式)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경주로서 용제의 동생이다. 성종 17년에 진사하고 무오사화 때 그 형 용제가 참혹한 변을 당한 이후 관직에는 뜻을 버리고 내성현 연수봉 밑으로 이사하여 외영당(畏影堂)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는데 감사가 그 뛰어난 재능과 덕망을 중히 여겨 관직을 추천하였으나 병을 빙자로 나아가지 않았다. 의성김씨 중시조 눌제, 광산김씨 중시조 습득공과 같이 천성향약(川城=乃城鄕約)을 지어 생활 훈으로 삼게 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금치담(禁致湛) 1461~l524
字는 가구(可久) 본관은 봉화로서 판관 간(衎)의 아들로 연산 17년에 생원하고 음사로 인동현감을 역임하고 그 후 망호헌을 지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배 헌(裵 巘) 1481~1534
字는 헌지(獻之) 본관은 흥해로서 우통례 이순의 장자로서 중종 때 생원하고 내성향약을 만들어 풍속 순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三益의 귀로 좌승지 증직을 받았다.

금원한(琴元漢) 1460~l506
字는 선지(善之)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부사 문곡 휘(微)의 아들이다. 성종 23년 때 진사한 후 평생을 학문연구와 덕망을 쌓아가면서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저서가 전한다.

금원형(琴元亨)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부사 문곡 휘(徵)의 아들로 성종 14년에 진사를 하였다.

금원정(琴元貞) 1472~l557
字는 정숙(正淑) 호는 농수(聾叟) 동래부사 문곡 휘(徵)의 아들이다. 연산 7년에 진사하고 중종 10년에 영해훈도를 역임하였다. 중종 14년에 현량(賢良)에 추천되었고 기묘사화 이후부터는 초야에서 낙전당을 지어 학문연구와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저서로는 농수집이 전한다.

금 오(琴 梧) 1486~l573
字는 백재(伯材) 호는 죽창(竹窓) 본관은 봉화로서 쌍송정의 증손이다.
중종 11년에 생원하고 어버이 병이 심하였을 때 효성이 지극하여 정이 스스로 날아들어 그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효행과 우애가 깊었고 학행이 뛰어나 많은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조 정(趙 貞) 1508~l589
字는 정경(正卿) 호는 단구(丹邱) 본관은 한양으로서 충렬공 인벽(仁壁)의 후예로서 중종 때 진사한 뒤 기묘사화가 일어나 공직생활을 단념하고 봉성면 와란에 들어와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전응방(全應房) 1491~l554
字는 이기(而紀)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옥천으로서 상장 휴계 희철(希哲)의 손자이다. 중종 때 진사하고 관직에는 뜻을 갖지 않았다. 이는 조부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시 호종관으로 몸소 추한 면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영주에서 산수 좋은 구천의 머루 다래 덤불을 해치고 야옹정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매년 철이 바뀔 때마다 장릉(단종 능)을 찾아가 도포 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곤 했던 절신이다. 저서로는 야옹집이 전한다.

금 축(琴 軸) 1496~l562
字는 대임(大任)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중종 때 진사하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제능참봉(齋陵參奉)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덕행을 쌓아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문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신경익(辛慶益)
중종때 진사를 하였다.

김언구(金彦球) 1507~?
字는 대명(大鳴) 호는 쌍벽당(雙碧堂) 본관은 광산으로 죽헌 김균(金筠)의 장자이며 중종 26년에 生員한 다음조부 용담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학문연구에 깊이 노력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가정을 다스리는 십잠(十箴)을 지어 교화하였다. 저서로는 십잠과 쌍벽당집이 전한다.

박승준(朴承俊) 1512~l543
字는 중언(仲彦) 호는 낙한정(樂閑亭) 본관은 반남으로서 소고의 중형이다. 중종 때 진사하고 봉화 봉성면 창평리로 이사하여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연구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대 문장가였다.

박창기(朴昌基) 1485~l585
본관은 무안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권동보(權東輔) 1518~l592
字는 진경(震卿) 호는 청하(靑霞)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장자이다. 향시에 장원하여 음직으로 헌능 참봉하고 중종 38년에 생원 진사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을사사화로 부친이 화를 입어 20년간 두문불출 하다가 부친이 신원된 다음 초계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하고 석천정사를 짓고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시문 240편과 담천집이 전한다.

권동미(權東美) 1525~l585
字는 자휴(子休) 호는 석정 (石亭)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제2자이다. 선조 14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여 별좌 도사 현감 감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치적이 뛰어났다.

박이고(朴彌高) 1524~l586
字는 치앙(致仰) 호는 가은(可隱) 본관은 영해로서 遯翁의 증손이다. 선조 때 진사하고 유고가 있다.

박응봉(朴應鳳) 1588~l673
字는 자익(子翼) 호는 신와(新窩) 昌基의 손으로 생원을 하였다.

민경훈(閱景勳) 1541~l600
字는 중경(仲景), 본관은 여흥으로서 선조 때 생원하여 음사로 참봉하고 전적을 역임하다가 선조 때 부안 현감 재직 중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승전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만년에 주유하던 중 명호 삼동(골마)에 옮겨 앉아 山水佳景을 벗삼아 유연자적하였다.

신석번(申石蕃) 1524~?
字는 중연(仲衍) 호는 백원(百源) 본관은 평산으로서 應之의 후예로서 인조 11년에 생원하고 세자사부 자의사업 장령(世子師傅 諮議司業 掌令)을 임명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잠심하여 증이조참의가 되고 저서로는 백원집 3권이 전한다.

송복원(宋福源) 1544~l611
字는 천지(川至) 호는 만대정(晩對亭) 본관은 야성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송이래(宋履泰) 1680~l718
字는 사향(士享) 호는 호암(芦庵) 본관은 야성으로 진사를 하였다.

송득용(宋得龍) 1721~1806
字는 사균(士均) 호는 모원암(慕圓庵) 본관은 야성으로 진사를 하였다.

금 원(琴 援) 1582~l641
字는 도재(道齋) 본관은 봉화로서 윤선의 아들이며 김구전(苟全)의 제자로서 광해 5년에 생원을 하였다.

김시침(金時㶩) 1600~l670
字는 종경(終卿) 호는 일용재(一慵齋) 본관은 풍산으로 영조의 아들이다.
인조 13년에 생원하고 서빙고 별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금응협(琴應夾) 1525~l586
字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 훈도 榟의 아들이고 명종 10년 때 진사하고 음사로 참봉을 거쳐 익위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향리에서 후진을 지도하면서 한문을 깊이 연구하여 일휴당집의 저서를 남겼다.

금응훈(琴應壎) 1530~l605
字는 훈지(壎之) 호는 면진재(勉進齋)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로서 선조 때 진사를 하였다.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여 스승인 퇴계가 勉進이라고 호를 지어 주었다. 제자를 많이 길렀고 저서로는 면진제집이 전한다.

금난수(琴蘭秀) 1530~l604
字는 문원(聞遠) 호는 성성재(惺惺齋) 또는 弧山主人이라 했다. 본관은 봉화로서 쌍송정의 후예이고 계문이다. 명종 16년에 진사하고 탁행으로 참봉을 거쳐 장예원 시평을 지낼 때 임란이 발발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성주판관에는 不赴하고 5년간 봉화 현감을 하였다.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문장과 덕망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성성재집이 전한다.

금응빈(琴應賓)
字는 화수(和受) 본관은 봉화로서 부사 梧의 아들이다. 명종 1년에 생원하고 기상이 든든하여 세속의 구애를 받지 않았고 시문에 능하였다.

금복고(琴復古) 1549~l632
字는 고여(皡如) 호는 송음(松陰) 본관은 봉화로서 선조 6년에 진사하고 탁행으로 참봉이 되었고 임란 때 많은 활약으로 원종공신으로 호군이 되었다.

김백태(金伯態) 1556~l609
字는 경망(景望) 본관은 광산으로서 진사로 임진왜란 때 의병정제장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순직하였다. 평소 애용하던 갑옷, 투구, 말안장 등 일체를 봉성면 외삼리 묘 밑에 묻어 두었다.

임 흘(任 屹) 1557~l620
字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 본관은 풍천으로서 선조 15년에 진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 柳宗介의 부대장으로 소천 전투에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전옥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화를 떠나 예안온혜로 환고하여 청량산 기슭 경치 좋은 곳에 羅浮精舍와 翠蛇亭을 지어 학문만 연구했다. 지금 공의 종택에 문집과 僧兵大將 사명당 惟靜이 발문을 쓴 시집이 있다. 그 끝에 ‘萬曆庚子秋 松雲老書’라 쓰여 있다.

권호신(權虎臣) 1588~1629
字는 백무(伯武) 호는 도은(陶隱) 본관은 안동으로서 寅의 장자로 선조 때 생원하고 학문과 효행으로 참봉을 하였다. 당시 순흥도호부 지방의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도은집이 간행되었다.

권상원(權尙遠) 1591~?
字는 원유(遠游) 호는 백운자(白雲子)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증손이다. 학문이 깊고 시문, 서예에 능하여 유곡문장의 원조라고 하며 삼절 중의 한 사람이다. 인조 8년에 진사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여 일생을 초연하게 보냈다. 저서로는 백운집이 전한다.

이대근(李大根) 세조 때
字는 불발(不拔) 본관은 우계로서 도촌의 장자로서 연산 2년(1496)에 진사하고 음직으로 감찰과 홍천현감을 역임하였다. 공이 선영길에 순흥 청다리를 지날 때마다 말이 피해가기에 살펴보니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 곳이었다. 그날 밤 현몽하여 봉축하였다.

이흥문
字는 선흥(善興) 호는 수북(水北) 본관은 우계로서 도촌의 후로서 선조 때 생원을 하고 임란 때 만취당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시화에 특히 능하였다.

이성화(李成樺) 1582~
字는 자회(子晦) 호는 하천(荷泉) 본관은 우계로 도촌의 후이다. 광해 때 생원하고 관직에 뜻이 없어 학문에 잠심하였고 효성 또한 대단하였다.

이성간(李成幹) 1585~l668
字는 자폐(子閉) 본관은 우계로서 여빈의 아들이다. 선조 때 진사를 하였다.

이성건(李成楗) 1585~?
字는 자강(子强) 본관은 우계로서 도촌의 후계로 진사를 하였다.

이 담(李 燂) 1701~?
字는 명윤(明允) 본관은 우계로서 도촌의 후예이다. 선조 때 생원하고 군자감정을 하였다.

이광전(李光前)
字는 자술(子述) 본관은 우계로서 진사를 하였다.

이여혐(李汝馦)
字는 자실(子實) 본관은 우계로서 선조 때 생원하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희(李 熺) 1611~?
字는 일장(日章) 본관은 우계로서 광해 때 진사를 하였다.

이 극(李火克) 1632~1693
字는 기욱(器郁) 호는 태봉(台峯) 본관은 우계로서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상재(權尙載)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광해 때 진사를 하였다.

변영순(邊永淳) 1523~?
字는 개숙(開淑) 호는 만취당(晩翠堂) 본관은 원주로서 대은 안열(安烈)의 7세손이다. 명종 때 생원하고 조부의 유훈을 지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와 제자 육성에 전념을 다하였다. 인조 때 내성 거촌리 깊숙한 심천을 찾아 전거하여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유연자적하였다. 저서로는 만취당집이 전한다.

김정헌(金廷憲) 1516~l573
호는 눌암 본관은 안동이다. 명종 때 진사를 하였다.

금 인(琴 軔) 1510~1593
字는 백임(伯任)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현감 계(啓)의 둘째아들인 원수의 장남이다. 중종 35년에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연산군이 집권하자 그 폭정이 심하여 곧 돌아와 봉화읍 도촌에 앉아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길렀다. 松溪文集이 있다.

금 보(琴輔) 1521~1586
字는 사임(士任)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현감 啓의 손자이며 명종 9년에 생원한 후에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글씨는 퇴계 제자 중 3대 명필의 한 사람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퇴계가 써준 경제잠도(敬齋簪圖)를 정독하니 스승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선천적으로 효성이 뛰어나 상신으로 있는 동안은 웃음마저도 웃지 아니하여 공자의 제자 高柴와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문장명필로 덕망이 높았다. 梅軒文集 2권이 있다.

김득가(金得可) 1547~l591
字는 대중(大中) 호는 주봉(柱峰) 본관은 의성으로서 개암의 장자로 생원하고 관직은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사복시정을 증직 받았다. 계문이며 창녕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김추임 1592~l654
字는 만설(萬說) 호는 외서암(畏棲巖) 본관은 의성으로서 개암 증손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여 일천으로 참봉을 역임하였다.

김득려(金得礪)
字는 사섬(士銛) 호는 잠계(潛溪) 본관은 광산으로서 진사를 하였다.

권준신(權俊臣) 1561~l642
字는 사영(士英) 호는 자원당(自遠堂) 본관은 안동으로서 선조 15년에 생원을 하고 도고서원에 배향되었다.

금봉서(琴鳳瑞) 1538~l605
字는 경휴(景休) 호는 여강(廬江)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부사 문곡 휘(微)의 증손으로서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퇴계문집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이성(洪以成) 1556~l608
字는 취부(就夫) 본관은 남양, 장무공 숙(淑)의 증손이다. 선조 34년에 生員을 하였다. 백부 당성위가 김안로의 날조사건으로 화를 당하자 소백산 깊숙한 영천군 동면 관천리(현문단 2리)에 낙남 은거하여 세사를 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기르고 유연자적하였다. 문집이 전한다.

이선장(李善長) 1557~?
字는 덕초(德初) 호는 용담(龍潭) 본관은 진성으로서 참봉 흥양의 후예로서 안동 마래에서 내성 용담으로 이사하여 선조 때 진사하였다. 부모님의 병환에 몸을 아끼지 않고 효성을 다하였다. 사림에서 추천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그때 효자비가 지금 용담에 묻혀 있어 아쉽다.

임지도(任之道)
字는 송보(松甫)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풍천으로서 선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주민(金柱旻) 1584~1657
字는 졸수제(拙修齊) 본관은 안동으로서 구전(苟全)의 子이다. 광해군 때 생원을 하였다. 학문 연구에 잠심하여 증 사복시정을 하였다.

홍우정(洪宇定) 1593~1654
字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본관은 남양[土洪] 문장공 만전당의 손자이다. 광해 8년에 진사하고 권간의 무옥으로 장인인 목사 최기의 옥사에 연루되어 천안에 부처되었다가 8년만에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종실대신의 추천으로 대군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호란 때 척화하고 문주산 밑 두곡에 낙남 은거하여 영남의 절사(節士)라 일컬었다. 인조가 그 명성을 듣고 내자직장에 임명했으나 불응하고, 다시 특명으로 좌랑, 태안현감을 또 효종이 현감에 발령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잠은, 각금당, 포옹, 손우당과 더불어 태백오현이라 칭한다. 영조 때 이조참의에, 순조 때 이조판서에 가증되고 介節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저서로는 두곡집과 실천예기가 전하고 있다.

정문성(鄭文成) 1544~?
字는 해중(諧仲) 본관은 봉화로서 道復의 5대손으로 진사를 하였다.

강 흡(姜 恰) 1602~1671
字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 본관은 진주로서 인조 8년에 진사하고 병자호란을 당하여 굴욕적인 항복을 슬퍼하며 초야에서 우국충정을 달랬다. 1637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1657년 세자 익위사 세마 부솔 등 역임. 효행으로 남구만이 추천하여 성현도찰방, 음산현감을 역임했다. 어느 해 우역질이 심하여 농우가 많이 죽어가 농사를 그르칠 위기에 처하자 공이 봉급을 털어 소를 사들여 작농케 하니 관찰사 이상전이 선정을 왕에게 보고하여 산음현감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홍두곡, 각금당, 정포옹, 손우당과 생사지교로서 함께 태백산에 은거하니 세상 사람들이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이라 내렸고 잠은집이 간행되었다.

금원형(琴元亨)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부사 문곡의 후예이다. 성종 14년에 진사를 하였다.

김창조(金昌祖) 1581~l637
字는 효언(孝彦) 호는 장암(藏庵) 본관은 풍산으로 현감 대현의 아들이다. 선조 때 진사하여 인조 때 참봉 도사를 역임, 국가의 기강확립을 위하여 여씨향약을 실시케 함에 도약정(都約正)이 되어 도리를 잘 준수하여 실천하였다. 청암 찰방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안방준이 의병을 인솔하여 남한산성을 향하여 가므로 俸米를 내어 군량을 도왔다. 왕이 항복함을 듣고 사직하고 돌아오다가 졸하니 광주목사 권준과 이덕양이 옷을 풀어 염하고 전라감사가 부전을 내어 운구하였다.

김주국(金柱團) 1586~l657
字는 임대(壬大) 본관은 안동으로서 구전의 子이다. 광해군 때 생원을 하였다.

금시해(琴是諧) 1587~l668
字는 극성(克成) 호는 아양헌(峨洋軒)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의의 후예 광해 1년에 생원하고 혼조시대에 증오감을 느껴 대과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초야에서 학문연구와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문집이 전한다.

김병기(金炳著) 1845~1895
字는 국경(國莖) 본관은 안동으로 생원하고 좌랑을 역임하였다.

홍 협(洪 協)
광해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주한(金柱漢) 1603~l680
字는 의로(倚老) 본관은 안동으로서 선조 때 생원을 하였다.

금대수(琴大遂) 1576~?
자는 형백 (亨伯) 본관은 봉화로서 광해 8년에 진사를 하였다.

박안흠(朴安欽)
字는 君敬이고 號는 南軒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瑮의 아들이다. 인조 때 생원하고 문망이 높았다.

김 율(金 瑮)
호는 천유당(天有堂) 인조 때 진사를 하였다.

박 돈(朴 燉) 1592~1627
字는 회이(晦而) 호는 봉은(鳳隱) 본관은 반남으로서 낙한정의 증손으로서 광해 때 생원하고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홍준형(洪俊亨) 1606~l666
字는 언겸(彦謙)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남양(土洪) 휴휴당 충정공 후예로서 인조 때 진사를 하였다. 매헌집이 전한다.

하소지(河紹地)
진사를 하고 장인인 쌍송정으로부터 종과 토지를 분배받았다. 잘 간직하여 자손에게 전하라는 증인 2명의 수결증서가 있다.

유형립(柳亨立)
인조 때 진사를 하였다.

여상정(余尙珽) 1601~?
字는 덕음(德音) 선조 때 생원을 하였다.

홍도형(洪道亨)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신 환(申 瓛)
호는 풍암(楓巖) 본관은 평산으로서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금이고(琴以古) 1571~1644
字는 정여(靜如)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儀의 후예로 인조 5년에 생원을 하였다.

금순고(琴純古) 1587~l644
字는 박여(樸如)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儀의 후예이다. 인조 11년에 생원을 하였다.

조이주(趙以周)
본관은 한양으로서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추길(金秋吉) 1603~l681
字는 차설(次說) 호는 학정(鶴汀) 본관은 의성으로서 宇宏의 후이다. 선조 8년에 생원하고 수직으로 첨지중후부사를 제수 받았으며 팔오헌 聲九의 귀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김 강(金 鋼) 1609~1668
字는 치정(致情) 호는 오수(迃叟) 본관은 선성으로서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병자호란 때 五聖人의 위패를 피난시켜 有衛之功을 세웠다. 저서로는 오수집이 전한다.

홍우형(洪遇亨)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남형회(南亨書)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남몽오(南夢驚) 1528~?
字는 景祥 호는 삼송당(三松堂) 본관은 영양으로서 인조 때 진사를 한 뒤 서당을 세워 인근 선비들을 모아 가르치니 제자들이 70여 명이었고 그 중에는 김개국, 박선장, 금복고, 김영조, 권준신 등이 당세(當世)에 이름이 높았다. 소고 박 선생의 剛州比里南天子의 句가 있으며 퇴계의 제자로서 唱酬詩篇도 있다. 저서로는 문집이 전한다.

금양중(琴養中) 1603~l651
字는 유달(幼澾) 본관은 봉화로서 椅의 후손이다. 인조 13년에 생원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심전력하여 사림의 추앙을 크게 받았다. 유고가 있다.

금양령(琴養靈) 1605~l650
字는 유안(幼安) 본관은 봉화로서 인조 11년에 진사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금치겸(琴致謙) 1616~l601
字는 광길(光吉)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인조 때 진사를 하였다.

금종로(琴宗路)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로서 정조 1년 정유(丁酉)에 진사를 하였다.

김주열(金株烈) 1624~l684
字는 원숙(元淑) 호는 청휴제(淸休齊) 본관은 안동으로서 정조 원년 정유에 진사를 하고 현감을 하였다.

김휘벽(金輝壁) 1628~l650
字는 숙제(叔帝) 호는 매석(梅石) 본관은 풍산으로서 진사하고 참봉을 하였다.

김양열(金揚烈) 1624~l703
字는 극소(克紹) 호는 청휴제(淸休齊) 본관은 안동으로서 효종 때 생원하고 저서로는 문집이 전하고 있다.

이 우(李 鍝)
효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 연(權 瑌)
광해 8년에 진사를 하였다.

금시정(琴是正) 1596~1627
字는 자심(子心) 본관은 봉화로서 매헌 보(輔)의 손자이다. 광해 10년에 진사를 하였다.

정 신(鄭 伸)
호는 보졸당(保拙堂)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정 숙(郵 俶)
인조 때 생원을 하였다.

임 확(任 碻) 인조때
字는 노유(魯攸) 호는 은무(隱霧) 본관은 풍천으로서 인조 때 생원하여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연구에만 노력하였다.

박안흠(朴安欽)
효종 때 생원을 하였다.

성갑하(成甲夏) 1621~l685
字는 경여(慶餘) 본관은 창녕으로서 효종 때 진사하고 여러 번 관직에 추천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박시춘(朴施春) 1629~l654
字는 영백(榮伯)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 善長의 후예로서 효종 때 생원을 하였다.

박시창(朴施昌) 1630~l695
字는 장유(長儒) 호는 쌍백당(雙白堂)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 善長의 후예이다.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금서규(琴瑞奎) 1632~l708
字는 문휘(文微)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儀의 후이다. 숙종 3년에 진사하고 초야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사색으로 지냈다.

권두인(權斗寅) 1643~l719
字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5대손이다. 숙종 원년에 진사를 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니 그 소문이 널리 퍼져 상신 권대운(權大運) 등이 추천하여 참봉, 정랑, 현감 등 요직을 거치고 귀향하였다.
문장은 당대 일인자로 알려져 요학(僚鶴)이라 일컬어 一世의 유종(儒宗)이었다.
하당, 창설은 유곡의 대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하당집 5책이 전한다.

구광두(具光斗)
字는 치극(穉極) 호는 선오(仙梧) 본관은 능성으로서 진사를 하였다.

박시우(朴施雨) 1620~l689
字는 시약(時若) 호는 동해옹(東海翁) 본관은 무안으로서 현종 때 생원하고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만 일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김한두(金漢斗)
字는 만첨(萬瞻) 본관은 광산으로서 현종 때 진사를 하였다.

성대하(成大夏) 1647~l724
字는 하경(夏卿) 호는 단애(丹厓) 본관은 창영으로서 계서 이성의 아들이다. 숙종 계유 때 생원하고 학문 연구에만 극력 노력하였다.

김한태(金漢泰)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 면(金 沔) 1649~1691
字는 주덕(周德) 본관은 의성이며 황파의 후로서 생원을 하였다.

김상광(金相光) 1674~1746
字는 지중(智仲) 호는 만우(晩遇) 본관은 의성으로서 면의 장자이다. 숙종 때 생원하고 일천으로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이 속(李 㻋) 1651~?
본관은 전주로서 숙종 8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 압(李 玾)
본관은 전주로서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광정(李光庭) 1677~1760
字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본관은 원주로서 도사 時奄의 손자이고 갈암의 문인이다. 영조 때 진사하고 탁행으로 우익위를 역임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면서 도학의 실천가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당시 영남유림의 종구로서 대문장가라 영남 어느 집을 막론하고 이분의 글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저서로는 눌은집이 전하고 있다.

금세겸(琴世謙) 1607~1652
字는 위길(撝吉) 본관은 봉화로서 인조 8년에 진사하고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금치겸(琴致謙) 1616~1661
字는 광길(光吉)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인조 13년에 진사하고 학문연구에 정진하였다.

김경온(金景溫) 1692~l734
字는 광보(光甫) 호는 단사(丹砂)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영조원년에 진사한 후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뾰족한 바위와 시원한 샘을 가르쳐주면서 “이곳이 그대가 살 곳이다.” 하였는데 바로 거기가 丹砂峽이다. 여기서 은거 중 어사가 지나다가 추천하여 건원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했고 저서로는 단사집이 전한다.

김서절(金瑞節) 1695~1745
字는 상옹(祥翁) 본관은 풍산으로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경철(金景澈) 1698~l764
字는 유청(幼淸) 호는 서파(西坡)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손자이다. 숙종 때 생원하고 추천으로 현감을 역임하였고, 유고가 있다.

김좌원(金左源) 1711~l752
字는 백봉(伯逢) 본관은 풍산으로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강이일(姜履一) 1677~l727
字는 탄지(坦之) 본관은 진주로서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아들 潤의 귀로 가선대부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권두광(權斗光) 1653~1726
字는 명언(明彦) 호는 일로당(逸老堂)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제의 5대손이다. 영조 4년에 진사한 다음 춘양으로 전거하여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유종유(柳宗儒)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 담(李 燂) 1608~1701
字는 명윤(明允) 본관은 우계로서 숙종 때 생원을 하고 군자감 정에 이르렀다.

김지강(金至剛) 1642~?
字는 자유(子柔) 본관은 안동으로서 인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지대(金至大) 1663~l743
字는 대재(大哉) 호는 기암(踦庵) 본관은 안동으로서 현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성유(金聲裕) 1645~l691
字는 덕주(德周) 본관은 의성으로서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유종휴(柳宗休)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금성심(琴聖心)
字는 희백(希伯) 본관은 봉화로서 忠達의 손자이다. 숙종 때 진사하고 오직 독서로서 평생을 지냈다.

정태형(鄭泰亨)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박진갑(朴震甲) 1651~l685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본관은 무안이다.

김여용(金汝鎔)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여능(金汝錂) 1683~1750
字는 부미(夫美) 호는 분곡(賁谷) 본관은 의성으로서 개암후이고 聲裕의 아들이다.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여당(金汝鏜) 1667~1737
字는 천집(天集) 호는 졸암(拙庵) 본관은 의성으로서 진사를 한 후 손자 한동(翰東)의 貴로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김 성(金亻星) 1661~1724
字는 군석(君錫) 본관은 풍산으로서 현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경찬(金景澯) 1680~1772
字는 원증(元증) 호는 송학(松鶴)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손자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유춘영(柳春榮)
호는 석계(石溪)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태운(金泰運) 1676~l743
字는 상원(相元) 본관은 안동으로서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동완(李棟完) 1651~l726
字는 국촌(國村) 호는 모산(茅山) 본관은 전주로서 효령대군의 후예이며 숙종 때 진사한 뒤 벼슬길을 단념하고 청순한 덕행으로 사림의 중망과 존경을 받았다. 선생인 허미수가 보내온 액서에 “마음을 바로 지켜 행동을 망령되이 하지 말며 입을 잘 다스리고 행동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이니라.” 하여 이 세 가지를 굳게 지켰다 하여 三守堂이라 일컬었다.
당세의 대유학자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모산집이 전한다.

김광두(金光斗)
字는 사능(士能) 본관은 광산으로서 숙종 때 생원을 하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김광국(金光國)
호는 육인제(六忍齊)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금명지(琴命擊) 1683~?
字는 정경(正卿) 호는 백뢰(白瀨)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儀의 후예이다. 숙종 때 생원하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유만화(柳晩華)
호는 소헌(素軒) 본관은 전주로서 진일제의 후예이며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진화(李鎭華) 1677~l754
字는 장세(長世) 호는 묵암(黙庵) 본관은 우계로서 호군 基定의 아들로 생원을 하고 유고가 있다.

조이주(趙以周)
본관은 한양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한여원(韓汝元)
본관은 청주로서 생원을 하였다.

유익화(柳益華)
본관은 전주로서 진일제의 후예이며 숙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이단(李以檀) 1691~1731
字는 군방(君邦) 본관은 우계로서 錫鉉의 아들로 생원을 하였다.

김기현(金基賢)
숙종 때 진사를 하였다.

금운심(琴運心) 1706~l775
字는 기중(機仲) 본관은 봉화로서 是諧의 현손이다. 경종 때 생원하고 독서와 더불어 유연자적하였다.

김경헌(金景瀗) 1699~1744
字는 유증(幼澄) 호는 송암(松庵)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손자이다. 숙종 때 진사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당쟁으로 정국이 혼란함으로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저서로는 송암육집이 전한다.

권 시(權 蓍) 1678~1749
字는 덕원(德圓)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제의 후로 선암의 손자이다. 춘양에 들어가서 손수 전답 백여 두락을 개간했을 뿐 아니라 마당에서 기와를 만들어 매일 소죽을 쑤는 아궁이에 구워내어 口字 개와집을 장만하여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주경야독으로 숙종 39년에 생원하고 평생 근면, 성실로 일관했다.

권 확(權 獲) 1684~1757
字는 선경(先卿) 호는 서수(西水)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 빈(權 濱) 1685~1753
字는 효이(孝而) 호는 삼정(三亭) 본간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하고 후에 사복시정을 하였다.

권 천(權 蒨) 1692~1760
字는 자화(子華)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9년에 생원을 하였다.

권 우(權 萭) 1692~1756
字는 공보(工甫) 호는 덕계(德溪)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9년에 생원을 하였다.

권 급(標 芨) 1698~1781
字는 기중(企仲) 호는 서봉(西峯)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8년에 생원을 하였다.

권 면(糧 葂) 1698~1753
字는 일지(逸之)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종 11년에 생원을 하였다.

금경제(琴敬躋)
字는 경승(景昇) 호는 성헌(惺軒)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 儀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박경지(朴敬祉) 1677~l754
字는 명휴(命休) 호는 만회당(晩悔堂) 본관은 무안으로서 동해옹 施雨의 손이다. 영조 때 생원하고 저서로는 역학계몽(易學啓蒙), 중용도설(中庸圖說), 훈회후생(訓誨後生)과 만회문집이 전한다.

김서석(金瑞錫) 1693~l787
字는 여명(汝明)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진사하고 수직으로 자헌대부를 하였다.

김서응(金瑞應) 1695~1774
字는 응서(應瑞)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진사를 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권 신(權 莘) 1698~1776
字는 천민(天民)호는 병암(甁庵)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16년에 생원을 하였다.

권정태(權正泰) 1686~l739
字는 통경(通卿) 호는 눌암(訥庵)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숙종 39년에 생원을 하고 저서로는 눌암집이 간행되었다.

권정시(權正始) 1692~l765
字는 신중(愼仲) 호는 도어제(陶漁齊)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진사하였다. 도어재집이 있다.

권정운(權正運) 1713~l778
字는 회여(會汝) 호는 도사(陶沙)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홍 경(洪 儆) 1695~1730
字는 경겸(敬兼) 본관은 남양으로서 영조 6년에 생원을 하였다.

강 숙(姜 潚) 1709~1781
字는 사청(士淸) 호는 유은(柳隱) 본관은 진주로서 영조 무자(1768)년에 생원하고 동왕을미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영릉참봉을 제수했으며 저서로는 유은집이 간행되었다.

권정경(權正兢) 1725~l757
字는 영경(英卿) 호는 일제(一齋) 본관은 안동으로 생원을 하였다. 유고가 있다.

김택동(金宅東) 1708~l778
字는 성서(聖瑞) 호는 일지와(一枝窩)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증손이다. 영조 때 장원으로 생원을 하고 일천으로 현감을 했다. 유고가 전한다.

김재소(金在紹) 1743~1827
字는 화백(華白) 호는 백청(白廳)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정조 때 장원으로 생원하고 부호군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유 수(柳 燧)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여 극(余 極)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성혜인(成惠寅) 1703~l765
字는 춘보(春甫) 호는 춘헌(春軒) 본관은 창녕으로서 부용당의 4대손. 영조 때 생원하고 태학관에서 조항언 등이 공자에게 선성왕호를 버리자고 청하거늘 홀로 상소하여 조의 소가 윤허되지 못하였고 그때 세자가 대리하니 곧은 논의가 기울어져 유생 강유들이 상소, 학당을 홀로 잘 운영하여 발전시키니 왕이 옳게 했다고 표창을 하였다.

성거인(成巨寅) 1690~1760
字는 인상(寅祥) 본관은 창녕으로서 계서(溪西)의 증손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이태춘(李泰春)
호는 춘촌(春村) 영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준원(金浚源)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익원(金益源) 1715~l756
字는 겸지(謙之) 본관은 풍산으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행원(金行源) 1713~1778
字는 사즉(思則) 호는 오은(梧隱)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탁(姜 탁) 1776~?
字는 경백(警百) 본관은 진주로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택(姜 澤) 1747~?
字는 사원(士原) 본관은 진주로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정통(權正通) 1706~1789
字는 태경(泰卿)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정택(權正宅) 1706~l765
字는 사안(士安) 호는 소산(小山)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진사하고 현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소산집이 간행되었다.

권정웅(權正雄) 1708~l756
字는 사긍(士兢) 호는 춘포(春浦)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3등으로 진사하고 현령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권정흠(權正欽) 1713~1778
字는 자경(子敬) 호는 간암(艮嵒)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진사하고 저서로는 간암집이 전하고 있다.

김희용(金熙鏞) 1767~1835
字는 치봉(致鳳) 호는 함진(涵鎭)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생원을 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김서필(金瑞必) 1659~?
字는 흥옹(興翁) 호는 구물당(九勿堂)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진사하고 통정대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김서길(金瑞吉) 1728~1799
字는 선옹(善翁)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이명(金爾銘) 1672~1746
字는 성경(聖警) 본관은 안동으로서 영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유현(金有鉉) 1696~l756
字는 玉汝, 호는 회와(晦窩)이다. 영조 때 진사를 하였다.

변상수(邊尙綏) 1696~?
字는 유원(柔遠) 호는 옥성헌(玉成軒) 본관은 원주로서 만취당의 후이다. 영조 때 진사하고 눌은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후진을 배출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옥성집이 전한다.

권택규(權宅揆) 1694~l760
字는 이서(以緖) 본관은 안동으로서 영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양균(金養均)
字는 초평(初平) 본관은 안동으로서 영조 때 진사를 하였다.

홍해숭(洪海崇)
호는 경암(警庵)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박 급(朴 圾) 1726~1763
字는 명서(明敍)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금필항(琴必恒)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상탁(金相鐸) 1739~l799
字는 희주(希周) 본관은 풍산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김상일(金相馹) 1746~1803
字는 필승(必昇) 본관은 풍산으로 생원을 하였다.

김상호(金相鎬) 1747~l781
字는 숙경(叔京) 본관은 풍산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김정원(金鼎源)
정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종봉(金宗鳳) 1763~l823
字는 중덕(仲德) 호는 영지당(靈芝堂) 본관은 풍산으로서 정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봉수(金鳳銖) 1776~l836
字는 필부(畢父) 본관은 의성으로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찬수(金燦銖) 1797~l875
字는 중양(仲襄) 호는 기민당(旡憫堂)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진사를 하였다.

권사엄(權思儼) 1727~1801
字는 성약(聖若) 호는 오사옹(五斯翁)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사회(權思晦) 1741~1810
字는 맹화(孟華)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정조 때 장원으로 진사하여 증 비서승을 증직 받고 문집이 발간되었다.

김 영(金 永) 1750~1812
字는 응오(應五) 본관은 의성으로서 승지 건수의 아들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도만(金道萬) 1753~l803
字는 미영(美永) 호는 수동(守東) 본관은 김녕으로서 진사를 한 뒤 사복시정을 역임하였다.

김희명(金熙命) 1753~l817
字는 목지(穆之)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희락(金熙洛) 1766~1803
字는 명숙(明淑) 호는 고식헌(故寔軒)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이 현손이다. 정조 때 장원으로 생원하고 도산과에 진사한 다음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지평을 지냈다. 저서로는 고식헌 강의 3권이 전하고 있다.

김희질(金熙質) 1766~l853
字는 은수(恩叟)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영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철수(金喆銖) 1792~1827
字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하고 1868년 서원폐철령 때 유건을 찢어 상위에 던져 이로 인하여 충청도 문의(文義)에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동헌록과 노원집이 전한다.

김규명(金奎命) 1832~1899
字는 경우(景佑) 본관은 풍산으로서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득려(金得礪)
字는 사섬(士銛) 호는 잠계 (潛溪) 본관은 광산으로서 진사를 하였다.

김백지(金百祉)
字는 의지(宜之) 호는 휴산(休山) 본관은 광산으로 진사를 하였다.

김병기(金炳蓍)
字는 국경(國莖) 본관은 안동으로서 진사를 하고 좌랑을 역임하였다.

김항수(金恒銖) 1752~l843
字는 중진(仲鎭)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병수(金昺銖) 1801~l877
字는 기언(基彦)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연(金宗煙) 1764~l816
字는 군백(君百) 본관은 풍산으로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경(金宗慶) 1768~l798
字는 원초(元初) 본관은 풍산으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철(金宗哲) 1755~1826
字는 사길(士吉) 본관은 풍산으로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영(姜 泳) 1783~
字는 덕함(德涵) 호는 낙오헌(樂五軒) 본관은 진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상용(金相鏞) 1779~l845
字는 치성(穉成) 호는 용수(鏞叟) 본관은 풍산으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욱(金宗煜) 1779~l865
字는 이회(而晦) 본관은 풍산으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휴(金宗烋) 1783~l866
字는 성호(聖浩) 호는 서소(書巢) 본관은 풍산으로 순조 22년에 진사하고 철종 6년에 영남유생들이 장헌세자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를 공이 초하였다. 저서로는 서소집이 전한다.

김종희(金宗熙)
본관은 풍산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종걸(金宗杰) 1817~?
字는 문흥(文興) 호는 삼백제(三百齋) 본관은 풍산으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사호(權思浩) 1733~l806
字는 기천(基天) 호는 유양(酉陽) 본관은 안동으로서 두경의 후로 생원을 하고 현감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실기가 전한다.

권사협(權思浹) 1753~l832
字는 사선(士善) 호가 취죽(醉竹) 안동인으로 충재의 후이며 정조 때 생원하여 유고가 있다.

권사영(權思永) 1757~l820
字는 효칙(孝則) 호는 가이헌(可以軒)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하여 증호조참판하고 유고가 있다.

권사양(權思襄) 1756~l834
字는 성유(聖猷) 호는 석암(石巒),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이도(權履度) 1747~1808
字는 신지(身之)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취도(權就度) 1749~l786
자는 이장(而章) 호는 백은(白隱)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고 증이조참판을 하였다.

김진수(金振銖) 1782~l837
字는 성집(成集)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재정(金在鼎) 1785~l860
字는 상지(象之) 본관은 의성으로 생원과 참봉을 하였다.

김백지(金百祉)
字는 의지(宜之) 호는 휴산(休山) 본관은 광산으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정지간(鄭趾簡)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일(姜榏) 1783~?
字는 겸지(謙之) 호는 겸제(謙齊) 본관은 진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목(姜 穆) 1795~?
字는 敬之, 호는 晩松이다. 본관은 진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수환(姜遂煥) 1786~?
字는 성언(成彦), 호는 노기헌(老寄軒)이다. 본관은 진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수목(姜守睦)
본관은 진주로서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필우(姜必祐) 1799~?
字는 여순(汝純)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 일(姜 鎰)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성언극(成彦極) 1730~1786
字는 입여(立汝) 호는 전백당(傳白堂) 본관은 창녕으로 계서의 5대손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전백집이 전하고 있다.

성언근(成彦根) 1770~1848
字는 숙회(叔晦) 호는 가은(稼隱) 본관은 창녕으로서 계서의 5대손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주경야독으로 정조 때 생원하고 정미년에 문효세자가 급히 사망하니 왕대비의 밀지로 공이 상소하니 왕이 영남은 원래 충절의 고장이라더니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가은집 2권이 전한다.

김상유(金相儒)
정조 때 진사를 하였다.

이태상(李泰相)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사문(權思聞) 1734~l800
字는 유문(幼聞) 호는 송신제(松身齊)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송신제집이 전한다.

김희설(金熙卨) 1739~l812
字는 현수(玄叟) 호는 학문(鶴門)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 장원으로 생원함.

김희명(金熙命) 1753~l817
字는 목지(穆之)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희소(金熙紹) 1758~l836
字는 백옹(伯雍) 호는 문천(文泉)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정조 때 생원을 하였다. 저서로는 문천집이 전한다.

김희질(金熙質) 1768~1815
字는 은수(殷叟)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희승(金熙昇) 1758~l832
字는 숙경(叔擎) 호는 해중(海中)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재헌(金在憲) 1773~1811
字는 치원(穉原)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재공(金在恭) 1782~l837
字는 대경(大競) 호는 유헌(儒軒)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고 유고가 있다.

김정수(金正銖) 1799~l860
字는 두수(斗銖)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장원으로 진사를 하였다.

배상규(裵相逵) 1765~1826
호는 갈벌(葛茂) 字는 翼之, 본관은 흥해로서 순조 때(1804) 생원을 하였다.

권의도(權義度) 1764~1804
字는 경시(敬持) 본관은 안동, 충재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운도(權雲度) 1768~l842
字는 대달(大達)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상현(金相玄)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수중(姜守重) 1786~?
字는 경약(景約) 본관은 진주로서 생원을 하였다.

강시환(姜始煥) 1786~?
字는 유수(有修) 호는 백록(白麓) 본관은 진주로서 생원을 하였다.

강 직(姜 稷) 1795~?
字는 경지(敬之) 호는 만송(晩松) 본관은 진주로서 생원을 하였다.

강 욱(姜 ?) 1866~?
字는 덕일(德一) 호는 요육제(了育齋) 본관은 진주로 진사를 하였다.

황지임(黃志任)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 일(權 馹) 1791~?
字는 회중(晦仲) 호는 만호(晩湖) 본관은 안동으로 동강 士温의 9세손으로 순조 때 진사를 하고 저서로는 만호집이 전한다.

권계하(權啓夏) 1790~1818
字는 혜언(惠彦)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순조 때 진사를 하였다.

권재옥(權載鈺) 1783~l852
字는 문상(文相) 호는 다산(茶山)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고 참봉을 하였다.

권재용(權載鏞) 1791~l832
字는 광여(光汝)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택하(權宅夏) 1799~l861
字는 주보(周輔) 호는 수재(修齋) 본관은 안동이며 충재의 후로 현종 때 생원을 하고 음직으로 예안 현감을 하였다.

김두창(金斗昌) 1739~l812
字는 계년(季年) 호는 상초(相樵)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영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동식(金東式)
字는 국경(國卿) 호는 문유제(文有齊) 본관은 안동으로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우준(權遇準)
字는 公伯, 호는 晩開軒으로 본관은 安東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권기준(權起準)
字는 公發, 號는 巽巖으로 본관은 安東이다. 순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갑동(金甲東) 1725~l795
字는 사원(士元) 호는 신곡(信谷)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홍환유(洪煥猷)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홍만유(洪晩裕)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강헌규(姜獻奎)
字는 경수(景受) 호는 농로(農盧)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옥윤(金玉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성종진(成鐘震) 1809~l886
字는 경구(景九) 호는 회산(檜山) 본관은 창녕으로서 언극의 증손,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태황(金泰璜)
호는 도담(道潭)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규헌(金奎獻)
헌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응규(金應奎)
字는 숙문(叔文) 호는 하서(霞棲) 본관은 광산으로서 헌종 때 진사를 하였다.

권익화(權益和)
호는 石棲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심기(權心夔)
字는 子典, 호는 巖齋, 본관은 安東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호수(金浩銖)
字는 원지(源之)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항수(金恒銖) 1752~l843
字는 중진(中鎭)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기수(金驥銖) 1788~l850
字는 공락(公樂)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재천(權載天)
철종 원년(1850. 4. 16) 3등으로 생원을 하였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권재형(權載衡) 1808~l861
字는 平仲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철종 4년에 2등으로 생원을 하였다.

권재혁(權載爀) 1809~1873
字는 경원(景圓) 호는 석서(石棲)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권승하(權承夏) 1807~l890
字는 윤화(允華) 호는 기천(杞泉)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저서로는 기천집이 간행되었다.

권효연(權孝淵) 1829~l874
字는 희증(希曾) 호는 농장(農丈)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철종 9년에 생원하고 고종 9년에 동부도사가 되었다.

강 선(姜 銑) 1846~?
字는 재용(再容) 본관은 진주로서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휘봉(李輝鳳)
호는 난포(蘭圃) 본관은 화산으로 충효당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숙로(李璹魯)
字는 순원(順元) 호는 약사(略史) 본관은 진성으로서 송재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간부(金侃浮) 1812~l882
字는 중진(仲鎭)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광수(金洗銖) 1810~l851
字는 원지(源之)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황서한(黃舒漢)
字는 치순(穉醇) 호는 백천(白川) 본관은 창원으로 철종 때 생원을 하였고 저서로는 백천집이 전한다.

조시성(趙時成)
字는 사원(士元) 호는 두남(斗南) 본관은 한양으로서 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휘약(金輝鑰)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휘유(金輝鍮)
字는 옥여(玉汝) 호는 태고제(太古齊) 본관은 선성으로서 진사를 하고 저서로는 태고집이 발간되었다.

권재선(權載銑)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승로(李昇魯)
字는 성일(聖日) 호는 백초(白樵) 본관은 진성으로서 송재의 후이다.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기수(金基銖)
字는 형숙(衡叔)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회수(金會銖) 1804~l847
字는 이극(而極)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도수(金度銖) 1807~l840
字는 정백(貞伯) 호는 묵용제(黙容齊)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매수(金邁銖) 1809~?
字는 진오(進吾) 호는 좌해(左海)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헌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창수(金昌銖) 1843~?
字는 사헌(士憲)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철종 때 진사하고 통정대부를 하였다.

김일영(金一永) 1810~l875
字는 응오(應五)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고 晩海 建銖의 장남이다.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달영(金達永) 1828~l900
字는 응삼(應三) 호는 죽남(竹南)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로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진락(金震洛) 1819~l876
字는 양숙(養淑) 본관은 풍산으로 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중연(金重淵) 1827~l864
字는 천경(天卿) 본관은 풍산으로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명화(權鳴和)
호는 칠은(七隱) 본관은 안동으로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강 유(姜 鎏) 1858~?
字는 원달(源達) 호는 창제(蒼濟)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강하영(姜夏永)
字는 충오(忠五)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진주로서 철종 때 생원을 하고 참봉을 거쳐 혜민원 주서관을 하였다.

홍 유(洪 鎏)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박종희(朴宗羲)
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교영(李敎英) 1823~l895
字는 화여(華汝) 호는 귀은(歸隱)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의 후이다. 고종 13년에 생원하고 익종참봉 상의원주부를 거쳐 청송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귀은집이 발간되었다.

성 영(成 瀯) 1830~1892
字는 여익(汝翊) 호는 오은(梧隱) 본관은 창녕으로서 권백당의 4대손으로 독행 수신하여 철종 때 진사하였다.

김정락(金貞洛) 1801~?
字는 성초(聖初) 본관은 풍산으로 생원을 하였다.

김호수(金浩銖) 1810~1851
字는 원지(源之)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순조 때 생원을 하였다.

김중태(金仲態)
字는 공망(公望) 호는 득천(得川) 본관은 광산으로서 진사를 하였다.

김태수(金泰水)
字는 경천(景天) 호는 정와(晶窩) 본관은 광산으로 진사를 하였다.

김진수(金震銖) 1827~l896
字는 치춘(穉春)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이다. 철종 1년에 진사하고 음보로 돈녕부도정을 역임하였다.

김덕영(金悳永) 1848~1907
字는 중일(重一) 호는 강제(剛齊) 본관은 의성으로 개암의 후이다. 성균생원을 하였다.

김태림(金泰林) 1831~l878
字는 백란(白鸞) 호는 운촌(雲村) 본관은 의성으로 팔오헌의 후로 생원을 하였다.

김대규(金大奎)
호는 예은(禮隱)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강 회(姜 澮) 1888~?
字는 구여(九汝) 호는 법우(法愚)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강 복(姜氵馥) 1888~?
字는 덕여(德汝) 호는 월계(月溪)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강호중(姜鎬重) 1888~?
字는 성장(聖章)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교림(金敎林) 1865~1938
字는 인직(仁直) 호는 회남(晦南)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하고 참봉을 하였다.

강춘원(姜春元)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성발교(成發敎) 1828~1892
字는 진수(振秀) 호는 정암(晶菴) 본관은 창녕으로서 계서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고 필법이 뛰어났다.

성한우(成漢羽)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성주영(成周永) 1831~l901
字는 기팔(箕八) 호는 죽고(竹皐) 본관은 창녕으로 惠寅의 4대손으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강준영(姜準永) 1891~?
字는 계옥(系玉)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은화(李殷和)
호는 만성(晩惺)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홍종선(洪鐘善)
호는 일우(一愚)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정지성(鄭之誠) 1813~l891
字는 여운(汝運) 士誠의 8대손 헌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병두(李秉斗) 1814~l896
字는 원중(元仲) 호는 둔사(遯沙) 본관은 우계로 헌종 12년에 진사를 하고 학덕이 늦게야 알려져 別思典으로 부호군이 되고 이어 가선대부 동지돈령부사에 올랐다. 저서로는 둔사집이 전한다.

김규명(金奎命) 1832~l899
字는 경우(景佑) 본관은 풍산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정남규(鄭南圭) 1832~l900
字는 안도(安道) 호는 용암(龍巖) 본관은 청주로서 지성의 아들로 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석우(李錫寓)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석찬(李錫瓚) 1832~?
본관은 전주로서 생원을 하였다.

이승표(李承標)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승철(李承喆)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병필(李秉弼)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이인상(李麟相) 1874~?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황연한(黃淵漢) 1841~?
字는 치헌(穉憲) 호는 소제(素齊) 본관은 창원으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황은영(黃恩英)
字는 효백(孝伯) 본관은 평해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황중연(黃中鍊) 1829~?
字는 덕휘(德輝) 호는 벽은(碧隱) 본관은 창원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황중연(黃中演)
字는 성읍(聖揖) 본관은 창원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구광두(具光斗)
字는 치극(穉極) 호는 선오(仙梧) 본관은 능성으로서 진사를 하였다.

조현익(趙顯翼) 1826~l902
字는 세경(世卿)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한양으로서 주경야독하여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저서로는 죽헌집이 발간되었다.

이중찬(李中瓚) 1853~l929
字는 贊玉, 호는 於山이다. 본관은 眞城이며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배상선(裵相善)
호는 우제(愚齋)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휘진(金輝晉)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 석(金㙽)
字는 군석(君奭) 호는 석홍(石虹) 본관은 선성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저서로는 석홍집이 전한다.

김종원(金鐘遠)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복연(金福淵)
호는 지암(芝庵)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강 익(姜榏) 1843~
字는 백겸(百兼) 본관은 진주로서 헌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건영(金建永) 1848~l905
字는 극부(極夫) 호는 해관(海觀) 본관은 의성으로서 聲厚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고 광무 3년 壯祖典禮 때 왕에게 士林를 대표하여 만인소를 제출하였다. 참봉을 하였다.

김담영(金聃永) 1848~1905
字는 이로(耳老) 호는 죽옥(竹玉)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고 참봉을 하였다.

김정영(金鼎永) 1825~l886
字는 성실(聖實) 호는 용호(龍湖)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홍윤(金弘潤)
字는 원택(元澤) 호는 탁천(濯川) 본관은 광산으로 생원을 하였다.

권찬수(權瓚銖) 1849~l914
자는 찬옥(贊玉)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권세연(權世淵) 1836~l879
字는 조원(祖源) 호는 성대(星臺) 본관은 안동으로서 창설재의 주손이다. 고종 7년에 진사하고 곧 숭능참봉에 임명되었다.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게 되자 1896년에 회갑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키는 그의 격문을 보고 수천 명이 모여들어 안동창의 대장에 추천되었다. 중군장에 권재호, 포대장에 김재중을 임명하고 안동을 비롯하여 도내 각처에 출정하여 많은 공을 세우니 영남 의병의 효시였다. 예안 창의대장 이만도, 영양 창의대장 조영기,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 등과 합동작전을 세웠다. 저서로는 성대문집이 전한다.

권재철(權載轍) 1826~l886
字는 성철(聖轍)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권돈연(權敦淵) 1845~1920
字는 예겸(禮謙) 호는 遯庵 본관은 안동으로 참판 泳夏의 넷째아들 평암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를 하고 도사를 거쳐 감조관을 역임하였다.

박홍화(朴弘禾) 1856~l932
字는 주경(周卿) 본관은 무안으로 수서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유현(金有鉉)
字는 옥여(玉汝) 호는 회와(晦窩) 본관은 안동으로서 생원을 하였다.

신태로(申泰魯)
본관은 평산으로 조선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유석조(柳碩組)
본관은 전주로서 성종 때 생원을 하였다.

유성규(柳成奎)
본관은 전주로서 貞立의 후이다. 순조 때 진사를 하였다.

김중웅(金仲熊)
字는 공망(公望) 호는 득천(得川) 본관은 광산으로 생원을 하였다.

유의화(柳義和)
본관은 전주 宗澤의 아들로 숙종 을묘에 진사하였다.

김한태(金漢泰)
字는 종지(宗之) 본관은 광산으로 생원을 하였다.

이휘봉(李揮鳳)
호는 난포(蘭圃) 본관은 화산으로 진사를 하였다.

권상덕(權相德) 1846~l909
字는 경맹(景孟) 호는 동석(東石)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과 진사를 하였다.

권상중(權相重) 1854~1913
字는 공근(公謹) 호는 정사(晶沙)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고종 때 진사와 생원을 하였다.

권상호(權相浩) 1853~l887
자는 맹연(孟淵)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철연(權喆淵) 1874~l951
字는 성길(聖吉) 호는 황암(惶庵)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고 집에는 언제나 문인묵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김이평(金履坪)
字는 경옥(景玉)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치근(金致根) 1846~1905
字는 화여(華汝)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금용두(琴龍斗)
본관은 봉화로 고종 때 친사를 하였다.

김규영(金奎永)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규헌(金奎憲) 1817~l872
字는 경범(景範) 호는 수월헌(水月軒) 본관은 풍산으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병호(金秉浩) 1856~?
字는 맹선(孟善) 본관은 풍산으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이종건(李鐘建) 1854~l892
字는 명수(鳴叟) 호는 죽오(竹塢) 본관은 우계로서 고종 21년에 생원을 하였다.

임병준(任炳準)
字는 사범(士範) 호는 만송재(晩松齋) 본관은 풍천으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홍재혁(洪在赫)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안장환(安章煥)
호는 지재(志齋) 본관은 죽산으로 고종 때 진사하고 몸을 닦는 데에 8조가 있고 집에 있음에 9조를 정해두고 실천하여 모두가 우러러봤다.

김두흠(金斗欽)
호는 매암(梅菴)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박승진(朴勝振)
호는 청하(聽荷)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중호(金重鎬) 1871~1948
字는 세경(世卿) 호는 석롱(石聾) 본관은 의성으로 황파의 후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저서로는 석롱집이 있다.

김진원(金進源) 1872~l945
자는 해응(海應) 호는 석아(石我) 본관은 의성으로 황파의 후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석아문집이 간행되었다.

권직현(權直鉉)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박기선(朴基善)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배희목(裵熙穆)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강 육(姜 淯) 1873~?
字는 권원(卷遠) 호는 정재(正齋)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강 훈(姜 鑂) 1874~?
字는 순오(舜五) 호는 백농(白農) 본관은 진주로서 진사를 하였다.

강 심(姜 鐔) 1876~?
字는 대경(大卿) 호는 몽회(夢淮)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김덕현(金德鉉)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병세(金秉世) 1874~?
字는 주현(周顯) 본관은 풍산으로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권용진(權瑢進)
字는 密玉, 본관은 안동이다. 고종 때 생원을 하였다.

송학수(宋學洙) 1880~1958
字는 계행(季行) 호는 침천(枕泉) 본관은 여산으로 고종 때 진사를 하였다.

김 훈(金 勳) 高宗~?
字는 시민(時敏) 본관은 선성으로 진사와 참봉을 하였다.

김득지(金得砥)
字는 석범(碩範) 본관은 영양으로 克行의 아들이며 생원을 하였다.

김시윤(金時潤)
字는 사응(四應) 호는 벽헌(碧軒) 본관은 광산으로 진사를 하였다.

금우열(琴佑烈)
호는 자산(紫山) 고종 22년에 진사하고 통정대부를 하였다. 紫山文集이 있다.

권정화(權鼎和) 1808~l889
字는 中實이고, 호는 醒棲이다. 鈞의 후이고 생원을 했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봉화군사 > 第 16篇 人 物 > 第 3節 司馬(生員·進士)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A101&sMok_Nmbr=190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A101&sMok_Nmbr=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