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안동지역◇유적

[안동의 제사] 李堣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20. 22:46
안동의 제사


36.李 堣


□ 位置 : 安東市 玉井洞 423番地 松齋宗宅
이 종택은 원래 도산면 온혜리에 있었다. 송재선생이 안동부사 재직 당시 종택 부근에 건립하였던 애련정(愛蓮亭)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진된 것을 후손들이 그 정자를 이곳에 복원함과 동시에 정자 뒤편에 종택을 재건하고 종택 후정에 묘우와 영정각(影幀閣)을 이건하였다.

□ 神主
◦ 考位
顯十六代祖考嘉善大夫行戶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神主
◦ 配位
顯十六代祖妣貞夫人月城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1月 18日
◦ 配位 : 1月 8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예종(睿宗) 1년(1469)에 태어나 중종(中宗) 12년(151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명중(明仲)이고 호(號)는 송재(松齋)이며 퇴계(退溪)선생의 숙부(叔父)이다. 성종 23년(149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奉敎), 대교(待敎), 한림(翰林), 전랑(銓郞), 지제교(知製敎), 사간(司諫), 수찬(修撰),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청해군(淸海君)에 봉해졌다.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중종(中宗) 3년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나아가 선정(善政)에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11년에는 특진관(特進官), 형조참판(刑措參判)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강원•경상도 어사(御使)를 지내고, 안동부사(安東府使),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공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공의 시문 중 「隣蹄南江을 건너면서』라는 시와 「딱다구리』라는 시는 우리 나라 2000년 한시사(漢詩史)에서 명시(名詩)로 꼽히고 있다. 공은 정신과 기골(氣骨)이 청수(淸秀)하고, 운치(韻致)가 고원(高遠)하며 온량두제(溫良愷悌)하여 효도(孝道)와 행의(行誼)에 돈독(敦篤)하였다. 특히 재질(才質)이 뛰어나 조정(朝廷)에서 밝게 드러났다.
1512년 관직에서 물러나 장남(長男) 황해도찰방(黃海道察訪) 수령(壽苓), 조카 온계(溫溪) 해(瀣), 퇴계(退溪) 황(滉) 등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시집 《귀전록(歸田錄)》과 《동국사략(東國史略)》2권을 저술하였다. 묘갈(墓碣)은 퇴계선생께서 찬(撰)하였고, 유택(幽宅)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 > 안동의 제사 > Ⅵ. 不遷位祭祀 > 安東地方 不遷位 47位 > 36. 李堣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5&sBookNmbr=C006&sMok_Nmbr=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