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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지명유래] 金溪里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20. 23:32
안동의 지명유래


3. 金溪里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어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전기에 금계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는 흥해 배씨와 안동 권씨였다면 조선 중‧후기에는 의성 김씨인 학봉의 후손들이다. 학봉은 임하 천전에서 청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금계로 이주하였다. 학봉은 이 금계에서 실제 살았던 기간은 불과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안동지역 학문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로 유명한 곳인 금계리는 행정구역으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原州) 변씨(邊氏), 의성(義城) 김씨(金氏), 안동(安東) 장씨(張氏)의 집성마을이다.
자연마을은 1리에 알실, 음지, 복당, 사망, 검제 등 5개의 마을에 116세대 306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리에는 미리미, 작장골, 마누이, 텃골, 경광 등 5개의 마을에 43세대 12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 500년 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 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여 천년불패지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 같다 하여 금지라 불렀다.
◦ 학봉종택(鶴峯宗宅, 風雷軒):학봉선생의 종택으로 원래 현 위치에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갑진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 소계서당(邵溪書堂):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강학지소이다. 선생은 학봉의 11대 종손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퇴계학의 적전을 이었고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 금계리 선돌:검제에서 금계 2리 미산마을로 들어가려면 금계천을 가로지르는 미산교를 건너서 간다. 이 미산교에서 제방을 따라 80m 정도 서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며 크기는 길이 120cm 높이 70cm 정도이고 형상은 염소를 닮았다.


금계리 선돌 뒤에 보이는 마을은 금계리의 미르미이다.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동중학교에 근무하는 직원이 학가산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이곳에 있는 돌을 수레에 싣자 갑자기 코에서 코피가 났다고 한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직원은 학교까지 이 돌을 운반한 후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동료 직원들이 환자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 별별 치료를 다 하였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에 그 직원이 가지고 온 돌의 생김새가 신묘하여 이것 때문에 부정이 났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도로 제자리에 갔다 놓았더니 병이 완쾌되었다고 전한다.

◇ 음막‧을막골
서후면사무소를 지나 봉정사 방면으로 오르다가 오른편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 사망마을에서 볼 때에는 서북쪽이다. 골짜기 안에 있어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 음막골: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불당재:올막 뒤에 있는 산이다. 불당이 있어서 불당재라 한다.
◦ 불당사: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부의 서쪽 15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판서 권예(權輗)가 선영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불타고 없어졌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석복산(石復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福堂)이라 불렀다 한다. 단정(丹井)은 복당(福堂) 북동쪽에 있다.
◦ 구종가 터:학봉종가의 옛 터이다.
◦ 소복당(召福堂):소복산(召福山)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金氏) 종가(宗家)에 모여서 당유사(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金氏) 문중(門中)에서 1사람, 타성에서 1사람, 색장(色掌) 1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계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 동안 흉사에는 안가며 항상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 단정골:복당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뒷골:복당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 뒤에 있다는 뜻에서 뒷골이라 한다.
◦ 복병산(伏屛山):복당 앞에 있는 산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이 있다.
◦ 빈솟골:뒷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김씨의 빈소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솔거리:복당 남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솔거리라 한다.

◇ 사망(仕望)
금계에서 단정을 지나 소복산 동편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 때에 이 마을에 사는 선비가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나머지 자신의 소망을 담아서 마을 이름을 아예 벼슬 사(仕) 자에 바랄 망(望) 자를 써서 사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알실‧지곡(知谷)
행정구역으로는 금계 1리에 속하는 마을로 400여 년 전에 이 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학문이 깊어 세상살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고 전하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는데 대부분 적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아는 것이 많은 선비가 살고 있다고 해서 알 지(知)자에 골 곡(谷)자를 써서 지곡이라 불렀다. 알실은 지곡을 우리말로 부른 것이다.
또한 알처럼 생긴 외딴 산이 있어서 알곡이라고도 한다.

◇ 미리미‧미산(眉山)
금계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금하리(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있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같이 생겼으며 눈썹 같다고 미산(眉山)이라 하였다. 또한 마을지형이 미르(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 경광(鏡光)
금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광서원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에 오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선생이 정국의 문란함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공조전서를 지낸 계씨(季氏) 상공(尙恭)공과 함께 안동으로 낙향하였는데 전서공은 풍천면 하회리에 정착하고 선생은 금계촌에 우거(寓居)하였다.
선생은 집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나타내고 당호를 백죽당이라 하였다. 인조 때 사림의 발의로 금계동에 경광정사를 짓고 사당을 세워 선생의 절의를 기렸다. 숙종 때 병조판서의 증직이 내렸으며 경광정사가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지명은 경광서원이 있다고 해서 경광이라 한다.
◦ 배사골:옛날에 사간(司諫) 벼슬을 지낸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다.
◦ 작장골: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작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멀미들:송야천이 휘감아 도는 머리에 있다고 멀미들이라 한다.
◦ 높은 절골:옛날 높은 곳에 절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한터들:송야천 변에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에서 한터들이라 한다.
◦ 거너리:송야천을 사이에 두고 안동시 노하동과 마주하고 있다. 송야천이 좁은 폭을 이루어 흐르다가 이곳에서 폭이 넓어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텃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 정문(旌門)이 있어 효자문(孝子門)이라 하였다. 지금은 변씨(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만운이들:만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들이다.


만운마을 효자문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원주 변씨 종택과 간재가 있다

◇ 텃골‧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있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윗쪽은 동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동무지:텃골 위에 있는 마을이다.
◦ 부루골:동무지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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