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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명현당호] 慵齋 李宗準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9. 20:19

안동의 명현당호


慵齋 李宗準

선생은 본관이 경주로 자는 중균(仲勻)이며 호는 용재(慵齋), 상우당(尙友堂), 부휴거사(孚休居士), 태정일민(太庭逸民), 장륙거사(藏六居士)이다. 진사 시민(時敏)의 아들이며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다. 5세에 글을 붙이고 7세에 글의 뜻에 통하고 13세에 문장을 이루었으며 김종직에게 사사받았다. 스승 김종직은 ‘중균을 보면 가슴이 시원히 트인다’고 했을 만큼 맑고 빼어난 풍채에 성품이 단아하고 강직했으며 시와 문장, 글씨, 그림에 모두 솜씨가 높았다.
성종 8년(1477) 사마시에 합격한 뒤, 1485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일찍부터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박한주(朴漢柱)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종 18년(1487)에 이조좌랑으로 일본 사신 호송관에 차출되었는데 왜의 사신이 선생의 서화를 얻고 ‘비로소 천하의 중보(重寶)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듬해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고, 동 23년(1492) 호당에 뽑혀서 사가독서하고 수찬(修撰)이 되어 환취정(環翠亭)에서 임금을 모시고 시를 지으니 선생이 으뜸을 차지하였다. 이어 사간원정언이 되어 외척이 권세를 잡을 조짐이 보임을 힘써 간하여 강직하기로 조정에 알려졌다. 동 24년 검상을 거쳐 의정부사인이 되었고 동 25년(1494)에 의성군수가 되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모진 국문을 받고 유배를 가던 중 단천 마곡역에서 이사중의 싯귀를 써 붙인 것이 원망의 뜻이 있다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숨졌다. 중종 때에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 때 홍문관부제학에 증직되었으며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鹿里社)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용재집(慵齋集)』 1권이 전한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의 명현당호 > 당호편 > 慵齋 李宗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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