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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인물초색인] 이승직(李繩直), 이명민(李命敏), 이시민(李時敏), 이우(李堣), 금의(琴椅), 정유일(鄭惟一)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9. 23:24

안동인물초색인


■ 이승직(李繩直)

1378(우왕 4, 무오) ~ 1431(세종 13, 신해)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경주 출생. 이조판서(吏曹判書) 만실(蔓實)의 자로 송도(松都)에서 출생했다. 생원(生員)ㆍ진사시(進士試) 합격하여 태종(太宗) 때에 순금사호군(巡禁司護軍)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세종(世宗) 때에 양주부사(楊州府使)ㆍ공조(工曹)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경상감사(慶尙監司)ㆍ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재임시 청렴하고 밝은 정사를 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히었다. 경기도 포천(抱川)에 살다가 만년에 처향(妻鄕 : 栢竹堂 裵尙志의 사위임)을 따라 서후(西後) 금계리(金溪里)로 옮겨와 살았다.
◎참고문헌 : 永嘉誌ㆍ慶州李氏譜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49



■ 이명민(李命敏)

? ~1453(단종 1, 계유)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자는 이회(而晦).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충민(忠愍)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자. 1448년(세종 30) 내불당(內佛堂)을 짓는 일을 감독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ㆍ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내면서 토목 공사의 일을 잘 맡아 하였다. 1452년(문종 2)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고 이 해 단종이 즉위한 후 직장(直長)ㆍ안악군수(安岳郡守) 등을 역임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黃甫仁)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숙종 때 신원되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팔충신조사단(八忠信朝士壇)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端宗實錄ㆍ國朝人物考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34



■ 이시민(李時敏)

1430(세종 12, 경술) ~ 1473(성종 4, 계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금호(琴湖). 관찰사(觀察使) 승직(繩直)의 자로 서후(西後) 금계(金溪)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안악군수(安岳郡守)이던 형 명민(命敏)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자 벼슬의 뜻이 막혀 낙향했다. 이듬해 연좌(連坐)되어 예안현(禮安縣)에 안치되었다가 1472년(성종 3)에 풀려났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ㆍ慶州李氏譜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50



■ 이응조(李應祚)

1540(중종 35, 경자)∼1592(선조 25, 임진)

본관 경주(慶州). 생부는 창(菖). 숙부 이(苡)에게 출계. 임진왜란에 백의(白衣)로 참전하여 전사함. 증직(贈職)됨.
▣참고:『金溪誌』 ?집필:이원걸


■ 이재욱(李再煜)

1606(선조 39, 병오)∼?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함(景含). 승직(繩直)의 7대손. 성영(成楹)의 子. 1642년(선조 20) 진사시 합격.
▣참고:『金溪志』 ?집필:이원걸


■ 이재환(李再煥)

1604(선조 37, 갑진)∼1658(효종 9, 무술)

본관 경주(慶州). 자는 회지(晦之). 응조(應祚)의 손자. 성극(成極)의 子. 장흥효(張興孝) 문인. 1642년(인조 20) 생원시 합격.
▣참고:「墓碣銘」(金應祖 撰) ?집필:이원걸


■ 이종준(李宗準)

1454(단종 2, 갑술) ~ 1499(연산군 5, 기미)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ㆍ용헌(慵軒). 서후(西後) 출생.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 시민(時敏)의 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 등과 사귀었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488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ㆍ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1493년(성종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쳤다. 이듬해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제작하고, 봉록(俸祿)을 털어 향교를 중수하며 학문 진흥에 힘썼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 조정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에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어가던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이사중(李師中)의 시(詩)를 써붙인 것이 불온하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 이듬해 사형되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서후(西後)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里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ㆍ燕山君日記ㆍ永嘉誌ㆍ안동금계마을(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63



■ 이찬(李燦)

1550(명종 5, 경술)∼?

본관 경주(慶州). 자는 양원(陽遠). 호는 묵우헌(黙愚軒). 종준(宗準)의 증손(曾孫). 학문과 행실을 독실히 하여 선대의 유적을 계승하였음. 수직(壽職):통정대부(通政大夫). 무오사화로 인해 당시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몇 백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함. 증직: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참고:「墓碣銘」(李承奎 撰) ?집필:이원걸


■ 이귀실(李貴實)

1572(선조 5, 임신)∼1661(현종 2, 신축)

본관 경주(慶州). 자는 노성(魯聖). 호는 소묵재(小黙齋). 찬(燦)의 子. 무오(戊午)•계유(癸酉)의 화(禍) 이후 두려워 두문불출(杜門不出)함. 수직(壽職):통정대부.
▣참고:「墓碣銘」(李俊鎬 撰) ?집필:이원걸


■ 이기실(李起實)

1575(선조 8, 을해)∼1663(현종 4, 계묘)

본관 경주(慶州). 자는 광익(光益). 호는 창랑(蒼浪). 찬(燦)의 次子. 무오사화 이후 두문불출하면서 임천(林泉)에서 덕을 길러 유림의 모범이 됨. 수직(壽職):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참고:「墓碣銘」(徐庭桂 撰) ?집필:이원걸


■ 이립(李立)

1641(인조 19, 신사)∼1707(숙종 33, 정해)

본관 경주(慶州). 자는 국초(國礎). 호는 행포(杏圃). 종준(宗準)의 6세손. 서(瑞)의 次子. 문학과 효우가 세상에 사표(師表)가 되었으나 화(禍)를 당한 집 자손이라는 이유로 임천(林泉)에 묻혀 후진교육에 진력함. 증직:통정대부.
참고:「墓碣銘」(金永煥 撰) ?집필:이원걸


■ 이동규(李東圭)

1765(영조 41, 을유)∼1823(순조 23, 계미)

본관 경주(慶州). 자는 신가(信可). 호는 갈운(葛雲). 종준(宗準)의 10대손. 시만(時萬)의 子. 이조판서 이석규(李錫奎)의 천거로 사과를 거쳐 판관 역임.
▣참고:「墓碣銘」(柳賢佑 撰) ?집필:이원걸


■ 이용준(李龍俊)

1784(정조 9, 갑진)∼1867(고종 4, 정미)

본관 경주(慶州). 자는 득주(得珠). 호는 송운(松雲). 동규(東圭)의 子.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함.
▣참고:「墓碣銘」(李仁根 撰) ?집필:이원걸


■ 이상현(李相鉉)

1817(순조 17, 정축)∼1895(고종 32, 을미)

본관 경주(慶州). 자는 성임(聖任). 호는 만오(晩悟). 종준(宗準)의 후손. 주호(周顥)의 子. 외조는 의성(義城) 김양후(金養厚). 과장(科場)에 운이 없어 귀향하여 전원 생활에 전념하면서 후진을 양성함. 족보를 찬수하면서 향리의 미풍양속 진작에 주력함.
▣참고:「墓碣銘」(權相圭 撰) ?집필:이원걸


■ 이상일(李相逸)

1834(순조 34, 갑오)∼1903(광무 7, 계묘)

본관 경주(慶州). 자는 여명(汝明). 호는 강고(江臯). 종준(宗準)의 12대손. 갑준(甲俊)의 第3子. 김흥락(金興洛)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子 태형(泰炯)을 문하생으로 보냄. 의리와 사랑으로 재물(財物)을 쓰니 문친(文親)과 향단(鄕團)이 군자라고 칭송함. 수직(壽職):통정대부(通政大夫).
▣참고:「墓碣銘」(李仁根 撰) ?집필:이원걸


■ 이홍준(李弘準)

?∼1523(중종 18, 계미)

본관 경주(慶州). 자는 군식(君式). 호는 눌재(訥齋). 종준(宗準)의 弟. 1486년(성종 17) 진사시 합격.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그 형 종준(宗準)이 참변을 당하자 세상사에 뜻이 없어 가족을 이끌고 안동 내성(乃城=奈城)으로 내려와 자취를 숨김. 가례(家禮)를 준수하고 남전여씨(藍田呂氏)의 유규(遺規)를 행하면서 후진을 깨우쳐 줌. 저서:『訥齋遺稿』.
▣참고:『寰輿勝覽』 ?집필:김태안


■ 이덕장(李德璋)

1482(성종 13, 임인)∼1524(중종 19, 갑신)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부(慶溥). 홍준(弘準)의 子. 음직(蔭職)으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역임. 부친상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 나와 자제들과 후학들을 가르침. 집안이 가난하여 모친을 봉양하기 어려워 벼슬을 구해서 서울에 갔다가 이듬해 병에 걸려 객지에서 죽음.
▣참고:「墓碣銘」(李滉 撰) ?집필:이원걸


■ 이포(李苞)

생몰년 미상

본관 경주(慶州). 자는 중용(仲容). 덕장(德璋)의 子. 1549년(명종 4) 생원시 합격. 성품이 곧아 수령의 가혹한 정사(政事)에 분개하여 명종조(明宗朝)에 박민도(剝民圖. 백성을 착취하는 그림)를 그려 올림. 이에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을 제수하고 박민도(剝民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어좌(御座)에 세워두었다고 함.
▣참고:『司馬榜目』 ?집필:김태안


■ 이공준(李公準)

1471(성종 2, 신묘)∼?

본관 경주(慶州). 종준(宗準)의 弟. 훈도(訓導)를 지냄.
▣참고:「墓碣銘」(金昌棋 撰) ?집필:이원걸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시사 5 > ⊙ 성씨의 인물 > ∘이씨 > 【慶州 李氏】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A009&sMok_Nmbr=105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A009&sMok_Nmbr=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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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상지(裵尙志)

1351(충정왕 3, 신묘)∼1413(태종 13, 계사)

본관 흥해(興海). 호는 백죽당(栢竹堂). 전(詮)의 子. 고려가 망할 무렵 초연히 벼슬을 버리고 안동(安東) 금계(金溪)에 물러와 잣나무, 대나무를 심고 그 속에 집을 지어 백죽당(栢竹堂)이라 편액하고 이로써 자호를 삼았음. 마침내 고려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숨김. 제향:鏡光書院(경광서원). 저서:『栢竹堂實紀』.
▣참고:「墓碣銘」(權瑎 撰) ?집필:김태안

*참고: 대사헌공(大司憲公) 이승직(李繩直)의 처부(妻父)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시사 5 > ⊙ 성씨의 인물 > ∘배씨 > 【興海 裵氏】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A009&sMok_Nmbr=53


■ 권계경(權啓經)

려말~선초

본관 안동(安東). 고려 예의판서(禮儀判書) 인(靷)의 孫. 창신교위(彰信校尉) 후(厚)의 子. 선교랑(宣敎郞)으로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지냈으나 世祖의 왕위찬탈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함.
▣참고:문중자료(權五信) □집필:김태안

*참고: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의 처부(妻父)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시사 5 > ⊙ 성씨의 인물 > ∘권씨 > 【安東 權氏】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A009&sMok_Nmbr=8


■ 이우(李堣)

1469(예종 1, 기축) ~ 1517(중종 13, 정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진성(眞城).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진사(進士) 계양(繼陽)의 자로 도산(陶山) 온혜(溫惠)에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냈으며, 1506년(중종 1)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508년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나가 고을을 잘 다스려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1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512년 늙은 모친을 봉양하고자 사직 귀향했다. 이 때 온계(溫溪)ㆍ퇴계(退溪) 두 조카들을 가르쳤다. 1515년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부임하였으며, 1517년 겨울 병으로 관아에서 몰하니 나라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했다. 청근수령(請謹守令)으로 널리 알려졌고, 시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도산(陶山)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송재집(松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燕山君日記ㆍ中宗實錄ㆍ國朝人物考ㆍ宣城誌

*참고: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의 사위[壻]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57



■ 금원복(琴元福)

1480(성종 11, 경자)∼1561(명종 16, 신유)

본관 봉화(奉化). 자는 성지(成之). 계(啓)의 子. 외조는 월성(月城) 이시민(李時敏). 1514년(중종 9) 음보(蔭補)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문경현감(聞慶縣監) 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1550년(명종 5) 면천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돌아온 이후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 예조에 8년을 재직하는 동안 대례(大禮)를 거행할 때 모든 절차를 담당함.
▣참고:「墓碣銘」(琴輔 撰) ?집필:김태안

*참고: 금호공(琴湖公) 이시민(李時敏)의 외손(外孫)


■ 금의(琴椅)

1489(성종 20, 기유) ~ 1551(명종 6, 신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봉화(奉化). 자는 중재(仲材). 호는 해촌(海村).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치잠(致湛)의 자. 외조는 이조판서(吏曹判書) 김담(金淡).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예문관(禮文館)의 전적(典籍)‧기사관(記事官)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등 청요직(淸要職)을 지냈다. 늘 어머니의 병환을 염려하여 내직보다 외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울산부사(蔚山府使)•풍기군수(豊基郡守)•청송부사(靑松府使)•영천군수(永川郡守)를 역임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서로 왕래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봉화(奉化) 내성현(奈城縣)에 살았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國朝榜目•永嘉誌

*참고: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사위[壻]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63



■ 정유일(鄭惟一)

1533(중종 28, 계사) ~ 1576(선조 9, 병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 목번(穆蕃)의 자. 권벌(權橃)ㆍ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부(詩賦)에 뛰어났다. 1552년(명종 7) 생원이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하고 진보(眞寶)ㆍ예안(禮安)의 현감(縣監), 형조좌랑(刑曹佐郞)ㆍ영천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다. 이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ㆍ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쳐 1570년(선조 3)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71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대사간(大司諫)ㆍ승지(承旨)ㆍ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다. 『관동록(關東錄)』, 『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한중필록(閑中筆錄)』 등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문봉집(文峯集)』이 있고, 편저에 『명현록(名賢錄)』이 있다. 봉화(奉化) 내성현(奈城縣)에 살았다.
◎참고문헌 : 明宗ㆍ宣祖實錄ㆍ國朝人物考ㆍ永嘉誌ㆍ陶山及門諸賢錄

*참고: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의 외손자(外孫子)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1&sBookNmbr=B004&sMok_Nmbr=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