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유물/안동지역◇유적

[안동의 명현당호] 敬堂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9. 15:36
안동의 명현당호


敬堂



1. 位置: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경당 종택을 찾아가는 길은 안동에서 예천으로 뻗어있는 34번 국도를 이용한다. 시가지를 막 벗어나면 놋다리밟기의 전설을 간직한 솔밤다리(송야교)를 만나게 되고 이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면 천등산 봉정사로 향하는 길이다. 이 길은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와 연결되는 짧은 길(8㎞)이지만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해주는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 입구에서부터 권태사묘 입구, 김태사묘 입구 등의 표지석을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안동 권씨 복야파의 파조인 권수홍의 신도비와 묘단, 단계 하위지 선생이 제향되어 있는 창렬서원, 경당 장흥효 선생의 유적지인 금계의 광풍정과 제월대,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택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 안동 삼태사의 묘소, 안동 권씨 능동재사, 숭실재(崇室齋), 안동 김씨 태장재사,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관물당(觀物堂), 김태사‧권태사‧장태사 신도비, 죽헌고택(竹軒古宅), 봉정사(鳳停寺), 개목사(開目寺), 함벽당(涵碧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경당 장흥효 선생을 배향한 경광서원(鏡光書院), 경당 장흥효 선생이 강학하던 봉림정사(鳳林精舍),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張貞弼) 공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성곡재사[追遠齋],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강학(講學) 장소인 소계서당(邵溪書堂), 고려 예의판서 권인(權靷) 공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마련한 송파재사(松坡齋舍), 칠계재(七戒齋) 장세규(張世奎) 공의 고택 등의 비지정문화재 등이 산재되어 있다. 경당 종택은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는 길을 따라 서후면 사무소가 위치한 삼거리까지 간다. 이 곳에서 곧바로 진행하면 봉정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명리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명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100m 정도 나아가면 다시 오른편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이 곳에는 장태사신도비(張太師神道碑), 안동 장씨 성곡재사(城谷齋舍-追遠齋) 입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오른편으로 경당 종택이 보인다. 밭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울타리가 집을 감싸고 있을 뿐 솟을대문은 없다. 그저 울 사이가 조금 터져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면 바로 경당 종택의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2. 堂號의 由來
퇴계 이황 선생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학파는 대체로 퇴계의 4대 문인으로 꼽히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월천(月川) 조목(趙穆)‧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을 중심으로 각기 문파를 이루면서 사우(師友)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중 학풍과 맥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면서 최대의 학파로 성장한 것은 학봉 선생 계열이라 할 수 있다. 그 계보를 보면 학봉 김성일의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로 이어지고 경당의 외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형제로 이어진다. 이 학통은 다시 갈암의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 밀암의 외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으로 이어지고, 대산의 외증손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장흥효이다. 선생은 위로는 학봉 선생의 학통을 잇고 아래로는 많은 제자와 문인을 길러내 영남 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경당의 학문은 한결같이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임천(林泉)에 숨어 책을 읽고 궁리하였으며, 책상머리에는 항상 커다랗게 경(敬)자를 써 붙이고 그것으로 생활의 바탕을 삼았다. 공은 언제나 첫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가묘에 참배했다. 그리고 주자(朱子)의 화상을 배례하고 난 후 서실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독서하고 사색 궁리하며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꼬박 뜬눈으로 밤을 밝혀 탐구했다.
선생이 거처하는 집 남쪽에는 아름다운 천석(泉石)이 있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제월대(霽月臺)라 이름짓고, 배우는 젊은이와 더불어 이 곳을 거닐며 예(禮)를 익히며 사색에 잠겼다. 그는 좀처럼 성내(城內)에 가는 일이 없었고 이웃 마을 조차 찾지 않으면서 자연을 벗삼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공의 가르침은 제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베풀었으며 평생토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책 읽는 것은 그것을 몸에 배게 하여 생활에 옮기게 함으로써 값이 있게 되고 소중함이 있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다”라고 훈육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도리를 떠나면 고기가 물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으며, 처음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둔 선비에게는 “오늘 한가지 어려운 일을 행하며, 오늘 한가지 사물을 관찰하고, 내일 한가지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며 깨치게 되면서 꾸준히 하나하나 쌓아 가면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 행하는 일이 쌓이게 되어 크게 이루게 될 것이고 이것이 힘이 되어 반드시 환하게 꿰뚫어 통하게 될 것이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공부는 남이 보지 않은 곳에서 조심함을 으뜸으로 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또 잘 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이 배우고 익혀지지 않으면 거짓된 공부가 될 뿐이다”라 했다. 이와 같이 충후(忠厚)와 성실(誠實)을 바탕으로 경(敬)의 학문을 중시하여 선생은 자신의 아호를 경당(敬堂)으로 불렀다.

3. 建築物의 構造와 配置
종택의 구성은 정침과 정침의 동북쪽 뒷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남향집이다. 원래 종택의 위치는 제월대와 광풍정이 있는 봄파리(春坡)에 있었으나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서 지금부터 24년 전에 예전의 규모대로 중건한 것이다. 자연석을 다듬어 바른층쌓기로 죽담(기단)을 쌓고 자연석으로 된 주초석을 그 위에 놓고 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형태는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민도리집으로 정면 6칸 측면 7칸의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앞쪽은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달려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로 전체 6칸의 규모이다. 사랑채 공간은 문간채 보다 훨씬 높게 죽담을 쌓고 기둥을 세워 덩그러니 높은 품격을 자아낸다.
사랑채 공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사랑방은 정면 2칸 측면이 1칸 반의 규모로 전체 3칸 통의 넓이를 갖고 있다. 사랑방의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다. 방 앞으로는 머름을 올려 창호를 냈다. 창호는 띠살문의 창으로 쌍여닫이와 미닫이로 된 이중문이다. 사랑방의 오른편으로 사랑마루를 놓고 작은 사랑방과 연결되는데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랑마루에는 궁판이 있는 띠살문의 4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마루의 우측면 벽에는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곳 판문을 통하여 외부의 손님이 사랑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에 경당고택(敬堂古宅)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선생의 종손인 남정(南井) 김구직(金九稷)의 글씨이다.
중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서면 사랑방에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보이고 반듯한 안마당을 만나게 된다. 정침은 왼쪽에서부터 1칸의 부엌, 2칸 통의 안방, 2칸의 대청, 1칸의 상방으로 전체적으로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안방의 경우 측면은 1칸 반의 규모로 방위에 공루를 설치하여 전체적인 높이는 훌쩍 커져 있다. 안방 앞으로는 반 칸의 마루를 깔았다. 대청은 전체 4칸의 규모로 우물마루를 깔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뒷벽에는 바라지창을 달았다. 대청에서 안방과 상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나 있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 동자주에 성주신이 모셔져 있다.
몸채의 좌 익사와 우 익사는 3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좌 익사는 부엌과 고방 등의 취사와 저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우 익사는 상방과 작은 사랑방으로 되어 있는 주거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몸채의 우측면인 우 익사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안채의 대청 옆에 상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상방의 앞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우측면 벽에 판문이 달려 있다. 판문을 열면 사당으로 오를 수 있다. 이 문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으나 경당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안채의 대청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 때 신위를 모셔올 경우에 사용한다. 작은 사랑방 앞으로 난간이 있는 쪽마루를 내어 큰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곳에 문을 냄으로써 큰사랑에서 작은사랑과 안채로 자유롭게 동선이 연결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안마당에는 장독대가 사랑방 뒤로 배치되어 있고 화단이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아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나 바닥을 시멘트로 발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사당은 정침의 동북쪽 뒤에 자리잡고 있다. 다듬돌 바른층쌓기의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달려 있다. 어칸에는 쌍여닫이문과 좌우 협칸에는 여닫이문이 달려있는데 문은 궁판 있는 세살문이다. 내부에는 교의에 혼독을 올려놓고 신주를 모셨다. 교의 앞에 제상이 놓여 있고 제상 앞에 향상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 춘파에서 이리로 옮겨온 후 절 집을 사서 지은 것이다.

4. 關聯人物
가. 장정필(張貞弼)
경당 종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병자년(丙子年, 1936)에 세운 장태사신도비에 의하면, “공의 휘는 길(吉)이요 자는 영부(寧父)이다. 고려조에 이름을 바꾸어 정필(貞弼)이라고 내려주셨고 호는 포음(圃蔭)이다.
그 선조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주(蘇州) 사람이다. 5대조의 휘는 백익(伯翼)인데 우복야를 지냈고, 고조의 휘는 보고(保臯)인데 청해진 대사요, 증조의 휘는 우(羽)인데 대원수이다. 조의 휘는 섬인데 좌상이며, 고의 휘는 원(源)인데 대사마 장군이다.
공은 5세 되던 해에 난리를 만났는데 대사마 공께서 업고서 배를 타고 조선 땅 강릉에 정착했다. 그 뒤 고창(古昌, 옛 안동의 지명)에 터를 잡았다. 18세에 정사를 수행하여 당나라에 들어갔고 24세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감을 즐기지 않았다. 임천(林泉)에서 덕을 닦으며 제자 수 천명을 가르쳤는데 천자가 그의 어진 소문을 듣고 예를 갖추어 불렀다. 몇 해 안에 위차를 뛰어 넘어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는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문교(文敎)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래서 공은 학교를 세워 조정의 의전과 관혼상제를 정착시켜 한결같이 고례를 따르게 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당세의 부자(夫子)라고 칭송했다. 뒤에 소인배인 한 각로(閣老)인 김남석의 무고를 입어 동쪽으로 방환 됨에 고창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경순왕 경인년(930)에 견훤이 고창을 포위하자 고려 태조가 달려와 구원하였는데 고창군 북쪽 병산에 진을 쳤다. 공은 김선평, 권행과 힘을 합쳐 견훤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성(義聲)이 크게 떨쳤다. 그리하여 고려 태조 왕건은 공과 권행은 대상에 김선평은 대광에 임명하고 군은 안동부로 승급시켰다. 뒤에 고려가 삼한을 통합하고서 공을 원훈에 책록하고 삼중대광에 올리고 벽상공신이라 불렀으며 고창군(古昌君)의 작위를 내렸다. 관직은 태사영운사 겸 집현전 직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공은 사문을 흥기 시키고 예법을 정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그 공이 지대하자 태조는 아부(亞父)라 부르며 녹전을 내렸다. 그 녹전에는 원훈인 대신 길은 중국의 귀양 당한 이름이기에 의리상 불가하니 정필로 하라고 지어 주셨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온 뒤에는 제자 6, 7백 명에게 안동에서 강학을 했다. 향년은 91세로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정필로 시작된 안동 장씨의 역사는 처음부터 화려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대동보』에 의하면 2세 보천(寶千)이 이부상서(吏部尙書), 3세 금선(錦善)이 상장군, 4세 광현(光賢)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면서 중앙의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나. 장사길(張思吉)
장사길의 자는 창만(昌萬)이고 호는 복제(復齊)이다. 13세 수명의 셋째아들 려(儷)의 자식으로써,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대동보에 나오는 희양공 묘갈명에 의하면 공은 공양왕 시절에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왕조의 창업에 참여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된다. 그의 셋째 아우 사정(思靖)도 형과 함께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순충좌명공신(純忠佐命功臣)의 녹훈을 받는다. 사길과 사정은 정종 때에 공신책록을 받으니 사길은 정사 2등공신이 되고, 사정은 정사원종1등공신이 된다. 사길은 화산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의정부의 좌찬성을 역임하며 희양공(僖襄公)의 시호를 받는다.
시조로부터 이어져 오는 동안 안동 장씨는 안동으로부터 떠나 타지로 흩어져 나갔다가 다시 안동에 정착하고 안동 장씨 춘파파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20세 장의(張儀)가 안동 춘파에 정착하면서부터다. 대동보에 의하면 장의의 초명은 유의(由義)로써 후릉참봉(厚陵參奉)의 직첩을 받았고, 벼슬에 뜻이 없어서 서울로부터 낙향하여 금계의 위쪽 춘파에 은거하였다. 그 시조인 장정필이 가문의 역사를 시작한 곳으로 돌아와 다시 안동에서의 역사를 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장흥효는 장의의 6대손이다.

다. 장흥효(張興孝, 1564~1633)
장흥효의 자는 행원(行原)이고 호는 경당이며 아버지는 전력부위 팽수(彭壽)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 나아가서 학문을 익혔고 김성일의 타계 이후에는 서애 류성룡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배웠다. 퇴계학파의 중추를 형성하는 세 사람으로부터 배움으로써 퇴계 이황의 사상이 전개되어 나가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마침 학봉 김성일 선생이 이웃인 검제로 옮겨와 살자 그의 앞에 나아가 제자가 되었다. 과거나 입신의 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몸을 닦아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학문을 연구의 지표로 삼았다.
성리학의 핵심을 풀어놓은 『근사록(近思錄)』을 주로 삼아 모든 경전에 널리 통했으며, 정밀하게 탐구하고 신중히 생각하며 배운 것을 힘써 실천하고, 자신의 품성과 인격을 높이는 것에 침잠했다. 스승인 학봉 선생은 “이 사람은 장차 크게 성취할 것이니 내가 제자 가운데 이런 사람을 얻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고 하였다. 공이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기간은 대략 17년간이다. 이 동안에 학문의 틀을 세우고 일가견을 이룰 수 있었다.
서애 선생이 향리에 내려오자 공은 33세의 나이에 서애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더 한층 학문의 길을 닦아 본심을 지키고 바른 심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서애 선생은 마음으로 배우고 닦는 존심양성지요(存心養性之要)를 하나하나 가르쳐 설명하니 배우는 분에게 진리가 밝혀지고 잘못이 고쳐지니 새로운 말씀에 얻은 바가 많아지고 넓어졌다.
장흥효의 문집에는 이 무렵 그가 류성룡으로부터 이(理)의 허실(虛實)과 존심양성의 요체를 깊이 강마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학봉과 서애의 학문사상에 얼마나 경도됐는가는 후일 꿈에 학봉 김선생을 뵙고, 꿈에 서애 류선생을 뵙고 등의 글을 지어 꿈속에서도 두 스승에게서 학문을 깨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한강 선생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공은 문인이 아니면서도 제자의 예를 갖추어 장문의 문목(問目)을 올려 정주학을 수업했고 그 가르침을 따랐다. 후일 한강이 죽자 공은 3개월간 소식(素食)하고 3년간 근신하여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선생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같이 저술이나 심오한 이론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인수변(人獸辨)』,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십이회도(十二會圖)』,『삼팔목도(三八木圖)』, 『무극태극유무변(無極太極有無辨)』과 같은 나름대로 특색 있는 논술을 남겼다.
경당 선생의 위학정신은 천인일치(天人一致)의 이치추구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의 이 사상이 간결하게 나타난 것이 인수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인수변에서 인간이 지켜야할 예도(禮道)를 인성(人性)과 수성(獸性)이라는 상반된 두 개념을 제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외형상으로 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선하고 순하며 통하기 때문에 항상 바르게 행할 수 있음이고,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사체가 있으나 예로써 다스릴 줄 알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인간의 대체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성인의 경지에 이르며 하늘에 합일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인간이 인성을 버리고 악(惡)‧역(逆)‧편(偏)‧색(塞)으로써 상징되는 수성(獸性)을 따르며 사체를 비례(非禮)로써 다스린다면 결국은 소체(小體)를 따라 돼지의 상태로 떨어질 것이라 했다. 그의 천(天) 개념은 인성을 잃지 않고 인(仁)과 예(禮)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주역에 정통했다. 일원소장도와 십이회도는 주역의 64괘로써 천지의 변화하는 이치와 사시(四時)의 변동, 일월(日月)의 소장(消長)을 설명하는 역학서이다. 공은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제자 교육에 힘쓴 학자이다. 이러한 선생의 학행이 조정에 추천되어 만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의 직첩을 받았고 백죽당 배상지 선생, 용재 이종준 선생과 함께 경광서원에 배향되었다.

5. 其他
가. 光風亭
천등산 남록 서후면 금계리 거대한 자연 암벽 아래에 있는 정자이다. 이 곳은 경당 선생이 300여 문인에게 강학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자가 세워진 장소의 경사진 터를 자연스럽게 건축에 끌어들여 정자의 앞부분은 누하주를 받혀 누각식으로 지었고 가운데부터는 막돌 허튼층쌓기의 죽담을 쌓고 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앞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주를 사용했다.
평면은 대각선으로 대칭된 공간배치를 한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좌측면은 1칸 반의 방을 내고 앞에 반 칸의 마루를 배치하였고 가운데 칸은 측면 1칸 정면 1칸의 방과 마루를 배치하였으며 우측면은 2칸의 마루를 깔아 대각선으로 대칭 되게 배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정자의 앞쪽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정자 뒤로는 거대한 자연 암벽이 있어 선생께서 제월대(霽月臺)라 명명했다. 제월이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줄임 말로써 부단한 자기 수양을 통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능주목사를 지낸 김진화가 바위 표면에 경당 선생 제월대라는 휘호를 남겼다. 현재는 제월대 위에 1987년에 완공한 또 다른 정자가 세워져 있다.

나. 鳳林精舍
안동 장씨 춘파파의 문중 산인 상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봉림사라는 절터였기에 지금도 삼층석탑의 잔영이 남아 있다. 안동 장씨 춘파파의 입향조인 후릉참봉 의(儀)가 최초로 들어와 자리잡은 곳이다. 이 정사는 그 후손인 경당이 여러 학자와 제자들이 성리학을 강론하던 곳으로 영남 유림들의 많은 관심을 끌던 곳이다.
이전에는 문중의 시회가 해마다 이 곳에서 열렸으나 현재는 그러한 모임이 중단되었다. 현재 진성인 이강호(李康鎬)가 지은 봉림정사 기문과 6세손 구봉(九鳳), 후학(後學) 서산 김흥락과 후학 판서 장석룡(張錫龍)이 지은 시 봉림정사운(鳳林精舍韻)이 게판되어 있다.

다. 敬堂記
吾友張君行原, 居永嘉鶴山之陽. 自少, 履君子之庭, 而學古人之道, 經亂而意不變, 家貧而志益堅, 世以迂拙目笑之, 張君受而甘心焉. 歲癸丑冬, 余與權峻甫諸友, 收拾鶴峯先生遺稿, 棲鳳停·金溪月餘, 張君實與之同事. 吾見其立心之不怠, 言笑之不肆, 而知其植於內者, 固矣. 一日, 謂吾曰: “余竊取程夫子之意, 以敬, 名吾堂, 而因以爲號焉. 又竊慕廬山氣像, 以光風, 名吾亭; 以霽月, 名吾臺, 非敢望其庶幾也. 要擬盤盂之銘, 揭諸座隅, 時自警省耳. 蓋非敬則二三其道, 以無以主宰乎一身, 雖有淸風明月, 徒爲悅耳目·蕩心志之資耳. 安能有此灑落之襟懷乎. 敬者, 所以收斂此心, 而爲光霽之淵源也. 光霽, 所以快活流行, 而爲此敬之功用也. 體用相須, 表裏無間, 不可以二視也. 名之之意, 蓋取諸此, 而吾恨吾心之不然, 怠肆紛擾之時, 常多, 而整齊嚴肅之時, 常少, 方寸之風, 震蕩而靡定, 胸中之月, 晦蝕而不明, 惟以窣窣無見, 而終得罪於先師是懼. 今雖收拾文字. 不過爲盲者之丹靑, 亦何益焉. 子當爲余, 記此以警之, 庶使朝夕, 顧諟而提省焉, 則雖洛之東西, 二百里之遠, 卽是日對吾君於一堂之上也. 不亦樂乎.” 余斂袵起敬曰: “其義其名, 至矣盡矣. 吾無以贅於子之言矣. 子之亂不變, 貧益堅, 志不怠, 言不辭者, 皆居敬之功, 而猶懼夫此心之或放, 風蕩而月昏, 則如吾(缺)者, 亦將何如哉. 雖博聞(缺), 涵養須用敬, 而進學, 則在致知, 塊然一堂之上, 徒主惺惺, 而若不從事於理會事物之功, 則其何以得到豁然之境, 而有光霽之氣像也. 彼佛氏之死敬, 是也. 嗚呼, 盍相戒之勉之哉.” 烏洛散人認齋崔晛書. (敬堂集 續1)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의 명현당호 > 당호·건물편 > 敬堂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3&CODE2=03&CLSS=3&sBookNmbr=C004&sMok_Nmbr=3



*참고: 한국문집총간 > 경당집 > 敬堂先生續集卷之一 / 雜著 > 敬堂說求記 / 附敬堂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281A_0060_050_0010_2003_A069_XML




경당기(敬堂記)

인재 최현(崔哯)


내 친구 장행원(장흥효) 군은 영가의 학가산 남쪽에 살고 있는데, 소싯적부터 군자의 뜰에 거닐면서 고인의 도를 배우더니 난을 겪은 뒤에도 그 뜻이 변하지 않았고 집은 가난하였으되 뜻은 더욱 굳었다.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면서 세상 물정 모른다고 비웃었으나 장군은 그 비웃음을 감수하였다.

계축년(1613년) 겨울, 내가 권준보 등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학봉 선생의 유고를 수습하느라 봉정사와 금계에 여러 달 머물렀는데, 장군이 실제로 참여해서 일을 했다. 나는 그가 게으르지 않으며 말하고 웃음에 있어 방자하지 않음을 보고서 그 속에 쌓인 것이 견고함을 알았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삼가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으로써 서재를 이름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호를 삼았다. 또 삼가 여산의 기상을 사모하여 정자의 이름을 ‘광풍’으로, 대의 이름을 ‘제월’로 지었다. 감히 거기에 바랄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반우에 새긴 명에 비기어 자리의 모퉁이에 걸어 두고 때때로 스스로 경계를 삼을 뿐이다.

무릇 경이 아니면 그 도가 두셋으로 나누어져 일신도 주재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청풍명월이 있을지라도 한갓 이목을 즐겁게 하고 심지를 방탕하게 할 뿐이니, 어찌 능히 상쾌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경’이라는 것은 이 마음을 수렴하는 바로서, 광풍제월(光風霽月: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의 연원이 되는 것이요, 광풍제월은 쾌활하고 유행하는 것으로 이 경의 공용이 된다. 체와 용이 서로 필요한 것이고, 표리가 간격이 없으니, 가히 두 가지로 볼 수 없다.

이름의 뜻은 대개 여기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 마음은 항상 그렇지 못한 게 한스러우니 항상 게으르고 방자하여 어지러운 때는 많고, 정제되고 엄숙한 때는 적다. 사방 한 치의 마음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 머무름이 없고, 가슴속의 달은 어둑해져 밝지 않으니, 오직 처량하게 견문과 학식이 없어 끝내 선사에 죄를 얻을까 두렵다.

지금 비록 문자를 수습하지만 맹인이 단청을 보는 격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대가 마땅히 나를 위해 이것을 기록하여 경계해 주어 거의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반성케 하니, 비록 낙동강 동쪽과 서쪽으로 200리 멀리 떨어져 있은들 날마다 그대를 당 위에서 대하는 듯할 것이니, 이 또한 낙이 아니겠는가?”

내가 옷깃을 여미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일렀다. “그 뜻과 이름이 지극하고 뜻을 다했도다. 내 그대에게 쓸데없이 덧붙일 말이 없도다. 그대는 어려움에 처해도 변치 않고, 가난할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뜻은 게으르지 않으며, 말도 방자하지 않은 것은 모두 거경의 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마음이 혹 방심되어, 멋대로 방탕하여 날로 어두워질까 두려워하니 나와 같이 못난 사람은 또한 장차 어찌할 것인가? 비록 널리 배웠다 하더라도 품성을 기르고 닦는 데에는 반드시 경을 필요로 하는데, 학문의 진취는 지식을 철저히 하는 데 달렸으니 괴연하게 한 대청 위에서 성성(惺惺)만 주장하고 만일 사물을 이해하는 공용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넓은 경지에 이르러 광풍제월의 기상을 지닐 수가 있겠는가? 저 불교의 죽은 경이 그런 것이다. 아! 어찌 서로 경계하고 힘쓰지 않을 것인가.”

오락산인 인재 최현 짓다.

*출처: 유교넷. 한국국학진흥원.
광풍정 > 원문자료 > 경당기(敬堂記)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ansb009&sMenuTyp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