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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집(虛白堂集)] 삼귀정기(三龜亭記) -용재(慵齋) 성현(成俔)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2. 16. 16:51

삼귀정기[주-D001]〔三龜亭記〕

용재(慵齋) 성현(成俔)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주-D002] 씨가 자신의 고향 풍산현(豐山縣)에 있는 삼귀정의 형상을 설명해 주고는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풍산은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다. 현의 서쪽 5리쯤에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의 동쪽 20보쯤에 동오(東吳)라고 하는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의 높이는 겨우 6, 7장(丈) 정도인데 정자가 그 봉우리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은 모두 너른 들판으로[주-D003] 그 형세가 시원하게 툭 트여서 아득히 먼 곳까지 조망해 볼 수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곡강(曲江)이라고 하는 큰 시내가 있으니 곧 낙수(洛水 낙동강)이고, 또 마라(馬螺)[주-D004]라고 하는 못이 있는데 연못가에는 절벽이 웅장하게 솟아 높이가 만 길은 될 듯하고, 강가에 있는 긴 숲은 10리 남짓 뻗어 있다.

정자의 북쪽에는 학가산(鶴駕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쌍계(雙溪)[주-D005]가 이 산에서 흘러나와 낙수로 들어가며 그 두 물이 만나 모이는 곳이 병담(屛潭)인데, 혹 화천(花川)이라고도 한다. 그 병담 앞의 봉우리에는 또 천여 길 정도 되는 병벽(屛壁)이라고 하는 석벽이 있고, 쌍계의 북쪽에는 붕암(鵬巖)이라고 하는 기암이 있다. 쌍계의 양쪽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는데 층층이 푸른빛을 뿜으며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

정자 아래에는 논배미와 보리밭이 펼쳐져 있는데 봄에는 푸른 새싹이 머리털처럼 풍성하게 자라나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이삭이 구름처럼 일렁이니 참으로 드물게 아름다운 곳이라 하겠다.

화산(花山 안동(安東)의 고호)은 김씨의 본관이다. 김씨는 우리나라의 큰 문벌이고 그의 외조 권 상국(權相國)[주-D006]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는 바로 그의 딸로, 나이가 88세이다. 그의 아들 영전(永銓), 영추(永錘), 영수(永銖) 등이 모두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그 봉양을 극진히 하는 가운데, 또 이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노닐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다. 정자 터에는 바위 3개가 있는데, 모양이 꼭 엎드린 거북과 같기 때문에 ‘삼귀정’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매양 좋은 때와 길일을 만나면 어머니를 가마에 태우고 정자에 올랐는데, 노래자(老萊子)가 늙은 부모를 위해 입었다는 색동옷이 가마의 전후에서 화사하게 빛났다. 정자에 가득한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같은 자손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모시면 어머니는 엿을 입에 물고 즐거워하였으니, 그 즐거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거처할 집은 있어도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는 어려우며, 또 좋은 경치는 있으나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금 김씨 집안은 땅도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인물도 어진 사람인 데다가 어버이도 장수를 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두루 갖추어진 셈이니, 어찌 선을 쌓아 복을 남긴 결과가 아니겠는가.

무릇 생물 중에 장수하는 것은 거북만 한 것이 없고 물건 중에 단단한 것은 돌만 한 것이 없다. 자식들이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영원하고 돌처럼 단단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다. 이들 대에서부터 증손ㆍ현손에 이르고, 증손ㆍ현손에서 잉손(仍孫 7대손)ㆍ운손(雲孫 8대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어버이를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이러한 마음을 변치 않는다면, 이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될 것이고 이 고을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될 것이므로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내세울 것 없는 고향이 있긴 하지만 명리의 굴레에 얽매인 처지라 물러나 노년을 보낼 길이 없으며, 게다가 조부와 부친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형제들의 상사(喪事)도 많이 치렀으니[주-D007], 비록 오정(五鼎)[주-D008]의 영화가 있다고 한들 자로(子路)처럼 쌀을 지고 와 부모를 봉양하고자 해도[주-D009] 할 수 없는 신세이다. 그래서 김씨의 여러 어진 이들이 그 부모를 받들어 모시고 즐겁게 노니는 것을 더욱 부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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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 삼귀정기(三龜亭記) : 1496년(연산군2) 저자의 나이 58세 때 풍산의 소산(素山)에 거주하는 진사 김영균(金永鈞)의 요청을 받아 지은 기문이다. 삼귀정은 김영균의 형제들이 그의 노모 예천 권씨(醴泉權氏)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정자 터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3개 있었던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저자는 이 바위를 들어 주인공의 장수를 축원하고 자식들의 효를 칭송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면서도, 전반부에서는 삼귀정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서술하여 기문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한편 이 바위는 고인돌로 알려져 있고 예천 권씨는 88세의 수를 누리고 그해에 작고하였다.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권8 〈상촌팔영(象村八詠)〉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삼귀정의 현판은 성현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주-D002] 김세경(金世卿) : 김영균(金永鈞, 1441~?)을 말한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세경은 그의 자이다. 김계권(金係權, ?~1458)의 셋째 아들이다. 부친 김계권은 세칭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0세로 한성부 판관을 지냈으며, 예천 권씨(醴泉權氏, 1409~1496)를 아내로 맞아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출가한 장남 학조대사(學祖大師) 아래로 뒤에 나오는 영전(永銓), 영추(永錘), 영수(永銖)가 바로 그들이다. 김영균은 본래 이름이 ‘永鈞’이었으나 명나라 신종(神宗)의 어휘인 익균(翊鈞)을 피휘하여 후대의 족보에는 ‘永勻’으로 표기하고 있다. 《安東金氏族譜, 1878년(高宗15)》

[주-D003] 너른 들판으로 : 대본에는 ‘距海’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는 ‘鉅海’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는 ‘鉅野’로 되어 있고, 《안동김씨족보》에 수록된 〈판관공 장령공 묘도(判官公掌令公墓圖)〉에는 해당 위치에 ‘대야(大野)’라고 표기한 점을 참작하여 ‘鉅野’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주-D004] 마라(馬螺) : 오늘날 풍산읍 마애리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깊은 물웅덩이〔沼〕를 말하는 것으로, 이 지역을 달리 마래, 마애(磨崖), 망천(輞川)이라고도 한다.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권17 〈삼귀정팔영(三龜亭八詠)〉의 〈마애초벽(馬崖峭壁)〉 시에 마라담(馬螺潭)이라고 하였다.

[주-D005] 쌍계(雙溪) : 《동여도(東輿圖)》에 오늘날 풍산읍(豐山邑)의 동쪽 풍산천(豐山川)의 위치에 ‘쌍계(雙溪)’라고 표기되어 있다.

[주-D006] 권 상국(權相國) : 권맹손(權孟孫, 1390~1456)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이다.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 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이 기문을 부탁한 김영균(金永鈞)의 부친 김계권(金係權)의 장인이다. 김영균(金永鈞, 1441~?)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세경이다. 부친 김계권은 세칭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10세로 한성부 판관을 지냈으며, 예천 권씨(醴泉權氏, 1409~1496)를 아내로 맞아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출가한 장남 학조대사(學祖大師) 아래로 뒤에 나오는 영전(永銓), 영추(永錘), 영수(永銖)가 바로 그들이다. 김영균은 본래 이름이 ‘永鈞’이었으나 명나라 신종(神宗)의 어휘인 익균(翊鈞)을 피휘하여 후대의 족보에는 ‘永勻’으로 표기하고 있다. 《安東金氏族譜, 1878년(高宗15)》

[주-D007] 조부와 …… 치렀으니 :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조부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비통해하고, 형제들도 많이 사망한 것을 슬퍼한다.〔痛靈根之夙殞, 怨具爾之多喪.〕”라고 하였다.

[주-D008] 오정(五鼎) : 소, 양, 돼지, 생선, 순록의 다섯 가지 고기를 다섯 솥에 각각 담아 먹는 것을 이르는 말로, 고관 귀족의 대단히 호사스러운 진찬(珍饌)을 뜻한다.

[주-D009] 자로(子路)처럼 …… 해도 : 공자의 제자 자로가 “내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되는대로 거친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 리 밖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다.〔爲親負米百里之外〕 그러나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列鼎而食〕이 되었는데, 다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이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라고 술회한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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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집(虛白堂集)》은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이다.
성현은 자가 경숙(磬叔)이고 호는 용재(慵齋)ㆍ부휴자(浮休子)ㆍ허백당(虛白堂)ㆍ국오(菊塢)이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그의 본관은 경상남도 창녕(昌寧)이다. 창녕 성씨 집안은 고려조에 그곳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삼고 있다. 이들 성씨는 고려 말부터 관계(官界)에 오르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대대로 벼슬을 지낸, 혁혁한 문벌가이다. 그의 부친인 염조(念祖)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인물로서 서울에서 성현을 얻었다.
문장, 시, 그림, 인물, 역사적 사건 등을 다룬 잡록 형식의 글 모음집인 〈용재총화 慵齋叢話〉를 저술했으며, 장악원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 樂學軌範〉을 유자광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문집으로 〈허백당집 虛白堂集〉이 전한다.


[원문] 三龜亭記


上舍金世卿氏以其鄕豐山縣三龜亭之狀。求記於余。謹按豐山爲安東府屬縣。縣西五里許有村。曰金山村。東二十步許有峯。曰東吳。其高僅六七丈。亭跨峯頭。東西南皆距海。厥勢敞豁。眺望無際。亭南有大川。曰曲江。卽洛水也。有潭曰馬螺。潭上絶壁贔屭。高可萬丈。江上長林。連亙十里餘。亭北又有山。曰鶴駕。有雙溪出自山間來入于洛。其會水處爲屛潭。或稱花川。其峯又有石壁千餘丈。曰屛壁。雙溪北有奇巖。曰鵬巖。溪兩傍有栗樹千餘株。層翠紛敷。亭下有稻塍麥壟。春則綠髮丰茸。秋則黃雲䆉稏。眞奇勝之地也。花山爲金氏本貫。金爲朝中巨閥。而其外祖權相國齊平公。有盛名於朝。權氏卽其女也。年八十有八。其子永銓,永錘,永銖等。皆爲近邑守令。極其奉養。又構此亭。以爲晨夕遊憩之所。亭基有三石。形如伏龜。故以三龜名之。每當良辰吉日。扶輿升亭。萊衣彩服。輝映前後。滿亭蘭玉。森森列侍。萱闈含飴而悅豫。其爲樂。可勝旣哉。大抵世人。有其居。不得其勝。有其勝。不得其樂。而今則地得其勝。人得其賢。親又得其壽。衆美俱備。豈非積善毓慶之所致。夫生之壽者莫如龜。物之固者莫如石。人子之欲親之壽。如龜之永。如石之固。人人之所願。自玆以後。至于曾玄。自曾玄至于仍雲之遠。使各奉其親。如今之所爲。世世而勿替。則鄕爲壽鄕。人爲壽民。而當留美於靑史矣。若余者。雖有桑梓微區。而縛於名韁。無由退老。而且靈根已邈。具爾多喪。雖有五鼎之榮。而欲爲子路之負米。終不可得則尤羡夫金氏之諸賢能奉其親而娛樂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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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표점] 三龜亭記


上舍金世卿氏以其鄕豐山縣 三龜亭之狀,求記於余。謹按:豐山爲安東府屬縣。縣西五里許有村曰金山村,東二十步許有峯曰東吳,其高僅六七丈,亭跨峯頭。東、西、南皆距[주-D001]海[주-D002],厥勢敞豁,眺望無際。亭南有大川曰曲江,卽洛水也。有潭曰馬螺,潭上絶壁贔屭,高可萬丈。江上長林,連亙十里餘。亭北又有山曰鶴駕。有雙溪出自山間來入于洛,其會水處爲屛潭,或稱花川。其峯又有石壁千餘丈曰屛壁。雙溪北有奇巖曰鵬巖。溪兩傍有栗樹千餘株,層翠紛敷。亭下有稻塍麥壟,春則綠髮丰茸,秋則黃雲䆉稏,眞奇勝之地也。花山爲金氏本貫。金爲朝中巨閥,而其外祖權相國 齊平公,十[주-D003]盛名於朝。權氏卽其女也,年八十有八。其子永銓、永錘、永銖[주-D004]等,皆爲近邑守令,極其奉養,又構此亭,以爲晨夕遊憩之所。亭基有三石,形如伏龜,故以“三龜”名之。每當良辰吉日,扶輿升亭,萊衣彩服,輝映前後。滿亭[주-D005]蘭玉,森森列侍,萱闈含飴而悅豫,其爲樂,可勝旣哉?大抵世人,有其居,不得其勝,有其勝,不得其樂,而今則地得其勝,人得其賢,親又得其壽,衆美俱備,豈非積善毓慶之所致?夫生之壽者莫如龜,物之固者莫如石。人子之欲親之壽,如龜之永,如石之固,人人之所願。自玆以後至于曾玄,自曾玄至于仍雲之遠,使各奉其親,如今之所爲,世世而勿替,則鄕爲壽鄕,人爲壽民,而當留美於靑史矣。若余者,雖有桑梓微區,而縛於名韁,無由退老,而且靈根已邈,具爾多喪,雖有五鼎之榮而欲爲子路之負米,終不可得,則尤羡夫金氏之諸賢能奉其親而娛樂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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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 距 : 奎章閣本,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鉅”.

[주-D002] 海 :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野”.

[주-D003] 十 : 奎章閣本,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有”.

[주-D004] 銖 :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鐵”.

[주-D005] 亭 : 奎章閣本,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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