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二)/양평공◇이양생

[심승구] 어느 신발 장수 이야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2. 11. 13:25

[심승구] 어느 신발 장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에 군수 이종직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 이양생(1423∼1488)의 생애를 줄거리로 한다.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노비로 살며, 신발을 팔다가 군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17년 동안 포도대장을 지내고 재상에까지 오른다. 한 미시사가가 이 얼자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가 살던 역사의 무대와 함께 되살려 보고자 하였다.


얼자(孽子)의 탄생

조선이 건국된 지 30년이 지난 무렵이다. 세종 5년(1423) 경주이씨 양반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아비는 지방에서 판관(判官, 종5품) 벼슬을 하는 이종직(李從直)이다. 어미는 집안의 하녀였다. 종직은 아이의 이름을 ‘양생(陽生)’이라 지었다. 양기가 솟을 때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양생은 양인 어미에게 태어난 서자(庶子)가 아니라 천인 어미에게서 태어난 ‘얼자(孽子)’였다.
그런데 당시 노비법에 따르면, 천인 어미가 양인 남편과 혼인할 경우에는 그 자식도 양인이 될 수 있었다. 태종 14년(1414)부터는 노비 자식이 어미와 상관없이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이 법은 양인의 수를 늘리기 위한 특별한 조치였다. 고려 말 이래 귀족들의 노비가 많아지자 조선 왕조는 양인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노비법을 바꾸었다. 세금, 노동력,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이 많아져야 나라가 안정되고 건실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생은 종부법이 생긴 지 9년 뒤에 태어났으므로, 아비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양생은 호적에 양인으로 오르지 못했다. 당시 노비 주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비 소생을 천인으로 삼았다. 양인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노비정책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사람만 천인이면 모두 천인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혈육이나 지친이 따로 없었다. 노비의 생산을 통한 재산 증식이 이미 고려 이래 관행처럼 유지된 탓이다.
종부법의 시행은 ‘노비 파동’이라 일컬을 만큼, 양반들의 큰 반발과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그러자 양생이 10살이 되던 해인 세종 14년(1432)에는 종부법 대신 종모법(從母法)으로 바꾸었다. 어미의 신분이 천인이면 그 자식을 모두 천인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18년 만에 노비법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러자 얼자 이양생은 양인이 될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한 채, 노비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가노(家奴)에서 신발 장수로

양생이 6살이 되던 해, 부친 종직은 비리가 드러나 양근 군수에서 쫓겨났다. 백성을 시켜 벌꿀을 크게 치면서 원성을 샀고, 관아의 환상곡(還上穀: 흉년 대비 백성에게 빌려줄 곡식)을 개인 용도로 쓰며, 임신한 부녀자를 구타해 낙태시켜 장 1백과 자자형(刺字刑: 얼굴에 문신을 하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당시 종직의 동생이 대사헌이었던 탓에 간신히 자자형은 면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관직에 복직하지는 못했다. 장 1백의 처벌을 받을 경우에는 수령의 재임명이 금지된 탓이었다.
갑자기 부친의 벼슬길이 막히자, 가노 양생은 주인집의 생계를 위해 생산 활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도봉산 밑의 해등촌(海等村: 현 도봉부 방학동)에 살던 그는 어려서부터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이라 불린 백정들과 어울렸다. 당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백정들은 버들잎으로 그릇을 만들거나 소나 말을 도살하고 거기서 얻는 가죽, 말갈기와 말총, 힘줄과 뿔 등으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어린 그가 백정들에게 배운 일은 가죽신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신발 장사를 택한 이유는 당시 나라에 가죽신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나무나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고 검정 또는 백색의 가죽을 사용해 장화 형태로 만든 신발 화(靴) 와 목이 없는 가죽신 혜(鞋)

세종 때만 해도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복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신분에 따른 옷은 정해져 있었으나, 신발까지는 아니었다. 그러자 한양 사람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천인까지도 목이 긴 가죽신 화(靴)와 목 없는 피초혜(皮草鞋)를 신었다. 6품 이상의 관리가 신는 덧신 투(套)까지 모두 착용할 정도였다. 사실 천민들까지 가죽신을 좋아한 까닭은 귀한 탓도 있지만, 1년 이상 신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가죽신은 버선을 오래 신는 방법이기도 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가죽신을 신고 다니자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 의복으로 신분 구별이 안 된다는 우려와 함께 한양의 가죽 값이 껑충 뛰어 오른 것이다. 때마침 농사를 위해 소를 함부로 잡지 못하는 도살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라 가죽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자 몰래 소나 말을 훔치는 도적질까지 극성을 부렸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죽신의 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가죽신이 크게 유행하자, 어린 양생도 이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주로 발목 없는 가죽신 혜(鞋)를 만들어 장시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나라에서 얼마가지 않아 평민들의 가죽신 착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럼에도 가죽신의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신발 장수에서 공신으로

신발 장사를 하던 노비 양생에게 혼인은 뜻밖의 기회로 다가왔다. 양생이 참판집의 하녀를 아내로 얻은 것이다. 그가 맞이한 하녀의 상전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인 윤보(尹甫)였다. 그는 혼인을 한 뒤에도 윤보의 집에 이르면, 대문과 뜰을 쓸며 여기가 나의 본 주인이라며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노비였던 그가 혼인한 하녀의 상전 집안일에도 충실했던 것이다. 그 같은 배경 속에 양생은 윤보의 고모부인 수양대군을 돕게 되었다.



양생은 백정에게 신발 만드는 법과 무예를 배웠다. 백정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사냥을 일삼았기에 말 타고
활 쏘는 무예에 능숙한 자가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무예가 뛰어난 자를 시위패나 갑사로 뽑아 썼다.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측근 인물과 무사, 그리고 천인들을 끌어 모았다. 이 때 정희왕후 윤씨 집안의 친인척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심지어 노비들도 가세하였다. 이 때 양생도 수양대군을 돕는 노비 무리로 참여하였다. 후일 세조가 적개공신에 책봉하면서 이양생에 대하여 “일찍이 시위ㆍ수종(쫓아다니는 일)에 재능을 나타냈다.”고 칭찬한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세조를 돕는 일에는 양생의 작은 아버지 군자감 판관 이양직(李良直)도 참여했다. 양생의 본가 쪽 집안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한 것이다. 세조는 즉위한 뒤 노비 군대인 장용대를 만들었다. 1459년(세조 5)에 설치한 장용대는 공사 천인 가운데 무예자를 뽑는다고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즉위를 도운 노비들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부대였다. 이 때 세조를 도운 천인들 가운데는 시험 없이 들어간 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일찍이 백정들 틈에서 말 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익혔던 양생도 장용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8년 뒤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 난은 함경도 토호이자 회령부사 이시애가 세조의 집권 체제 강화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양생은 4도 병마도총사 귀성군 휘하로 참여하여 적진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 3등에 봉해져 세조의 생일날 창덕궁 잔치에서 교서를 받는다. 노비로 산 지 45년 만에 그는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첫 포도대장에서 재상으로

장용대에서 공신이 된 이후 그에게 내려진 관직은 겸사복이었다. 겸사복은 서반 종2품 아문의 금군으로서, 내금위와 함께 최정예 기병 중심의 무사들이다. 왕의 신임을 받던 겸사복은 국왕의 최측근에서 왕의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를 책임 맡았다. 겸사복으로서 그의 첫 임무는 북악산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는 일이었다. 호환(虎患)은 조선 건국 이래 도적과 함께 가장 큰 근심이었다. 호랑이는 한양은 물론이고 경기 일원의 왕릉 주변에 출현하여 사람과 말을 물어 죽였다.
특히 15세기 말에는 농토의 확보를 위해 저습지가 개간되고 벌목이 크게 이루어져 민가에 호랑이 출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별도의 호랑이 잡는 부대인 착호갑사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그는 세조대에서 성종대에 걸쳐 호랑이를 잡는 장수, 즉 착호장(捉虎將)으로 큰 명성을 날렸다.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그가 호랑이를 잡는 것은 풍부(馮婦: 춘추시대 진나라 때 호랑이를 잘 잡던 사람)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 지적과 함께 “매양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잡을 일이 있으면 조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위에 인용한 글은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그를 묘사한 대목이다. 이 사실은 당시 최고의 착호장으로서 양생의 역할을 짐작케 한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

착호 활동과 함께 그는 도적 잡는 데도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전국적으로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자, 조정에서는 그를 첫 포도대장에 임명하였다. 종래에는 도적이 발생하면 각 지역의 경수소(경비소)에서 잡거나 군사를 파견해 잡아 포상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대책은 도적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때마침 도적 장영기가 지리산을 무대로 전라와 경상 지역을 횡행하자 본격적인 포도 대책을 세웠다. 전문 장수를 임명해 도적을 잡는 ‘포도대장’ 제도가 그것이다.
성종 1년(1470)에 이양생은 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경기, 강원, 황해 일대를 약탈하던 도적을 잡은 공로로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그의 나이 48살이었다. 이어 1472년(성종 3)에는 관악산에 진을 친 강도 고도금·말응귀·가을마·수을외를 잡는다. 한양의 코 앞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라 계성군(雞城君)에 봉해진다. 도적을 잘 잡아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글을 전혀 몰라 다른 관직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그에게 포도대장의 역할만 맡긴다. 성종 13년 진위현 및 과천 광교산의 도적, 성종 14년 경기ㆍ충청ㆍ강원도의 도적, 성종 16년 경기도 양주의 강도, 성종 17년의 평안도와 황해도 강도 등은 다 그가 잡았다. 하지만 도적 잡는 일에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홍길동을 쫓기도 했지만, 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어떻든 양생은 죽기 두 해 전까지 장장 17년간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도성과 경기 일원을 범위로 하는 포도절목과 좌우의 두 대장이 맡는 포도대장의 제도가 완성되었다.
포도대장 역할을 그토록 오래 한 배경에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상이 된 뒤에도 장터를 지나다가 옛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회포를 푼 다음에야 길을 떠났다. 옛 백정 친구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도적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로 인해 도적을 잘 잡기로 소문이 났다. 그러자 당시에 “사람의 안색을 보고서 도적을 분변하여 열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었으니, 소옹(邵雍, 송대의 학자로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도 이만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민간에 떠도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후에 도둑을 잡았다. 그 결과 ‘열에 하나’ 뿐 아니라 ‘백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었다’는 평가와 함께 도둑이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포도장으로서의 활동은 그가 죽은 뒤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그의 사후에 도적 잡는 일이 지지부진 하자, “이양생이 포도장이 되었을 때에는, 재인과 백정을 끌어들여 도적의 소재를 파악하여 귀신과 같이 적발하였다. 지금은 장수 된 자가 이 방법을 알지 못하고 또 포도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쓰지 않으니, 만약 장차 마땅한 사람을 얻는다면 거의 도적이 없게 될 것이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의 포도 활동이 뒷날까지 귀감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얼자의 쓸쓸한 사후, 그리고

이양생은 60세가 넘도록 포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487년(성종 18) 7월 65세가 되는 나이에도 왕명을 받고 강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경기와 황해도를 다녀왔다. 이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활동이었다. 9개월 뒤인 1488년(성종 19) 4월 8일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부의를 보내 조문하며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세조대 공신이 된 이후 예종과 성종 등 3대에 걸쳐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오랫동안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큰 허물을 남기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양평(襄平)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을 ‘양’이라 하고,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을 ‘평’이라 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양생은 천얼(賤孽) 출신으로 젊었을 때에 가죽신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아 매양 저자에 앉아서 매매하였다. 성품이 순박하고 근실하며 눈으로는 글을 알지 못하나 활 쏘고 말 타는 데에 능하였다. 재추(宰樞)가 됨에 미쳐서도 옛 가게를 지나게 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옛 무리들과 더불어 땅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갔다. 그 아내는 윤보의 집 여종(婢)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富)하면 교제를 바꾸고 귀(貴)하면 아내를 바꾸는 것이니, 버리도록 하라.’고 하면 이양생이 말하기를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 부부가 되었다. ...... 성품이 인색하지 아니하여 만약 관기(官妓)에게 마음을 두면 의복을 다 벗어서 주었는데, 사람들이 혹시 그 지나침에 대해 웃으면, 말하기를, ‘가난한 관기에게 내가 베풀어 주지 아니하면, 저들이 무엇으로 살겠는가? 몸에 가득한 것이 모두 성상의 은혜인데, 은혜를 나누어 남에게 주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한가?’ 하였다. 조득림(趙得琳)도 미천한 몸으로 일어났으나 성품이 탐하고 교활하며 인색하여 조금이라도 남에게 주지 아니하고 이익을 구하는 데에는 싫어함이 없어서 기량이 같지 아니하였다.”

위의 내용은 15세기 말 사관(史官)의 평가이다. 객관적이고 엄정하기로 소문난 사관의 글에서 이만한 평가를 받은 예는 흔치 않다. 그는 양반가의 얼자로 태어나 노비로 살면서 불평 불만 없이 꿋꿋하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갔다. 어려울 때 만난 친구에 대한 의리를 평생 잊지 않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노비 아내를 끝없이 사랑했으며, 자신을 노비로 만든 아비의 집안을 다시 일으켰고, 노비 아내의 상전에 대한 예의도 잃지 않았으며, 세 임금을 모시며 충성을 다하였다. 또한 나라에 공을 세웠으면서도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높은 관직을 탐하지도 않았고, 자기보다 못한 이를 배려하고 베풀 줄 아는 따뜻한 인간미와 덕을 가졌다. 뒷날 이긍익은『연려실기술』에서 이양생을 세조대 명신(名臣)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를 정당하게 평가한 사례이다.
그는 죽기 전 아들이 없어 적자 형님인 이길상의 아들 이오(李晤)를 후사로 삼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편찬된『경주이씨족보』에 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자손들이 양생의 신분을 부끄럽게 여겨 본래 생부(生父) 이오의 자식으로 다시 돌려놓은 탓이다. 족보에 남은 그의 뒷모습이 쓸쓸히 여겨지는 까닭이다.
조선시대에 신분을 초월해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은 적지 않다. 이른바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이다. 그 가운데는 관직에 오르고 공신이 되며 재상에 이른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그럼에도 얼자로 태어나 노비와 신발 장수로 살면서도 의리를 지키며 인간미를 갖춘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글 한 자 몰라도 삶을 긍정하며 욕심 없이 사는 인격적 존재를 만나기는 더 어렵다. 그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이다.



작가소개

심승구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한국사 교수이며, 조선시대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야기 되지 않는 역사는 기억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로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이를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화콘텐츠학을 강의하고 있다.



*[출처] 스토리 테마파크 웹진 담談 20호  옛 기록 속의 이야기 2015.10
  http://story.ugyo.net/front/webzine/wzinSub.do?wzinCode=1006&subCode=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