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만오일고이상현

[晩悟公逸稿卷之二] [附錄] 墓碣銘 [并序] 永嘉 權相圭 謹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9. 17:53

晩悟公逸稿卷之二 / 附錄


墓碣銘 [并序] 永嘉 權相圭 謹撰

廣回之西坐子原。有臯如四尺之封。寔故晚悟李公巾屨之藏也。公曾孫成鎬。持家狀一通。責不侫以顯刻之文。誼有所不敢辭者。謹按狀而叙之。曰公諱相鉉。字聖任。晚悟其號。慶州其貫也。新羅佐命㓛臣諱謁平。爲鼻祖。高麗。月城君諱之秀。爲中祖。我朝翰林。贈副提學。慵齋先生諱宗凖。爲顯祖。有諱友三。諱悌權。諱光震。諱周顥。其高曾祖考。義城金氏櫝巖齋 養厚女。其妣也。純廟丁丑二月二十二日。公生。高宗乙未二月十七日終。公神彩英秀。宇量宏深。有長者風。早業公車。文詞蜚英。有聲塲屋間。因得廣交當世賢大夫士。或以族誼而眷注。橘山相公裕元。最其厚者也。或以氣義而相傾。趙小竹東淳。洪蘭軒蘭燮。徐硏雲昶輔。乃其摯者也。同鄕強輔。如權頥齋璉夏。金西山興洛諸公。皆許以道義。觀善質疑。自是。聞見益廣。聲華益。著莫不期之以需世之具。而竟落拓不過。栖栖于興 州之乾臯。課耕勸學。爲家計。晚而歸隱于奉化之汾川。汾盖梓里也。有湖山巖林之勝耕雲釣月之趣。學徒坌集。隨才奬誘。頗有作興之效。性篤倫理。而急於報本敦親。置祭田以護先壠。修譜牒以明派系。安東之琴溪里。慵齋舊址也。甞有手植杏樹。戊午禍後。枝枯而枿。歴六戊午而復甦。謀及諸宗。爲壇而封植。 因廣求名碩詩若文以識之。不倖又爲野火所灾。公痛甚。增培其根。又植核種于其傍。仍爲文祭之。憂闔宗先賢金石文㪚出而無一統。議及橘山相公。蒐合而刋傳之。以故。每宗中有大事。必邀公以咨謀焉。配晉州姜氏。貞敏公恰后桓之女。男曰斗炯。女適權鍾和金輝庚。斗炯男在昌。女適金晩秀金元模。在昌男。長錫鎬。次即成鎬。餘不錄。銘曰。

利用之器。有爲之志。薀而莫展。吁命之否。旣孝而睦。亦勤教育。是亦爲政。何必於國。我撮其大。而畧其細。銘兹貞珉。曷不永世。

歲赤䑕上元前三日。永嘉。權相圭。謹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http://ugyo.net/yk/gds/gdsKisaView.jsp?B_SUJI_ID=KSAC_M_A04000011&B_BOOK_ID=KSAC_T_A04000011_001&B_KWON_ID=005&B_STYLE_ID=005&iPage=1&B_KISA_ID=00078



◎만오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晚悟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근찬(謹撰)

광회(廣回)의 서쪽 자좌(子坐) 산에 넉자[四尺] 높이의 묘가 있으니 곧 만오이공(晚悟李公)의 유택(幽宅)이다. 공의 증손(曾孫) 성호(成鎬)가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니 정으로 보아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쓰노니 공의 휘는 상현(相鉉)이요, 자는 성임(聖任)이며 만오(晚悟)는 그 호며 경주(慶州)는 그 본관(本貫)이다.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㓛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高麗) 때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 분파조分派祖)가 되며 아조(我祖, 조선朝鮮)에 한림(翰林)으로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은 용재선생(慵齋先生)의 휘는 종준(宗凖)이니 현조(顯祖)가 된다. 뒤에 휘 제건(悌權), 휘 관진(光震), 휘 주호(周顥)가 공의 고조·증조·조부·부친이 된다. 의성김씨(義城金氏) 곡암재(櫝巖齋) 양후(養厚)의 따님이 모친이 된다.
순묘(純廟) 정축(丁丑, 1817) 2월 22일에 공이 출생하고 고종(高宗) 을미(乙未, 1895)에 공이 별세하다. 공은 풍채가 영결하고 도량이 굉심(宏深)하여 군자(君子)의 풍채로 일찍 벼슬길에 힘을 쓰니 문장(文章)이 더욱 영발(暎發)하고 명성이 경향(京鄕) 간에 자자하여 당시 현인(賢人) 명사(名士)들과 널리 사귀니 친족의 정으로는 귤산상공(橘山相公) 유원(裕元)이 가장 두터운 처지였고 의기로 상종한 분은 소죽(小竹) 정동순(趙東淳), 난헌(蘭軒) 홍남섭(洪蘭燮), 연운(硏雲) 서창보(徐昶輔)가 가장 친하던 분이며 또 동향현사(同鄕賢士)로는 이재(頥齋) 권연하(權璉夏),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제공(諸公)과 다 도의로 상교(相交)하여 착한 것은 취하고 의심나는 것은 푸니 이로써 보고 들음이 더욱 넓어지고 명성도 더욱 드러나 세상에 쓰일 수 있는 재목이라고 안이할 일이 없으니 결국은 때를 만나지 못하고 흥주건고(興州乾臯)에서 학문을 권장하고 농상(農桑)으로 생계를 삼다가 만년(晩年)에 분천(汾川)의 향리(鄕里)에 은거(隱居)하니 산수(山水) 암림(巖林)과 경운조월(耕雲釣月)의 취미가 있었으며 학도(學徒)들이 모여옴에 재질이 따라 교육하니 발전하는 효험(效驗)이 많았고 성품이 윤리에 깊어 조상에와 친족간에 정성과 돈목(敦睦)을 다하여 제전(祭田)을 사서 수호케 하고 보첩(譜牒)을 닦아 파계(派系)를 분명히 하다.
안동(安東) 땅 금계동(琴溪洞)은 용재선생(慵齋先生)의 옛터이라. 금호공(琴湖公) 께서 일찍 손수 은행나무를 심은 바 있으니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 후로 잎이 마르더니 무오년(戊午年)이 여섯 번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나니 공의 일가친척과 협의하고 단(壇)을 싸서 나무를 보호하고 널리 명사(名士)들의 글을 받아서 기록했더니 불행히도 또 불이 나서 나무를 태우니 공이 심히 통탄하여 그 나무를 살리고자 뿌리에 부꾸(북의 방언)를 주고 또 종자를 나무 곁에 새로 심고 글을 지어 치제하다. 족친 중에 명현(名賢)들의 금석지문(金石之文)이 없음을 근심하더니 귤산상공(橘山相公, 유원裕元)이 이를 수집 발간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종중대사(宗中大事)가 있을 때는 항상 공을 청해서 묻고 의논하다.
배(配)는 진주강씨(晉州姜氏) 정민공(貞敏公) 흡(恰)의 후손인 환(桓)의 따님이다. 아들에 두형(斗炯)이요, 딸은 권종화(權鍾和)·김휘경(金輝庚)에 출가하였고 두형(斗炯) 아들에 재창(在昌)이요, 딸은 김만수(金晩秀)·김원모(金元模)에게 출가하였으며 재창(在昌) 아들에 석호(錫鎬)·성호(成鎬)라. 나머지는 다 기록지 못한다.
명(銘)에 쓰일 수 있는 재목과 하고자 하는 뜻을 갖추어 놓고 쓰지 못하니 슬프다, 운명의 비색 함이로다. 효도하고 화목하여 또 교육에 힘을 쓰니 이 또한 정치일진대 하필이면 나라에서야 내 그 큰 것을 추려 간략하게 지어서 이 비석에 새기니 길이길이 전하리라.

歲赤鼠上元前三日 永嘉 權相圭 謹撰
세적서상원전삼일 영가 권상규 근찬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