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만오일고이상현

[晩悟公逸稿卷之二] [附錄] 遺事 [三從孫 在學 謹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9. 17:50

晩悟公逸稿卷之二 / 附錄


遺事 [三從孫 在學 謹撰]

公諱相鉉。字聖任。號晩悟。姓李氏慶州人。新羅佐命㓛臣。諱謁平。爲鼻祖。世襲簮組。有諱之秀。麗季。官至金紫光祿大夫。襲封月城君。入我朝。諱繩直。慶尙道觀察使。司憲府大司憲。有諱時敏。成均生員。號琴湖。是生諱宗凖。湖堂翰林。贈副提學。遊佔畢齋金先生門。卒于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爲十二代祖。高祖諱友三。曾祖悌權。祖光震。考周顥。倶隱德不仕。妣義城金氏。櫝巖齋養厚女。純廟丁丑二月二十二日。生公于汾川里第。公神彩俊秀。器宇宏厚。有長者風。家貧親老。耕耘樵技。徃徃躬執。而事已。便溫理性理之學。慥慥不已。自奉甚約。而菽滫之供。未甞匱乏。養拙齋李公用正。同閈而居教廸後進。以親命。請業于公。公甚器重之。以遠大期之。及養拙公沒。嗕門下諸公。爲修義稧。以效事一之誠。桂隱李公冕宙。歸隱李公教英。契好深宻。二公倶歴敭淸顯。公以布衣相從。未甞以窮達昜其心。己酉。丁外艱。哀毀踰制。䘮禮一遵家禮。當先世忌日。必前期齊肅。以致如在之誠。在昔琴湖祖。種一株杏。而謂慵齋公。曰汝長當習禮于此樹下。及戊午禍作。樹爲枯死。後當伸理。甹芽復生。此甚靈異。公築壇壝。爲詩若序而識之。一時名碩。多賡和之。慵齋公衣履之藏。在安東琴溪里。禍變以後。子孫竄伏東西。而從來位圡。爲他人所占據。公累次訟卞。終得復其圡。因定祭奠節目。爲永世遵奉之䂓。戊辰。與京鄕諸宗。議修宗中諸先軰金石錄。橘山相公裕元。實主其事。至於採摭文獻。悉委於公。公遍考諸家史乗。無遺蒐輯。編成十卷。公布各家。而一帙藏弆于家。甲戍。修派譜于安東乾井洞。公以都監。掌其役。費歲月而㓛告訖。公早失恃。尤眷眷於母家。每當外祖櫝巖公忌日。必預備助奠之具而晉參焉。以所居有江鮮。慮或過而變味。作乾鱐以待之。每年如是。其報本之誠。不以親表有間也。中年。寓居于興東之乾井里。遠近學子坌集。公隨才勸篤。及晩而還汾川。亦教施如一。始終受業者。彬彬多文學之士矣。就汾江上恁佳湖而家焉。以其骨肉團聚兼有湖山之勝。因爲送老計。顔其楣曰晩悟。公不利于育。無應門之童。同堂老少。一辭相謂。曰公不可以無嗣。於是。以三從兄東鎮之子斗炯爲后。實小子之叔父府君也。叔父一體親志。未甞少有違怫。躬墾菑田。至十餘頃。爲奉老濟接之資。人謂之稱家人也。公壽躋八旬。而動止未甞有疲容。神精不少耄。高宗乙未二月寢疾。以十七日。考終。享年七十九。初葬于佳山南麓。後移窆于廣回西崗午向原。配晉州姜氏。士人桓女。貞敏公恰后。有女士行。先公十五年而卒。葬于乾井古臺洞酉坐原。二女。長適安東權鍾和。次宣城金輝庚。斗炯。娶奉化琴氏聲濬女。無子。以吾弟在昌爲后。權男。丙燾。金男。聖九。斗炯二女。長適延安金晩秀。次義城金元模。在昌。年近四十而無兒。以吾第三子錫鎬子之。後。成鎬生。餘不盡錄。公軒昂有風儀。言議簡正。義有所執。必就乃已。亦未甞茍合于人。以譜事。多住京師時。橘山 公方秉。折節下之。趙小竹東淳。洪蘭軒蘭燮。徐硏雲昶輔。皆許以布衣交。經禮有可疑處。必於公問質。當時。以稷下淳儒。目之。所與傾盖。徃徃多要路人。或指示以仕進之梯。公不應。譜事旣。即浩然南歸。小竹贈行詩。曰影濶海天霜雁斷。懷深秋水露葭嗟。蘭軒詩。曰靑山我亦留淸債。赤葉君應發浩嗟。其眷眷不欲捨之意。斯可見矣。嗚呼。使公遭遇明時。得以展布所蘊。必有樹立可觀者。而時狀漸非。風潮日變。則實非士者求進之日。遂泊然無意於世。歸則杜門求志。嘐嘐而沒世。在公爲無憾。而未甞不爲世道慨然也。甞與權頣齋璉夏金西山興洛金感宙魯銖諸先軰。爲道義交。有唱酬諸什。平生不喜著述。又未甞畜稿。只收拾詩文若干卷。藏于巾衍。嗚呼。小子甞受學于公。親灸旣深。而田地魯下。不能軆平日教廸之萬一。草木之年。忽忽已耄廢。深懼懿行實蹟沉沒而無傳。從子成鎬。泣語余。曰曾王考事行顛末。惟伯父。可以實知。願無遺撰錄。以備家乗。余曰諾。若之言。是矣。乃敢忘其昏拙。粗記耳目所及。撰次如右。而不敢爲一毫無實之辭以犯溢美之科。惟當世立言君子。採摭大槪。爲後来微信之資。又幸之幸也。甲申三月淸明節。三從孫。在學。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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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공유사(晚悟公遺事) 역문(譯文)
-삼종손(三從孫) 재학(在學) 근찬(謹撰)

공의 휘는 상현(相鉉)이고 자는 성임(聖任)이요, 호는 만오(晩悟)이며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㓛臣) 휘 알평(謁平)을 시조(始祖)로 대대로 벼슬이 연속하니 휘 지수(之秀)는 고려말에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封)했고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휘 승직(繩直)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냈으며 휘 시민(時敏)은 성균생원(成均生員)에 호는 금호(琴湖)라. 휘 종준(宗凖)을 낳으니 호당(湖堂)에서 한림(翰林)으로 부제학(副提學)을 추증(追贈)하니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문하(門下)에서 배웠고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에 돌아가매[1499년 졸]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르니 공에게는 13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우삼(友三)이요, 증조의 휘는 제권(悌權)이며 조부의 휘는 광진(光震)이고 부친의 휘는 주호(周顥)니 함께 덕(德)은 있으나 벼슬은 아니 했다.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 독암재(櫝巖齋) 양후(養厚)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정축(丁丑) 2월 23일에 분천(汾川) 자택에서 공이 출생하니 얼굴이 준수하고 도량이 크고 두터워서 장자(長者)의 풍채가 있었다. 집은 가난하고 부모는 늙으시니 때로는 몸소 밭을 갈고 나무하여 매사에 편당 온화하게 처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잠시도 쉬지 않으시며 자신을 위해서는 생활이 심히 간소하고 어버이 봉양은 극진히 하셨다. 양졸재(養拙齋) 이공(李公) 용정(用正)이 한마을에 살면서 후진을 교육하니 부친의 명령에 따라 이공에게 수업을 하게 되니 공이 심히 큰 인물로 보고 원대한 기대를 하더니 양졸재(養拙齋)가 별세함에 그 문하(門下) 제공(諸公)과 더불어 수의계(修義稧)를 만들어서 한 분을 섬긴다는 옛 정성을 본받으니 계은이공(桂隱李公) 면주(冕宙)와 귀은이공(歸隱李公) 교영(教英)을 계(契)로 사귄 정분이 가장 깊고 친밀하더니 두 공은 다 깨끗한 벼슬을 지냈으나 공은 포의(布衣, 벼슬이 없음을 지칭함)로 상종(相從)하되 궁(窮)하면서도 달(達)함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기유(己酉)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정도에 지나쳤고 장례는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선대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전기(前期)해서 재개(再開)하고 엄숙(嚴肅)하여 생존 시와 같은 정성을 다하셨다.
옛날 금호(琴湖, 시민時敏) 선조께서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용재공(慵齋公, 종준宗準)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장성하거든 이 나무 아래서 예(禮)를 익히라” 하시더니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가 일어난 후 은행나무로 말라 죽더니 뒤에 원통함을 씻게 되는 동시에[신원伸寃]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심히 기이한 일이라. 공이 단(壇)을 놓고 글과 서문(序文)을 지어 이 일을 기록하니 한때 명석(名碩)들이 많이 화답하다. 용재공(慵齋公)의 의관장(衣冠葬)이 안동(安東) 금계리(琴溪里)에 있으나 화변(禍變)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사방에 숨어 사니 종래에 있던 위토(位土)마저 타인의 손에 들어간 지라 공이 누차 소송(訴訟)을 해서 그 위토(位土)를 물러 찼고 제사 절차를 정하여 영구토록 받들게 하셨다.
무진년(戊辰年)에 서울과 시골에 있는 족친들과 의논하여 종중선배(宗中先輩) 여러분의 금석록(金石錄)을 닦으니 귤산상공(橘山相公) 유원(裕元) 씨가 실상은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문헌(文獻, 족친 선현의 글)을 모으고 찾는 일은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종친가(宗親家) 여러 집을 두루 상고하여 빠짐없이 모아서 책 열 권[十卷]을 만들고 한 질[一帙]식 두루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갑술(甲戌)에 순흥(順興) 건정동(乾井洞)에서 파보(派譜)를 닦을 때 공이 도감(都監)으로 그 일을 맡아서 여러 해 만에 마쳤다. 공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정을 붙여 매양 외조부 독암공(櫝巖公)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미리 전물(奠物, 제사에 쓸 식물)을 준비하여 참례하고 사는 마을 앞에 강이 있어서 생선을 구해다가 시일이 지나면 변미(變味)될까 염려하여 볕에 말리어 놓고 제삿날을 기다리기를 매년 이처럼 하시니 그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이 친가와 외가에 다름이 없었다.
중년에 흥동(興東, 지금 순흥順興) 건정리(乾井里)에 우거(寓居)하니 원근(遠近)의 학도(學徒)들이 모였음에 공이 각기 재주에 따라 독실히 가르쳤고 만년(晩年)에 고향 분천강(汾川江) 상류 가호(佳湖)에 옮겨 집을 지으니 지친(至親)이 한곳에 모였고 겸해 호산(湖山)의 경관이 있으니 늙음을 보낼 계획으로 그 집을 만오(晩悟)라 이름하다. 공이 아들이 없고 심부름할 아이조차 없으니 문중(門中) 노소(老少)가 숙의(熟議)를 거듭하여 공의 뒤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삼종형(三從兄, 팔촌) 동진(東鎮) 씨의 아들 두형(斗炯)으로 양자(養子)로 삼으니 실지는 나의 숙부라. 숙부께서 부친의 뜻을 한 번도 어김이 없고 몸소 개간(開墾)의 노고로 밭 10여 마지기를 만들어 노친을 보양하고 빈객(賓客)을 수접(酬接)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 집 사자(嗣子)로 적당하다고 하였다. 공이 80이란 높은 수(壽)를 사시되 기동(起動)에 피곤한 빛이 없고 정신이 조금도 흐리지 않더니 고종(高宗) 을미(乙未) 2월에 병환을 얻어서 17일에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79라. 처음에 가산남록(佳山南麓)에 안장했다가 뒤에 광회서강(廣回西崗) 오향(午向)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는 진주강시(晉州姜氏)니 사인(士人) 환(桓)의 따님이요, 정민공(貞敏公) 흡(恰)의 후손이다. 역사의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15년 먼저 졸하니 건정고대동(乾井古臺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두 따님이 있으니 장녀는 안동(安東) 권중화(權鍾和)에 출가했고 다음 따님은 선성(宣城) 김휘경(金輝庚)에 출가했으며 두형(斗炯)은 봉화금씨(奉化琴氏) 성준(聲濬)의 따님에 장가들었으니 아들이 없어 나의 동생 재창(在昌)으로 양자(養子)를 하고 권중화(權鍾和)의 아들에 병도(丙燾)요, 김휘경(金輝庚)의 아들에 성구(聖九)이고 두형(斗炯)의 두 딸은 연안(延安) 김만수(金晩秀)에 출가하고 다음은 의성(義城) 김원모(金元模)에 출가했다. 재창(在昌)은 나이 40이 가깝도록 아들이 없어 나의 셋째 아들 석호(錫鎬)로 양자(養子)를 삼았더니 뒤에 성호(成鎬)를 낳다. 나머지는 다 수록하지 못한다.
공이 헌앙(軒昂)한 풍채가 있고 말과 의논이 바르며 의리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내 성취하여야 하며 남의 뜻에 아첨하지 않았다. 보사(譜事) 관계로 서울에 머물 때가 많아 귤산공(橘山公, 이유원李裕元)을 자주 찾음에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또 소죽(小竹) 조동순(趙東淳), 난헌(蘭軒) 홍난섭(洪蘭燮), 연운(硏雲) 서창보(徐昶輔)가 다 포의(布衣)로 사귐을 허락받아 사귀는 사이에 경서(經書)와 예절(禮節)에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으니 당시 사람들이 순실(淳實)한 선비로 추앙(推仰)하여라. 같이 사귄 사람이 요로(要路)에 벼슬하는 사람이 많더니 혹은 벼슬하는 길을 지시하나 응하지 않고 족보(族譜) 일이 끝나자 곧 향리(鄕里)로 돌아오니 소죽(小竹) 조동순(趙東淳)이 전별시(餞別時)를 지어 이르되

영활해천상안단(影濶海天霜雁斷)
그림자는 하늘과 바다에 넓은데 기러기는 끊어지고 (소식이 없다는 뜻)
회심추수로가차(懷深秋水露葭嗟)
회포는 가을 물에 깊은데 이슬 맞은 갈대만 슬프다. (생각이 간절한 뜻)

라 했고 난헌(蘭軒) 홍난섭(洪蘭燮) 시에 이르되

청산아역유청채(靑山我亦留淸債)
청산에는 나도 빛이 남았으니 (산을 즐기지 못했다는 뜻)
적엽군응발호차(赤葉君應發浩嗟)
단풍시절이 되면 군도 슬퍼하리라.

하니 그 못내 하며 놓지 않고 저항을 볼 수 있었다.

슬프다, 공으로 하여 밝은 대를 만나서 그 쌓은 포부를 펼 수 있었으면 반드시 세운 업적이 볼 만한 것이 있었으련만 나라 형편이 점점 들려가고 풍속이 날로 변하니 뜻있는 선비는 벼슬할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드디어 세상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뜻을 살려 교교(嘐嘐)하게 세상을 마치니 공에 있어서는 유감이 없으나 세상을 위해서는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감주(感宙) 김노수(金魯銖) 모든 선배로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고 부르고 화답한 바 있으나 평생에 짓는 것을 즐기지 아니하고 또 글을 모으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음으로 다만 시문(詩文) 약간 모아 상자에 갈무려 두었으니 슬프다.
소자(小子) 일찍 공에게 글을 배워보고 틈틈이 깊었으나 노둔한 것이 능히 가르침에 만분의 일도 체득지 못하고 천한 나이 어언간 늙어 폐물이 되면 떳떳한 행실과 실적이 없어질까 두려워해서 종자(從子, 조카) 성호(成鎬)가 나에게 울며 말하기를 증조부 일의 시말(始末)을 오직 백부께서 실지를 아실지니 원컨대 빠짐없이 기록하여 가승(家乘)으로 삼게 하소서.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다네. 말이 옳도다”하고 이에 감히 혼암(昏暗)함을 잊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대강 위와 같이 기록하니 터럭만치라도 실상이 없는 말을 해서 억지로 아름다움을 꾸미지 아니했으나 당세(當世) 군자(君子)들이 대강 가리고 추려서 후일 증빙(證憑)함.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