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一)/정렬공◆◆이규

[경주이씨종보/역사탐구③下] 이규, 충혜왕과 함께 귀양길에 순사殉死한 듯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5. 10. 11. 12:57

[경주이씨종보/제407호 3면] 2025년 9월 30일 화요일
[역사탐구③下] 이규, 충혜왕과 함께 귀양길에 순사殉死한 듯


정렬공(貞烈公) 첨의참리 이규(李揆, 중조 17世-월성군파 파조 지수의 長子)는 元나라 지배하의 고려 왕조에서 장관급의 재상까지 역임한 무관 출신이다. 어떤 면에서는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 왕조의 흑역사를 살면서 그가 지키고자 했던 관학(官學)은 무엇이었는가. 충혜왕 복위에 공을 세우고서도 왜 관직을 떠났는가. 그리고 그는 순사(殉死)하였는가.
정인지의 고려사와 김종서의 고려사절요 번역본 등을 바탕으로 사실 관계를 탐색하여 이규를 중심으로 편집하였다. 등장인물에 대한 존칭은 생략한다. 〈편집자 주〉


고 일당, 충혜 복위 반대하며 왕위 찬탈에 총력
이규의 기지와 충성심이 한껏 돋보인 사건도 있다. 바로 충혜왕의 복위 즉, 습위(襲位) 사례이다. 1339년 3월 癸未에 충숙왕(후 8년)이 승하한 뒤 세자(禎)의 습위 문제로 나라가 온통 혼란이다. 충숙왕은 죽기 전에 “충혜가 발피(撥皮, 불량배) 짓을 했으나, 습위를 유명(遺命)한다” 했다. 고려 중신들이 이를 중서성(中書省, 元의 고려 통치기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元의 태사(太師, 정1품)가 된 내시 출신 고려인 백안독고사(任氏)가 반대했다. 백안은 “충숙왕도 충혜를 발피라 불렀다. 그는 병도 있고 발피를 왕을 삼는 것은 부당하다”라며, “오직 고(藁)가 왕이 됨직하다.” 했다. 고는 충숙왕 때부터 백안을 비롯해, 참의찬성사 오잠 등 친원파 일당을 포섭해 고려 왕에 오르고자했던 인물이다.
이에 세자는 前 평리 이규 등 전•현직 관리를 원에 보내어 백방으로 습위를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개월째 왕이 공석 상태다.

이규, 원로들 元에 上疏토록 의견내 '충혜 습위'
그러던 6월 어느 날, 연경에서 교섭을 벌이던 이규가 원이 거부하기 쉽지 않은 방안을 내놓았다. 이규는 고려로 돌아가는 대호군 한불화(韓不花) 편에 전하기를, “승상의 고집이 처음과 같으매 본국의 기로(耆老, 벼슬을 그만둔 60세 이상 원로)들이 상소(上疏)해 진정(陳情)함이 있으면 그로 인해 성과를 도모할 수 있겠다.” 했다.(사진 고려사 세가 36권 371쪽). “세자는 곧바로 이규의 말을 받아 재상들에게 명해 시행에 들어갔다. 충숙왕이 사망한 지 3개월 후인 6월 壬辰에, 기로들이 연명한 2천여 자에 달하는 상소문이 작성되었다. 그간 원에 기여한 공로도 썼지만, 그 내용이 반성문과 다름없다. 구구절절 이다. 상소는 중서성에 접수되었고 효과를 발휘해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충혜가 마침내 왕을 습위했다.”
이규의 공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규는 녹훈을 받고 남을 공을 세웠음에도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타나지 않는다. 실록 고려사 그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려사 제36권 369〜374쪽).

흑역사의 시대
원나라에 충성하고 순종하라는 의미로 ‘忠’ 字의 돌림이 붙여진 왕은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등 6대 왕조다. 이들의 흑역사는 77년간 계속되었다. 백성 입장에서 보면, 고려 왕조도 그렇지만, 더 문제는 나라 망치기에 앞장섰던 친원파(親元派)들의 행태다. 1326년 원의 성제(省制)를 도입해 ‘高麗’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려 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고려의 관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다. 하여 그 부끄러움을 찾아내 교훈 삼아야 한다.

충혜 5년 만에 다시 폐위되어 귀양길에 오르다
이규가 관직에서 사라진 후, 충혜왕은 복위 5년 만에 元에 의해 다시 폐위되는 신세가 된다. 이규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충혜의 귀양, 그리고 묘정의 배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소상히 언급하고자한다.
충혜의 비운은 “1343년 11월, 元에서 온 내주(乃住)•타적(朶赤) 등 14인의 사신이 개경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충혜는 병을 핑계로 사신을 맞으려 하지 않았다. 신하의 권유로 마지못해 나갔다. 이를 본 원의 사신들이 백관이 보는 자리에서 왕을 발로 차며 4명의 중신을 창으로 찔렀다. 용사 2명은 칼로 베어 죽였다. 모두 도망했다. 칼을 들고 집집마다 수색해 126명의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개경 바닥을 뒤집어 놓았고 백성을 공포에 떨게 했다.”
1332년 1차 충혜왕 폐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고려에 귀양 와 있는 ‘타환태자 감싸기’ 때문인 듯하다. 타환은 후일 원의 마지막 황제인 혜종이 된다. 이른바 ‘기황후의 남편’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원에서는 차기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이 치열할 때다. 충혜가 그런 정치판에 끼어든 것이다.
원의 사신들은 한 달 후인 1343년 12월 乙未에 충혜를 강제로 말에 태워 연경으로 끌고 갔다. 황제(皇帝)가 충혜왕에게 “(중략…) 너의 피로 개를 먹여도 부족하다”라며 2만 리 떨어진 게양 현으로 귀양을 보냈다. 고려사에는 “아무도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다”라며 패륜적 행위도 늘어놓았다. 충혜는 1344년 2월 겨울 어느 날, 귀양길에서 객사한다. 혹자는 짐독(鴆毒, 올빼미류의 깃털로 술을 담가 만든 독술)을 만났다고 하고(중략…). 그의 나이 28세(음력 30세) 되던 해다. 대표적인 흑역사 중에 한 장면이다(고려사 제36권 391〜395쪽).

이규, 訃告도 없이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다
충혜왕이 귀양 가다 죽은 부분에서,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종순 종친(국당공파)은 용우 종친의 한 대필 원고의 문장 속에 “왕이 붙잡혀 감에 수행 구명하려다 악양(岳陽)에서 죽을 때 이규도 순사(殉死)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원의 자객들에게 왕과 함께 피살된 것으로 보았다.
필자도 이규의 순사에 동의한다. 고려사(世家 三) 실록을 보면 재상급의 종2품 이상 벼슬을 한 경우,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의 부고(訃告)가 기록되어 있다. ‘1344년 6월 甲子에 前 첨의찬성사 유방세가 졸(卒)했다.’ 식이다. 이규가 1339년 7월 벼슬을 그만두고, 1346년 5월 충혜왕 묘정에 배향(配享)될 때까지 사이에 재상급 12명의 訃告가 실려있다.
이규만 없다. 재상급의 이규는 부고도 없이 배향된 것이다. 예부에서 제물(祭物)을 보내 부고가 빠질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누가 보아도 수상하고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고려사 36, 37권 404쪽)
또 다른 정황은 당시 전•현직 중신들이 원과 중서성에 왕의 죄를 사해 줄 것을 탄원하고, 일부는 불화(佛畫)와 방물(方物)을 연경에 바치는 등 적극적인 구명을 펼쳤다. 충혜 복위에 공을 세운 사람 중 한 사람인 이규도 부고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구명에 참여했을 것이고, 무관으로서 왕을 따라갔을 가능성이 크다. 첨의 이규가 정승 한악과 함께 충혜 묘정에 첫 배향된 것도 무관치 않다고 본다. 종합해 보면 “이규는 귀양길의 왕을 수행하다 피살되어 부고가 실리지 못했다”가 결론이다. 따라서 향후 이규 연구에서 당시의 중서성 기록과 그가 속해있었던 병부(兵部), 고려병제사(高麗兵制史) 등을 살펴보면 정확한 생년과 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1344년 8월 庚申에 충혜왕을 영릉에 장(葬) 했다, 1년 9개월 후인 1346년 5월 乙酉에 대행왕을 대묘에 부제(祔祭)하고, 정승 한악과 참리 이규를 배향했다.” 배향을 기준으로 보면, 정렬공 이규의 연치는 62세로 추정된다(고려사 제37권 397쪽, 404쪽). <끝>

상우 편집위원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전 가천대학교 부총장
현 중앙화수회 중앙위원